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생각이 없어야 하고 생멸이 없어야 한다고 하는가!!!
誰無念誰無生 若實無生無不生 喚取機關木人問 求佛施功早晩成
放四大莫把捉 寂滅性中隨飮啄 諸行無常一切空 卽是如來大圓覺
수무념 수무생 약실무생무불생 환취기관목인문 구불시공조만성
방사대 막파착 적멸성중수음탁 제행무상일체공 즉시여래대원각
반갑습니다. 2월 27일 염화실 인터넷방송 강의 시작 하겠습니다
증도가 오늘은 지난시간에 이어서 誰無念 誰無生고 若實無生無不生이라
수무념 수무생고 약실무생무불생이라 라고 하는 여기서부터 할 차례입니다.
불교는 팔만대장경이라고 하는 그런 아주 엄청난 그 가르침이 있어서 참 불교공부를 할려고 하다 보면은
상당히 헤매기가 일쑤입니다. 언필칭 팔만사천 근기에 그 근기에 맞추느라고 팔만사천의 법문을 했다
그래서 뭐 우리 성전을 팔만대장경 이렇게 부르기도 하고 그러는데 그러다보니까 뭐 경전도 부처님이
설하셨다고 하는 경전도 별별 이야기가 많고 또 이야기가 여기에선 이 말하고 저기에선 저 말하고 이렇게
해서 서로 나중에 맞춰보면 相反되는 전혀 상반되는 그런 그 이야기들도 많고요.
또 그 뒤 제자들의 가르침이나 조사스님들의 가르침들도 모두가 부처님의 思想을 그대로 正統으로 이어
받았다고 인정되는 분들의 그 어록들이나 경전들을 이제 팔만대장경에 실어놓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자세히 또 들어가보면은 그 상황에서 또 그 근기에 알맞게 말씀하시다보니까 그게 일관성이 사실은 없어요
없는 게 당연하고 그래서 이제 그 앞뒤 말을 맞춰보면 정반대의 그 이야기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게 또
불교입니다
왜그런고 하니 근기가 각각 다르고 또 근기가 다르고 말하는 경우가 또 이제 그 말을 해야 할 그런 그 경우가
또 다르고 하기 때문에 그래요 그 뭐 세상사에도 역시 이제 그렇습니다만은 그런데 이 증도가라고하는 이 깨
달음의 노래 영각스님의 개인의 그 어떤 깨달음의 말씀이지만은 또 여기도 어찌 보면은 내가 읽은 경전의
이야기하고는 다르다 또 내가 읽은 조사스님의 어록하고는 다르다 이런 것을 가끔 느끼면서 아마 보시거나
듣게 될 것입니다. 뭐 저도 이제 공부하면서 그런 생각을 이제 많이 하게 되구요 그렇습니다.
오늘 誰無念 誰無生고 若實無生無不生이라 수무념 수무생고 약실무생무불생이라고 하는 거기도 보면은
대개 우리가 이제 공부한다고 하는 것은 지금 우리 마음에 많이 일어나는 그런 그 生覺들 이걸 이제 妄想이라
고 이렇게 말하고 煩惱라고 말하고 이게 그러죠 그런 것을 어떻게 하더라도 짓누르고 그 억누르고 또 그래서
잡생각 망상 번뇌 그걸 쓸어내고 제거하고 이렇게 해서 無念상태 무념상태가 되어야만 제대로 공부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이제 일반적으로 생각을 많이 하지요.
또 어떻습니까? 生滅의 變化, 生死를 超越한다라고 하는 말은 곧 생멸로부터 떠나야된다 라고 하는 그런 뜻이
되기 때문에 그래서 마음의 생멸변화 (生滅變化)는 곧 인간의 生死와 같은 것이다. 그래서 마음의 생멸변화가
없어야 비로소 이제 생사를 떠날 수 있다. 얼른 들으면 상당히 타당한 그런 이야기 이죠. 또 그렇게 이제 이야
기하는 그 경전이나 어록도 많습니다. 또 현재 뭐 불교를 가르친다고 하는 이들도 이제 그렇게 이야기하는 경우
도 물론 많고요 저도 이제 그렇게 이야기해야 할 경우는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증도가에서 지금 우리가
공부하고자하는 이 구절에서는 正反對의 이야기에요
누가 誰無念 수무념 누가 무념이라고 말하는가 무념이 되어야만 말하자면 궁극의 경지 불교의 궁극의 경지에
이른다고 말하는가 또 누가 生滅(생사)가 없어야만 된다고 하는가 생멸이 없어야 불교궁극의 경지에 오른다고
하는가 이런 말이에요. 그게 아니란 말입니다.
여기서 結論부터 말씀 드리면은 그대로 生覺이 있는 것, 生滅이 많은 것 바로 이것이 부처고 이것이 궁극의
경지고 이것이 바람직한 삶이다 . 이렇게 이제 말하는 거에요 그 다음에 이제 약실무생 若實無生이면 無不生이
라 그랬어요 만약에 실로 無生 無生하는데 실로 生滅이 없는 것을 말하는데 生滅이 실로 生滅이 없는 것이라고
한다면 不生도 없다 不生이 없다는 말은 生하지 아니함이 없다 이런 뜻이죠 그럼 전부 生滅한다 이런 뜻입니다.
그러니까 본래 無念 無生滅이 말하자면 사람들이 일어나는 生覺들을 어떤 한 곳에다가 이렇게 凝固시키고
生滅을 생멸하지 않도록 어떻게 그 말하자면 固定시키고 이렇게 해야만 그게 인제 그 불교 궁극의 경지라고
이렇게 이제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영가스님 말씀은 그게 아니라는 말이지요. 生滅하고 꼭 無生滅이 필요
하다면은 生滅하는 가운데서 無生滅을 봐야 되고 無念이 필요하다면은 生覺 속에서 無念을 봐야 된다 이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잘못 전해진 그 불교가 無念을 성취하기 위해서 수많은 노력들을 기울이고 無生滅,
우리의 마음이나 또 뭐 그 인간의 삶이라고 하는게 生覺으로 살고 生滅로 살게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그걸 無念으로 억지로 無念으로 만들려고 하고 억지로 無生滅로 만들려고 하다보니까
별별 부작용이 다 생기는 거지요.
전번에 언젠가도 말씀드렸지만은 그 화두일념이 안 되어가지고 그 머리를 갖다 법당마루에다
쥐어박고 피가 낭자할 정도로 그렇게 정말 답답하니까 마음을 어떻게 할 길이 없어서 그렇게
몸부림을 쳤다하는 그런 그 이야기를 했지요. 제가 직접 본 일이고 또 그 사람 가끔 또 여기
옵니다 와서 보기도하고 참 내가 이야기도 많이 하고 볼 때마다 그 생각을 하고 그러는데
본래 인간의 그 마음의 屬性이 어떻게 되어 있는가를 우리가 잘 이해해야지 그걸 이해하지 못하고
무턱대고 그렇게 生覺이 不斷히 作用하고 흘러가는 것을 붙들어 맬려고 하고 부단히 生滅變化 하는
이 세상을 그걸 어떻게 생멸변화하지 않도록 그렇게 하는 것이 그것이 바람직한 공부인줄 그렇게
알고는 그만 그런 방향으로 가다가 이제 그런 문제를 야기하게 되는데
지금 이 순간도 修行을 한다고 하고 불교를 공부 한다고 하는 이들이 그런 것을 목표로 無念을 목표로
無生滅을 목표로 하는 그런 생각에 사로잡혀서 공부하고 있는 이들이 적지가 않을 거에요. 事實은
이 問題에 대해서 영가스님께서 증도가 여기서 이제 바로잡는 이야기입니다.
영가스님이 언제 뭐 그렇게 생각 일어나는 것을 생각이 없도록하는 그런 과정을 거쳐서 깨달은 분도
아니고 생멸이 있는 것을 생멸이 없게 만들어가지고 어떤 깨달음을 이룬 것도 아니에요. 生滅하는
과정 속에서 不生不滅을 보는 것이고 生覺 속에서 無念을 보는 것이지 달리 무슨 뭐 生覺을 붙들어매고
生과 滅을 固定시키고 이렇게 해서 無念을 얻거나 不生不滅을 얻는게 아닙니다. 不生不滅의 理致는
本來 不生不滅로 되어 있다는 거지요.
그러니까 어떻게 뭐 석가모니부처님이 이 세상에 오셔가지고 세상을 바꿔 놓은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 세상을 보는 눈을 사람들 한테 바꾸라는 거지요. 이 세상을 어떻게 보느냐 생멸하는 변화 과정 속에서
불생멸을 보고 그 有念 생각 속에서 有念 속에서 無念을 보라 이렇게 가르친 것이지 뭐 흘러가는 生覺을
붙들어 매라는 것도 아니고 生滅하는 것을 生滅하지 않도록 고정시키라는 그런 말이 아니에요
그런데 현재 사람들이 수용하고 있는 지금 여기 이 삶, 이 세상이 가장 完全하고 완벽하고 완전무결하고
아무 결함이나 부족함이 없고 고칠 것도이 아무 것도 없는 그런 참다운 모습입니다.
현재 뭐 불교를 알던 모르던 관계 없어요 선인이든 악인이든 아무 상관없습니다. 지금 여기 있는 이대로의
이 세상 그대로가 본래 이미 완전무결하고 아주 훌륭한 삶, 세상이라고 하는 사실 이거 일깨우는 일입니다.
불교라는 것은 그런 것이지 뭘 어떻게 그 저기 저 뭐 분재하는 사람들이 그 나무가지를 그냥 비비꼬고 부여
잡고 이렇게 해가지고 억지로 어떤 모양을 만들어 내는 그런 식 그게 불교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불교는 그런게 아니에요. 그런데 공부를 잘못하는 사람들이 이제 그렇게 하는 것이 공부인양으로
그렇게 잘못 알고 있어요. 물론 그런 方便이 필요한 사람들도 있겠지요. 그런 방편을 꼭 필요로 하는
사람도 있겠으나 그건 방편설이지 말하자면 궁극적인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래서 그 다음 보면은 喚取機關木人問하라 求佛施功早晩成가 환취기관목인문하라 구불시공조만성
그냥 생각이 없는 사람, 생멸이 없는 사람 그건 뭐겠어요. 목석이죠. 나무나 돌로 깎아놓은 機關木人
(기관목인) 이라고요. 機關木人이라고 하는 것은 말하자면 나무로 만든 사람 이 뜻입니다. 나무로 만든
사람을 불러서 한번 물어보라 나무로 만든 사람은 無念 無生滅 무념 무생멸이니까요. 생각도 없는
나무로 만든 사람이고 생멸도 없는 나무 사람이니까. 아 그 산사람이라면 생각이 있는 것이고 생멸이
있는 것이 그게 부처고 산 사람이고 정상이지요
만약에 그 生覺도 없고 生滅이 없는 것을 목표로 한다면 그 사람은 저기 나무로 깎아놓은 그런 그
저기 뭐 法堂에 모셔놓은 佛像이라든지 기타 굳이 뭐 불상을 들먹거릴 필요 없이 나무로 깎아놓은
그런 그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잖아요. 그 나무로 만든 사람들이 無念이고 無生滅이니까 그 사람들에게
물어보아라. 그렇게 하는 게 아니다 이거지 그래서 이건 어떻게 보면은 야유조의 표현도 이제 약간 있어요.
여기에 대해서 뭐 해석들이 아주 분분하고
誰無念 誰無生 若實無生無不生 喚取機關木人問 求佛施功早晩成
放四大 莫把捉 寂滅性中隨飮啄 諸行無常一切空 卽是如來大圓覺
수무념 수무생 약실무생무불생 환취기관목인문 구불시공조만성
방사대 막파착 적멸성중수음탁 제행무상일체공 즉시여래대원각
구불시공조만성 求佛施功早晩成가 이건 求佛施功早晩成이로다 라고 하면 안돼요.
求佛施功早晩成이리요 라고 하던지 求佛施功早晩成가 라고 하던지 이렇게 표현을 해야 합니다.
부처를 구하기 위해서 부처가 되기 위해서 성불하기 위해서 공을 들이는 거 무슨 육바라밀 닦는다던지
참선을 한다든지 기도를 한다든지 경을 본다든지 하는 이런 공을 들이는 일로써 언제 부처를 이룰 것인가
부처는 功을 들이고 베풀어서 되는게 아니에요.
功을 베풀면 물론 福도 생기고 智慧도 닦을 수가 있고 뭐 온갖 그런 소득이 생길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부처는 그렇게 그런 정도의 수행을 통해서 얻어지는 그 結果가 부처가 아니에요.
그러니까 그런 그 功을 베풀어서 얻는 부처는 그거는 이제 되지도 않는 것이다.그러니까 無念 無生은
功을 베풀어서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고 또 功을 베풀어서 이루어졌다고 할 때 그것은 그야말로 木石과
다를 바 없는 것이니까 그 木石과 다를 바 없는 사람이 되려고 한다면 바로 木石으로 만들어놓은 사람
에게 가서 물어봐라 부처가 되기 위해서 공을 들인다고 언제 부처가 이루어지겠는가
과거 조사스님 해석도 그렇게 했어요. 조만성 早晩成가 언제 이루어지겠는가 어느 때 이루어지겠는가
이루어질 까닭이 없다 이겁니다 뭐 이런 주장은 영가스님뿐만 아니라 다른 스님들도 많이 이야기를
했어요. 本來 부처라고 하는 것 자주 말씀을 드리는데 정말 本來 부처의 그런 理致를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本來 부처(本來佛) 그거 알면 佛敎를 제대로 아는 것이죠
그래서 이 대목은 뭐 다른 증도가 해설서하고 전혀 이제 다른 데요 왜 이제 그 우리가 부처가 되기
위해서 功을 들이는 것이 부처되는 것하고는 다른 일이냐 늘 이제 이야기하듯이 사람사람이 本來로
다 갖추고 있고 個個人이 완전무결하다 圓成 원성 원만히 이루어져있는 것이다 이건 뭐 조사스님들
입만 떼었다하면 언필칭 하시는 말씀입니다. 本來 成佛 본래 부처예요.
功을 베푸는 것은 그건 이제 뭐 치장을 하고 조각을 하고 장엄을 하고 그래서 뭐 모양새를 갖추고
하는 그런 거지요 부처가 뭐 그런 모양새 갖췄을 때 부처고 모양새 안 갖추면 부처가 아니고 이렇게
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건 참 虛妄한 부처지요
그러니까 뭐 功德을 지어서 어느 정도 福이 있어서 잘 먹고 잘 살면은 부처고 뭐 그렇지 못하고 가난
하면 부처가 아니고 이렇게 되어서야 어디 그 부처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거 아니죠 그거는 世
俗的인 眼目이고 世俗的인 評價基準입니다. 그걸 소위 俗諦라해요. 세속적인 어떤 그 안목으로서 모든
것을 부처도 그렇게 이해하고 우리의 마음도 그렇게 이해를 하게 되는 그런 세속적인 안목이고 또
우리의 어떤 그 我田引水아전인수격인 우리의 성향에 그럴 듯하게 생각이 되는 그런 방향으로 이제
부처를 머리로 계산하는 거지요. 그건 참 그 곤란합니다.
그래서 無念 無生이 뭐 生覺을 한 곳에 잡아 매어가지고 無念 無生이 되게 해서 그래서 부처가 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설혹 그렇다손 치더라도 無不生, 生하지 아니함이 없는 것 그게 바람직한거다 이
거죠 그러니까 이런 꼭 無念 無生이 그 어떤 窮極의 目標라면은 無念 無生의 원조인 機關木人 나무로
만든 木石같은 사람 나무로 만든 조각 거기에 물어보라 그 목석 인간이 無念 無生이니까 그 무념 무생
한 사람한테 물어봐야 無念 無生이 그 어떤 것인지 알 것 아니냐 이런 식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求佛施功早晩成가 구불시공조만성가 부처가 되기 위해서 無念 無生이 되리라고 온갖 노력을
머리를 그냥 법당 마루에 짓찧고 이렇게 해 가면서 그렇게 功을 베풀어서 언제 부처가 되겠는가
妄想 이대로 뭐라고 했어요? 無明實性이 卽佛性이요 幻化空身이 卽法身이다.
(무명실성이 즉불성이요 환화공신이 즉법신이다.)그래서 이런 이야기가 그렇게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고 서두에서 그런 말씀을 하신 그겁니다. 無明이 곧 佛性이고 幻化空身 이 虛妄한 몸뚱이가
그대로 法身이라고 했으면은 거기서 다 이야기가 됬지않습니까 그걸 우리가 잘 생각하고 거기
無明實性卽佛性 幻化空身卽法身에서 모든 것을 잘 풀어나가야 되지않겠나 이런 생각입니다.
그래서 이 證道歌를 제대로 理解하는 열쇠는 바로 그 구절에 있고 또 그것은 불교의 제일 어려운 점
첨단 불교라고 할까요 불교 궁극의 이치를 설명하는 그 이해하는 그런 열쇠가 바로 無明實性이卽佛性
이요 幻化空身이卽法身이다.무명실성이즉불성이요 환화공신이즉법신이다 하는 바로 그 구절에 있습
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 아닙니까 폭탄 선언 아닙니까?
이 肉身 뭐 내 아프고 뭐 感氣 걸리고 뭐 곳곳에 그냥 病 투성이고 障碍 투성이고 정말 이 허망한
몸뚱이죠 바로 그 허깨비 그림자 같은 텅~빈 肉身 그것이 法身이라는 말입니다.
煩惱 無明 無明實性이 즉 佛性이라고 했잖아요. 번뇌 무명 그대로가 부처님 성품 佛性이다
이 아주 그 더 이상 말할게 없는 결정적인 말이에요. 뒤에 이제 결정설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정말 決定的인 그런 그 말입니다. 더 이상의 말은 있을 수가 없죠
無明實性이 卽佛性 幻化空身이 卽法身 무명실성이 즉불성 환화공신이 즉법신
그러니까 여기 뭡니까 無念이 되려고 하고 無生이 되려고 아등바등 애를 쓰는데 그거는 아니라는
거에요. 그거는 機關木人 기관목인 나무로 만든 사람이 잘 아니까 그 사람에게 무념 무생을 물어
보아라. 그렇게 노력해가지고 求佛施功 구불시공 부처가 되기 위해서 공을 들이는데 그게렇게 해서
언제 부처가 이루어지겠는가 그건 당치도 않다 이말 입니다.
부처님이 언제 無念입니까 조사스님들이 언제 無念입니까 무념 아니에요.
無念이면 뭐 죽은 시체나 木石이나 다를 바 없지요. 하등의 존경의 가치가 뭐 있습니까
그야말로 法堂에 모셔놓은 佛像이 부처라고 그래 生覺해서 佛像 그렇게 예배하고 그렇게 모시는지
그건 참 알 수가 없습니다만은 사람이 그게 그러한 佛像을 목표로 한다면은 그 참 허망합니다.
放四大 莫把捉하고 寂滅性中에 隨飮啄하라
방사대 막파착 하고 적멸성중에 수음탁 하라
그렇습니다. 四大를 놓아버려서 사대로 이루어진 육신을 붙잡지 마라 사람들이 그러니까 여기도 얼른
들으면은 無明實性이 卽佛性 幻化空身이 卽法身이라는 말하고 무명실성이 즉불성 환화공신이 즉법신
여기 放四大 莫把捉 방사대 막파착, 四大가 뭡니까 地水火風으로 이루어진 四大肉身을 말하는 것 이죠
육신에 인간이 너무 매달리니까 그래서 이것을 어떻게 다 뭐 결가부좌 해야만 참선이 잘 된다 해 가지고
결가부좌를 하도 안 되는 다리를 그냥 결가부좌를 몇 년을 했다가 그냥 어떻게 요즘 뭐 관절염 앓아가지고
병원에 쫓아다니는 그런 예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그참 四大肉身를 붙들고 거기에 뭐 그렇게 無念이
될려고 하고 無生이 되려고 하고 그렇게 공부하는 그런 사례들을 여기서 잘못됬다고 지적하는 것입니다.
그 四大肉身 붙들고 그렇게 하지마라 이런 말이죠
寂滅性中에 隨飮啄하라 적멸성중에 수음탁 하라 적멸한 성품가운데서 飮啄을 따라라 마음의 경지입니다.
그 어리석은 사람은 몸을 다스리고 지혜로운 사람은 마음을 다스린다 그랬어요.
또 그 유명한 그런 그 남악회향선사하고 마조스님하고 인가요 대화 유명한 대화 있죠
그 말이 수레를 멍에 했는데 수레가 가지 아니할 때 말을 때려야 옳습니까? 수레를 때려야 옳습니까
거기엔 소라고 되어있지요 소를 때려야 옳습니까? 수레를 때려야 옳습니까?
아 우리가 택시 그 저기 시내 가서 택시 잡으려고 할 때 차보고 택시 잡나요? 차보고 택시 잡지 않습니다.
운전수보고 택시 잡아요 천하에 쉬운 일 아닙니까? 천하에 알고 보면 그렇게 쉽고 간단 명료하고 너무
세 살 먹은 아이도 다 알 수 있는 그런 이치에요. 택시를 보고 저저 손을 흔들어서 부르지만은 그거 어디
택시보고 부른게 아니라구요. 운전수보고 저저 부르는거지 택시~라고 부르지만은 택시가 오라는 게
아니죠 운전수 보고 택시 몰고 오라는 뜻이지 옛날부터 그런 이야기를 다 해놓았어요.
무엇이 根本이고 무엇이 枝末인지 우리가 그런 것을 잘 알면은 그렇게 그 뭐 가부좌 안 되면 어떻습니까
다리 뻗고 참선하면 참선 안 되라는 법도 없고 의자에 앉아서 해도 아무 상관없는 것이고 다리 뻗고 해도
상관없는 것이고 행력선 좌력선 이라고 금방 또 뒤에 이제 나오는데 걸어다녀도 참선이고 누워있어도
참선이고 누워있으면 뭐죠 臥禪와선 아닙니까 누워있어도 참선이고 걸어 다니면 行禪행선이죠
거 뭐 스님들이 참선하는 스님들이 자고 싶으면 아 이제 와선 좀 해야 되겠다 이렇게 이제 말도
합니다만은 거 좋은 말 이죠 禪하는 마음으로 잔다 이거에요 그게 臥禪이지요 선잠이라고 할까요
禪睡선수 참선의 잠이다 그렇게도 표현할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放四大 莫把捉 방사대 막파착 사대를 놓아버리고 파착하지 말아라
그리고 마음의 原理대로 따르라
寂滅性中에 隨飮啄 적멸성중에 수음탁 음탁은 마시고 먹고 배고프면 먹고 목마르면 마시고 졸리면
자고하는게 수음탁입니다. 적멸성 가운데 그랬을 때 뭡니까 마음과 몸의 그 어떤 조화가 비로소 유지
되는 것이죠. 그렇다고 뭐 四大肉身을 우리가 完全히 無視하고 살라하는 그런 뜻은 아닙니다.
四大肉身에 너무 그렇게 매달려가지고 가부좌를 해야만 그게 온전한 참선인줄 그렇게 알고
그 가부좌는 억지로 되지도 않는 가부좌를 틀고 앉느라고 가부좌는 印度사람들 체형에 맞는 앉음새지
우리나라 사람들에겐 맞는 폼새가 아니라구요.
반가부좌하면 제일 편안합니다. 반가부좌 아니면 책상다리라도 괜찮아요. 뭐 앉는데 무슨 참선 있나요
그런데 그걸 우리나라사람 체형에 맞지도 않는 그런 그 가부좌를 틀고 앉는다고 아! 난 가부좌 틀고 뭐
10분 앉았다 뭐 20분 앉았었다 한 시간 앉았었다 이걸 자랑을 해 쌌고 그럽니다.
그러다가 나중에 이제 관절염 앓는다고 내내 病院 쫓아다니다 볼 일 다 보고요
참 그래서 이 證道歌 이것을 그 영가스님의 그런 그 悟道訟이지만 그야말로 부처님의 오도송인 華嚴經과
법화경과 하나도 다를 바 없는 것이고 또 이것은 그야말로 수행자들의 그 안목이 된다 모든 수행자들의
안목이 되고 또 부처가 되고 싶어 하는 불자들에게 바른 길을 안내하는 것이고 또 禪詩의 白眉다. 그래서
참선하는 사람들, 愛禪家들 禪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아주 애송하는 정말 애송하는 禪詩가 증도가입니다.
諸行無常一切空이 卽是如來大圓覺이라 제행무상일체공이 즉시여래대원각이라
諸行이 無常하여 一切가 空한 것이 그것이 곧 如來의 大圓覺이다 그렇습니다.
四大를 놓아버리면은 그야말로 肉身의 문제에 대해서 몸이 오고 가고 하는 것에 대해서 전혀 마음 쓸
일이 아니죠 몸이 또 이렇든 저렇든 또 마음 쓸 일이 아닙니다. 마음 쓸 일이 아닐 때 비로소 마음과의
調和를 잘 이룬다. 結局 우리 몸은 그대로 無常하고 마음도 물론 無常해요. 諸行無常제행무상이란 말은
몸도 無常하고 마음도 無常하고 눈에 보이는 모든 이 世上도 정말 無常합니다. 그래서 一切가 空해요.
信心銘에서 夢幻空華를 何勞把捉가 몽환공화를 하로파착가 그랬지요 이 世上이 꿈이요 幻影이요 헛꽃
이다. 그리고 모든 천도재에 반드시 읽어드리는 金剛經 또 그 금강경은 그 조계종의 소의경전이다 라고
대표경전으로 해서 의지해야 할 그런 경전으로 정해져 있습니다. 거기 이제 사구게 第一 根本이 되는
구절이 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이랬지요
요 구절 하고 상당히 잘 어울립니다.
제행무상일체공이 즉시여래대원각 諸行無常一切空이 卽是如來大圓覺 若見諸相非相이면 卽見如來라
약견제상비상이면 즉견여래라 모든 相이 相이 아닌줄 아니까 虛妄하니까 허망한 줄 알면은 곧 如來를
본다 卽見如來, 卽是如來大圓覺이다 如來의 大圓覺이다. 如來는 뭡니까 깨달음의 境地에요. 如來는 뭐
歷史的인 부처님 世尊을 두고 하는 소리도 아니고 禪房에 그 저 法堂에 앉아있는 그런 부처님도 아니고
깨달음의 境地를 如來大圓覺 如來라고 하고 大圓覺이라고 하고 凡所有相 모든 있는 바 形相은 전부
텅~비어 허망한 것이니까 그 허망한 것을 虛妄한 것으로 보라 아예 相이 아닌 것으로 보면 그대로
如來를 본다 如來의 大圓覺의 境地다 여래다 깨달음의 경지다 이런 뜻 이죠. 諸行無常一切空이卽是
如來大圓覺이다 이 아주 참 근사한 말입니다.
어떻게 보면은 여기는 全部 이제 空하고 없고 無常하고 텅~비고 또 凡所有相 皆是虛妄이고 이런
것이 이제 말하자면 如來의 境地고 如來의 大圓覺이고 우리가 또 깨달을려고 하는 깨달음의 경지고
이렇게 이제 얼른 생각이 들도록 글은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一次的으로는 事實 맞아요.
그러나 그렇게 空한 줄로 보았을 때 凡所有相 皆是虛妄으로 우리가 제일로 이해했을 때 如來를 본다
그리고 그것이 곧 如來의 大圓覺이다 라고 하는 말은 거기서 虛妄 속에서 虛妄하지 않는 永遠不滅을
그대로 거기서 보게 되는 그런 그 이야기죠. 그걸 뭐 꼭 드러내서 말은 안 했지만은 그렇게 되어있습
니다. 그런 理致가 말하자면은 바로 如來의 大圓覺이다. 그러한 理致가 내 살림살이 내 眼目 내 見解
가 되었을 때 그 사람은 그대로 如來의 大圓覺 이죠. 그러니까 卽見如來 곧 여래를 본다 이렇게 이야
기가 되는 것입니다.
참 이런 구절이요 어떻게 생각하면은 불교가 허무주의 또 어떤 空하고 텅~비어 없는 것 이런 것을 아주
지상의 제일이라 목표로 삼는 것 같지만은 우리가 그러한 이치를 이해하지 못하고는 불교를 사실 제대로
이해 못합니다. 한 차원 다른거지요. 내가 그 "山은 山이요 물은 물이다" 그랬을 때 그 다음에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면 "山은 山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니다 " 이런 말씀을 드려서 거기에서 이제 다시 내려오
면 비로소 "山은 그대로 山이고 물은 그대로 물이다" 이런 이야기를 해서 中道의 어떤 그 理致를 말씀을
드렸습니다만은
일단 그 우리가 이 四大肉身에 대한 그런 바른 理解 또 諸行이 無常하다고 하는데 대한 바른 理解
또 凡所有相 皆是虛妄이라고 하는데 대한 바른 理解 그렇게 되었을 때 그 우리의 저 앞에서 無罪福
무죄복 無損益무손익 이라고 그랬는데 罪니 福이니 하는 말도 無常 無我의 텅~빈 본바탕 자리 거기에서
텅~비어 없고 또 業이니 뭐 罪니 하는 槪念도 또 물론 텅~빈 봅바탕 자리 거기에서 텅~비어서 없고요
그 다음에 利益이니 損害니 無損益이니 하는 것도 거기에서 다 텅~비어서 없는 그러한 그 境地를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뭐 우리가 그 우리의 어떤 性向에 또 우리의 根機에 맞는 조그마한 그런 그릇이 필요로 하는 어떤 작은
利益 작은 所得 우리는 늘 거기에 연연하지요. 큰 거 아주 툭 터지게 큰 것은 감히 우리의 그릇이라고
우리의 어떤 그 盆이라고 생각을 못합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들은요 그렇게 작은 생각을 소인배 같은
작은 생각을 하지만 事實은 本來의 그릇, 本來 마음자리는 그런 게 아니거든요. 本來의 마음자리는 그런
소인배 같은 그런 작은 생각의 그 모양이 아닙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제 경전에서나 조사스님들의 말씀은 너무 큰 말씀 우리하고 뭐 너무 거리 있는 말씀이
아닌가 이런 생각이 간혹 들지요 들지만은 本來로 모든 사람들이 갖추고 있는 本來 마음자리, 근본성품이
그렇게 텅~빈 본바탕 공간으로 생겨먹었기 때문에 그 本來 마음 자리을 보신 부처님이나 조사스님들은
당신이 本來 마음 자리를 본대로 이야기 아니 할 수가 없는 거지요. 어떻게 그 사실을 숨겨놓고 이야기를
합니까? 남겨놓고 조금만 이야기 할 수가 없잖아요. 그거는 이제 法을 아끼는 것이라고 해서 아주 경계
하는 일 중의 하나입니다. 큰 허물이 된다고 그래요.
그래서 사람들의 작은 그릇에는 이런 큰 소리가 얼른 납득이 안 될지는 모르지만 그러나 우리 마음의
根本자리는 그 모든 것을 다 갖추고 있고 납득하게끔 되어 있고 마음의 根本자리 그것이 우리 모두의
살림살이가 될 수 있도록 그렇게 만들어져 있다는 事實 이걸 이제 우리가 理解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오늘은 諸行無常一切空이 卽是如來大圓覺이다 제행무상일체공이 즉시여래대원각이다 여기까지 했습
니다. 다시 한 번 정리하면 誰無念 誰無生고 若實無生無不生이니 수무념 수무생고 약실무생무불생이니
누가 無念이라 했던가 누가 無生滅이라 했던가 만약 실로 生滅이 없다면은 生하지 아니함이 없으니
喚取機關木人問하라 환취기관목인문하라 無念 無生이 궁극의 목표라면은 無念 無生한 기관목인, 즉
나무로 만든 사람을 불러서 물어 보아라 부처를 구하기 위해서 공을 들이는 것으로 언제 부처가 이루어질
것인가 조만간에 이루어질 것인가를.. 四大肉身를 놓아버리고 잡지를 마라 붙들지 마라
고요하고 滅한 아무것도 없는 空하고 寂滅한 性稟 마음 가운데서 마시고 식음을 따라라
諸行이 無常해서 一切가 空한 것이다 이 事實이 곧 如來의 大圓覺이다.
염화실 무비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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