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철스님의 주례사 [금고옥조]입니

일승법(一乘法)과 방편법(方便法)

장백산-1 2015. 11. 5. 00:38

 

일승법(一乘法)과 방편법(方便法)

 

十方國土  즉, 宇宙 속에 오직 一乘法만 있고 二乘도 없고 三乘도 없는데 부처님의 방편설도 빼놓는다.

쉽게 말하자면 온 시방세계는 이대로가 항상 있는 세계이고 걸림이 없는 세계이고, 하나의 참 진리의

세계인데, 이것을 無障碍法界라고 하는 것입니다. 또 이것을 一乘法이라 합니다.

 

佛敎가 있음으로써 無碍法界, 無障碍法界, 一乘法界, 一眞法界가 있는 것이 아니고, 本來 이 十方世界라

하는 宇宙는 一眞法界, 無碍法界, 無障碍法界, 一乘法界인데 석가모니부처님이 그것을 바로 아시고 그것

을 중생에게 소개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시방세계라 하는 것은 전체가 一乘뿐입니다. 무애법계, 일승법계뿐 그 외에는 하나도 없습니다.

딴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석가모니 부처님은 이런저런 말씀을 하시고, 온갖 말씀을 다 하셨습니다.

一乘  以外의 法門을 많이 하셨습니다. 그러면 그것은 어떻게 봐야할 것인가?

 

그것은 딴 것이 아니라 못 알아들으니까 對機應病式 方便으로 이런 말씀 저런 말씀을 하신 것이지 方便

으로 하는 말이 實說은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참으로 부처님 법문을 알려면 一乘法界의 消息을 알아야만

부처님의 뜻을 알 수 있는 것이지 그 외의 방편설로는 모릅니다. 방편설은 實際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석가모니부처님이 성도하시고서 '頓說華嚴'이라고, 처음 한꺼번에 [華嚴經]을 설해 버렸습니다. 화엄경

설해 놓으니까 귀가 막히고 눈이 멀어서 아무도 華嚴經을 보는 사람이 없고 듣는 사람도 없고 하니, 아무

알아듣지 못합니다. 모르는 것을 부처님 혼자 아무리 미래겁이 다하도록 말씀하신들 무슨 소용이 있겠

습니까 말씀하시나 안 하시나 중생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아무래도 이 사람들이 귀가 어둡고 눈이 어두워 이러하니, 차차 키워 가지고 귀도 조금 듣고 눈도 조금

밝게 가지고 一乘法門을 설해야 되겠다" 하고 물러섰습니다. '退說三乘'이라 물러서서 三乘法門을 설한

것입니다. 거기에서 여러 가지 잡동사니가 막 나옵니다. 이런저런 말도 나오고 유치원 아이를 보면 유치원

아이에 해당하法門을 하고, 초등학교 아이들을 보면 또 그에 해당하는 법문, 중학생, 고등학생, 대학생

등 이렇게 여러 가지 隨機說法을 합니다. 이것은 사람 보아 가면서 옷 해 입히는 方式입니다. 키 작은 사람

은 옷을 짧게 해서 입히고, 키가 큰 사람에게는  옷을 길게 해서 입히고 이런 方式입니다. 그러다 보니 八萬

四千 法門이 벌어진 것입니다. 衆生의 根機가 八萬四千으로 모두 다 各各 다르다 보니, 그렇게 소위 방편으

로 설한 것입니다. 八萬四千 法門 그것들은 全部 實說이 아닙니다.

 

처음에 一乘法門, 頓說華嚴 할 때 그 때에 모두가 一乘을 알아 버렸으면 눈깔사탕 따위의 방편은 필요 없는

아닙니까. 유치원 이야기, 초등학교, 중학교, 대학 이야기 모두 할 필요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못 알아들

으니까 할 수 없이 유치원부터 대학교에 이르기까지 팔만사천 법문이 모두 나온 것입니다.

 

그렇게 하다가 보니 어느 정도 根機가 커졌습니다. 석가모니부처님 法門을 알아들을 만큼 根機가 성숙한 것

입니다. 그래서 最後에 [法華經]과 [涅槃經]을 설한 것입니다. 이 두 경에서 그동안 方便으로 설한 緣由를

말한 것입니다. 그래서 最初에 [화엄경]을 설한 것이 一乘法門이고 最後에 또[법화경]을 설한 것이 一乘法

門인데, 화엄, 법화 중간에 40년 동안 설한 그것은 전부 다 方便說입니다. 거기에 가면 온갖 법문이 다 있습

니다. 온갖 것이 다 있는데 그것도 꼭 필요한 것입니다. 사람 키우기 위해서는 필요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一乘이란 것은 과연 어떤 것이냐, 이것도 생각해 봐야합니다. 一乘은 實法이니까

華嚴과 法華가 一乘을 代表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화엄, 법화는 어떤 진리에 서 있는가? 그 내용은 어떤

것인가?一乘 원교의 교리를 근본적으로 조직하여 집대성한 사람이 천태지자선사입니다. [법화경]에 대해

천태선사가 定義한 말씀이 있습니다. 원교라 함은 中道를 나타낸 것이니 兩邊을 막아 버렸다  일승원교란

것은 실지 그 내용이 中道인데 中道란 것은 양변을 여읜 것이라는 말입니다. 兩邊이란 有와 無, 是와 非,

善과 惡 등, 이분법적으로 분별하는 分別心이것이 전부 양변입니다. 상대세계에서는 모든 것이 전부 양변

으로 되어 있는데, 그 차별적 양변이란 것은  실법이 아닙니다.  그리고 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이 밝고 깨끗하면 양변을 雙으로 막고 정히 중도에 들면 二諦를 雙으로 비춘다. 말하자면 도를 자꾸

자꾸 많이 닦아 가지고 마음이 깨끗해졌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마음이 자연히 맑을 것 아닙니까 수도를

많이 해서 마음이 완전히 밝고 깨끗해져 버리면, 煩惱妄想이 하나도 없이 얼음알 같이 그렇게 깨끗해져

버리면, 그러면 양변을 여의는 것입니다. 그런 同時에 정히 中道에 들어갈 것 같으면 眞諦와 俗諦, 그것도

양변과 같은 것인데 2제를 쌍으로 비춘다는 말입니다.

 

앞에서는 마음이 밝아 가지고 확철히 도를 깨칠 것 같으면 쌍으로 이변을 막아 버린다. 이변을 초월한다고

했고, 그러면 그것이 중도에 들어간 것입니다. 중도에 들어가면 '2제를 쌍으로 비춘다'는 말은 眞俗이 서로

通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2제, 진과 속이 서로 합하고 선과 악이 서로 합합니다. 서로 융합한다는 말입니

다. 結局  差別的인 선악 유무의 二變을 완전히 超越하는 同時에 이것이 완전히 融合하는 것을 中道라 하며,

이것이 圓敎이고, 이것이 一乘이다 그 말입니다.

 

천태스님 말씀은 [법화경] 위주인데, [법화경]의 '諸法實相'이란 지금 여기 이순간 이 자리, '現實 이대로가

絶對'라는 말로, 이것은 그 原理가 어디에 있느냐 하면, 현실의 모든 차별적 양변을 완전히 떠나서 양변이

서로 융합한다는 말에 있습니다.

 

그러면 '遮'와 '照'라 하는 말, 양변을 超越한다와 양변이 서로 通한다, 라는 이것이 어떻게 다른가?

양변을 여읜다, 초월한다는 이 말은, 비유를 하자면 하늘에 구름이 잔뜩 끼어 있어 해가 안 보이지만 구름이

확 걷히면 해가 확연히 드러난다는 말과 같습니다. 양변을 초월한다는 말은 '구름이 걷힌다'는 말과 같습니다.

 

또 양변이 서로 通한다 하는 것은 '해가 드러났다' 이 말입니다. '구름이 걷혔다' 하면 으레 '해가 드러났다'는

말이 되는 것이고 '해가 드러났다'고 하면 '구름이 걷혔다'라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차'와 '조'가 둘이

아닙니다. 그래서 雙遮雙照, 雙으로 걷히고 雙으로 超越하고! 雙으로 비추고 雙으로 通하고!  雙으로 通한다

함은 超越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一乘圓敎, 中道란 모든 差別 分別을 超越하고 모든 分別 差別들이 圓融無

하여 서로 서로 融通自在한다. 이 말입니다. 이런 世上을 가리켜서 一乘圓敎라 합니다.

 

그리고 一眞法界란 이 세상 모든 것, 일체, 우주삼라만상이 다 平等하여 全部 眞如뿐입니다. 그렇게 되면

든 것이 融通自在해지는 것입니다. 이것을 無碍法界라 합니다. 유무, 시비, 선악, 생사, 거래, 장단, 고저,

주객, 음양, 시종, 미추등의 二分法的인 分離 分別 가림이 없고, 이래서 이 세상 모든 것이 無碍自在, 無碍

法界인 것입니다. 一眞法界 卽 無碍法界이고, 무애법계 즉 일진법계인데, 이것을 中道라 하고 이것을 一乘

圓敎라 합니다. 法華에서는 이렇게 설명했는데, 圓敎大宗이라고 하는 華嚴에서는 一乘을 어떻게 설명했는가,

그것을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華嚴이라고 하면 요새 강원에서 배우는 [화엄청량소]라는 것이 있는데, 청량스님이 여기에서 화엄종취에

대해 정확히 定義를 내리고 있습니다. 곧 비우며 막고 곧 막으며 비추니 쌍으로 비추며 쌍으로 막아서 둥글

게 밝아  一貫하면 이 宗聚에 契合한다. 즉 照而遮, 곧 비추면서 막는다, 結局 이 세상 모든 것이 融通自在

했다. 즉, 모든 것을 超越했다는 말입니다. 그런 同時에 卽遮而照니 모든 것이 融通自在한다는 말입니다.

즉, 모든 것을 超越할 때에 모든 것이 다 融通해 버리고, 모든 것이 다 融通할 때 모든 것이 다 超越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雙照雙遮, 雙遮雙照가 되지 않습니까. 雙으로 다 通하고 양변을 超越했다, 즉 양변이 서로

서로 融通하고 양변이 서로서로 超越한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되면 圓明一貫, 둥글게 밝다, 모든 것이 다

圓滿具足해진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일관할 것 같으면 계사종취, 화엄종취에 맞다 그 말입니다

 

華嚴經의 根本要旨는 어느 곳에 있느냐 하면 화엄종취라는 것은 다른 곳에 있는 것이 아니고 雙遮雙照에

있다. 그 말입니다. 쌍차쌍조를 확실히 바로 알면 이 화엄종취를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청량국사의 화엄

종취에 대한 정의입니다.

 

천태스님은 말씀하시기를 "中道란 雙遮雙照이니 이것을 바로 알면 中道인 同時에 一乘이고 圓敎이고 法華

道理다"라고 말씀하셨으며, 청량스님은 "華嚴이 圓敎인데 華嚴도 또한 딴 것이 아니라 雙遮雙照인데, 이

도리를 분명히 알 것 같으면 華嚴道理의 종취를 알 수 있다"고 말씀했습니다.

 

화엄에 대해 천태스님과 청량스님의 말씀이 다른 것은, 圓敎라는 것은 같은데 華嚴宗에서는 [法華經]을

大乘終敎라 해서 '最後의 敎理'이지 '圓滿圓敎'는 못 된다고 말씀하신 것이나, 그것은 서로서로 立場이

다르기 때문에 이리 표현하고 저리 표현한 것입니다. 이랬든 저랬든 간에 불교에서 가장 究竟인 最後

原理를 설한 經을 華嚴, 法華라 하는데, 이를 總稱하여 一乘圓敎라 합니다. 그러니 일승원교란 그 대표

적인 천태스님과 청량스님의 말씀과 정의에 의하면 雙遮雙照하는 中道에 서 있는 것이 즉 華嚴이요,

法華이다 이것입니다.

 

雙遮雙照를 理論的으로 들어가면 아주 어려운 것입니다. 兩邊을 完全히 超越하여 兩邊이 完全히 合해서

通한다고 그러면 華嚴의 四法界가 펼쳐집니다. 사법계는 '理法界, 事法界, 理事無碍法界, 事事無碍法界'를

말합니다 그런데, 四法界는 결국 이사무애법계, 사사무애법계를 말하려고 이법계, 사법계를 말한 것으로

이법계 중에 사법계가 있는 것이고, 사법계 중에 이법계가 있는 것이지, 이법계와 사법계가 따로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즉 이법계 사법계를 따로 세웠지만 각각 이법계 중에 사법계, 사법계 중에 이법계, 이렇게

하여 理事가 無碍입니다. 理事가 서로 거리낌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결국 宇宙森羅萬象萬物 어느 것

하나도 無碍法界 아님이 없습니다. 그리하여 온 宇宙의 모든 存在가 中道 아닌 것이 하나도 없고 絶對 아닌

것이 하나도 없다, 이렇게 結論이 내려집니다. 이것이 華嚴과 法華의 根本 理論입니다.  그러면 現實世上,

現象世界 이대로가 絶對로서, 내 말했듯이 極樂世界를 딴 데가서 求할 것 없고 天堂을 딴 데 가서 求할 것

이 없습니다. 실지 근본원리인 쌍차쌍조하는 중도의 도리를 확실히 깨쳐 버리면 지금 여기 있는 이대로

全切가 無碍自在, 無障碍法界인 것입니다.

 

그러면 앉은 자리 선 자리가 극락입니다. 근본요지는 어디 있나하면, 눈을 바로 떴나 못 떴나 이것입니다.

내가 항상 하는 소리이지만 해가 아무리 떠 있다고 해도 눈을 감고는 光明이 안 보입니다. 아무리 우리가

무애법계, 일승법계, 진여법계, 무장애법계에 살고 있지만 눈을 감고 앉아서 자꾸 "안 보인다, 안 보인다"

하면 그것 참딱한 노릇 아닙니까? 참으로 다행한 것은 우리가 눈을 떴든지 감았든지 간에 이 無障碍法界,

光明의 世界가 있는 것은 事實이고, 거기에 우리가 살고 있는 것이 事實이라는 점입니다. 아무리 눈을 감

고 엎어지고 자빠지고, 자빠지고 엎어지고 해도 自己가 눈을 떠서 光明을 못 본다 그뿐이지 이 光明의 世

界, 무애법계, 일진법계, 일승법계에 살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니 그 事實을 確信하고 노력하여

눈만 뜨면 모든 것이 다 解決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일진법계, 무애법계, 무장애법계 이외에 그와 모순되는말이 많이 있지만 그것은 전부 방편설입니다.

방편가설일 뿐 실설이 아닙니다. 그러니 어떻게 하든지 노력하여 실설을 따라 가야지 방편가설인 줄 알면서

그것을 따라갈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방편가설을 따라 간다면 그것은 좀 정신 없는 사람입니다.

그렇지만 아직 나이 어려서 아무것도 모르는 유치원 꼬마들에게 아무리 대학과정을 배우라고 해도 모르니

그것을 또 어떻게 해야합니까. 그러니 할 수 없이 유치원 과정부터 배우는 것입니다. 一乘이 실지로 根本法

根本法이지만 一乘을 위해서는 方便假說이 필요한 것입니다.

 

지금가지의 이야기를 綜合해 보면, 宇宙空間 中에 唯有一乘法이라 오직 一乘法뿐입니다. 本來 全切가

一乘法界이고, 본래 전체가 無碍法界이고, 본래 전체 이대로가 絶對의 世界입니다. 無二亦無三, 二乘도

없고 三乘도 없는데 그러면 왜 부처님은 여러 가지 말씀을 하셨는가? 그게 모두 方便說입니다. 설사

아무리 방편설을 설하였지만, 우리가 아무리 어둡다 어둡다 해대지만, 사람 個個人  全切가 光明世上

속을 벗어나서 살 수는 없습니다. 눈을 감았든가 떴든가 간에 눈을 감은 것과 뜬 것은 다르지만 光明

속에, 일진법계 속에, 무장애법계 속에 살고 있는 것만은 조금도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면 이것이 가장 究竟法이냐? 그건 아닙니다. 敎理的으로 볼때는 一乘法이 實, 三乘은 勸(방편)

이렇게 봅니다. 그러나 교리적으로 본다 해도 나중에 가서는 全切가 中道 아닌 것이 없습니다.

삼승도 중도 아닌 것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런 무애자재한 교리, 사법계라든지 제법실상이라든지 무애법계, 일승원교라 하는 것이 우리

불교의 究竟이냐? 그게 아닙니다. 敎外別傳인 禪이란 것이 있습니다. 一乘이니 하며 아무리 큰소리 해대

지만 이것은 말에만 그칠 뿐, 말! 말이지 實은 아닙니다. '敎'라 하는 것은 뭐라고 하든 '말'이지 '實'은

아닙니다. 아무리 一乘이 實法이라고 하지만 그것도 빨간 거짓말입니다.  一乘 이야기 아무리 해봤자

밥 이야기는 배 안 부릅니다. 아무 소용없습니다. 一乘 이것 가지고는 解脫 못 한다. 그 말입니다. 이것만

가지고서는! 밥은 실제 떠먹어야 됩니다. 그러니 오직 참으로 마음의 눈을 뜨려면 參禪을 해야 됩니다.

그것을 교외별전, 즉 선이라 하는 것입니다.

 

'교'라 하는 것은 부처님 말씀이고, '선'이라 하는 것은 부처님 마음을 전한 것인데, 말씀은 마음을 깨치기

위해 한 것이지 딴것 아닙니다. 요리 강의라는 것은 밥 잘 해 먹자는 것인데 밥 잘 해먹자는 것  이외에 뭐

있습니까, 요리강의를 천날만날 해도 배가 부르는가, 아무 소용 없습니다. 그러니 교외별전에서 볼 때는

일승 아니라 더한 일승이라도 이것 전부가 方便이고 전부 假說인 것입니다. 실제 아무 소용없는 것입니다.


진정스님 말씀이 있습니다.  다함이 없는 自性바다는 한 맛이나 그 한 맛마저 끊어져야 나의 선이다.

無盡性海 다함이 없는 自性의 바다, 自性의 바다 全切가 한맛이니, 一眞法界 無碍法界다 그 말입니다.

一味라하는 그것이 즉 無碍입니다. 어째서 一味가 無碍냐 하면, 이 宇宙 즉 世界는 差別로 되어 있습니다.

선과 악이 다르다 그 말입니다. 이것이 一味가 되려면, 한 맛이 되려면 서로 完全히 通해 버려야 됩니다.

안 通하면 한 맛이 안 됩니다. 결국 一味라 하는 것은 全部가 通하는 世界, 色과 空이 通하고 모든 것이

다 通해 있는 世界인 것입니다.


그러나 眞正한 眼目에서 볼 때는 一味相沈是我禪이라, 일미, 한맛이란 것, 무애, 모든 것이 통했다는 것,

中道니 뭐니 해대지만 사실에 있어 아무 소용이 없다. 그 말입니다. 실지와는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항상 하는 소리 아닙니까 "손가락을 가지고 달을 가리키면 달을 보지 손가락을 보지 말라"

一乘佛敎가 "實이다, 實이다!"라고 하는 것도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일 뿐이지 달은 아닙니다. 그러니

一乘 여기에만 얽매여서도 안 됩니다.

 

結局  華嚴이니 法華니 하는 것이 "실이다, 실이다" 하고 자꾸 주장을 하지만 內容에 있어서는 달을 가리

키는 손가락에 불과한 同時에 이것도 方便假說일 뿐입니다. 華嚴, 法華, 一乘圓敎가 다 方便假說인 줄을

分明히 알아야만 비로서 自己 마음을 깨치는 길로 들어갈 수 있는 것이지 "일승원교가 참으로 우리 불교

의 眞理다, 그것이 究竟이다, 最高다" 이렇게 할 것 같으면 실제에 있어서 우리가 항상 손가락에만 매달려

있지 달은 영원히 못 보고  만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시방세계가 전부 일승불교 이며 일승도리인데, 일승도리라 하는

것은 무애법계 卽 中道에 서있습니다. 中道란 不生不滅입니다. 또 양변을 여읜 것, 生滅이 完全히 通하는

無碍法界라는 말입니다. 이것을  '교'에서는 實이라 하여 구경법이라 하는데, 참으로 사실을 알고 보면

이것도 一種의 方便이고 假說이며,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지 달은 아니더란 말입니다. 그러니 화엄이고

법화고 일승이고 원교고 다 내버려야 된다 이 말입니다. 저 태평양 한복판에, 그리고 어떻게든 노력해서

손가락만 보지 말고 달을 봐야 되겠다 이것입니다. 예전에 늘상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부처님과 조사를 원수같이 보아야만 비로소 공부할 분이 있도다. 그러면 예전 조사 스님들의 어록은 모두

실인 것 같은 생각이 들겠지요, 물론 화엄, 법화와는 틀립니다. 그러나 나중에 참으로 바로 깨쳐 놓고 보면

조사스님의 어록도 사실에 있어서 '눈 속가시'다 그 말입니다. 그래서 참으로 超佛越祖, 부처도 초월하고

조사도 초월하는 이런 출격대장부가 되어야만 비로소 橫行天下하고 "내 말 한번 들어보라"고하든지 "내 말

듣지 말아라" 하든지 할 수 있는 것이지, 이 방편에 얽히고 저 방편에 얽히고 하여 이리 넘어지고 저리 넘어

지고 하면 永遠토록 살아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내가 또 이렇게 말하니, "허, 그러면 다 필요 없네, 그 뭐 화엄, 법화도 필요 없고 조사어록도 필요 없다고

하는데, 그러면 그런 것 다 뭐할 필요 있나, '이 뭣고!'만 하면서 앉아 있으면 안 되겠나!" 그야 물론 그렇

습니다. 그리 하면 그만이지만 그러나 아직 그리하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유치원에서 유치원 과정이 필요

하고 초등학교에서는 그 수준에 맞는 과정이 필요하듯이 모든 방편이 다 필요한 것입니다. 아직까지

유치원 자격밖에 안 되는 사람이 一超 直入如來地한다고 말만 그렇게 들었지 實際로는 그렇게 안 됩니다.

 

生覺을 해보십시오, 조그만 돌도 하나 못 드는 어린애가 큰 바위를 들려고 한다든지 태산을 짊어지고

가려고 하면 되겠습니까 안된다 이 말입니다. 이렇듯 자기 역량에 따라서 方便이 實이 되고 實도 方便이

되는 것이니, 우리가 모든 것에서 한 법에 국집해도 못쓰고 또 한 법이라도 함부로 버려도 안 됩니다.

사람 사람이 그 程度에 따라서, 境遇에 따라서 取할 것은 取하고 버릴 것은 버려야 합니다.  원 근본은

"부처도 초월하고 조사도 초월해서 불타와 조사 보기를 원수같이 보아야만 참으로 공부할 분이 있다"

이 말입니다. 이것이 근본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그때서야 참으로 크게 눈을 뜨고 殺佛殺祖 하는 그런

대출격장부가 될 것입니다.

 

이만큼 말했으면 무엇이다 하는 것, 그것에 대해 무엇을 取하고 어떻게 해야겠다는 것을 우리가 다 알 수

있게 되었을 것이니, 강원에서는 경 부지런히 익히고 선방에서는 화두 부지런히 해가지고 어떻게든 자기가

하는 공부를 하루바삐 빨리 성취하도록 노력합시다.

 

- 성철큰스님  1981년 음 11월 대중법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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