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지혜는 밝고 알음알이는 어둡다

장백산-1 2016. 7. 3. 17:14

禪僧은 옛 어록의 중독에서 벗어나야 ! " |법문집(法門集)

유당|2016.07.03. http://cafe.daum.net/yourhappyhouse/EblD/1298 


禪僧은 옛 語錄의 重毒에서 벗어나야 ! " 

 

선(禪)은 參禪을 오래하고 오래하지 않고를 가리지 않는다. 또한 스님 노릇 오래하고 오래하지 않고도 

가리지 않는다. 왜냐하면 禪, 法, 道, 佛, 心, 眞理, 깨달음, 本來面目, 본래의 나, 근원의 나, 진짜 나,

本性에는 먼저 했다거나 나중에 했다거나 하는 是非 分別 比較 判斷 分析 解釋하기를 좋아하고 즐기는 

生覺 妄想 煩惱 想念 意識 마음(心) 즉, 分別心 分別意識이 없기 때문이다

 

1.智慧는 밝고 알음알이(分別識, 分別心, 分別意識)은 어둡다.

 

“집 앞의 작은 길이 서울인 長安으로 뚫려있다.” 옛 사람 語錄에 있는 이 말은 理致의 길을 따라 理解

하기로는 내 집 앞 사립문을 벗어나  집 밖으로 나오면 이렇게 저렇게 서울인 長安으로 들어와 진다.라

는 말로 이해가 된다.    

 

어떤 法師가 이 어록을 들고 나와 法門하는 것을 본적이 있다. 그러나 이 어록을 처음 듣는 일반 사람들

게는 저 말이 法師가 깨달아서 들고 나온 말인가 책을 보고 옛 사람의 말을 옮겨 놓는 것인가 區別하

기가 매우 어렵고 어리등절 할 것이다.


 

"집 앞의 작은 길이 서울인 장안으로 뚫려있다"는 이 말은 옛 사람의 어록에 있는 말이다. 이 말은 事實

에 있어서 내 마음이 예수, 공자, 부처의 마음에 맞닿아있고  깨달은 모든 사람들의 마음에 맞닿아있고 

또 깨닫지 못한 사람들 마음에도 맞닿아있고 또 개미 병아리 닭 개 돼지 등 생명이 있는 곳에도 맞닿아

있다는 말이다. 그래야 서울인 장안으로 通하는 큰 길로 뚫려진 것 아니겠는가! 라는 말이다. 그러나 이 

말엔 두가 가지 意味가 있다. 하나는 깨닫는 이가 텅~빈 하늘을 본 뒤 텅~빈 하늘 아래 구름을 보고 하

는 말이요. 다른 하나는 깨달음이 없는 이가 구름속에서 푸른 하늘을 그림 그리듯 그려가지고 나오는 

말이다.

 

이 두 번째 사람도 理致를 따라 푸른 하늘을 구름 속에서 만들어 지어놓고 스스로 나만 알고 있다는 是非 

分別하기를 좋아하고 즐기는 生覺 망상 상념 의식 마음 즉, 분별심, 분별의식에 붙들린다. 그리고  그 허

한 분별심 분별의식을 애지중지한  것으로 알고  禪을 삼는다.  虛妄한 이 알음알이(識), 分別心, 分別

意識, 分別識이 禪門에서 가장 쉽게 생기는 病이다. 그러나 구름 속에서 벗어난 사람은 밝고 구름 속에 

있는 이는 어두우니 어쩌랴 !


알음알이(識), 분별심, 분별의식, 분별식을 따라 들어가는 길은 말은 같은 말로 나오지만 行이 나오지 못

하고 아는 것 즉, 알음알이(識)에 얽매임을 당해 스스로 밝지 못한 허물이 있다. 곧 큰 길을 막고 있다.


그러나 석가모니부처님은 그가 본 텅~빈 푸른 하늘은 모든 衆生 속에도 있다고 보고 나온 분이다. 다만 

衆生은 그 事實을 모르고 虛妄한 알음알이(識), 分別沈, 分別識, 分別意識, 幻想일 뿐인 輪廻 속에서 고통

을 받으며 살고 있다. 석가모니부처는 그런 어리석은 모든 衆生을 보고 그의 마음에 慈悲心이 일어난다. 

  

그러나 이 語錄을 들고 나와 說法을 하는 많은 방장이나 조실은 衆生 속에도 있는 텅~빈 푸른 하늘을 

소홀히 하고 그들만이 텅~비어서 뻥~뚫려있다고 보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 분은 慈悲心이 적고 智慧가 

밝지 못하다. 모든 聖人은 이 衆生 속에 있는 平等한 性稟 즉, 空性을 보고 나온 분들이다.

 

聖人은 살아있는 生命마다 그 속에 佛性, 神性, 本性, 空性, 法性, 眞理를 보지만 凡夫는 작은 法의 흔적만 

보고  執着하여 무엇으로도 결코 가려지지 않는 佛性을 만나지 못한다. 聖人은 사랑과 자비가 있지만 작

은 法에 執着한 사람의 지혜와 자비가 聖人의 그것과 같지 못함은 그러한 연유이다. 가려진 佛性이 밝게 

드러난 善知識은 마땅히 智慧와 福德 光明이 발산되어야 한다.

 

聖人의 눈에 뵌 絶對平等性은 지금 사람에게도 그대로 있다. 이 絶對平等性을 본 사람은 佛性을 본 사람

이다. 이런 善知識은 어리석은 衆生이 虛妄한 幻想일 뿐인 알음알이(識), 分別識, 分別心, 分別意識이라

는 輪廻의 苦痛 속에 있는 것을 보고 역시 그의 마음에 자비심이 일어난다. 이런 스승은 그의 삶이 항상 

새로워져 간다. 그리고 그와 가까이 있는 사람들의 마음이 먼저 便安해진다. 佛法이 그런 스승으로부터 

살아나기 때문이다. 석가世尊이 남긴 金剛經에 이같은 길을 밝게 보여주는 말이다. 삶이 항상 새로워진

다는 것은 인간의 마음이 깨달았다는 마음에도 머물지 않는다는 말이다. 인간의 마음이 깨달았다는 마

음에 머무는 대신에 八正道라는 實行으로 번져 나온다. 事實 깨달음이 없는 이 몸에서도 細胞가 계속 

자라고 變하고 있다. 숨을 들이 마시면 내쉬고 몸이 찰나 찰나를 固定 된 바 없이 變하고 있다. 이렇게 

몸은 變하고 있다.  마음 또한 變하고 있다.


사람은 이 變化하는 가운데 있다. 이 變化하는 中心이 東山水上이라는 話頭가 나온 當處이기도 하다. 마음

을 공부하다가 작은 知見이 나온다고 해서  ‘이것이네! 할 것이 없다는 말이다.  중생은 작은 知見에 머물

기를 아한다. 그러나 法, 진리, 불성, 본성, 본래면목, 진짜 나는 그런 작은 知見을 허락하지 않는다. 이 

허락하지 않는 것이 法의 性質 곧,“머물지 않고 마음을 낸다.”(應無所住 而生其心응무소주 이생기심)이라

는 말이다. 


그러나 중생은 전혀 오지않던 經驗때문에 그 작은 경험을 못 잊어 한다. 그리고 大法을 잊어버린다.  그것

이 어리석음이다.  그리고 스스로  그것이네!  하고 悟道頌을 짓고 요란하다. 그러나 그같은 虛妄한 幻想

인 작은 알음알이(識), 分別識 分別心 分別意識은 곧장 진정한 나를 가린 어둠이라는 사실을 똑바로 알아

야한다. 바른 경험은 사람 사람에게 뚫려 있는 것이다, 이같은 事實을 明確하게 아는 사람은 자랑 대신에 

겸허한 마음이 찾아들고 자비심과 지혜 복덕이 날마다 커지고 넓어진다.


金剛經은 중생들의 이같은 어둠을 밝혀 멈추게 하는 경전이다. 固定된 法이 없는 것(無有定法)이  아뇩다

라삼먁삼보리(無上正等正覺)이다. “이것이네 그것이네! 하면 그것은 옳은 法이 아니다. 라고 말하고 있다. 

이것이 석가모니世尊의  귀한 메시지이다. 金剛經은 나 안에 있는 佛性의 性質을 말하려고 나온 경전이다

. 佛性을 본 사람은 날마다 내가 먼저 새롭게 變化해 간다.  절로절로 저절로 풍요롭다. 그래서 法은 福德

과 智慧 光明을 다 갖추고 있다고 하는 것이다. 텅~텅~ 빈 곳엔 지키는 마음, 分別하는 마음, 執着하는 마

음이라곤 없다. 텅~텅~빈 곳에서 할 것은 다 한다. 하지만 그 하는 行爲 속에 머물지 않는다. 그러나 智慧

와 慈悲 光明 즉, 眞理, 法의 싹을 잃어버리는 알음알이(識), 분별식, 분별심, 분별의식인 허망한 幻想은 그

만 아는 法이 있다는 知見을 지어 世上을 分別해서 따로 본다. 그러나 생생하게 살아있는 法은 世上을 떠

나지 않고 삶속에서 나를 밝혀 준다. 

       

2. 北斗를 보려거든 얼굴을 南쪽으로 돌려라!  < 南面北斗>

 

 ‘남면북두(南面北斗)’라는 語錄은 원오극근선사가 남긴 말이다. 북두칠성을 보려면 얼굴을 南쪽으로 향

하라. 어떻게 얼굴을 남쪽으로 향해서 북쪽 하늘에 있는 북두칠성을 볼수 있을까 !  南面北斗....조사 스

님들의 말뜻은 그 방향을 모두 같이하고 있다. 지리산에서 평생 參禪만 해온 한 토굴 스님은 어느 看話禪 

法會에서 “남면북두’라는 이 公案을 들고나와 佛性은 空間이 없어서 南쪽에도 있고 北쪽에도 있다”라고 

그의 見解를 보인 적이 있다. 이런 見解 이건 눈에만 있고 마음에는 아직 맞닿지 못해서 원오의 본뜻을 지

나친 것이 되고 말았다. 언뜻 보기엔 그럴 듯한 見解지만 南面北斗라는 이 公案은 말 풀어 놓는 答을 기다

리는 것이 아니다. 화살이 과녁을 멀리 벗어나 있다. 납승의 눈이 못된다. 마음에 없는 말을 하고 나온 것

이다.  이런 맘 밖에서 내어다 보는 눈이 그의 佛性을 멀리하고 가려버리게 한다. 알음알이(識), 분별식, 

분별심, 분별의식이라는 허망한 幻想에서 오는 意理禪이 그것이다. 南面北斗라는 이 公案은  사람의 本性

을 보기 위하여 北斗를 들고 나온다. 人間의 本性은 내게 있지만 本性은 눈으로 볼 수 있는 性質의 것이 

못된다.


북두’ 가 북쪽에 있는데 얼굴은 남쪽을 향한다. ~ ? 보는 사람이 북쪽을 보고 있는 동안은 이미 그 눈이 

北斗라는 境界를 따르는 눈이 되어 버린다. 북두칠성을 쫒아서 보는 行爲가 그에게 있는 佛性을 덮어버

린다. 그러나 남쪽을 향하면 우선 경계인 “북쪽” 을 놓는다. 밖을 향하는 눈은 저절로 내 맘이 있는 안을 

향할 수밖에 없다. 내 안에 本性을 보게 한다. 廻光返照가 내 안에 本性을 보게 한다는 그 말이다. 밖을 

향하는 마음의 눈이 나에게 있는 本性이 있는 곳으로 향한다. 참작함이 온다. 그래서 參禪이다. 이 참작

하는 곳엔 造作이 없는 疑心만 있다.  이 疑心은 있지만 알 수 없는 것이다.몸을 의지해 앉고 서고 하는 

행동을 하고는 있지만 疑心으로 남아 있을 뿐! 다른 것이 없다.


그러면 몸을 통해서 몸이 아닌 本性에 내 눈이 간다. 몸을 지나 보는 것이 그치는 곳에 北斗를 대신하는 

말, 本性, 佛性, 지금 여기 이 순간 텅~빈 바탕 공간의식 하나 이 자리가 있다. 몸 아닌 것을 보는 다른 

말이다. 저 南面北斗라는 公案을 이렇게 接近하는 이는 마음공부에 든 사람이다. 그러면 저 사람은 北斗

를 보나 南쪽을 보나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러기 전에는 북두칠성을 보려거든 얼굴을 남쪽으로 향해야

한다. 照顧脚下 라는 말이 이 뜻을 대신한다.


照顧脚下라는 이 말을 더 日常으로 가져 와보면 남의 허물 보는 것을 돌이켜 내 허물을 본 것도 덤으로 

온다. 參禪은 이렇게 日常을 떠나 있지 않은 마음공부이다. 하나만 바로 하면  열 가지가 풀리는 것이 이 

禪공부다. 마음 본래의 성품 즉, 本性, 佛性, 神性, 性靈, 法性, 眞性, 본래마음, 本來面目, 眞理, 佛, 禪, 法, 

道, 진짜 나, 본래의 나라고 부르는 것은 내가 깨닫고 못 깨닫고 와는 전혀 관계없이 본래본시 나에게 존

재한다. 돌아봐 허물이 고쳐지면  누구나 이 自性인 마음 本來의 性品, 本城, 佛性에 이른다. 눈이 事物을 

따르는 것은 性稟을 등지는 길이다. 즉, 남쪽을 依持해서 남쪽 아닌 本性을 본다는 말이다.無자도 無에 

依持해서 조주 뜻을 즉, 本性을 안다는 말이고, 또 몸을 依持해 몸 아닌 本性을 본다, 번뇌 망상을 依持해 

번뇌 망상 아닌 本性을 본다는 말이다. 그렇게 하면 是非 分別 妄想 煩惱 마음 의식 생각이라는 알음알이

(識), 분별식, 분별심, 분별의식이라는 허망한 幻想이 저절로  떨어져 나간다.  시궁창에서 연꽃이 피어나

는 이치를 본다.  연꽃을 보고 있는 동안 시궁창은 안 뵈는 것과 같다. 아 ~ 연꽃! 연꽃이 없을 때는 시궁

창만 있다. 연꽃을 봐버리니 시궁창은 없고 아름다운 연꽃만 있다. 시궁창을 놓고 연꽃을 본다.


단지 虛妄한 幻想일 뿐인 시비 분별 비교 판단 해석 분석 망상 번뇌 분별심 분별의식 알음알이를 벗어

나는 方法도 시궁창을 놓고 연꽃만 보는 거와 같다. 시비 분별 비교 판단 해석 분석 망상 번뇌 분별심 

분별의식 알음알이(識)이 있는데 그것들을 놔두고 스스로 있는 성품, 自性, 本性, 佛性만을 봐버리니

 虛妄한 幻想인 시비 분별 비교 판단 해석 분석 망상 번뇌 분별심 분별의식 알음알이(識)에 관심이 없

어지는 것이다. 허망한 幻想인 시비 분별 비교 판단 해석 분석 망상 번뇌 분별심 분별의식 알음알이(識)

은 저절로 사라진다. 虛妄한 幻想인 시비 분별 비교 판단 분석 해석 하기를 좋아하고 즐기는 생각 망상 

번뇌 상념 의식 마음 즉, 분별심 분별의식 알음알이(識)을 억지로 없애려고 밀어내면 그럴수록 그것들

은 더욱 더 많이 생깁니다. 그런 속성이 虛妄한 幻想인 시비 분별 비교 판단 분석 해석 하기를 즐기고 

좋아하는 생각 망상 번뇌 상념 의식 마음 즉, 분별심, 분별의식, 알음알이(識)의 性質이다.

 

이 차이가 큰 길을 가른다. 어려움은 애써 하려는 노력을 그치는 일이다. 왜냐하면 그 노력이 번뇌를 

더욱 더 많이 하게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배우는 것이 아니다. 이런 法門을 듣고 잘못 익힌 習을 돌이

켜 그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 사람은 智慧가 있는 사람이다. 禪, 法, 道 佛 心 진리, 깨달음, 본래면목,

本性, 佛性,본래의 나, 근원의 나, 진짜 나, 바로 지금 여기 이순간 텅~빈 바탕 공간마음 하나 이 자리는 

參禪을 오래하고 또 많이 알고 스님 노릇 오래하고 안하고 하는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 왜냐하면 

本性에는 참선 많이 하는 것을 기억하고 또 먼저 한 사람 나중에 한 사람도 기억하는 법이 없기 때문입

니다. 석가와 중생이라는 分別도 없으니 말이다. 그냥 한번 봐버리면 옛 사람과 같은 경험을 하고 나온

다. 性稟, 本性, 佛性이 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마음공부는 그런 공부이다. 經驗이 오면 그 사람은 

虛妄한 幻想인 시비 분별하기를 좋아하고 즐기는 생각 망상 번뇌 의식 마음 즉, 분별심 분별의식 알음

알이(識) 속에서 그 생각 망상 상념 번뇌 의식 마음 즉, 분별심 분별의식 알음알이(識)에 마음이 없다는 

事實을 알고 나온다. 그렇기에 日常生活 속에서 불교공부, 마음공부를 한다.

 

이처럼 간단한 공부가 안 되는 것은 믿음의 방향을 모르고서 마음공부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方向이 

없는 공부는 내 맘에 相對를 짓는 習만 늘린다. 그 業習이 또 다른 境界를 만들고 시비 분별 비교 하기

를 즐기고 좋아하는 생각 망상 번뇌 상념 의식 마음 즉, 분별심 분별의식 알음알이(識)만 늘어난다. 시

비 분별 비교를 하면 남이 있고 나가 있고, 악과 선이 있고, 지옥과 천당이 있고, 俗人과 僧이 있고, 많

고 적음이 있기 마련이다. 이런 시비 분별 비교 하기를 좋아하고 즐기는 생각 망상 번뇌 잡념 의식 마음 

즉, 분별심 분별의식 알음알이(식)때문에 우월감 열등감이 생기고 斷見 常見에 떨어진 사람들이 많은 

것이다.


그러나 본성, 불성 하나를 통해 버리면 양변을 벗어난다.  물질을 다루는 것, 사람 대하는 것, 南面北斗,  

照顧 脚下, 無,  東山水上 그런 공안 화두가 깨끗하게 싹 한 곳에서 풀려버린다. 불교인이 보기에는 낯선 

다른 宗敎 聖經에서 까지도 禪, 法, 道, 진리, 佛, 본성, 불성, 신성, 본래면목, 진짜 나, 본래의 나의 智慧

를 품고 있는 구절을 본다. 베드로는 , 主여 ! 어디서든지 主를 따르겠습니다. 예수는 말한다. “너는 새벽 

닭 울기 전에 세 번 나를 등질 것이다”   닭 우는 소리는 깨달음이 나오는 곳이다. 그리고 세 번은 人間

게 있는 욕심내는 마음, 성 내는 마음, 어리석은 마음 즉, 三毒心 곧, 고린도전서에 보이는 “이익을 구

하지 않는 마음, 성내지 않는 마음, 지혜롭지 못한 마음” 을 말하고 있다. 이는 貪心(탐심) 嗔心(진심) 癡

心(치심) 三毒心이다. 이 三毒心이 일어 날 때마다  베드로는 자신도 모르게 예수를 등지고 있는 것이 

된다. 主는 三毒心이 없는 者이다. 三毒沈이 들면 저절로 眞理를 등진다. 베드로가 이 말 듣고 있을 때가 

저녁 시간인 듯하다. 새벽 닭 우는 시간 까지는 그렇게  먼 시간이 아닌 짧은 시간이다. 어떻게 잠든 속

에 있는 사람이 세 번이나 그를 만나며 또 배신하고 있겠는가!  그는 꿈속에서 잠만 쿨쿨 자고 있는 시간

일 것이다.

 

서쪽에서 온 禪家의 初祖 보리달마는 말한다. 석가世尊은 3말 6되의 우유를 마시고 成佛 했다는 비유

또한 그것이다. 이는 戒定慧 三學과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반야지혜인 六바라밀을  비유로 들고 

나온 것이다. 남면북두, ‘북두칠성을 보려면 얼굴을 남쪽으로 돌린다.’는 언구 또한 肉眼을 벗어난 

心眼에서 온 뜻을 품고 있다.


저 쪽에 밝은 불이 있다. 그 불을 보려고 그 반대쪽을 본다. 이것을 公案 話頭라고 한다. 보는 눈이 글자

에 붙어 있는 동안엔  일반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안가는 말이 공안 화두다. 북두칠성은 佛性, 본성, 

神性의 뜻을 품고 있는 말이다. 북두칠성, 본성, 불성, 신성, 본래면목, 본래의 나, 진짜 나를 보려고 하는 

자는 사람이다. 사람에게는 肉眼이 있고 心眼이 있다. 心眼에 智慧가 있다. 佛性을 보려는 자가 다른 쪽

을 봐야 하는 이유는 本性은 肉眼으로는 볼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에 육안으로 본성을 보면 곧 

그 사람 눈이 상하고 미혹에 합류하고 만다. 조주 無자 화두에 조주 無자는 불타는 덤불인데 그 가까이 

가면 얼굴이 타버린다가 그 말이다. 그리고 “佛, 佛이 不相見“ 부처는 부처를 보지 못한다. 가 또한 그 

말이다.


우리는 길을 가다가  가끔 工場에서 산소용접을 하는 것을 본다. 용접을 할 때 그 산소 불빛이 너무

밝아서그 불빛을 직접 보면 그 사람의 눈이 상해버린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눈을 보호하는 안경을 

착용한다. 안 그러면 불빛을 바로 보지 않고 얼굴을 반대쪽으로 돌리고 용접 일을 한다. 이 남면북두 

또한 이와 같다. 


佛性, 本性, 神性, 本來面目, 진짜 나, 본래의 나, 自性, 法性, 眞心, 眞性은 사람의 눈으로는 들여다 볼 

수가 없는 것이다. 佛性 있는 곳에 나라고 하는 것, 에고의식, 자아의식, 분별심, 분별의식이 맞닿으면 

나라고 하는 것, 에고의식이  화롯불에 눈 녹듯이 싹 깨끗하게 녹아서 사라져 버린다. 즉, 無我, 無分別

心, 無心이 된다. 그 때 나는 變하기 시작한다. 거듭난다. 내가 振理의 몸으로 돌아간다.  歸依佛이다. 

그래서 “南面北斗” 는 貴한 言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