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아득한 성자>

장백산-1 2016. 2. 5. 01:38

<아득한 성자> / 조오현 스님

 

하루라는 오늘 오늘이라는 이 하루에/

뜨는 해도 다 보고 지는 해도  다 보았다고/

더 이상  더 볼 것 없다고/

알 까고 죽는 하루살이 떼.
죽을 때가 지났는데도 나는 살아있지만/

그 어느 날 그 하루도 산 것 같지 않고 보면/

천년을 산다고 해도 성자는 아득한/

하루살이 떼. 

오현 스님의 대표 작품으로  중·고교 교과서에도 수록돼
 無常하고 虛無한 人生이나 하루 잘 산 이가 主人公  강조

 

詩人은 詩로써 말하고 道人은 깨달음의 도력(道力)으로 평가한다. 구도자는 아침에 깨달음을

얻고 저녁에 죽어도 여한이 없다(朝聞道 夕死可矣). ‘아득한 聖者’는 오현(1932~ ) 스님의 대표

詩로 정지용 문학상 수상작이다. 중·고등학교 교과서에 수록된 작품이다. 작가 자신이 밝혔듯이

悟道誦이다. 그러나 기존의 오도송과는 그 형식이나 내용, 격조가 사뭇 다르다.

“하루라는 오늘 오늘이라는 이 하루”가 참으로 意味가 깊은 表現이다. 우리가 百년 千년을 사는

같지만 事實은 현재라고 이름하는 바로 지금 여기 이 자리 이 순간만을 살아가는 것일 뿐이다.

우리, 우주만물, 이 세상 이 모든 것들, 삶, 인생, 현실, 현상들은 오직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

라고하는 現在만을 사는 것일 뿐이다. 지나간 시간을 過去라는 이름으로, 아직 오지 않는 시간을

未來라는 이름으로 부를 뿐이지 우리, 우주만물, 이 세상 이 모든 것들, 삶, 인생, 현실, 현상들은

결코 過去나 未來를 경험할 수가 없다. 오직 바로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라는 現在, 오늘 지금

이 순간 찰나만을 살고 있을 뿐이다. 이 찰나가 連續的으로 이어져 無限한 時間인 劫이라는 無量

한 時間을 이루는 것이다(無量遠劫卽一念  一念卽是無量劫). 시간은 현재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 찰나의 연속일 뿐이다. 世上은 찰라도 쉬지 않고 變化하면서 흘러가기에 無常하다. 이 理致

를 깨달은 者가 석가모니부처이고, 이런 理致에 대해 아무 自覺도 없이 사는 者를 無知한 衆生이라

부른다.

이 세상 이 모든 것이 無常한 것임을 깨달은 사람은 오늘 現在 바로 지금 여기 이 자리 이 순간만이

내 인생, 삶, 세상, 현실, 우리들의 모든 時間이며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너무나 貴重하고 價値 있는

時間임을 아는 사람이다. 無常하고 虛無한 人生, 삶, 세상, 현실, 우리들, 우주만물이라지만 오늘

루, 지금 여기 이 자리 이 순간을 충실하게 잘 사는 사람이 眞正한 宇宙의 主人公이고 歷史의 創造

者인 것이다. 현재라는 지금 여기 이 자리 이 순간, 오늘 하루를 잘 살면 위대한 삶, 부처의 삶이다.

고작해야 百年도 못 살면서 千年을 살것 같은 欲望에  미쳐서 사는 삶이 어리석은 중생의 삶이다.

事實 本來 時間이라는 槪念은 固定된 實體가 없다. 다만 人間이 살고 있는 現象世界 卽, 事物들이

조금도 쉬지 않고 無常하게 變化할 뿐이다. 人間들의 意識은 事物이 變化하는 형태에 따라 時間

이라는 觀念을 만들어 놓고는 마치 그 時間을 基準으로 世上萬物이 變化해 가는 것으로 거꾸로

覺하고 있는 것이다.

凡夫도 천성(千聖)도 오직 지금 여기 現在 이 자리 이 순간만을 살다가 가는 하루살이 인생이다.

그러나 하루살이 삶이지만 하루살이는 자신이 되돌아가야 할 때를 알고 이 세상과 자신에 대한

執着을 놓아버리고 마지막 알을 까고 죽는다.  ‘알 까고 죽는 하루살이 떼’는 위대하다.

만약 알을 까지 않고 죽는다면 영원히 하루살이의 삶은 끝나 버린다. 알을 까고 죽기 때문에
하루

살이 삶은 永遠히 지속되는 것이다. 歷史의 계승자로서 주인공으로서의 역할이 가능해지는 것이

다. 알을 까는 일은 성스럽고 위대한 불사(佛事)다. 오늘 하루 현재 지금 여기 이 자리 이 순간을

아무런 후회 없이 어떤 미련도 없이 잘 살다가는 하루살이는 千年을 사는 聖者와 같다.

서포 김만중은 조선문학을 부르짖으며 “文學은 自身의 民族魂이 깃든 母國語로써 노래하라”고

하였다. 우리의 言語, 한글이 없었던 시대는 中國의 漢字를 빌어서 詩를 읊고 歷史를 기록했다.

‘아득한 聖者’는 이런 면에서 한국선시사(韓國禪詩史)에 새로운 詩 형식을 개척한 혁명이요, 하나의

돌파이다. 아무도 감히 시도할 수 없었던 새로운 경지의 禪詩 형식의 모형을 개척한 것이다.

앞으로 禪詩가 自身이 깨달은 世界를 일반인들이 잘 알 수 없는 漢詩 형식을 통해서 읊는 것보다

우리들의 마음 世界를 자유자재로 나타내기에 가장 쉬운 우리 글인 한글로 표현해야 할 것이다.

그러면 분명 한국 시단에 심오한 정신세계와 사유를 통해 얻은 깊은 사상과 절제된 언어로 빚은

좋은 시를 보태게 될 것이다.

김형중 동대부중 교감·문학박사 ,
 법보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