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깨달음은 이해 영역…부처님도 선정 지도 안 했다”

장백산-1 2015. 9. 6. 17:55

 

 

“깨달음은 이해 영역…부처님도 선정 지도 안 했다”

 승인 2015.09.05  14:44:32  법보신문  이재형 기자  mitra@beopbo.com

 

조계종 교육원장 현응 스님
‘깨달음은 이루는 것’ 비판, 부처님도 사유 통해 깨달아
깨달음과 역사 분리는 잘못, 연기이해· 현실 참여해야 보살
현재 간화선은 앉은뱅이 불교 참석 학자들은 ‘적극 공감’
일부선 “깨달음 오도” 지적

 

 

  

 조계종 교육원장 현응 스님은 이날 세미나에서 禪定이 불교의 핵심 수행이라는 통념에서 벗어나 “선정이나 삼매 없이도 깨달을 수 있다”는 파격적인 주장을 폈다. 이같은 주장은 현재 조계종의 스님들의 수행관과 큰 차이가 있다는 점에서 반발과 논란이 예상된다. 

 

 

“부처님은 苦行을 통해서도 아니요, 禪定을 통해서도 아닌 論理的인 思惟와 省察을 통해서 깨달음을

얻었다. 깨달음은 이해의 영역이었기 때문에 설법, 토론, 대화를 통해 얻을 수 있었다. 부처님은 가르침

을 청할 때 三昧와 禪定을 통해 수련하라고 지도하지는 않았다. 따라서 선정이나 삼매 없이도 충분히

깨달음이 가능하다.”

조계종 교육원장 현응 스님은 자신이 1990년 펴낸 ‘깨달음의 역사’ 발간 25주년을 맞아 9월4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예인홀에서 열린 세미나에서 “선정이나 삼매 없이도 깨달을 수 있다”며 “불교의 요체는

‘이루는 깨달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는 깨달음’에 있다”는 파격적인 주장을 펼쳐 큰 논란이

예상된다.

 

현응 스님은 ‘깨달음과 그 역사, 그 이후’라는 기조발제를 통해 불교의 깨달음에 대한 새로운 견해를

주장했다. 스님에 따르면 현재 조계종에서 깨달음을 위한 수행은 평생에 걸친 과업이다. 깨달음을 위

한 노력은 3개월, 6개월 정도로는 언급조차 할 수 없고, 여러 해가 지나고 수십 년 이상을 참선 수행하

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데 수십 년을 투자해도 현실적으로는 깨달았다고 하는 사람이 보기 힘들어

돈오(頓悟)라는 말이 민망할 정도라는 것이다.

 

스님은 “깨달음은 불교도에게 선결과제이자 기본요건이기 때문에 깨달음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다른

문제에는 진지한 관심을 기울이기 힘들다”며 “한국불교를 變化시키기 위한 현실적인 목적에서 ‘깨달음’

을 이해하고자 했다”고 말했다. 스님은 먼저 韓國佛敎에서의 깨달음이란 ‘몸과 마음의 完成된 境地이자

모든 煩惱를 끊고 고매한 人格을 이룬 높은 경지’로서 ‘깨달음’ ‘확철대오’ 등으로 표현한다고 밝혔다.

 

스님은 이어 이렇게 定義하는 깨달음은 대단히 抽象的으로, 깨달음이란 것을 이렇게 모호하게 설정해서

는 이를 얻기 위한 노력의 방법도 不分明하고, 깨달음의 成就 또한 어느 水準의 어떤 것을 말하는지 제대

로 알 수 없다고 지적했다. 평생을 노력해도 깨달음을 얻지 못하는 까닭도 깨달음이라는 내용을 잘못 설정

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스님은 律藏인 ‘마하박가’의 내용을 인용하며 부처님은 삶의 괴로움을 緣起의 觀點, 卽 原因, 條件, 生成,

消滅의 觀點으로 洞察하고 理解하는 內容이 바로 부처님의 깨달음으로 기술했다고 말했다. 따라서 부처

을 각자(覺者)라 할 때 그 깨달음은 緣起觀의 理解를 確立함이며, 삶의 괴로움의 問題를 이러한 洞察과

理解로서 解決해야 한다는 것이다.

 

스님은 부처님이 녹야원의 첫 說法에서 다섯 수행자에게 자신의 깨달음을 說明하고 納得시키는데 걸린

時間은 단지 불과 며칠이 걸렸다는 부분을 상기시켰다. 그리고 부처님이 ‘납득시킨다’는 말을 썼듯이 깨

달음은 곧 理解의 領域이라는 것이다. 특히 납득시키는 방법도 禪定이나 三昧를 通한 방법이 아니라 밤

낮 없는 對話와 討論이었다고 주장했다. 스님은 “만일 깨달음을 ‘올바른 理解’라고 한다면 그러한 깨달음

을 얻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라며 “아마 雨安居 期間 중에 부처님을 포함한 61명은 집중적

인 說法과 討論을 했다고 짐작된다”고 강조했다.

 

 

  

 현응 스님은 이날 발제에서 “개인적으로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이라는 수행의 층위를 

 믿지 않으며, 禪定은 宗敎的 想像力이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현응 스님은 일반적으로 ‘알아차림’ ‘마음챙김’ 등으로 번역되는 사띠(念, 憶念)를 ‘잘 記憶하여 그 內容

思惟하는 일’이라고 규정했다. 記錄이 없던 時代에 工夫하는 方法이 사띠(記憶하여 思惟함) 外엔 달리

었으며, 부처님 제자인 비구스님들을 聲聞제자라 부른 것도 가르침을 記憶으로 修行하면서 그 가르침를

다른 사람들에게 傳承하는 사람임을 特徵지어 표현하는 말일 것으로 추정했다.

 

스님은 그러나 사띠가 부처님이 說法한 內容을 記憶하고 思惟하는 方式에서 特定한 主題나 內容으로

再整理해 이것들을 三昧(禪定)와 結合한 위파사나 方式으로 省察하는 方式으로 變化해갔다고 지적했다.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이라는 層位가 생겼고, 그 基準에 四禪, 八正, 구차제정 등 禪定의 水準

정도도 포함되는 등 ‘理解하는 깨달음’에서 ‘이루는 깨달음’으로 變했다는 것이다. 中國佛敎도 法相宗,

華嚴宗, 천태종 등 매우 높은 수준의 다양한 불교학파를 이뤄 경쟁적으로 자파의 敎學을 탐구하고 선양

하면서, 중국불교는 심오하지만 난해한 교리를 전개하는 학자들의 불교가 되고 말았다고 평가했다.

스님은 看話禪도 記憶의 修行 方法임을 力說했다. 스님에 따르면 간(看)은 ‘잘 살펴보다’는 뜻이며,

화(話)는 이야기나 대화라는 뜻이다. 看話禪은 조사스님들의 설법 이야기나 주고받은 대화를 잘 記憶

했다가 수시로 思惟하는 수행인 것이다. 이런 禪佛敎의 看話禪은 印度 사띠 수행의 중국적 변용으로서,

다만 같은 점은 사띠든 간화선이든 둘 다 설법 내용이나 대화를 늘 記憶하여 省察하는 수행 방법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宋代를 지나 元代에 이르러 ‘이야기(話頭)’ 속의 特別한 句節이나 單語 한 글자마다 마음

을 集中하거나 疑心하면서 禪定에 깊이 드는 方式으로 變했고, 이때부터 禪, 또는 看話禪은 外形的으로

는 坐禪을 重視하는 앉은뱅이 佛敎가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따라서 過去의 간화선은 선정을 필요로 하

않기 때문에 行住坐臥나 日常에서도 가능했지만, 元나라 몽산禪師가 禪定爲主의 看話禪을 제창하고,

우리나라 西山大師가 ‘선가귀감’에서 말하는 禪도 몽산禪에 깊이 影響을 받았다는 게 스님의 견해다.

 

현응 스님은 “은유, 파격, 역설의 선적인 이야기를 평소 記憶하고 있으면서 그 이야기를 반복적으로

吟味하며 그 意圖와 核心을 捕捉하고자 하는 것이 旣存의 간화선 방식이라면, 特定한 어구(語句)에

集中해 선정에 깊이 드는 것을 강조하는 선은 그 성격과 패러다임이 전혀 다르다”며 “선정위주의

참선을 조계선이나 간화선이라 호칭하는 것은 부정확한 표현”이라고 주장했다.

 

스님은 또 “선정과 삼매로서 마음을 닦아 깨달은 마음으로 만들려는 것은 각종 화학적 재료를 섞거나

변용해 금을 만들려하는 연금술을 닮았다”며 “사람들은 이제 연금술을 믿지 않거나 그 효용성을 인정

하지 않는다. 마음의 연금술 또한 道人을 念願하는 사람들의 환타지가 될 수 있지만 그러기에는 치르는

대가가 너무 크다”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현응 스님이 말하는 깨달음이란 무엇이고 어떤 방법으로 노력해야 한다는 걸까. 현응 스님은

“깨달음이란 緣起와 空에 대한 올바른 理解”로 規定했다. 스님은 이어 “緣起나 空에 대한 내용 자체가

워낙 合理的이며 科學的이라 어느 정도 지적인 능력만 있으면 그 槪念을 파악하기가 어렵지 않다”고

설명했다. 오늘날 看話禪은 좌선의 자세로 앉아서 선정삼매 속에서 무념의 참선 경지를 이루거나 특정

어구를 의심하는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지만, 한편 현대사회의 또 다른 사띠 工夫는 경전과 어록, 다양한

독서를 하면서 탐구하는 마음으로 사유하면서 읽는 것으로 가능하다는 것이다.

 

스님은 깨달음과 歷史의 관계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스님에 따르면 깨달음이 緣起를 잘 理解하는 領域

라면, 歷史는 方向과 內容을 選擇해 具體的으로 行爲 하는 것이다. 즉 歷史는 智慧와 對比되는 慈悲의

域으로, 倫理, 正義, 平和, 公定, 平等 등이 여기에 포함된다. 스님은 “깨달음과 歷史는 分離돼서는 안

며 오히려 다른 차원의 두 영역을 하나의 삶에 결합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보디(깨달음)’만 있고 ‘사트바(역사)’의 영역이 없으면 小乘的 아라한일 뿐이며, 보디가 없는 역사행은

범부중생의 삶일 뿐이라는 것이다. 스님은 특히 “깨달음과 역사는 다른 차원의 영역이지만 이 둘을 결

합하면 ‘보디사트바(보살)’가 된다”며 “연기와 공을 잘 이해하는 깨달음을 얻어 存在들의 變化性과 關

係性을 洞察함으로써 實在意識으로부터 解脫한 自由精神을 얻은 者가 곧 아라한으로, 그가 살고 있는

역사에 현실적으로 참여하고자 하는 의도적인 마음을 내서 실제로 각종 바라밀(다양한 방편행)을 하는

사람, 이를 일러 보살이라 한다”고 밝혔다.

 

 

  

 현응 스님의 주장에 대해 이날 지정토론으로 참여한 학자들은 대단히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현응 스님의 주장이 “경전에 근거하지 않은 개인적인 사견”이라는 비판도 제기됐다.

 

현응 스님의 이같은 파격적인 주장에 대해 이날 지정토론으로 참여한 학자들은 한결같이 肯定的으로

評價했다. 조성택 고려대 철학과 교수는 “현응 스님의 글은 기존 불교에 익숙한 사람들을 굉장히 불편

하게 한다”며 “현응 스님은 불교 밖에서 불교를 바라보고 전통의 바깥에서 전통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

이라고 말했다. 조 교수는 이어 “현응 스님이 주장하는 ‘이해하는 깨달음’이란 사물을 피상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투철하게 보는 것(照見)’이 깨달음으로 이 깨달음을 깊이 실천하는 것(行深)이 바로 나와

세상을 두루 구제하고자 하는 보살행”이라고 밝히고 “이제 오랜 침체에 빠져 있는 한국불교의 전통을

새롭게 갱신하고자 하는 열망이 바로 '이해하는 깨달음'이요, 깨달음과 역사가 둘이 아님을 재확인하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홍창성 미네소타주립대학 철학과 교수는 “현응 스님이 말하는 깨달음이란 事實에 對한 眞理인 緣起의

法則을 理解하는 것이고, 歷史 속에서의 實踐은 불교에서는 慈悲行을 말하는 것으로서 이것은 당위의

영역에 해당한다”며 “나 자신도 현응 스님의 말대로 깨달음이 역사와 자비의 영역과 만나야 하며 자비

가 깨달음의 연장선에서 이뤄지는 행위라고 믿는다”고 말했다.

 

정경일 새길기독교사회문화원장은 현응 스님의 省察을 깨달음의 脫神秘化, 깨달음의 脫境界化, 깨달음

脫宗敎化라는 3가지 주제로 분석한 뒤 이를 ‘佛敎의 現代化’로 요약했다. 그는 “현대화의 핵심은 당

대적 문제와 상황을 緣起의 智慧와 慈悲로 철저히 思惟하고 行動하는 것”이라며 “오늘의 불교가 직면하

고 있는 종교적 다원성과 사회적 고통이라는 현대적 상황에 충실히 참여하며 응답 할 때 불교의 깨달음

은 모든 종교에게, 아니 모든 인류에게 선물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해남 대흥사 일지암 암주이자 교육부장을 역임한 법인 스님의 사회로 진행된 이날 세미나에서는 참석자

들의 다양한 질문과 현응 스님의 답변이 오고갔다. 한형조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를 비롯해 김응철 중앙

승가대 교수, 윤창화 민족사 대표 등은 현응 스님의 주장에 깊은 공감을 표명했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현응 스님의 견해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도 있었다. 이제열 불교경전연구원장은

초기경전인 쌍윳따니까야의 내용을 언급한 뒤 “緣起를 깨달았다는 것은 理解가 아닌 體驗이고 그

體驗은 선정 수행을 통해 실현된다”며 “깨달음은 이해의 영역을 포함하지만 더 나아가 체험적으로

증득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또 “경전에도 부처님은 無色界 四禪定과 滅盡定에 이르러 緣起를

思惟하고 새벽에 道를 깨쳤다고 명시돼 있다”며 “현응 스님은 경전의 근거를 무시하고 개인적인 사

견으로 연기와 깨달음을 오도하고 있다는 의구심을 떨치기 어렵다”고 말했다.

 

또 김재성 능인불교대학원대 교수도 “오비구가 부처님의 대화로만 깨달은 것이 아니라 선정을 통해

깨달았음이 경전에 분명히 나와 있다”고 지적하고, “아난존자가 기억력이 탁월했지만 아라한과를

얻지 못해 처음 結集에 참여하지 못했던 점도 간과돼서는 안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재형 기자 mitra@beop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