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불성(佛性)은 텅~빈 채로 살아있다 / 혜민 스님

장백산-1 2016. 2. 10. 18:05

불성(佛性)은 텅~빈 채로 살아있다  / 혜민 스님


불성(佛性)은 텅~빈 채로 살아있다. 즉, 아무것도 없이 텅~빈 바탕인 채로 살아있다. 그런데

아무것도 없이 텅~빈 空인 채로 살아있는 이것을 直接 經驗하지 않고 觀念으로, 生覺으로 理解

하려고 하면 마치 텅~빈 채로 살아있는 무언가가 따로 있다고 상(相)으로 세워놓고서  그 相을

執着하고 붙잡는다.  그래서 석가모니부처님의 根本 가르침인 無我思想과 정면으로 충돌한다고

錯覺한다. 


심지어는 있다, 살아있다는 말에 끄달려 힌두교의 범아론적 가르침과 뭐가 다르냐고 異議를 제기한다.

그래서 本來淸淨, 本來面目, 主人公, 眞我, 본래의 나, 진짜 나, 一乘, 一佛를 말하는 禪佛敎를 포함한

大乘佛敎 全切가 다 석가모니부처님 初期 根本 가르침에 맞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그게 아니다. 아무것도 없이 텅~빈 空인채로 살아있다는 말은 衆生들이 몸, 생각, 느낌 감정,

의지 의도 욕망, 分別하는 마음 分別하는 意識을 나라고 同一時하는 그 錯覺을 석가모니부처님께서

탁 쳐 내신 것이다. 五蘊은 고정불변하는 독립적인 실체로써 홀로 저기 어디에 따로 存在하는 것이

아니고  단지 緣起되어서 아주 잠시 잠깐 머물다 사라지는 것 즉,  五蘊은 스스로 永遠히 變化하지

않는 것이 아니고 또한 별도로 따로 存在하는 獨立的인 자성(自性)이 없다는 말씀이다.  실제로 중생

들이 나라고 여기고 執着하는 五蘊 卽, 몸, 느낌 감정, 생각, 의지 의도 욕망, 分別하는 마음 分別하는

意識의 觀點에서 보면 五蘊은 틀림없이 無自性이고 無我다.


정말로 그렇다. 그런데 五蘊이 無自性이고 無我인 事實을 깨닫고 난 後엔 어떻게 될까?  그 後의 일을

누군가가 진작에 소상히 일러 주었더라면 오랜 시간동안 허송세월 하지 않고 고생도 덜 했을텐데  하

는 아쉬움이 있다. 바로 나라고 錯覺하는 五蘊이 無自性이고 無我고 텅~빈 空이구나 라는 事實을 아무

것도 없이 텅~빈 空인채로 살아있는 무언가가 안다는 것이다. 五蘊인 내가 無自性 無我임으로 아무것

없는(空)인 줄로 알았는데, 無自性, 無我, 空 이것이 끝인줄 알았는데, 뭔가가 텅~빈 채로 살아서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 끝이 아니라는 사실을 안다는 것이다. 


이 事實이 가장 큰 神秘이다. 아무것도 없다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아는 그 무엇도 없어야 하지

않는가? 그런데, 분명 生覺이 完全히 끊어지고 난 後에도 무언가가 텅~빈 채로 살아서 그 텅~빈 가

데서도 五蘊인 나라고 하는 것이  無我, 無自性, 空이구나 라는 事實을 당장 지금 여기 이 순간 즉시

안다. 바로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가 텅~비어서 아무것도 없구나 라는 사실을 지금 당장 즉시 안다. 
그래서 아무것도 없이 텅~빈 채로 살아있는 것이 般若心經에서 말하듯 얻을 것이 아무것도 없는 고로

(이무소득고 以無所得故) 마음의 모든 고통에서 벗어난다는 사실을 안다. 


하지만 아무것도 없이 텅~빈 채로 살아있는 것이 以無所得故라는 사실을 안다는 것은 결코 槪念

이나 生覺을 굴려서 아는 것이 절대 아니다. 배고플때, 아! 배고프구나 하는 점을 生覺을 통하지

않고도 당장 바로 지금 이 순간 즉시 알수 있듯이, 그냥 아무것도 없이 텅~빈 채로 살아있는 뭔가

가 배고픈 事實을 당장 바로 지금 여기 이 순간에 안다. 그리고 “나”라고 同一視 했던 五蘊과 世上

이 둘 다 無自性 無我로 텅~비었다(空)이라는 事實을 당장 바로 지금 여기 이 순간에 안다. 그리고

五蘊인 나와 世上을 둘로 나눈 것은 오직 虛妄하고 허깨비 같은 고정된 실체가 없는 分別하는 生覺

이였을 뿐이라는 事實을 당장 바로 지금 여기 이 순간에 안다.


그런데 여기까지 오게 되면 아무것도 없이 텅~빈 채(空)로 살아서 아는 뭔가가 어디에 있는지 찾게

된다. 하지만 그 뭔가는 아무리 찾으려고 백방으로 노력을 해도 절대로 찾을 수가 없는 것이다. 왜냐

하면 아무것도 없이 텅~빈 채(空)로 살아서 모든 것을 아는 그 뭔가가 별도로  따로 고정불변하는 독

립적인 실체가 있는 어떤 모양이나 獨自性을 갖고 따로 별도로 어디에 존재하는 무엇이 아니고 바로

아무것도 없이 텅~빈 空인채로 살아있는  그 自體이기 때문이다. 


즉, 살아서 앎과 텅~빔(空)이 둘이 아니고, 아무것도 없이 텅~빔(空) 그 自體가 살아서 모든 것을

안다. 즉, 아무것도 없는 텅~빈 마음이 살아 있고 그 自體가 想像을 超越하는 全知全能한 知性, 앎

이다. 이 얼마나 신기하고 신비롭고 놀라운 사실인가?


이 根本的인 앎, 根本知, 살아있는 텅~빈 바탕마음은 虛空처럼 텅~비었기에 더럽혀질 수가 없다.
허공에 대고 아무리 똥칠을 해 봐야 결코 더럽혀 질수가 없는 것과 같다. 또한 根本知는 오고 감이

없다. 不生不滅이다. 不增不減이다. 또한 本來的인 이 앎은 몸안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사실 몸

과 밖이 따로 없이 宇宙空間 전체에 充滿해 있으면서 모든 것을 다 안다. 根本的인 앎의 관점에서

보면 내 어깨가 결린다는 사실을 아는 거나 새소리가 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거나 何等의 差異가

없다. 정말로 똑같은 오직 하나뿐인 本來的인 앎, 본래의 나, 진짜 나, 본성이 아는 것이다. 


즉, 나무를 보면 바로 그 根本的인 앎이 나무에도 있는 것이다. 산을 보면 그 本來的인 앎이 산에도

있는 것이다. 뒤집어 말하면 나무가 있다는 事實을, 산이 있다는 事實을 아는 그 마음이 바로 아무

것도 없이 텅~빈 채(空)으로 살아서 아는 앎, 根本的인 앎, 本來的인 앎, 全知全能한 앎 그 自體다.

그리고 그 아무것도 없이 텅~빈 채(空)으로 살아서 아는 앎(根本知, 空寂靈知)는 어느 한 곳에만

있지 않고  이 宇宙空間을 통털어서 없지 않은 곳이 없게 充滿해 있으며 안과 밖을 다 통해서 존재

한다. 天地가 그냥 아무것도 없이 텅~빈 채로 살아있고 그러기에 主와 客, 五蘊인 나와 이 世上을

로 나누지 않고 同時에 하나로 포섭한다.


여기까지 이 글을 읽고 나면 분명 어떤 사람은 또 生覺 觀念 머리로 理解해서 내게 따질 것이다.
석가모니부처님은 分明히 無自性 無我로 아무것도 없이 텅~비었다(空)이라고 하셨는데 어찌해서

뭔가가 있다 하냐고. 아무것도 없는 채로 텅~빈 채(空)으로 있는 것도 있는 거 아니냐고. 아니면

반대로 텅~빈 것이라는 말을 또 다른 相으로 세워놓고  그 相을 붙잡고 그 相을 人爲的으로 努力

해서 얻어야하는 어떤 對相, 目標物로 만들어 버린다. 


이와 같이 分別하는 生覺이나 觀念은 사실 둘 다 問題다. 이 世上을 恒常 分別하는 生覺 이나 觀念

속에 갇혀서 理解하는 意識水準에서 바라보면 이처럼 恒常  아무것도 없이 텅~빈 채(공)로 살아서

아는 마음(識, 앎)과 그 아무것도 없이 텅~빈 채로 살아서 아는 마음을 經驗하는 또 다른 뭔가가

따로 있다고 習慣的 自動的으로 無意識的으로 자꾸 이분화(二分化)해서 理解하려고 한다. 

 

그래서 아무것도 없이 텅~빈 채로 살아서  모든 것을 아는 마음을 生覺이나 觀念으로 “내”가 그것을

얻으려고 하거나, 아무것도 없이 텅~빈 채로 모든 것을 아는 마음을 體驗하고 나서도 生覺이나 觀念

으로 아직도 “내”가 남아 있다고 錯覺한다. 왜 이러한 質問이나 錯覺을 하는지는 충분히 이해가 된다. 


生覺이 完全히 끊어진 後, 意識이 새롭게 다시 활짝 깨어나 二分法的인 主와 客이 있다고 여기는 分別

하는 마음을 포섭하는 아무것도 없이 텅~빈 채로 살아서 모든 것을 아는 앎(識, 마음)을 제대로 經驗해

보지 못했기 때문에, 生覺으로, 相으로, 觀念으로만 그 本來的인 앎, 아무것도 없이 텅~빈 채로 살아서

아는 앎(마음,식), 本來의 나를 자꾸 붙잡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이 세상 이 모든 것들, 우리들, 우주만물, 삶, 현실, 인생, 현상세계가 無自性, 無我, 空임을 바로 아는

즉, 아무것도 없이 텅~빈 空인 채로 살아서 모든 것을 다 아는 앎, 根本知, 本來의 나는 없었던 것

이 새롭게 생겨나는 것 즉, 緣起해서 생겨난 어떤 것이 아니다. 緣起해서 일어난 앎이라고 하면 그 앎

도 變할수 있다는 앎인데 그 깨달음 卽, 아무것도 없이 텅~빈 空인 채로 살아서 모든 것을 다 아는 앎,

本來的인 앎, 全知全能한 知性, 本來의 나는 결코 永遠히 變하지 않는 不生不滅의 實在이다. 


마지막으로 한가지만 덧붙이자면 아무것도 없이 텅~빈 채로 살아서 모든 것을 다 아는 앎은 이 세상

그런 앎이 自己 혼자밖에 없다는 사실을 또 스스로 안다. 아무것도 없이 텅~빈 空인 채로 살아서

모든 것을 다 아는 마음(앎, 根本知, 本來의 앎, 본래의 나)가 깨어나 스스로의 존재를 認識한다. 이것

이 바로 修行의 엄청난 妙味이다. 


석가모니부처님께서 태어나자 마자 사방으로 일곱 걸음씩 걷고 나서 天上天下唯我獨存이라고 하신

理由가 바로 지금 여기 아무것도 없이 텅~빈 空인 채로 살아서 모든 것을 다 아는 앎, 根本知, 本來

의 앎, 본래의 내가 바로 天上天下唯我獨存이라는 사실에 있는 것이다. 天上天下唯我獨存인 그 앎,

아무것도 없이 텅~빈 無自性 無我 空인 채로 살아서 모든 것을 다 아는 그 마음(앎)은 석가모니부처

도 알수 없다는 道理가 바로 지금 여기 아무것도 없이 텅~빈 채로 살아서 모든 것을 다 아는 마음,

全知全能한 앎, 本來의 나에게 있는 것이다. 모든 부처가 자기들의 몸을 구중궁궐(九重宮闕)속에

숨겼다는 道理도 지금 여기 아무것도 없이 텅~빈 채로 살아서 모든 것을 다 아는 앎(마음), 本來의

앎, 本心, 全知全能한 마음 여기에 있는 것이다.


아무것도 없이 텅~빈 공인 채로 살아서 모든 것을 다 아는 앎(마음), 全知全能한 앎, 本來의 앎,

根本知, 根源的인 앎, 空寂靈知, 本來의 나 이 자리는 어느 누구에게도 절대로 내보여줄 수가 없

으므로 善知識이 시자에게 빗장문을 잠그라는 道理도 여기에 있다.

 

禪佛敎의 선(禪)자를 破字해 보면 왼쪽에 볼시(示) 와 오른쪽에 홀로단(單) 으로 이루어졌다.
즉, 禪은 혼자서 스스로를 볼 수밖에 없다는 단어이다. 欲界 色界 無色界 三界안에 아무것도

없이 텅~빈 채로 살아서 모든 것을 다 아는 마음(앎), 全知全能한 앎, 그 텅~빈 앎, 본래의 나

혼자만이 홀로 空間宇宙와 宇宙森羅萬象萬物 속에 가득히 充滿해 있다.

 

-혜민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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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無所見無分別  耳聽無聲絶是非  是非分別都放下  但看心佛自歸依

목무소견무분별  이청무성절시비  시비분별도방하  단간심불자귀의

 

눈이 있어도 보는 것이 없으면 분별함이 없고 귀가 있어도 듣는 소리가 없으면 시비함이 없다

시비 걸고 분별하는 마음을 모두 내려놓으니 다만 마음부처가 스스로 돌아와 있음을 관찰할 뿐이다

-부설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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