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후기] '2015.6.12(P287)
신심명은 삼조 승찬대사께서 우리가 처음 발심할 때부터 마지막 구경 성불 할 때까지 가져야 하는 信心에 대해 남겨 놓으신 사언절구의 시문이다. 신심명(信心銘)은 불교의 근본 골자로써 지극한 보배인데 낭야 각선사가 '지도무난 유혐간택 (至道無難 唯嫌揀擇) 단막증애 통연명백 (但莫憎愛 洞然明白), 즉 지극한 도(道)는 어렵지 않음이요 오직 간택함을 꺼릴 뿐이니, 미워하고 사랑하는 분별만 하지 않으면 통연히 명백하니라'라는 첫 구절만 큼지막하게 쓰고 그 나머지 뒷 구절들은 모두 조그맣게 써서 주해로 붙였다고 할 정도로 '지도무난 유혐간택 (至道無難 唯嫌揀擇) 단막증애 통연명백 (但莫憎愛 洞然明白)이라는 이 구절이 신신명의 핵심(核心)이라고 할 수 있다.
성철스님께서는 '신신명의 대의는 우리가 모든 상대적인 양변의 차별하는 견해, 분별하는 견해를 모두 버리면 원융무애(圓融無碍)한 세계로 돌아 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부사의 해탈경계 또는 진여법계, 무장애법계라 말하기도 합니다. 둘 아닌 세계,불이(不二)의 세계인 무애자재(無碍自在)한 세계를 말씀해 놓은 이 신신명도 신심명을 모를 때는 신심명이 금덩이처럼 소중하지만 신심명을 깨치고 보면 신심명은 거름처럼 더러운 것입니다'라고 말씀하셨다.
한편 증도가(證道歌)는 영가스님이 육조 혜능스님을 찾아가서 확철히 깨치고 난 후 지은 저술로서 선종사상을 대표하는 중요한 위치에 있을 뿐 아니라 선과 교의 관계를 더욱 완연히 드러낸 저술이다. 성철스님은 '증도가라 하였는데 증(證)이란 구경(究竟)을 바로 체득함을 말합니다. 증오(證悟)란 얼음을 완전히 녹여서 물로 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물 자체도 볼 수 없는 경계, 따라서 중생의 분별 번뇌 망상이 다 끊어져서 제8아뢰야식(阿賴耶識) 근본무명(根本無明)까지 끊어진 구경각(究竟覺)을 말하니 곧 실제로 성불(成佛)한 것, 견성(見性)한 것을 증오(證悟)라 하고 간단히 줄여서 증(證)이라고 하는 것입니다'라고 말씀하면서,
'이 증도가(證道歌)에서 무엇을 근본(根本)으로 삼았느냐 하면, 증오(證悟)를 근본(根本)으로 삼아서 깨달았기 때문에 성도, 성불, 구경각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도(道)를 증(證)한 노래(歌)라는 뜻으로 증도가(證道歌)라고 하는 것입니다. 도를 증해서 구경각을 성취한다고 하면 그 깨달음의 내용은 무엇이냐? 무념(無念), 무생(無生) 입니다'라고 하셨다.
중요한 것은 쌍차쌍조(雙遮雙照)다. 쌍차(雙遮), 즉 양변을 막는다는 것은 양극단을 버린다는 것을 의미하며, 쌍조(雙照), 즉 양변으 비춘다는 것은 양극단이 완전히 융합(融合)하는 것을 말한다. 양변이란 모두 변견인데, 변견을 버리면 곧바로 중도(中道)다. 양변을 버리고나니 쌍조, 즉 양변이 서로 융합하지 않을래야 융합하지 않을 수 없으며, 쌍조, 즉 양변을 완전히 융합하니 쌍차, 즉 양변을 버리지 않을래야 버리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이 쌍차쌍조(雙遮雙照) 원리(原理)가 참으로 묘(妙)하여 진공묘유(眞空妙有)라고도 말하며 불교의 최고(最高) 원리(原理)인 중도(中道)인 것이니 이 사실만 잘 알면 되나 그것이 그리 쉬운 일인가.
성철스님께서 1967년 동안거에서 하신 법문을 정리해 엮은 책이며 특히 '이 글들을 얻어보고 마치 캄캄한 밤중에 횃불을 만난 것 같았으며, 내 갈 길이 환히 비춰보이는 듯하였다'고 술회하셨고 기본적으로 위 신심명 증도가 두 글은 모두 암송해야 하는 당연 필독서이며 독특한 해설이 돋보였다
[밑줄치기]
- - 신심명(信心銘)
ㅇ 결국 우리가 양쪽 변견을 떠나 자성을 꺠치고 중도(中道)를 성취하면 쌍차쌍조(雙遮雙照)의 차조(遮照) 동시가 되어 우주삼라만상과 항사묘용이 쌍차쌍조(雙遮雙照)의 차조(遮照) 동시 여기에 원만구족(圓滿具足)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로므로 공(空)이라 해서 아무것도 없는 텅~빈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一切가 圓滿具足한 것을 공(空)이라 하며 空이 또 空이 아니어서, 일체 우주삼라만상이 쌍차쌍조(雙遮雙照)의 차조(遮照) 동시 여기에 포함(包含)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ㅇ 대립되어 서로 통하지 못하는 상대세계를 초월하고 절대세계에 들어가면 모든 상대를 극복하여 융합한다는 의미입니다. 나와 남이 없다 하니 아무것도 없이 텅텅~빈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나와 남이 없을 뿐입니다. 따라서 남이 곧 나이고 내가 바로 남으로서, 나와 남이 하나로 통하는 절대법계의 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ㅇ 하나는 작은 하나이며 일체는 커다란 전체입니다. 진여법계에서는 하나가 곧 많음이고 많음이 바로 하나로써 하나와 많음이 서로서로 통하여, 하나가 곧 전체이고 전체가 바로 하나라는 것입니다(일즉일체 일체죽일/一卽一切 一切卽一)
- 증도가
ㅇ '절학무위한도인(絶學無爲閑道人)'은 중도(中道)를 바로 깨친 사람이며, '부제망상불구진(不除妄想不求眞)'은 참됨과 망상이라는 양변을 다 버린 것을 말하니 그것이 곧 중도(中道)입니다.
ㅇ 예전에 스님들은 '나무로 만든 장승이 노래를 부르고 돌로 된 여자가 일어나 춤을 춘다'라고 했습니다. 결국은 참으로 생겨나는 것이 없으면 곧 생겨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즉 생겨나지 않는 것이 생겨나는 것이고, 생겨나는 것이 생겨나지 않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렇게 되어야 쌍차(雙遮)가 곧 쌍조(雙照)이며 쌍조(雙照)가 곧 쌍차(雙遮)이어서 차조동시(遮照同時)가 표현됩니다
ㅇ 사량분별(思量分別)이 다 떨어지면 무정물인 나무 장승과 돌 여자처럼 되어 영영 무심(無心)이 되어 버립니다. 무심이 되면 그때 비로소 참으로 부처의 무진묘용(無盡妙用)이 무심(無心)에서 살아나게 됩니다
ㅇ 禪이란 一切의 분별 번뇌 妄想을 떠나서 오미일여(悟昧一如)한 데서 확철히 깨쳐 大圓境智가 현발되어야 합니다. 自性을 완전히 깨쳐서 선정과 지혜가 둥글고 밝은 경계가 선(禪)이지 그전에는 전체가 분별 번뇌 망상인 줄 알아야 합니다. 화두가 조금 잘된다고 참선 잘 하는 줄 알아서는 천부당만부당이니 그 사람은 분별 번뇌 망상 피우는 사람이지 참선하는 사람은 아닙니다. 선방에 앉아서 화두 한다고 해도 분별 번뇌 망상하는 것이지 참으로 참선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ㅇ 석장이란 육환장을 말합니다. 육환장 머리에 두 개의 걸이가 붙어 있고 또 한쪽 걸이마다, 세 개씩 조그만 고리가 달려 있습니다. 그러니 육환장은 양 걸이마다 세 개씩 모두 여섯 개의 고리가 달려 있는 나무 지팡이입니다. 그런데 그 육환장이 무엇을 표현하느냐 하면, 양 걸이는 진속이제(眞俗異諦)를 표현한 것이고, 여섯 개의 고리란 육바라밀을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고 중심의 나무 지팡이는 중도(中道)를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육환장은 그저 나무 지팡이가 아니라 중도(中道) 위에 서있는, 이제가 원융하고 육도가 원만구족한 불교 진리 전체를 표현하고 있는 것이 육환장입니다
ㅇ 그러므로 손가락은 달이 아니기 때문에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키면 달을 보아야 하고 팔만대장경의 문자 속에는 부처(佛)가 없으니 오로지 우리의 자성(自性)을 깨쳐야 합니다
ㅇ 어떤 사람이 저 산꼭대기, 수미산 꼭대기까지 올라가서 서 있더라는 얘기가 있습니다. 사람이 훌륭해지면 훌륭해질수록 下心을 더 한다는 말입니다
[기사모음1]
“성철사상의 참다운 이해자는 무비라고 자부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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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생100주년 기념] 성철스님과 나의 법연(法緣)을 말하다 - 무비스님 |
데스크승인 2012.08.10 08:53:49
정리=이진두 논설위원 | 사진제공=윤제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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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철스님은 후학들에게 수행자의 진정한 모습을 보여주신 분입니다. 스스로 수행자의 길에서 한 치도 어긋나지 않았고 자신이성취한 모든 것을 후학들에게 아낌없이 전하는데 평생을 보냈습니다. 해인총림 방장시절 성철스님은 ‘백일법문’을 비롯하여 상당법문, 소참법문을 통해 고구정녕이 불교의 이론과 사상, 불자가 지녀야 할 가치관을 일러주셨습니다.
佛敎의 궁극적(窮極的)인 目標인 '깨달음'에 이르는 첩경은 참선수행임을 누누이 말씀하시고 수좌들에게 엄하면서도 자상한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선방에서는 장군죽비로 수좌들을 가차 없이 경책했습니다. 조는 수좌만이 아니라 졸지 않는 수좌도 그 큰 장군죽비로 사정없이 내리쳤습니다. 정진대중들은 스님의 발자국 소리만 듣고도 정신을 번쩍 차렸으니까요.
요즘의 수행풍토에서 스님의 그런 모습이 무척 아쉽고 그립습니다. 방장 스님이나 조실 스님 그리고 지도자 위치에 있는 스님들이 성철스님처럼 그렇게 이론과 실천으로 후학을 일깨우고 다그친다면 제방의 수행분위기는 엄청 달라지리라 생각합니다. 그렇게만 된다면 정진 중에도 도반끼리 법을 두고 의견을 달리하는 토론도 나오고 해제 때면 여기저기 수행처에서 법거량이 빈번하지 않겠습니까?”
부산 범어사에 주석하면서 선(禪)과 교(敎)로 두루 불자들을 지도하고 있는 우리 곁의 선지식(善知識) 무비(無比)스님. 스님은 젊은 시절 성철스님과의 법연(法緣)을 말하는 자리에서 첫 마디를 이렇게 말하면서 대담에 응했다.
■ 대담 : 원택스님(백련불교문화재단 이사장)
- 성철스님과의 첫 만남은 어떠했습니까?
“1970~1971년 겨울 스님께서 <육조단경>을 강의할 때 참석했습니다. 그 이전 1967년 동안거 때 스님의 ‘백일법문’ 법석에는 참석하지 못했었지요. 역경연수원에 가느라고. 당시 소참법문 형식으로 육조단경을 스님께서 강의하셨는데 감로수와 같은 그 법문은 지금도 기억에 선명합니다.
1971년 동안거 때는 한 철 동안 용맹정진하기로 도반 몇몇과 결사하고 선열당(禪悅堂) 뒤편 조사전(祖師殿)에서 목숨을 내건 정진에 들어갔어요. 그때 성철스님의 법문과 죽비경책은 결사대중을 이끄는 양 날개였습니다.
당시 동참 스님들인 적명.거해.근일.일현.정안.현호스님 등은 지금 제방에서 지도자로서 후학을 제접하고 있지요. 그때의 한 철 용맹정진 이후 7일간의 용맹정진에 더러 동참하곤 했으나 그 시절처럼 혼신을 다 하지는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큰스님의 경책이 없었기 때문이라 여깁니다.”
육조단경 강의 때 첫 만남, 법문과 죽비 경책은 대중 이끄는 양 날개
- ‘나는 큰 절 방장 스님 시자’라는 말을 자주 하신다고 들었습니다. 그 말씀의 뜻은 무엇입니까?
“하! 하! 그 이야기 말이요? 나는 큰스님의 상좌가 아니잖습니까. 그런데도 방장 스님 시자라 하는 데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지요. 그 당시 큰스님은 해인사 백련암에 주로 머무셨지요. 상당법문 때나 큰 절에 일이 있을 때면 백련암에서 큰 절로 오셔서 퇴설당에 머무셨어요. 그때는 내가 ‘현지 시자’를 자원했지요. 스님이 머무실 방을 청소하고 아궁이에 미리 군불도 때 놓고…. 그 일이 내 몫이었지요. 그러한 데는 큰스님의 말씀을 한마디라도 더 들으려는 내 딴의 꿍심이 있었어요.
그런 내가 기특했던지 스님은 내가 여쭙는 말에 흔연히 답해주셨지요. ‘불교를 알려면 어느 책을 읽어야 합니까’ 하니 ‘<종경록(宗鏡錄)>을 일러주셨고 일본학자 우이 하주쿠(宇井伯壽, 1882~ 1963)의 <불교대전>도 읽으라 하셨지요. 불교대전은 10권으로 된 책인데 일본의 인도철학자요 불교학자이며 문헌을 철저히 고증하는 학문연구로 유명한 우이 하주쿠의 유명한 저서이지요.”
- 돈점논쟁(頓漸論爭)에 대한 스님의 견해는 어떠십니까?
“성철 큰스님은 보조지눌(普照知訥, 1158~ 1210) 국사를 엄청 비판했지요. 그걸 ‘돈점논쟁’이라 부르는데 돈오돈수(頓悟頓修, 단 번에 깨치어 도를 이룬다)와 돈오점수(頓悟漸修, 깨쳤다 해도 습기는 남아 있으니 점차 닦아 나가야 한다)의 수증론(修證論, 닦음과 깨침의 논리)을 말하는 것이지요. 달리 말하면 문자와 이론으로 깨달음을 아는 것은 해오(解悟)이지 증오(證悟, 자신이 깨달음을 체득함)가 아니라는 말이지요. 그래서 증오라야 진정한 깨달음이요 대각의 성취이지 해오의 단계는 문자와 언어로서만 아는 것이기에 궁극적인 깨달음이 아니라는 말이에요.
큰스님이 보조스님을 비판하는 대목은 초기 보조사상은 ‘해오’에 머물렀으나 보조스님 말기에는 ‘증오’라야 한다고 보조스님 스스로도 그렇게 말했는데 후학들은 초기의 보조사상에만 머물러 있다는 질타(叱咤)이지요. 보조스님을 바로 알고 참선수행자는 돈오돈수를 근본목표로 해야 한다는 큰 가르침이지요. 큰스님은 자신의 이 말씀을 <선문정로(禪門正路)>라는 책에 자세히 해 놓으셨지요.”
- 백일법문 법석에 참석하지 않으셨다면 그 법문을 접할 기회는 없었겠습니다.
“아니지요. 백일법문을 듣는 것으로 말하면 동시대 살고 있는 승속(僧俗) 가운데 나만큼 그 법문을 많이 들은 사람은 없을 거라고 자부할 정도입니다. 큰스님의 직접 강의를 들은 것은 <육조단경>이 전부였지만 천제 . 만수 . 원 공. 원기 스님 등이 큰스님의 법문이나 강설을 녹음으로 잘 남겨두었고 이것을 원택스님이 CD로, 책으로 자세히 풀어서 지금 널리 퍼뜨리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요즘은 당시 그 법석에 참여하지 못한 사람들도 당시와 똑같은 분위기를 느끼며 큰스님 녹음 법문을 듣고 있으니 얼마나 좋습니까.”
‘백일법문’ 통해 불교, 중도사상 회통, 신심명 증도가 등으로 스님 사상 깊이 이해
- 그렇게 자부하신다면 스님께서 생각하시는 백일법문의 영향력은 어떠하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큰스님은 백일법문을 통해 불교를 중도(中道)로 회통(會通)했습니다. 부처님이 깨달으신 내용은 중도(中道)라고 한마디로 일러주시고 그 중도의 법칙으로 불교를 설명했으며 중도를 기준으로 불교와 비불교를 판단하는 근거로 삼았지 않습니까. 백일법문을 들어보면 큰스님이 중도로서 불교를 꿰뚫었음을 알게 되고 이른바 ‘성철사상’의 뿌리를 알게 된다고 봅니다.
나는 백일법문 그리고 큰스님이 강설한 신심명(信心銘), 증도가(證道歌), 육조단경(六祖壇經) 등을 통해 ‘성철스님의 법을 깊이 이해했고 당신을 가장 잘 이해한 사람은 무비(無比)’라고 나 스스로 믿고 있습니다. 허- 허- 허.”
- 스님 오늘 말씀 참으로 고맙습니다. 마지막으로 하실 말씀이 있으시다면….
“큰스님은 나에게는 ‘선사(禪師)는 이러해야 한다’는 표상입니다. 나는 후학들에게나 불자들에게 ‘성철스님을 거울삼아 수행해야 한다’고 기회 있을 때마다 힘주어 말하고 있습니다. 나는 대선지식을 모시고 살았던 나의 삶이 참으로 크나큰 복(福)이었음을 새삼 알았기 때문입니다. 큰스님 가신지 20년이 다 된 지금 다시금 큰스님을 회상할 기회를 내게 주어서 내가 원택스님에게 감사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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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ibulgyo.com/news/photo/201208/120030_57850_2255.jp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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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어사 화엄전을 찾아온 원택스님(오른쪽)과 이진두 논설위원에게 성철스님과의 법연을 이야기하는 무비스님(왼쪽). |
■ 무비스님은…
부산 범어사에서 여환(如幻)스님을 은사로 출가, 해인사 강원 졸업, 해인사 통도사 등 여러 선원에서 안거했다. 탄허스님의 법맥을 이은 대강백으로 통도사.범어사 강주, 조계종 승가대학원장과 교육원장, 동국역경원장 등을 역임했다. 현 동화사 한문불전승가대학원장. 범어사 화엄전에 주석하면서 전국의 수많은 법회와 인터넷카페 염화실(http://cafe.daum.net/yumhwasil)을 통해 불자들의 마음을 열어주고 있다.
역.저서로 <금강경오가해> <금강경강의> <화엄경강의> <지장경강의> <사람이 부처님이다> <법화경(상.하)> <일곱 번의 작별인사-49재 법문집> <신 금강경강의> <무비스님 직지강설> <신심명> <천수경> <무비스님의 보살계를 받는 길> <당신은 부처님> 등 다수가 있다.
[불교신문 2838호/ 8월11일자]
[기사모음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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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있는 것도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달마대사의 공(空)
달마 죽음·부활 말한 옛 고사는 ‘공’을 이름이 해탈경지는 非有非無로서 이중부정차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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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2.04.03 17:42:00
“창칼을 만나도 언제나 태연하고, 독약을 마셔도 한가롭고 한가롭도다.” 죽음의 공포가 불법을 깨친 이에게 한낱 어린아이 장난 같다는 것이 영가대사의 생각이겠다.
성철 큰스님은 그의 저서인 ‘신심명, 증도가 강설’에서 구마라습의 제자인 승조 스님과 또 달마대사의 일화를 각각 소개하셨다. 승조(僧肇) 스님은 당시 요진나라 임금이 그를 탐내어 재상으로 삼고자 하므로 사양하는 그를 위협하여 그 직을 맡도록 강요했다. 이에 승조 스님은 죽음을 감수하고 그 요청을 거절했다는 일화를 소개하셨고, 유명한 달마 스님은 그의 설법으로 많은 중생들이 감화를 받는 것을 보고 질투심을 느낀 이들이 그를 죽이려고 시도했으나 다 실패하고, 드디어 여섯 번째에 독약으로 그가 세상의 인연을 스스로 다했다는 것이다. 그가 죽은 뒤에 3년이 지나서 후위(後魏)의 송운(宋雲)이 서역으로 귀국하는 달마대사가 짚신 한 쪽만을 지팡이에 매고 걸어가는 것을 고갯마루에서 만나 인사했다고 한다. 그가 후위에 돌아와 이 사실을 임금에게 보고하여 달마대사의 무덤을 파헤치니 과연 그 무덤 속에 대사는 보이지 않고 짚신 한쪽만이 남아 있었다는 것이었다. 달마대사는 독약으로 과연 죽었는가, 아닌가?
원효대사가 ‘금강삼매경론’ 서문에서 기술하였듯이, ‘일심의 근원은 유무(有無)를 떠나서 홀로 해맑다’고 말했다. 불법을 깨달은 이는 우주법계의 일심을 통달하고 있으므로 유 · 무 양경계(兩境界)를 벗어나 자유자재한 해탈의 경지를 노닐고 있다 하겠다. 이런 해탈의 경지는 공(空)의 경지로서 원효의 지적처럼 유무라는 분별을 떠난 경지이므로 공(空)은 논리적으로 비유비무(非有非無)로서 이중부정(二重否定)의 차원이다.
한쪽 짚신을 메고 가는 달마를 후위국의 사신이 다시 만났다는 것은 이미 공(空)의 경지에 이른 달마를 상징하는 것이겠다. 더구나 한쪽 짚신을 메고 가는 달마의 무덤을 파보니 달마의 시신은 없고 나머지 한쪽 짚신만 남아 있었다는 고사와 함께 하는데, 달마대사의 죽음과 대사의 부활을 동시에 말하는 저 고사는 달마대사가 해탈한 공(空)의 경지에 있음을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해탈한 공(空)은 비유비무(非有非無)다. 죽었으니 비유이고, 부활하여 살아 있으니 비무로서 이중부정의 입장을 알알이 드러내었다고 여기지 않을 수 없다.
“우리 스승님께서 연등불을 뵈옵고 다겁토록 인욕선인이 되셨도다. 몇 번이나 태어나고 몇 번이나 죽었던가? 생사가 아득하여 그침이 없었도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전생담의 이야기다. 전생에 석가모니 부처님은 연등불이 지나가시는 것을 보고 자신의 머리카락을 풀고 진흙바닥에 깔아서 연등불 부처님의 발에 흙이 묻지 않도록 하셨다. 그 공덕을 보고서 연등불께서 석가모니 부처님께 수기(手記)하시면서 너는 다음 생에 태어나 석가모니 부처가 되리라고 말씀하셨다 한다.
또 전생에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산중의 토굴에서 수행을 하고 계셨는데, 당시의 가리왕과 그 수하 시녀들이 수행 장소 근처에서 사냥을 하고 있었다 한다. 왕이 사냥에 몰두하던 중에 시녀들이 수행중인 한 남루한 성자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고 감동받아 그 주위에서 그에게 경배를 올리고 있었다 한다. 이 광경을 보고 임금이 질투심에서 화가 나 이 남루한 성자가 자기의 여자들을 유혹하여 정신을 빼앗는다고 생각하여 그 성자를 잡아서 갈기갈기 토막 내어 죽였다고 한다. 그 성자(석가모니 부처님)는 그토록 엄청난 고통도 인내하면서 그 왕에 대한 분노와 원한을 품지 않았으므로 오늘날의 석가모니 부처님으로 화현하셨다는 것이다.
![](http://www.beopbo.com/news/photo/PEG/13334426882811.jpg) |
▲김형효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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