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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올불수선(兀兀不修善)이요 등등부조악(騰騰不造惡)이니라
적적단견문(寂寂斷見聞)이요 탕탕심무착(蕩蕩心無着)이니라
올올불수선(兀兀不修善)이요, 올올하야 善도 행하지 아니하고 騰騰하야 惡도 짓지 않는다.
적적(寂寂)하야 보고 듣는 것이 끊고, 탕탕(蕩蕩)하야 마음이 착(着)함이 없다.
이 게송은 육조(六祖) 혜능(慧能)스님께서 臨終하실 때 이 게송을 읊으시고 涅槃을 하셨습니다.
올올(兀兀)하야 선(善)도 닦지 않는다. ‘올올하다’고 한 것은 泰山처럼 動함이 없고 따악 靜해져
갖고 있는 모습입니다. 騰騰하야 惡도 짓지 않는다. 등등한 것도 泰山처럼 움직이지 않고 따악
不動한 모습! 그러니 무슨 惡을 지을 것이 있으며. 적적(寂寂)하야 견문(見聞)이 다 끊어졌다.
寂寂한 것은 말 그대로 고요하고 고요해서 보고 듣는 것이 다 끊어졌다 그말이여.
마지막에 蕩蕩하야 마음이 執着함이 없다. ‘탕탕하다’는 것은 넓고 넓은 모양을 표현한 것입니다.
兀兀하고, 騰騰하고, 寂寂하고, 蕩蕩한 모습은 六祖스님께서 涅槃하시는 그 場面을 —
그 몸가짐과 마음 상태를 고대로 읊으신 게송인 것입니다. 이 게송 안에는 生과 死가 없는 참모습,
生과 死가 없는 眞理를 깨달으신 보살 化現으로서 마지막 읊으시고 열반에 드신 그 게송인 것입니다.
‘佛法은 절에 가서 佛供을 드리는 거다’ 막연히 그렇게 알고 절로 왔다갔다 하고, 불공이나 드리고
거기에서 끝나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佛敎는 불(佛) 자가 ‘부처 불(佛)’ 그러지만,
‘부처’라는 게 무엇입니까? ‘깨달은 분’이란 말인 것입니다.
부처님, 석가모니 부처님, 깨달으셨으니까 부처님인데, 그 부처님을 믿는 것은 당연히 우리의
교주이시고 그러니까 당연히 존경하고 믿어야 하지마는 부처님은 당신을 믿고 존경하라고
그것만을 바라시지는 않습니다.
『우리 모든 衆生들이 正法을 依持해서 自己가 自己의 중생심을 닦아서 스스로 부처가 되는 것』을
부처님께서는 원하신 것입니다. 불교를 믿으면 부처님을 기쁘게 해드려야 하는데 부처님은 절에 많은
돈과 쌀을 갖다 주는 것을 그렇게 좋아하시지 않습니다. 스님네는 혹 좋아할런가 모르나
부처님은 그것을 좋아하시지 않고, 불공도 드리고 부처님께 와서 절도 하지마는
自己가 自己의 부처를 깨닫는 — 自己의 마음을 깨달아서 生老病死에서부터서 解脫해 가지고
여러 중생들이 다 부처가 되기를 제일 좋아하시고 바라시는 것입니다.
용화사 이 법보전은 그러한 의미에서 비록 부처님 열반하신 뒤로 삼천 년이 되어서 말세가 되었다
하지마는 법보 제자들은 말법(末法) 속에 다시 정법(正法) 시대를 만나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이 자리에 모이신 비구·비구니·사미·행자·청신사·청신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自己가 自己를 깨닫는 것이지 남이 대신 깨달아 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자기가 자기를 깨닫는데, 깨닫는 것이 무슨 팔만대장경 어려운 경전을 읽고 외우고 해석하고 그것이
아닌 것입니다.물론 경도 공부하고, 외울 경(經)도 있곤하나 그것이 경이라고 하는 것은 다 알고보면
팔만대장경이 다 ‘자기가 자기를 깨달으라’고 하는 말씀을 이러한 각도에서도 말씀하시고 저런 각도
에서도 말씀하신 것이라, 경전을 옳게 본 사람은 자기 마음을 깨닫는 공부를 해야만 되는 건데,
중생은 길이 잘못 들었거나 근기(根機)가 弱해 가지고 自己 깨닫는 것은 뒷전으로 두고,
‘부처님께 供養을 올리면 所願을 成就한다, 福을 많이 짓는다’ 이러한 정도로 해서 불교를 믿으면서,
일생을 나름대로 ‘나는 불교 신자다’ 이렇게 生覺하고 있을 분이 참 많습니다마는,
정말 ‘나를 깨닫는 工夫’는 그렇게 어렵고 複雜한 것이 아닙니다.
눈으로 무엇을 볼 때 보는 데로 따라가지 말고, 보는 바로 ‘나’ — ‘이놈이 무엇인가?’
귀로 무엇을 들을 때는 듣는 그리 쫓아가지 말고, 바로 듣는 이놈이 ‘이뭣고?’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여기 조실스님 영정(影幀) 옆에 生也是 死也是 頭頭毘盧 物物華藏
나는 것도 이놈이요, 죽은 것도 이놈이다. 生과 死는 보통 肉體를 基準으로 해서
이 몸뚱이가 태어나면 생(生)이라 그러고, 살다가 肉身이 죽으면 그것을 사(死)라고 그러는데,
이 佛法 門中에 生과 死는 肉體를 基準으로 두기 보다는, 生覺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루에도
수백 가지 生覺이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데, 그 生覺 일어나는 것이 바로 생(生)이고,
그 生覺이 이리저리 하다가 또 꺼지면 그것이 죽음(死)인 것입니다.
생사(生死), 하루 동안에도 生覺을 基準으로 해서 生死를 삼는다면은
우리는 하루에도 몇백만 번을 태어났다 죽었다 하는 것입니다.
그 生覺의 ‘죽었다 살았다’ ‘생겨났다 죽었다’하는 것이, 그것이 原因이 되어서 온갖 업(業)을 짓게 되고,
結局은 業 속에서 肉體가 죽을 때 비참하게 죽어가는 것이고, 죽은 뒤에는 어디로 갈지 모르는 것입니다.
다행히 착한 일을 하고 좋은 일을 한 사람은 天堂에 갈 것이고, 念佛도 많이 하고 그런 사람은 또 極樂에도
갈런지 모르나, 대부분 살다가 보면 알게 모르게 많은 業을 지어 가지고 地獄에 안 간다고 아무도 保證을
할 수가 없고, 畜生이 될런지 다시 또 人道 還生할런지 모릅니다마는,
결정코 ‘일어났다 꺼졌다’하는 그 한 生覺을 단속을 잘하면 地獄에 갈까 걱정할 것도 없고,
畜生이 될까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한 生覺’을 어떻게 단속하느냐?
눈으로 무엇을 보거나, 귀로 뭔 소리을 듣거나, 마음에 무슨 生覺이 떠오르거나, 行住坐臥 語默動靜,
일체처(一切處) 일체시(一切時)가 바로 내가 나를 챙길 수 있는 좋은 機會인 것입니다.
누가 나한테 오장(五臟) 뒤집어지는 억울하고 그런 고약한 말을 하더라도, 그 말로 따라가면은
울화(鬱火)가 치밀어져 가지고 눈에 毒이 오르고 얼굴이 變하고 당장 그 사람과 싸움을 하게 되는데,
正法을 믿고 參禪하는 사람은 그 말을 듣자마자 숨을 들어마셨다 내쉬면서 ‘이뭣고~?’
또 ‘이뭣고~?’ 이렇게 自己를 단속하는 참선으로 돌아오게 되면 相對할 아무 원수도 없고
미운 사람도 없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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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바세계(娑婆世界)에 우리가 태어났지만은 이 正法을 믿고 살아가는 사람과
正法을 믿지 않고 貧富貴賤, 成住壞空, 生老病死 속에서 사는 사람과는 世界가 다른 것입니다.
正法을 믿을 줄 모르고 ‘참나’를 찾는 참선을 할 줄 모르는 사람은 사람으로서 태어나 가지고
이 몸뚱이를 가지고 地獄에 가서 地獄苦를 받는 衆生과 별로 다를 것이 없고, 겉은 分明히 사람인데
소 돼지 개 畜生처럼 일생을 그렇게 비참하게 살아가는 사람도 적지 않습니다.
이 자리에 모이신 도반 여러분, 법보 가족 여러분! 정말 우리는 만나기 어려운 사람 몸을 받아서
태어났습니다. 만나기 어려운 또 불법을 만났습니다. 불법 가운데에서도 이 법보전에 영가를 모신
법보 가족, 이 자리에 모이신 여러분들은 정말 이 세상에서 극락세계에 태어난 것보다도
천당에 태어난 것보다도 훨씬 더 다행하고 행복한 삶을 사시게 되는 것입니다.
야야포불면(夜夜抱佛眠)이요 조조환공기(朝朝還共起)로다
욕식불거처(欲識佛去處)인댄 지저어성시(只這語聲是)니라
이 게송은 포대화상(布袋和尚)이 읊으신 게송입니다.
야야포불면(夜夜抱佛眠), 밤이면 밤마다 부처님을 껴안고 자고
조조환공기(朝朝還共起). 아침이면 아침마다 부처님과 함께 일어난다
욕식불거처(欲識佛居處), 부처님 있는 곳을 알고자 하는가
지자어성시(只這語聲是). 지금 소리 내서 말 하는 이놈 이것이다.
우리는 밤마다 부처님을 꼭 껴안고 자는데 자면서도 부처님을 안고 자는 줄을 모르고,
하루 지나간 일을 이 생각 저 생각 걱정하다가 잠든 줄 모르게 잠이 들고 밤에 꿈도 꾸다가,
아침에 일어나면 부처님과 함께 일어난 줄을 인식을 못하고 그냥 자고 일어나는 것 뿐인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 반드시 자성불(自性佛)이 계신 것을 確實히 믿어야 하고 認識을 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자리! 우리의 本性자리는 얼굴이 잘생겼거나 못 생겼거나, 지식이 있거나 없거나,
늙었거나 젊었거나 일단 사람으로 태어나면 그 몸안에는 자성(自性)을 가지고 태어나는데,
그 自性이라는 것 그것이 自己의 마음자리고, 그것이 自己를 지켜주고 살아가는 自己의 부처님인
것입니다. 그 부처님을 잘 때 따악 부처님과 함께 잠에 드는 거고, 아침에 일어날 때는—
이 肉體는 송장인데 肉體가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이 肉體 속에 있는 부처님이 일어나는 겁니다.
그런데 일어나는데 부처님이 어디 계시냐? 눈으로 볼래야 볼 수도 없고,
손으로 만져 볼래야 만져 볼 수 없습니다. 지금 말하고 있는 이것이 나 自身의 부처님이고,
이 말을 듣고 있는 이것이 바로 여러분 自身의 부처님인 것입니다. 그러면서 항상
보다가 놓쳐버리고, 듣다가 놓쳐버리고, 골을 내다가 놓쳐버리고, 걸어가다가 잊어버리고.
그런데 行住坐臥 語默動靜간에 恒常 ‘이뭣고~?’ ‘대관절 이놈이 무엇인가?’
생하는 놈도 이놈이요, 죽은 놈도 이놈이다. 이놈이라는게 우리는 눈으로 볼 수도 없고
손으로 잡을 수도 없고 아무리 우리의 마음으로 찾아봤자 그것은 ‘아, 이것이로구나!’
이렇게 알기는 어려운 것이고, 항상 ‘이뭣고~?’ 자꾸 그렇게 잊어버리면 또 챙기고,
잊어버리면 또 챙기고 하다보면 나중에는 챙기지 안 해도 항상 알 수 없는 ‘이뭣고~?’
한 의문이 마음속에 끊어지지 않게 됩니다. 이것은 열심히 한 사람에게는 언제 오더라도
그 경계(境界)가 오는 것이고, 그 경계가 와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고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어서 一切處 一切時에 疑心이 끊어지지 않고, 그 의단이 惺惺寂寂하게
유지가 되어가면 반드시 그 사람은 自己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佛法을 믿는 것은 이러기 위해서
믿는 것이고, 부처님께서 나오셔서 49년 동안 팔만사천 법문을 설하신 것은 오직 이 하나를,
이 한마디를 우리 중생들에게 일러주시기 위해서 誕生을 하신 것입니다.
오늘 법보재를 맞이해서 우리의 법보 영가의 재사를 모시면서 우리는 다같은 한 가족으로서
일생 동안을 이러한 마음으로 같이 살고, 世世生生에 또 이러한 正法 문중에서 다시 만나서
또 이 正法에 의해서 ‘참나’를 깨닫고, 이 깨닫는 法을 一切 衆生에게 傳達을 하고, 그래서
온 宇宙法界가 깨달은 부처님으로 가득 찰 때까지 우리는 한 형제요, 가족으로 이렇게 살게
되기를 바라면서 法床에서 내려가고자 합니다.(끝)
송담스님(No.758)— 2013(계사년) 법보재(0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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