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因緣 / 12緣起 / 숭산스님
마음에 속지 않으려면 / 숭산 스님
무명(無明)이란 밝지 못한 마음, 가려진 마음이다. 밝지 못한 마음, 無明心이 일어나면
本來 밝고 깨끗한 自己 즉, 淸淨心을 잊어버리고 바깥 境界 對相에 動搖하게 된다.
어떤 처녀가 한 농부을 보았다. 인물이 훤칠하게 잘 생겼고 가문도 좋았다.
남이 알까 두려워 자신이 먼저 남 모르게 사랑하고 싶은 衝動心이 일어났다.
“아, 저런 사람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그래서 남몰래 편지를 썼다.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죽을 때까지 함께 살고 싶습니다.
나의 모든 것을 다 바치고 싶습니다.’
상대방도 그 편지를 받고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다.
“좋습니다. 당신이 그렇게 나를 좋아한다면 언제 한 번 만납시다.”
그렇게 해서 두 남녀가 만나보고 나니 처녀는 마음이 더욱 動搖했다.
그래서 저 남자 저 여자를 어떻게 내 愛人을 만들까 하는 生覺에서
눈 ·귀· 코· 혀·몸. 뜻을 지속적으로 接觸하였다.
받아들이는 것이 따뜻하였다.
물론 그 가운데 마음에 들지 않은 점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좋지 않은 것은 다 버리고 좋은 점만 좋아하였다.
사랑하다보니 통째로 갖고 싶었다. 그래서 結婚式이라는 것을 하였다.
결혼 후에 아이를 배더니 아이가 태어났다.
그래서 좋아서 어찌나 기쁘던지 “어허둥둥 내 새끼야 - ” 하면서
사랑하는 남편 이상으로 자식들을 사랑하고 기쁘게 길렀다.
그러다가 나이가 들고 점점 노쇠해지더니 病이 들고 갖가지 고통거리로 그만 죽고 말았다.
“괜히 왔다 가는구먼 -.” 그때서야 인생의 허망함을 깨달았다.
“낳아도 안 낳아도 상관없는 것. 내 가슴만 이렇게 찢기고 간다.”고 후회하였다.
이것이 12因緣이다.
最初의 한 生覺, 한 여자가 한 남자를 보고 일어나는 最初의 한 生覺이 無明이다.
남자를 보지 않았으면 그 다음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런데 남자를 보았기 때문에
그 最初의 한 生覺 [無明]에 의해서 편지를 쓰는 行이 이루어지고,
피차가 서로 알게 되는 識이 이루어졌으며, 이 識에 좋아한다는 名色이 붙고,
눈· 귀· 코· 혀· 몸· 뜻 (六入)으로 서로간에 접촉(觸)하여 좋은 것을 받아들이고(受),
사랑하고(愛), 사랑하다보니 아주 자기 것으로 만들려는 집착으로(取) 한 살림을 차리고〔有〕
한 살림을 차려 살다 보니 아이를 낳았다(生) 난 자식도 어느새 늙어(老) 병들고(病) 갖가지
고통사를 연출하다가 그만 죽어버리니(死) 그것이 人生이었다.
‘차라리 처음 한 生覺을 일으키지 아니하였다면 이런 結果는 없었을 것’하고 後悔를 하여도
그때는 이미 소용이 없었다. 어떤가? 인생이란 이런 것이다. 이게 어디 인생뿐이던가?
이 世上 모든 것들이 이렇게 성· 주· 괴· 공(成·住·壞·空)의 과정을 거치고 생·주·이·멸(生·住·異·滅)
하는 과정을 거치는 것이다.
그렇다면 아무 生覺도 하지 말고 그냥 바보처럼 살라는 말인가? 그건 아니다.
처음 한 生覺인 無明心에 의해서 일으키는 結果는 이렇지만
명심(明心)에 의해서 일으키는 일은 이런 結果가 없다.
밝고 맑은 마음[淸淨心]에는 이 世上을 두 가지로 分離하고 分別하는 두 가지 마음이 없기 때문에
取하려 하고 버리려고 하는 것[捨]도 없고, 예쁘고 미운 것도 없고, 나고 죽는 것도 없으므로
淸淨心(自己) 속에서 일어나는 萬가지 行事는 生과 死와는 전혀 關係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佛敎의 日常生活은 淸淨心, 명(明)의 생활이요, 智慧의 생활이다.
청정심, 明과 智慧가 없는 생활은 苦痛의 생활이다. 밝은 마음 明에 의한 삶은 설사 苦痛이 온다
하더라도 그 고통이 苦痛으로 받아들여지지 않기 때문에 늙음, 병듬, 죽음에 초연하다.
늙으면 늙어서 좋고 병들면 병들어서 좋고 工夫하다 죽으면 공부하다 죽어서 좋다.
諸佛菩薩들이 죽어서 ‘선명(善名)’을 남긴다 하는 것은 바로 이것을 의미한 것이다.
그러면 그 無明은 어떻게 생겨나는가? 無明心, 最初의 한 生覺은 갑자기 바람처럼
생기는 것이므로 ‘홀연무명(忽然無明)·무명풍(無明風)’이라 말한다.
망망한 바다에 바람이 불면 波濤가 생긴다. 한 波濤가 생기면 萬가지 파도가 생긴다.
그래서 일파자동만파수(一波自動萬波隨)라고 하지 않는가? 누가 시켜서 일어나는 파도가 아니다.
그런데 만가지 파도가 일어나는 것이 마치 꼭 누가 시켜서 일어나는 것 같거든,
그것은 神이나 부처가 시킨 짓도 아니고 鬼神이 장난한 것도 아니고 단지
前生에 맺어졌던 因緣의 에너지(因緣力)이 서로서로 通해서 일어난 것이고,
서로간에 欲心이 通해서 일어난 것이다.
어떤 사람을 보는데도 누구에게는 좋은 사람이고 누구에게는 싫은 사람이 있거든,
이것도 因緣 때문이야. 그래서 불교학자들은 이 12인연을 시간적으로 과거 현재 미래,
3世에 배치하여
無明· 行· 識은 過去 前生에 行爲한 業力에 의해서 일어난 果報요,
名色· 六入· 觸 ·受· 愛· 取· 有는 今生에 맺어서 일어난 果報이며,
生· 老· 病 死· 憂· 悲· 苦· 惱는 未來의 結果라고 한다.
이렇게 하여 삼세양중인과(三世兩重因果)를 組織하였다.
그리고 또 어떤 사람은 心理學的인 側面에서 無明을 맹목적인 삶에 비유하여
目的 없이 눈에 띄는 대로 執着된 생활을 한 結果를 12因緣으로 설명하는 이도 있고,
하나의 人生을 生理學的인 面에서 설명하여 놓은 사람도 있다.
예컨대, 父母의 盲目的인 사랑은 無明· 行· 識이요,
어머니 胎에 들어가 자리를 잡고 精神과 肉體가 分離되서
눈· 귀· 코· 혀· 몸· 뜻이 생겨 世上에 태어나는 것은 名色· 六入· 觸이며,
태어나서 온갖 것을 받아들이고· 갈애하고· 취하여 자기의 소유를 만드는 것은 受· 愛· 取· 有며,
다시 제2의 生命을 낳아 늙고 병들어 죽게되는 것은 生·老·死·憂·悲·苦·惱다. 이렇게 설명한 이도 있다.
어쨌든 12因緣은 이 世上 萬物이 時間 속에서 어떻게 成·住·壞·空하고 生·住·離·滅 하느냐 하는
問題를 提起한 것이다. 그러니까 그 十二因緣을 만드는 것은 오직 自己의 마음이다.
콩으로 두부를 만들 때 갈아서 솥에 끓여서 퍼내고 간수를 치고 엉기게 하여 순두부를 만들어 놓고
두부 틀을 들이대는데, 그 틀을 둥글게 할 것이냐 모나게 할 것이냐 하는 것은 전적으로 만드는 사람의
마음 여하에 달린 것이다. 두부를 만들어 놓고 나면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예쁘다· 밉다· 잘 생겼다·
못 생겼다 말하지만 結局 그 놈이 뚝배기 속에 들어가 보글보글 끓다가 입 속에 들어가서 뱃속으로
내려가면 진국만 다 흡수되고 나머지 찌거기는 오줌 똥이 되어 화장실에 배설된다. 콩은 虛妄한 일이지,
그러니 이 세상 모든 것이 다 無常하다고 하지 않는가? 그러나 그 無常함 속에서 이 世上은 이루어진다.
그러니 그 無常함 속의 世上도 우리가 우습게 生覺하면 우습지 멋있다고 生覺하면 또 멋있는 세상이다.
그러니까 이 世上 모든 것이 곧 生覺이고 마음뿐이다, 一切唯心造다.
그 생각 마음에 속지 않으려면 無明心을 일으키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무진장 - 행운의 집 http://cafe.daum.net/yourhappyhou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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