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에 대한 幻想' / 법륜스님
해솔 | 2015.12.05. 21:37 http://cafe.daum.net/yourhappyhouse/DyWe/2654
'깨달음에 대한 환상' / 법륜 스님
'깨달음이란 무엇일까?' '깨달음이란 어떤 것일까?' 모든 사람들이 참으로 궁금해 하는 물음일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깨달음이라는 것에 대한 일종의 幻想에 사로잡혀 있는듯 합니다. 깨달음이라는 것은
'이러해야 한다', '내가 알 수 없는 그 엄청난 무엇일 것이다' 라고 生覺하며 깨달음에 대한 그림, 幻想을
강화해 가고 있는 듯 합니다. 깨달음과 자기자신과의 사이를 너무 저 멀리 내다잡고 있는 生覺이 듭니다.
깨달음이란 그 어떤 特定한 根機를 지닌 사람들의 專有物이라는 生覺 말입니다. 그러다보니 많은 사람들
이 깨달음이 무엇인가에 대해 關心은 있지만 깨달음이 '내 문제'라고 生覺하고 있는 것 같지는 같습니다.
심지어 修行者라고 자부하는 이들마저도 '이번 生에는 福이나 짓고 그러다보면 다음 生 언젠가는 깨달을
날이 있겠지' 하고 멀찌감치 깨달음과 거리를 두고 있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法會 때 한번 質問을 던져 보았습니다. '成佛하는 것 卽, 깨닫는 것이 이번 生의 願이신 분' 하고
말입니다. 어느 정도 예상은 하였지만 이 정도로 안 계실 줄은 몰랐습니다. 많은 분들께서 입으로는
'成佛 하세요' '成佛 합시다' 하면서도 實은 成佛보다는 눈앞에 닥친 欲望의 充足에 더 큰 마음을 쓰
면서 살아갑니다. 性佛 즉, 깨달음은 나와 關係 있는 일이 아니라는 生覺 때문에 그렇습니다.
깨달음은 저 높은 곳 어디 特別한 딴 世上의 일 일거라는, 特別한 根機가 있는 사람들의 專有物일
것이라는 幻想 때문이겠지요. 10년 씩이나 넘게 長坐不臥하는 스님들이나, 수십 년 世俗에서 벗어나
깨달음을 추구하는 이들도 깨달음을 터득해서 얻지 못하는데 어떻게 내가 깨달음을 터득해서 얻을
수 있을까 하는 마음이 너무도 크게 깨달음을 가로막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法友님들, 生活修行者 道伴님들! 깨달음에 대한 幻想에서 이제 분연히 벗어나야 합니다.
깨달음은 바로 '지금 여기 이 순간 텅~빈 바탕 이 자리'에서 바로 '나'의 일이 되어야 합니다.
깨달음 그 自體는 幻想도 아니요, 神秘스러운 그 어떤 奧妙한 形相을 하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 마음속에서 想像하고 있는 그런 모습, 이미지, 그림은 깨달음이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깨달음을 그렇게 어렵게 멀리 있는 것으로 바라보고 있는 그 마음의 視線이 나를 깨달음에서
더욱 더 멀어지게 만드는 가장 큰 障碍物이라는 事實을 아셔야 합니다.
깨달음은 대단하고 엄청난 것일 것이며, 하늘과 땅이 열리고 온 宇宙가 開闢(개벽)을 하고 天地가
내 안으로 와락 들어와 안기게 될 것이라는 그런 抽象的이고 幻想的인 모습 이미지想像은 결코
깨달음이 아닙니다. 또한 깨닫게 되면 뭔가 대박이 나에게 터지는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깨달은 사람이 보는 世上은 깨닫지 못한 사람이 보는 世上과는 전혀 딴판으로 다른 世上
일 거라는 生覺은 그야말로 錯覺일 뿐이며 妄想 煩惱 生覺이라는 二分法으로 世上을 分離하고
分別하고 差別하는 마음 즉, 虛妄하고 헛된 分別心에 불과할 뿐입니다.
깨달음, 成佛, 道, 眞理, 본래마음, 本性, 佛性, 神性, 부처, 하나님이란 가장 단순하고, 가장 평범하고,
가장 우리와 가까운 것입니다. 그 어떤 엄청난 苦行과 努力과 集中을 통해서만 터득되고 얻어질 수
있는 것이 깨달음, 成佛이라면 깨달음 그 自體가 우리를 眞理에서 너무도 멀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父母未生前 本來面目 자리, 참나, 主人公, 깨달음, 成佛, 道, 法, 眞理, 本性, 본마음, 佛性, 神性, 부처,
하느님이란 저 멀리, 나 밖에 別天地의 世上으로 있는 것이 아닌 바로 내 마음 안에서 언제나 처럼
은은한 視線과 美笑로 우리의 內面을 지탱하고 있는 生命뿌리일 것입니다. 너무 가까이 있기에 오히려
볼 수 없고 찾을 수 없는 肉身의 눈이 外部의 다른 모든 事物을 볼 수 있지만 늘 함께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自身의 눈은 볼 수 없듯이 말입니다.
깨달음이란 지금 여기 이 순간 텅~빈 바탕 이 자리에 있는 그대로의 世上을 있는 그대로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 보고, 감촉을 느끼고, 대상을 생각하는 것 以外의 다른 것은 결코 아닐 터입니다. 바로
지금 여기 이 텅~빈 바탕 이 자리에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 보
고, 감촉을 느끼고, 대상을 생각해서 받아들이는 것에 다름이 아닙니다. 깨달음, 成佛은 지금 여기 이
순간 텅~빈 바탕 이 자리에 있는 그대로 보여지는 있는 그대로의 宇宙法界, 一切 모습을 '있는 그대
로' 볼 수 있는 (正見)' 즉, 固定觀念인 生覺의 틀, 偏見, 色眼鏡이 없는 그 正見이 곧 깨달음일 것입니다.
매우 평범하고 單純하면서도 가까운 것이 成佛이고 깨달음 입니다. 오히려 그렇게 가까이 항상 함께하
고 單純한 것이 깨달음, 成佛, 本來面目, 참나(眞我), 主人公, 본마음, 道, 法, 眞理, 本性, 佛性, 神性,
부처, 如來, 하나님, 神이었기에 人間들의 깨달음에 대한 抽象的 幻想的 固定觀念이 깨달음, 성불, 진리,
도, 본성, 본래면목, 본마음, 주인공, 법, 불성, 신성, 부처, 하나님, 신, 여래인 우리 자신으로부터 우리
스스로를 점점 멀어지게 했는지 모를 일입니다.
지금 여기 눈앞 이 순간 텅~빈 바탕 이 자리에 있는 그대로의 現實을 自身의 生覺이라는 잣대, 固定
觀念으로 재고 計算하고 分別해서 바라보는 사람이 어리석은 無明의 衆生이고, 있는 그대로의 現實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사람이 깨달아 밝은 智慧가 있는 사람일 터입니다.
깨달음! 지금 여기 이 순간 텅~빈 바탕 이 자리에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
그러나 이것은 말처럼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닐 터입니다. 자신을 돌이켜 봅시다. '나는 과연 지금 여기
이 순간 텅~빈 바탕 이 자리에 있는 그대로의 世上을 있는 그대로 보는 눈을 갖고 있는가!' 지금 여기
텅~빈 바탕 이 자리에 있는 그대로의 世上을 있는 그대로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 보고, 촉감을 느끼
고, 대상을 생각해서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어떤 分離 分別도 없이 온전히 許容해서 받아들일 수 있는가!'
하고 말입니다. 애석하게도 우리들의 마음의 視野는 제대로 그러지 못합니다.
天地法界는 宇宙法界는 항상 지금 여기 텅~빈 바탕 이 자리에 있는 그대로 언제나처럼 그렇게 如如하게
있건만 人間 마음의 視線은 온통 온갖가지 固定觀念과 업식(業識)으로 물들어 있기 때문에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못하고 숱한 偏見
과 色眼鏡을 낀 채로 '자기 잣대'로 삐뚤어지고 뒤틀린 世上을 보는 겁니다. 어느 한 對相, 境界를 바라봄
에도 언제나 자기 잣대 固定觀念만큼만 바라보고 자기 잣대 색안경 만큼만 보고 分別해서 判斷 해석합니다.
내 思考方式대로 바라보는 歪曲된 世上, 虛像, 幻想, 影像만이 내 앞에 있을 뿐입니다.
이를테면 수많은 사람이 똑같은 어느 한 사람을 바라봄에도 수백, 수천명이 바라보는 그 '한 사람'은 같지
않습니다. 사람은 如如한 있는 그대로의 모습의 똑같은 한 사람이건만 바라보는 視線은 사람 수대로 수백,
수천 가지가 되어 버립니다. 지금 이렇게 이 글을 쓰고 있는 글쓴이에 대해 지금 이 글을 읽고 계시는 분은
어느 한 분이라도 이 글을 쓰고 있는 사람을 똑같은 모습으로 認知하지 못합니다. 이 글을 읽고 계시는 분
모두는 '自己 生覺의 잣대만큼만의 글을 쓰고 있는 이'를 認識할 뿐인 겁니다. 이 말은 곧 지금 여기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있는 그대로의 글쓴이는 오직 하나이건만
그 사람을 바라보는 이들은 '있는 그대로의 글쓴이'를 千差萬別의 生覺의 잣대로 認識하는 겁니다.
이와같이 우리의 마음의 눈은 정견(正見)으로 있는 그대로의 世上을 있는 그대로 바라봄이 되지 못합니다.
온통 삶에서 自己가 쌓아 온 經驗만큼의 業識에 따라서 제 멋대로 世上을 바라봅니다. 온갖 分別心을 있는
그대로의 世上에 投影하여 對相을 바라봅니다. 과연 나는 이 世上을 分別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世上을
있는 그대로 正見으로 바라보고 있는가 하고 수행자는 언제나 스스로에게 反問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를
테면 어떤 사람을 처음 볼 때라도 생김새, 出身, 학벌, 사회적 지위, 가문, 재산, 출신지역 등과 상관 없이
처음 보는 그 사람을 있는 그대로 如如한 마음으로 대할 수 있는가 하는 등의 反問들 말입니다.
깨달은 사람의 마음의 눈으로 있는 그대로의 世上을 있는 그대로 보는 視線은 無分別, 無所有, 無所得,
無執着의 放下着하는 마음의 시선 즉, 어느 것 어디에도 걸림이 없는 偏見과 固定觀念이 없는 맑은 마음
의 視野입니다. 이런 正見의 맑은 마음의 視線은 곧 지금 여기 텅~빈 바탕 이 자리에 있는그대로의 世上
을 分別하지 않는 마음(無分別心)이며, 所有하고자 하지 않는 마음(無所有心)이며, 얻고자 하지 않는
마음(無所得心)이고, 그렇기에 어떤 것에도 執着하지 않는 맑은 마음(無執着心)입니다.
지금 여기 텅~빈 바탕 이 자리에 있는 그대로의 世上, 如如한 世上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分別하지
않으며, 내 것이다, 네 것이다 所有의 觀念을 짓지 않고, 我執 때문에 내 것으로 얻고자 하지 않습니다.
어디에도 걸림이 없고 어떤 執着도 없는 있는 그대로의 世上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無分別의 맑은
마음의 視野입니다.
그냥 그저 一切의 모든 對相 즉, 이 世上 모든 것은 결코 이름을 지을 수도 없고, 分別을 지을 수도 없고,
所有할 수도 없으며, 執着할 것도 없는 애써 말로 표현한다면 '그저 그런 것' 如如한 것일 뿐입니다.
崇山스님의 말씀처럼 이 世上 모든 것은 '오직 모를 뿐'인 것입니다.
이 世上 모든 것은 무엇이라고도 이름 지을 수 없고, 어떻게 하더라도 分別할 수 없는 것이기에
'이것이 무엇인가(이뭣고)',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인가 했을 때 앞뒤로 사방으로 마음이 꽉 막혀서,
아무 말도 꺼낼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話頭禪'입니다. 오직 '疑心'만이 남게 되는 겁니다.
지금 여기 텅~빈 바탕 이 자리에 있는 그대로의 世上을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이 이렇듯 간단한 것 같으
면서도 어려운 일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깨달음을 추구하는 생활수행자 밝은 도반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지금 여기 텅~빈 바탕 이 자리에 있는 그대로의 世上을 無分別, 無所有, 無所得, 無執着의 放下着 하는
맑고 밝은 正見의 마음으로 있는 그대로의 世上을 있는 그대로 보는 마음을 쓰는 演習을 계속해 나가는
일입니다. 그런 마음을 쓰는 연습은 바로 깨달음으로 가는 연습이며, 부처 마음이 되는 연습이 됩니다.
그러한 偏見 없는 있는 그대로의 世上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마음 쓰기 연습은 一切의 對相, 우주만물,
이 世上 모든 것을 對面할 때 무분별, 무소유, 무소득, 무집착의 방하착 마음으로 있는 그대로의 世上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공(空)의 실천이며, 방하착(放下着)하는 생활수행 실천이
되는 겁니다. 固定觀念과 偏見으로 가득찬 마음의 視線으로 歪曲된 世上을 바라보는 方式을 내려놓고
아무 分別 없이, 所有하려함 없이, 얻으려함 없이, 執着함 없이, 그래서 一切를 다 놓고 自由롭게 가는
放下着의 생활실천이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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