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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석 류영모 “예수 靈性은 佛性· 仁性과 결코 다르지 않아”

장백산-1 2015. 8. 29. 20:20

 

 

다석 류영모
 
한국식 기독교 신비주의 키워낸 종교사상가

2011.03.09 09:47 입력 발행호수 : 1087 호 / 발행일 : 2011년 3월 2일

 

“믿으면 축복”이라는 기복신앙의 허구 갈파

 

“예수 靈性은 佛性· 仁性과 결코 다르지 않아”

 

40년간 하루 한 끼만 먹어…‘홀로 됨’ 강조

 

2009~2010년까지 2년여에 걸쳐 인류의 스승을 연재했던 오강남 캐나다 리자이나대 명예교수가 뒤늦게

다석 류영모와 신천 함석헌 선생에 대한 원고를 보내왔다. 기독교인 임에도 불교와 유교, 노장까지 아우르

는 심층 차원의 사상을 통섭하고 있다는 점에서 독창성이 두드러진다는 것이 오 교수의 설명이다. 이에

2회에 걸쳐 원고를 게재한다. 편집자 주


 

함석헌 선생의 스승으로 알려진 다석(多夕) 류영모(柳永模, 1890-1981)는 한국이 나은 특출한 宗敎

思想家다. 그는 5세 때 아버지로부터 ‘千字文’을 배웠고 6세 때에는 서당에서 ‘통감(統監)’을 익혔으며

10세에 수하동 소학교에 입학하여 2년 간 신학문에 접한 후 서당에서 3년 간 ‘맹자(孟子)’를 배웠다.

후에 맹자는 예수, 공자와 더불어 그의 사상의 뿌리이자 원천이 됐다.


을사늑약으로 나라의 主權을 빼앗기자 1905년 경성일어학당에 입학해 일본어를 익혔으며 1907년에는

서울 경신학교에 입학, 성경, 기독교사, 한문, 영어, 물리학, 천문학, 한국사 등을 배웠다. 1909년 경기도

양평학교에서 한 학기동안 교사로 일하고, 1910년부터는 나중 3·1 운동 33인 중 하나가 된 남강 이승훈

이 세운 평안북도 정주 오산학교의 초빙을 받아 과학과 수학 등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류영모는 1905년 15세에 YMCA 한국 초대 총무인 김정식의 인도로 기독교에 입문했다. 그는 수업에 앞

서 학생들과 함께 기도를 했으며 수업 중에도 기독교 정신을 가르치는데 더 열의를 보였던 정통 기독교인

이었다. 이렇게 시작된 오산학교의 기독교 정신에 힘입어 주기철, 함석헌, 한경직 같은 걸출한 지도자들

이 배출되었다.


그러나 그는 학교를 떠나면서 기독교 정통 신앙을 버린다. 그는 나중 이일을 회고하면서 “20세에 철도 들지

않은 상태에서 녹음기처럼 들은 것을 그대로 전한 ‘멀쩡한 일’이라고 했다. 소위 表層 기독교에서 深層 기독

교로 자라난 셈이다. 기독교에 입교한지 7년만의 일이다. 류영모가 표층 기독교 교리 신앙을 버린 이유는

크게 세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는 톨스토이를 알게 됐고, 둘째는 노자와 불교경전을 읽게 됐으며, 셋째로

두 살 연하의 동생 영철이 요절한 것이었다. 1910년 톨스토이의 객사(客死)가 알려지면서 톨스토이의 심층

신앙을 알게 됐다. 또 老子와 佛敎經典에서 말 할 수 없을 만큼의 깊이를 보았으며, 두 살 연하의 동생이 19

세 젊은 나이로 죽는 것을 보면서 ‘잘 믿으면 축복 받는다’는 기복신앙의 허구를 꿰뚫어 본 것이다.


그는 1912년 오산학교에서 나와 일본 도쿄 물리학교에 입학하여 1년간 다니다가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귀국해버렸다. 예수처럼 참나, 얼나를 깨닫고 하느님의 아들로서 하느님과 이웃을 섬기며 사는 일을 하며

사는데 대학 교육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는 깨달음에 이른 것이다. 마치 원효가 당나라로 유학 가다가 동굴

에서 해골에 담긴 물을 마시고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는 진리를 깨친 후 유학을 포기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맹자·톨스토이에 큰 감명


1921년 류영모는 오산학교 교장으로 초청되었다. 도쿄 유학 중 김정식의 소개로 만난 적이 있는 고당

조만식이 오산학교 교장으로 봉직하고 있었는데, 그가 일제의 탄압으로 교장에서 물러나게 되자 이승훈은

서른 살이 갓 지난 그를 교장으로 초청했던 것이다. 1910년 과학 교사로 봉직했던 그는 이제 교장으로 취

임하여 수신(修身)과목을 맡아 ‘성경’ ‘도덕경’ 등 동서의 경전은 물론 톨스토이 우치무라 간죠(內村鑑三),

칼라일 등의 사상을 가르쳤다. 그러나 일제 당국으로부터 교장 인준을 받지 못해 결국 1년 남짓 머물다가

교장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때 졸업반 학생이었던 11년 연하의 제자 함석헌을 만나 평생 가장 가까운 사제지간의 연을 맺

었다. 서울로 돌아온 류영모는 아버지의 피혁상을 돕다가 아버지가 차려준 솜 공장을 직접 경영하기도

했다. 1927년 YMCA의 연경반 모임을 지도하던 월남 이상재가 돌아가자 류영모는 그 당시 YMCA 총무

로 있던 현동환의 권유로 1928년부터 연경반을 지도하기 시작, 1963년까지 약 35년간 계속하였다.

‘요한복음 등 기독교 경전은 물론 ’도덕경‘ 등 이웃종교의 경전도 강의했다.


1927년 일본유학을 하고 귀국한 김교신은 일본에서 무교회주의자 우치무라 간죠의 성서모임에 참석하던

한국 유학생 여섯 명과 함께 고국에서도 無敎會 신앙을 전파할 목적으로 ‘성서조선’이라는 잡지를 내고 성

서연구회도 만들었다. 김교신은 함석헌의 소개로 류영모를 만나 동인으로 참여하여 달라고 권유했다.


그러나 류영모는 아직도 표층 기독교 차원에 머물고 있던 김교신이나 그의 동료들의 신앙에 전적으로

동조할 수는 없었다. 자기도 “열다섯 살에 입교하여 23세까지 십자가를 부르짖는 십자가 신앙”이었지만

이제 톨스토이 같은 ‘비정통’ 신앙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1937년 겨울 어느 날 ‘성서조선’ 사람들의 모임에 참석했다가 간청에 못 이겨 ‘요한복음’ 3장16절을

풀이했다. 그는 요한복음의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는 內容을 하느님이 우리 마음속에 하느님의

씨앗을 넣어주셨다는 의미로 해석하며 “사람은 제 마음 속에 있는 하느님의 씨앗(聖靈)을 키워 하느님

과 하나되는 것을 삶의 궁극적 목표로 삼아야 한다”고 역설했다. 부처님이 모든 사람의 마음에 佛性

있다고 말한 것이나, 공자님이 사람은 누구나 마음속에 인성(仁性)을 가지고 있다고 했는데 이런 가르

침이 예수가 말하는 靈性과 다를 것이 없다는 설명이다.


1933년 아버지가 암으로 돌아가고 2년 후 아버지가 남긴 가산을 정리하여 종로구 적선동에서 세검정

자하문 밖, 그 당시 경기도 고양군 은평면 구기리, 지금의 서울 종로구 구기동으로 이사, 그 일대에 임야

를 사서 과일과 채소를 재배했다. 땀 흘리지 않고 살아가는 불한당(不汗黨)의 삶에서 20세 때 톨스토이를

알고부터 이상으로 그리던 農村의 삶을 살게 된 것이다.

 


도덕경·불교경전에 심취


1941년 크게 깨친바가 있어 2월 17일 그 때부터 하루에 저녁 한 끼만 먹는 일일일식(一日一食)을 실행

하기로 결심하고 다음 날에는 온 가족이 모인 자리에서 해혼(解婚)을 선언했다. “남녀가 婚姻을 맺었으

면 혼인을 풀어야 한다”는 것이다. 離婚이 아니라 혼인 관계를 유지하면서 오누이처럼 산다는 뜻이라고

했다. 사실 이처럼 ‘홀로 됨’은 심층 종교를 지향하는 이들의 특징 중 하나이기도 하다. ‘도마복음’에서

예수님이 “홀로이고 택함을 입은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나라를 찾을 것임이라”는 말로 ‘홀로 됨’ 혹은

 ‘홀로 섬’을 강조하고 있다. 하나 됨, 단독자, 홀로인 자와의 홀로 됨(alone with the Alone) 등의 중요성

을 부각한 것이다. ‘홀로’라는 뜻의 그리스어 ‘모나코스(monachos)’에서 수도사라는 ‘monk’나 수도원이

라는 ‘monastery’라는 낱말이 파생되어왔다. 홀로 됨이 종교적 삶에 중요함을 일깨워주는 말이다.


류영모는 1년 후인 1942년 1월 4일 ‘솟남’의 체험을 했다. 이 경험을 그는 “마침내 아버지의 품에 들어

갔다”고표현했다. 자기 마음속에 깃든 ‘얼나’, ‘참나’를 깨닫고 오로지 그것을 하느님으로 받들겠다는

것이다. 류영모는 1940년경부터 다석(多夕)이라는 호를 사용했다. 낮보다는 밤을 더 귀중히 여긴다는

뜻이다. “한낮의 밝음은 宇宙의 神秘와 靈魂의 속삭임을 防害하는 것”이므로 밤이야말로 ‘영원의 소리

를 빨리 들을 수 있는’ 시간이라고 했다. 우리가 기도할 때 눈을 감는 것은 어둠 속에서 이 세상을 초월

하여 하느님께 이르기 위함인데, 밤에는 눈을 감지 않아도 눈감은 효과를 주므로, 밤이 되면 잠만 자지

말고 하느님께로 나아가자는 것이 ‘多夕’이라는 호에 숨은 깊은 뜻이라고 한다. ‘영혼의 어두운 밤’을

지나야 하느님과 하나 된다고 가르치는 중세 그리스도교 신비가들의 말을 연상하게 한다.


회통·다원주의 삶 지향


그는 “예수, 석가는 우리와 똑 같다. 유교, 불교, 예수교가 따로 있는 것 아니다. 오직 精神을 ‘하나’로

고동(鼓動)시키는 것뿐이다. 이 고동은 우리를 하느님께로 올려 보낸다.”고 했다. 유교, 불교, 그리스도교

의 宗敎 傳統別 差異가 重要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지금껏 보아온대로 表層 종교냐 深層 종교냐를 따지고,

심층일 경우 그것이 어느 전통이든 모두 우리를 '참 하나'와 하나 되게 도와주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본 것

이다.


또 그의 회통 사상을 가장 잘 드러내는 말이 ‘빈~탕(空) 한데(與) 맞혀(配) 놀이(享)(공여배향)’라는 말이다.

‘하느님을 함께 모시고 늘 제사 드리는 자세로 살며 즐기자’고 하는 이 말에서 “하느님을 모시는 일은 기독

교적이고, 제사지내듯 정성을 다하는 자세는 유교적이고, 빈~탕은 불교적이고, 한데에서 놀자는 것은 도교

적”이라는 분석이다. 50여 년 전 배타적인 기독교 일색이던 한국의 종교적 분위기에서 그가 이런 종교 다원

주의적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고 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류영모는 1961년 11월 외손녀와 함께 옥상에 지어놓은 별 관측용 유리방에 올라갔다가 내려오는 중 외손녀

가 떨어지려 하자 외손녀를 껴안은 채 3미터 높이의 현관으로 떨어져 의식을 잃었다. 서울대병원에 입원해서

일주일이 지나서야 의식이 회복되었다.


의식이 들락날락하는 상태에서도 “죽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니다.” “예수와 석가는 참 비슷해요. 매우 가까워요.

죽으면 평안할 거야. 무엇을 믿거나 죽으면 모두 평안할 거야”라는 말을 하고 의식이 겨우 회복된 후 함석헌이

방문했을 때 ‘요한복음’ 17장 21절,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

어”하는 말씀과 13장 31절, “지금 인자가 영광을 얻었고 하느님도 인자로 인하여 영광을 얻으셨도다”하는 말

씀, “이 두 가지가 같은 말씀이야”하는 등 성경 내용을 놓고 이야기하기도 했다. 세계 신비주의 사상의 핵심 요

소인 神과 人間의 ‘하나 됨’을 무의식 상태에서마저 다시 확인한 셈이다.

 

 

▲오강남 명예교수

1981년 2월 3일 류영모는 육신의 옷을 벗고 ‘빈탕한데’에 들어갔다. 40년간 하루 한 끼씩 먹고 산 삶을

마감한 것이다. 산 기간은 90년 10개월 21일, 날수로 3만3200일이었다.


오강남 캐나다 리자이나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