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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위의 수행 아닌 무위의 수행

장백산-1 2015. 5. 23. 00:02

 

 

 

 

 

15. 05. 21 - 유위의 수행 아닌 무위의 수행     

 

 


유위의 수행 아닌 무위의 수행 / 본질과 방편

 

그동안 佛敎를 工夫해 오면서 몇 가지 지속적인 궁금증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方便과 本質에 관한

疑問이었다. 첫 번째 의문이 들었던 점은 많은 경전들을 살펴보면, 종단의 소의경전인 般若心經 金剛經

六祖檀經을 비롯해서 수많은 大乘經典들이 모두 공통적으로 ‘修行’에 대해서는 說하지 않고, 다만 眞理에

대해서만 說해져 있다는 점이었다.

 

異常했던 점은, 내가 살아오면서 佛敎界에서, 또 많은 스님들이나 책 등을 통해 정말 절대적일 정도로

들어왔던 ‘修行해야 한다’는 말이 정작 가장 重要한 經典에서는 登場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그동안

佛敎界에서 본다면 佛子가 受行하지 않는다는 것은 罪惡과도 같이 느껴졌다. 佛子라면, 修行자라면

당연히 祈禱와 修行을 必須的으로 해야 한다. 修行을 얼마나 잘 하느냐가 바로 그 사람이 얼마나 훌륭한

佛子인지, 스님인지를 가늠하는 尺度처럼 느껴지곤 했다.

 

그런데 왜 그렇게 절대적으로 철저하게 實踐해야 할 修行을 大乘의 核心인 大乘經典들과 禪佛敎의 初期

祖師의 주요 語錄들에서는 왜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는 것일까? 심지어 祖師禪의 수많은 語錄들을 보면

坐禪 關心 修行에 대해서 오히려 修行을 하지 말도록 권하고 있다. 修行 爲主의 北宗禪에 비해 慧能의

南宗禪은 坐禪 修行을 通해서가 아닌 直指人心 見性成佛하라는 가르침에서 보듯이 祖師와의 問答을 通해

곧장 法을 眞理를 드러내고 있다.

 

이와 관련해 또 한 가지 疑問은 佛法은 有爲法이 아니라 無爲法이며, 有爲行이 아닌 無爲行을 通해서만

가까워질 수 있는 工夫라는 점이다. 無爲라는 槪念은 말 그대로 함이 없이 行한다는 것으로, 世上의 참모습,

諸法의 實相, 眞理는 意圖的인 努力이나 人爲的 作爲的인 修行을 通해서 얻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렇듯 佛法은 無爲法이지 결코 有爲法은 아닌 것이다.

 

이러한 大 前提에서 볼 때, 그동안 韓國佛敎에서 내가 접해 왔던 佛法은 너무나도 有爲的인 修行, 뼈를

깎는 苦行 精進, 長坐不臥 修行과 坐禪 修行을 過度하게 强調하고 있다는 느낌이 强하게 들었다. 祈禱

修行을 때도 3,000배나 1만배 절이며, 장괘합장하고 금강경 7독이며, 대비주 108독, 몇 시간이고

앉아서 독경이나 염불을 하는 등의 뼈를 깎는 치열한 苦行 修行 精進과 가행정진, 철야정진 등이야말로

진정한 修行者 佛子에게 必須的인 것처럼 보였다.

 

그렇다면 經典이나 祖師 語錄에서 보듯이 無爲法인 根本과도 合當하지 않는 修行 方便이 현재 佛敎에서

가장 重要한 비중을 차지하게 된 理由가 무엇일까? 그것은 修行이라는 方便이 歷史를 이어오면서 수많은

衆生들을 위해 慈悲 方便으로 施說이 되었을 것이고, 그 修行이라는 方便이 오랜 기간 定着되다 보니 지금

에 와서는 修行이라는 方便 이것이 곧 가장 重要한 本質인 것처럼 糊塗(호도)된 것이 아닌가 싶다.

 

佛法은 世間法처럼 미리 目標를 定해놓고 熱心히 努力해서 터득할 수 있는 法이 아니다. 이 佛法 工夫는

因果法이나 有爲法이 아닌 것이다. 佛法은 不二의 가르침이며 中道의 가르침다. 取하거나 버리거나 하는

人爲的 作爲的인 가르침이 아닌 것이다. 어떤 修行 方便이라 할지라도 그 方便은 어디까지나 단지 眞理를

가리키는 손가락에 불과할 뿐이기에, 眞理를 터득하기 위한 方便인 修行조차도 取하고 執着해서는 안된다.

江을 건너면 뗏목을 버리고 가야하 듯, 그 뗏목에 取하고 執着해서 메고가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것이다.

眞理를 터득하기 위한 方便인 修行을 取하고 執着하는 것은 修行이 完成된 부처(佛)와 修行이 아직 完成이 

안된 衆生을 나누는 二分法이어서 不二法에 어긋나는 人爲的인 修行일 뿐이다.

 

祖師禪이라는 方便은 그 어떤 修行도 定해두지 않음으로써 모든 修行의 方便을 거두어 들여서 이렇게도

저렇게도 할 수 없는 답답한 마음의 상태에서 完全한 無爲에 이르도록 이끈다. 참된 看話禪 또한 祖師禪의

修行 方便의 傳統을 이을 뿐, 特定한 方便이나 人爲的 作爲的인 努力을 必要로 하지 않는다. 위빠사나 行 

方便 또한  다만 分別없이 알아차리는 方便일 뿐, 어떤 特定한 修行 方便에 依持하고 집착하고 그修行 方便

에 期待어 의존하게 되면 그 修行의 方便은 本質이 아닌 有爲의 方便에 치우친 것일 뿐이다.

 

그래서 참된 修行은 修行을 하되, 人爲的 作爲的인 有爲의 修行을 하지 않는 것이다. 하되 함이 없이

修行하는 것이다. 요즘 佛子들의 修行을 보면 修行의 참 뜻에 어긋나 競爭하듯, 形式에 너무 치우쳐서,

有爲的 作爲的으로 修行하는 것을 보게 된다. 眞理를 터득하기 위한 참된 修行은 修行을 하지 않는

같은 修行, 無爲의 가르침임을 잊지 말자. 修行을 하되 修行함이 없는 듯한 無爲의 修行을 하자.

 

BBS 불교방송 라디오 '법상스님의 목탁소리'(평일 07:50~08:00)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