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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識), 분별심에 대한 이해

장백산-1 2016. 1. 7. 00:23

식(識), 분별심에 대한 이해

 

識蘊은 고정되고 불변하는 독립적인 실체가 있는 마음이 아닌, 虛妄한 分別心 分別意識일 뿐이다.

인간은 실체가 없는 이 허망한 분별심을 이용해서 이 세상 이 모든 것들을 分別하여 認識한다.

分別心이란 분리하고 나누어서 認識한다는 말인데, 내 안에는 識이라는 마음이 있고, 그 識의

認識  對相을 世界라고 나와 나누어서 認識하는 것이다. 이렇게 識의 對相이 되는 것을 名色이라

부른다. 이와 같이 識은 나와 세상을 나누어서 인식하고, 識의 일체 모든 대상들 즉, 名色을 서로

나누고 分別해서 意識한다.

 

스님들의 법문이나 불교 서적들을 살펴보다 보면 늘 많이 듣는 말이 ‘分別心을 버려라’,

‘알음알이를 놓아버려라’일 것이다. 이 分別心, 알음알이가 바로 識이다.

 

앞에서 識蘊은 無我라고 했다. 識은 固定된 實體가 아니라 因緣 따라 變化하는 것일 뿐이다.

인연 따라 변화하는 모든 존재를 有爲法이라고 한다. 卽, 분별심이나 알음알이를 버리라고 하는

이유는 분별심 알음알이 그것이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인연따라 변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말은 아무런 분별심이나 알음알이를 전혀 내지 말라는 말이 아니라, 그 분별하는 마음 알음

알이를 일으켜서 사용하되  분별심 그것이 실체인 줄 착각해서 집착하지 말라는 의미다.

 

어떤 사람을 보고 우리는 좋은 사람이라거나 나쁜 사람이라고 分別하여 意識한다. 어떤 음식을

보고도 몸에 좋은 음식이라거나 나쁜 음식이라고 分別한다. 날씨를 보고도 좋은 날씨 혹은 나쁜

날씨라고 分別한다. 사람들의 피부색깔을 보고 상대를 편견을 가진 채 分別하여 認識하기도 한다.

어느 대학을 나왔느냐에 따라 상대방을 分別하여 認識한다.

 

우리는 이러한 分別心을 ‘진짜 내 마음’이라고 여기면서, 내 안에 變함없이 存在하면서 活動하는

意識이라고 굳게 믿는다. 그 分別心에 고집하고 집착하는 것이다. 거기에서 모든 괴로움이 생긴다.

그 意識  分別心이 단지 因緣 따라 虛妄하고 無常하게 생겨나고 사라지는 헛된 고정된 실체가 없는

分別心  意識임을 알지 못하고 허망하고 공허한 그 分別心에 집착하는 것이다.

 

고정된 실체가 없는 그러한 虛妄한 分別心들은 실체적으로 옳다 그르다, 좋다 나쁘다 라고 고정된

실체가 아니지만, 우리는 그렇게 分別하여 認識하는 마음 의식 그것이 고정된 내 마음인 것으로

錯覺하는 것이다.

 

사람들을 좋거나 나쁜 사람이라는 分別心을 가지고 대하게 된다면,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기 때문에 나의 偏見어린 시선으로 상대방을 해석해서 보게 된다.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

해서 꺼려하고, 시비 걸고, 미워하던 사람이 훗날에 알고 보니 참으로 좋은 사람이었고, 나를 위해

큰 도움을 줄 사람이었을지 어찌 알겠는가.

 

만약 分別心이 없이 사람을 대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을 편견어린 시선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 사람의 외모, 경제력, 얼굴색, 학벌, 지위를 놓고 따지고

分別해서 認識하는 것이 아니라, 分別心을 놓아버리고 텅~빈 마음으로 있는 그대로의 존재로

바라봐 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識蘊이 無我인 줄을 아는 智慧로운 이의 세상을 보는 참된 認識일 것이다. 식온무아의

관점에서 본다면, 모든 分別心은 전부 空하여 실체적인 것이 아니다. 즉, 우리가 일으키는 알음알이,

分別心, 쉽게 말해 우리가 일으키는 모든 生覺들은 全部 分別心이고 識蘊의 作用인데, 이러한 生覺

,分別心은 전혀 實體的인 것이 아니다. 그렇기에 分別해서 世上을 바라보면 괴로울 수밖에 없다.

 

그저 지금 여기 있는 그대로 어떤 解釋도 없이, 分別도 없이 지금 여기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때만이 ‘五蘊皆空  度一切苦厄’이라는 말처럼 고통을 넘어서 깨달음에 이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