三界唯心 萬法唯識 (삼계유심 만법유식 )
삼계(욕계, 색계, 무색계라는 이름의 이 세상)가 오직 마음일 뿐이고,
만법(萬法, 이 세상 모든 것)이 오직 의식일 뿐이다.
* 유식(唯識 vijnapti-matrata) ; 오직 마음, 오직 의식일 뿐
오늘 그대 앞에 일어나는 모든 일(모든 사람, 모든 사건, 모든 사고, 모든 상황)들은 그대 마음 속에서
이미 일어났었던 일들이다. 즉, 이미 그대가 알게 모르게 생각(生覺)을 했었거나 마음을 먹었던 일들이
오늘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 그대 앞에 꿈, 허깨비, 신기루, 물거품, 그림자, 이슬, 번개 같이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운명이란 것도, 그대 앞에 일어나는 모든 사건, 사고, 일, 사람, 상황, 환경도 그저 그냥 그대
생각 마음 의식이 펼쳐내는 환상(幻想), 환영(幻影), 망상(妄想), 허상(虛象)이라는 연극, 영화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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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에서 말하는 삼계(三界)란 욕계(欲界)와 색계(色界)와 무색계(無色界)를 뜻하지만 우주삼라만상과
천지만물 일체(一切)를 통틀어서 말할 때 흔히 쓴다. 욕계천(欲界天)이나 색계천(色界天)이나 무색계천
(無色界天)이라고 하는 말도 모두 마음(심心, 식識)이 만들었다는 뜻에서 욕계천 색계천 무색계천 삼게
(三界)를 가리켜 의성천(意成天)이라는 이름으로도 부른다.
이 세상 모든 존재(만법, 것, 현상), 우주삼라만상만물은 제각각 그 존재(存在)의 모습이 다르고, 성질(性質)
이 다르고, 지금 여기 처(處)해 있는 장소(場所)가 제각각 다르다고 해서 제각각의 고정된 다른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고, 오직 마음일 뿐이다. 마음의 다른 표현이 이 세상 모든 것들, 우주삼라만상만물이라는 말이다.
만법(萬法)이란 이 세상 모든 것들, 우주삼라만상만물, 일체 현상(존재)들로 현시(現示)되어 드러나 있는 이
세상 모든 것들이다. 사람이 움직이고 차가 굴러가고, 4계절의 순환이나 변화들도 모두가 마음, 의식의 작용
(作用)이고 활동(活動)일 뿐이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는 말, 즉 이 세상 모든 것, 만법(萬法), 우주삼라만상만물, 일체 현상(존재)도
삼계유심(三界唯心)이나 만법유식(萬法唯識)이라는 말과 같은 뜻이다. 이 세상 모든 것, 일체(一切)가 마음
(心, 識)에 의지해서 존재하고 작용하고 활동하고 있는 것이라는 말이다. 이것이 불교의 근본이며 기본이다.
불교의 가르침을 이해하려면 이 말을 깊이 새겨두어야 한다. 모든 경전(經典)이나 조사들의 어록(語錄)들이
전부 다 마음(心, 意, 識)의 이치(理致)를 말하고 있다. 불교의 모든 성인들은 다 이 마음의 이치를 깨달은
사람들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보고 듣고 냄새맡고 맛보고 촉감을 느끼고 마음으로 생각을 하면서 살아가는
일체의 삶, 모든 일상생활이 전부 다 마음일 뿐이다.
昨夜月滿樓 작야월만루 窓外蘆花秋 창외노화추
佛祖喪身命 불조상신명 流水過橋來 유수과교래
어젯밤 누각에 달빛 가득하고 창밖엔 갈대꽃 피니 가을이로다
부처와 조사들 몸의 수명을 마친 곳에 흐르는 물이 다리를 지나 오네
-현정선원 대우선사 오도송-
삼계(三界)는 유심(唯心)이요, 만법(萬法)이 유식(唯識)이다. 현정선원 大愚선사님 법문.
만법(萬法)이 유식(唯識)이라 함은 이 세상(世上)이 온통 생각, 마음, 의식(心, 意, 識)으로 이루어졌음을
가리켜 환하게 밝히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 하늘, 땅, 사람, 우주삼라만상만물, 이 세상 모든 것(존재, 현
상)이 몽땅 생각 마음 의식으로 빚어낸 <허망한 業의 그림자(업영, 業影)>일 뿐이라는 사실을 밝혀서,
사람들로 하여금 허망(虛妄)하고 헛된 바람(虛願), 욕망(欲望), 욕구(欲求), 충동, 의지, 의도에서 놓여나,
문득 한생각으로 이 세상(世上) 밖으로 벗어나서 다함없는 무생락(無生樂), 생겨남이 없는 즐거움을 누리
라는 겁니다. 무생락(無生樂) 이것이 바로 범부나 성인이나 다 한결같이 돌아가 귀착(歸着)할 본향(本鄕)
입니다.
한 생각, 한 마음이 인연(因緣) 따라 일어나는 게 다 허망(虛妄)해서, 앎(識, 알음알이)이 본래(本來) 스스로
아는 앎(識, 알음알이)이 없건만, 범부가 이 허망(虛妄)한 한 생각(生覺), 한 마음을 붙잡아서 나의 마음으로
삼음으로써 무명(無明)의 사단(事端)이 벌어지는 겁니다.
유식(唯識)의 매우 깊은 이치(理致)를 밝히고 보면, <생각하는 사람>도 <생각>도 <생각하는 행위>도 모
두가 생각(生覺) 마음(心) 의식(意識)으로 조작해 지어낸 텅~빈 실체가 없는 이름일 뿐인데, 일단 이것을
실체(實體)로 인식(誤認)하고 집착심(執着心)을 일으키면, 문득 생각으로 조작해 지어낸 허깨비, 환화(幻
化)로 된 이 <생각하는 사람>이 <생각하는 행위>로 <생각>을 지배(支配)하고 통제(統制)하려고 작심하
고는, 전혀 생각(生覺) 자기본위의 잣대로 분별해서 가까운 사이 먼 사이를 가리고 분별(分別)하면서, 취
(取)하고 버리고 하는 분별이라는 취사선택하는 허망한 행위를 쉬지 못하니, 이것이 바로 어리석은 범부
가 행하는 생각(生覺) 사고(思考)의 전형이 아니겠어요?
제 입으로 이 세상이 전부 꿈이라고 말 하면서도, 이 세상이라는 이 꿈 속에서 다시 좋은 꿈, 나쁜 꿈을
나누고 분별(分別) 구분하면서, 이쪽과 저쪽으로 분별해서 나누고 가르기를 그치지 못하니, 참 딱할 뿐
입니다. 지금 여기서 이렇게 묻고, 이렇게 대답하고 하는 일들 모두가 꿈속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인데,
어리석은 사람들이 이 세상이라는 이 꿈 속 상황(狀況)을 실제(實際)인 줄로 굳게 믿고 착각(錯覺)해서
이 세상이라는 이 꿈 속 상황에 집착심(執着心)을 일으킨다면 이것이 환상일 뿐인 바로 生과 死의 윤회
의 수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고, 설사 생사윤회의 늪에서 벗어난들 이 세상이라는 이 꿈속에서
어디로 갈 것이며, 생사윤회의 수렁에서 벗어나지 못한들 이 세상이라는 이 꿈속에서 무슨 일이 있겠
습니까.
이와 같이 이 세상 모든 것이 꿈, 허깨비, 신기루, 물거품, 그림자, 이슬, 번개 같은 것인 줄 확철하게
알아서 그것들에게 깊이 개입하지 않게 되면, 이 사람을 일러서 달관(達觀)한 사람, 견도(見道)한 사람,
견성(見性)한 사람, 즉 이 세상 모든 것의 본질, 근원, 근본성품을 터득한 사람이라 말하는 것이니, 모름
지기 보고 듣고 냄새맡고 맛보고 촉감을 느끼고 생각을 하는 가운데 문득 무심(無心), 무분별심(無分別心)
에 들어서 아무 분별(分別을 하지 않는다면 이것이 성인의 가르침의 요체(要諦)이니, 달리 두리번거릴
다른 일이 전혀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더욱 정진 하세요.
* * *
인연 따라 생겨났다가 사라지는 변화하는 일체 모든 것은 허망(虛妄)한 인연(因緣)이 화합(和合)해서 마치
꿈, 허깨비, 신기루, 물거품, 그림자, 이슬, 번개 처럼 이루어지는 헛것으로, 이 세상 모두가 실체성(實體性)
이 없는 텅~빈 헛것인데, 이 몸도 이 마음도 이 세상도 전부 다 실체성(實體性)이 없다는 말입니다. 이
<꿈, 허깨비, 신기루, 물거품, 그림자, 이슬, 번개 같은 형상>(환상 幻象)에 헷갈린 범부들이 눈앞에 드러난
꿈, 허깨비, 신기루, 물거품, 그림자, 이슬, 번개 같은 온갖 현상(現象)들을 실제 있는 것으로 오인(誤認)하여
분별(分別)하고 집착(執着)함으로써 이 세상의 모습(世間相)이 실제로 있는 것 처럼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이 생겨나면 이 세상 온갖 것이 생겨나고, 마음이 사라지면 이 세상 온갖 法것이 사라진다
(심생종종법생 심멸종종법멸, 心生種種法生 心滅種種法滅)」이라는 이 세상의 사실(事實)을 밝힘으로써,
곧 <만법(萬法)이 유식(唯識)일 뿐임>을 밝혀서 중생들로 하여금 어떤 실체(實體)도 없는 온갖 사물(事物)
에 집착하지 않게 하고자 하는 것이 석가모니 부처님 가르침의 요체(要諦)임을 알아야 합니다.
요컨대, 衆生이 本來 고정된 성품(性稟)이 없기 때문에,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고>(生老病死) 하는 일도
없는 것이고, 이 세간상(世間相)도 상주(常住)하여 <이루어지고 머물고 허물어지고 없어지고> (成住壞空)
하는 일이 없는 것이어서, 이 世上은 전혀 끊임없이 변화(變化)하는 그 모습과는 달리 항상(恒常)하기에 변
(變)하는 일이 전혀 없는데, 다만 미혹한 중생의 생각 의식 마음이 공연히 혼자서 헐떡이고 허둥대며 시끄
럽게 구는 것입니다.
이렇게 지독하게 허망한 꿈을 꾸어 온지가 너무나 오래 되어서, 막상 지금 이렇게 진실(眞實)을 펼쳐보여
주어도 좀처럼 믿지 못하는 범부의 업장(業障)이 무겁고 두꺼우니, 어찌 진리(眞理)에 뜻을 둔 사람이 이
엄청난 꿈에서 훌쩍 깨어나는 일에 게으름을 부릴 수 있겠습니까!!! 더욱 용맹정진하여, 이 몇십억년 묵은
망정(妄情)의 꿈, 환상을 떨쳐버리고, 참되고 여여(如如)한 <진리의 세계>을 마음껏 소요(逍遙)하며 참된
삶을 누리도록 하세요.
* * *
인연(因緣) 따라서 생겨나는 이 세상 모든 것은 <본래 자체의 성품>(자체성 自體性)이 없기 때문에 <다른
것(법法)> 인연(因緣)에 의지(依持)해서만 존재(存在)할 수 있게 되는 겁니다. 이런 사실(事實)이 연기(緣起)
의 이치(理致)입니다. 마치 빛의 그림자가 물체에 의지해서 생겨나고, 메아리가 소리라는 파동(波動)하는
에너지에 의지(依持)해서 생겨나듯이 말이에요. 만약 그림자나 메아리가 본래 그것 자체의 성품이 있는 것
(法)이라면 꼭 다른 것에 의지해야만 존재 할 까닭이 없지 않겠어요?
그러므로 마땅히 알아야 합니다. 우주만물의 인연(因緣)에 따라서 생겨나는 모든 法은 ―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우주만물의 인연(因緣)으로 말미암지 않고 생겨나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 자체의 성품이 없기에,
마치 꿈과 같고 환(幻)과 같아서, 전혀 진실(眞實)됨이 없는 건데, 다만 사람들이 그 겉모양에 헷갈려서 이
허망하고 무상(無常)한 형상(形相)을 실체(實體)로 오인하여 집착함으로써 이 세상모습이 마치 실유(實有)
인 양 '있는 것처럼 보이게 된 것입니다. ···
저 '알렉산더'나 '징기스칸'과 같은 영웅 호걸들이 이룩한 대제국(大帝國)이 지금 모두 어디로 갔습니까?
2,500여년 전에, '붓다'도 이 事實을 문득 깨닫고 깊이 사색(思索)해 보니, 새벽 별이 새벽 별이 아니고,
이 世上 이 모두 <있되 있음이 아니고, 없되 없음이 아닌> 묘(妙)한 존재 즉, 진공묘유(眞空妙有)라는
사실을 밝혀냈던 것이고,
20세기 들어서 일체 존재의 실상(實相)을 구명하던 과학자들도 오랜 연구 끝에, 일체 만유(萬有)의 구경
(究竟)의 질료(質料)인 양자(量子, quantum)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라>는 진실로 엄청난
놀라운 사실의 발견(發見)에 도달하게 된 겁니다.
요컨대, 인간들의 관찰의 대상인 이 世上 一切 萬物은, 人間들의 觀察 行爲와는 전혀 相關없이 저 바깥에
그것들 自體의 固有의 性稟을 가지고, 저마다의 길을 가면서, 獨立的인 기능을 하는, 그런 존재가 아니라,
사람들의 生覺 意識 마음에 依持해 만들어진, 다시 말해서, 인간들이 스스로의 업(業)으로 投映한 허망한
생각 마음 의식의 그림자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결국 삼계(三界)는 유심(唯心)이요, 만법
(萬法)은 유식(唯識)이고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겁니다.
* * *
본래 아무 일도 없는 <如如한 法>(如法) 가운데서 헛되이 생과 멸(生과 滅)을 분별해서 보고 가고 옴(去來)
를 분별(分別)해서 바라봄으로써 이 세상사(世上事)가 마치 꿈처럼 환(幻)처럼 중생의 마음 속에 投映된 것
입니다. 따라서 이 세상의 실상(實相)은 전혀 범부의 망령된 계교(計巧) 때문에 <있음>이 된 것이므로, 이
잘못된 망견(妄見)을 떼어주기 위한 方便으로 어쩔 수 없이 <공(空)한 도리>를 설하게 된 것인데, 사람들
은 이 方便의 空한 도리의 말씀을 잘못 알고는, 제법실상(諸法實相)의 뜻을 <있음>이라고 알면 잘못 아는
것이고, <공(空)했다>고 알면 바르게 아는 것이라는, 또 하나의 분별 망상 번뇌 망견(妄見)을 갖기에 이르
렀으니, 참 딱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제법실상(諸法實相)의 뜻은 空 · 有 양변(兩邊)이 모두 옳지 않으며, 이 <옳지 않다>는 말도 또한 군말일
뿐이지만 요컨대 <법의 본래법>(本法)은 法도 아니고 法 아님도 아니니, <여여>(如如)라고 해도, <여여가
아니라> (不如如)고 해도 다 맞지 않아서, 마치 두꺼운 철판 위에 올라앉은 모기처럼 도무지 주둥이를 댈
수가 없는 겁니다.
결국 여여<如如>라고 해도 벌써 변(變)해 버린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결정코 불생불멸(不生不滅) 법문
(法門)에 들어서, 진실로 면전엔 티끌 만한 한 법(法)도 없음을 사무친 사람은, 일체의 현전상(現前相)이
100% 생각 마음 의식만으로 망령되이 세워진 자신만의 허망한 환상임을 알게 되며, 이야말로 <만법이
유식임>(萬法唯識)을 말하는 근거인 겁니다.
그러기에 고인이 말하기를, 「석가모니부처님이 자신은 일찍이 한 마디 말도 설한 적이 없다는 事實을
알면 이를 일러서 다문제일(多聞第一)이라 한다」고 했던 게 아니겠어요? 결국 진정한 설법(說法)이란,
말함도 없고, <드러내 보일 것>(現示해 보일 것)도 없는 것이 <참된 설법>(眞說)임을 분명히 알아야
하며, 따라서 진정한 법보시(法布施)란 자신이 기왕에 보고 듣고 배워서 기억해 두었던 것을 남에게 말
해주는 게 아니라 ―그것은 세속의 강의나 강연입니다 ― 순전히 천진(天眞)한 자기 가슴에서 우러나오
는 한 생각 한 마음이 온누리를 껴잡는 말이라야 참된 설법임을 알아야 합니다. 거기에는 끝내 인간의
범용(凡庸)한 지견의 산물일 수밖에 없는 일체의 이치(理致)나 도리(道理)가 끼여들 여지가 없습니다.
요약하건대, 선지식(善知識)이란, 이 세상 모든 것이 범부가 미혹 때문에 스스로 지은 업영(業影)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자기 눈앞에 전개된 온갖 경계를 지나면서 이에 까닭 없이 막히고 걸리고 하면서
헐떡이는 것을 딱하게 여기고는, 어느 것 어디에고 걸리지 않는 선교(善巧)한 방편을 베풀어서, 붙은 것
은 떼어주고, 막힌 것은 뚫어주고 하는 것이 바로 선지식이 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일임을 알아야 합
니다. 결코 스스로는 흙탕물 속에 있으면서 협열(狹劣)한 소견으로 성지(聖旨)를 어둡히는 일이 있어선
안 됩니다.
* * *
천지 삼라만상이 온통 통틀어서 <나> 혼자 뿐이요, 달리 상대할만한 타(他)가 있을 수 없습니다. 온 세상
이 본래 <하나의 참된 법계>(일진법계 一眞法界)일 뿐인데, 어리석은 중생들이 연생(緣生)의 허망함을
알지 못하고, 생멸(生滅)도 왕래(往來)도 없는 가운데 분별하여 생멸을 보고 분별하여 왕래를 봄으로써,
이 세상이 마치 실제(實際)인 양 중생의 마음속에 자리하게 된 것입니다.
요컨대, 일여도(一如道) 가운데서 연생(緣生)이 무생(無生)임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눈앞엔 티끌 하나
없는 게 眞實임에도 불구하고, 이 법계(法界) 허공계(虛空界)가 하늘 땅 삼라만상으로 장엄(莊嚴)되기에
이르렀는데, ― 따라서 이 장엄이 장엄이 아니라, 다만 그 이름이 장엄인 겁니다 ― 사실은 이 世上 이 모
두가 꿈과 같고 환(幻)과 같아서 전혀 실(實)다운 法이 없는 것이며, 전혀 미혹(迷惑)한 衆生의 생각, 마음,
意識으로만 그린 그림으로 存在하는 것처럼 여기게 된 것이니,
그러기에 경에 이르기를, 「삼계(三界 : 欲界 色界 無色界)가 유심(唯心)이요, 만법(萬法)이 유식(唯識)
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肉身의 因緣 때문에 순전히 범부의 생각 마음 의식만으로 <있음>
이 된 일체의 지각활동(知覺活動 , 고苦· 락樂, 애愛· 증憎, 시是· 비非, 득得· 실失) 등의 분별은 그
모두가 허망(虛妄)하여 지각(知覺)에 卽하여 지각이 아닌 겁니다.
그러므로 고인이 이르기를, 「만약 마음 밖으로 지각활동을 좇으면서 分別을 일삼는다면 이 사람은 걸음
걸음 마다에서 귀신과 사귀게 되리라」고 말했던 게 아니겠어요?
結局 <이 몸과 이 마음과 이 세계(世界)>가 모두 고정불변하는 실체가 없는 허망한 꿈, 허깨비, 신기루,
물거품, 그림자, 이슬, 번개 임을 분명하게 보는 사람을 <달관(達觀)한 사람>이라 하고, 뭇 중생을 이와
같은 경지에 인도하는 것이야말로 부처의 대자대비심(大慈大悲心)이며, 부처의 일대기(一代記)의 요체
임을 알아야 합니다.
* * *
연생(緣生)하는 모든 法은 무생(無生)이요 무기(無起)인지라, 현전(現前)하는 一切 萬法은 그 모두가
<제각각의 자체 성품이 없어서>(無有自性), 꿈과 같고 환(幻)과 같음을 철저히 깨달아 살펴야 합니다.
눈앞엔 진실로 한 법도 실다운 법이 없는데, 사람들이 이 일여(一如)한 법계(法界) 가운데서 헛되이
온갖 형상(形相)을 取하여 그 이미지에 이름을 짓고 뜻을 한정(限定) 짓고 하여, 가로 세로로 엮어놓은
것이 바로 사람들이 사는 이 세상의 모습인 겁니다.
사람들은 이 꿈 같고 환(幻)과 같은 세상사(世上事)를 실유(實有)로 보기 때문에 이에 현혹(眩惑)되어서,
세상사 경계를 따라 바퀴 돌 듯 하면서 윤회(輪廻)하고, <생사의 바다>(生死海)에 빠져서 헤어나지 못
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 모든 것, 이 모든 현전상(現前相)이 몽땅 생각 의식 마음만으로 지어진 허망(虛妄)하고
고정된 실체가 없는 헛된 꿈, 환(幻)임을 분명히 보아서, 이른바 <만법이 유식인 도리>(萬法唯識)를 분명
하게 밝히면 이것이 바로 성인들 가르침의 요체(要諦)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기에 法華經에도 이르기를, 「시법주법위(是法住法位) 세간상(世間相)이 상주(常住)한다」고 했으니,
지금처럼 이렇게 울통불퉁하는 이대로인 채로 이 세상이 상주(常住), 즉 항상하여 변함이 없다는 사실을
철저히 밝혀서, 다시는 산하대지 삼라만상(山河大地 森羅萬象)에 미혹(迷惑)되는 일이 없으면 이 사람을
일러서 달관(達觀)한 사람이라 하고, <마음의 눈(心眼)>이 열린 사람이라 하는 겁니다.
* * *
<만법이 생겨남이 없는 도리(無生法印)>를 그만큼 되풀이해서 자세히 파헤쳐 보여줬는데도 아직도
그대들 눈앞에 事物이 있습니까? ― 모래 벌 법문에서 ― 지금 당장에 면전에서 치성하게 생멸(生滅)이
이어지는 동안에도 實際로는 전혀 티끌만큼도 生滅하는 조짐조차 없다는 사실을 거듭거듭 밝혀내지
않았습니까?
그러므로 <만법이 유식>(萬法唯識)이라는 말은, 지금 현재 면전에 전개되고 있는 온갖 법이 모두 순전
히 생각 마음 意識만으로 헛되이 지어진 꿈, 환(幻)이므로, 모름지기 고정된 實體가 없는 헛것에 집착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무시이래(無始以來)로 진실로 티끌하나 없기 때문에(本來無一物) "본래 아무것도 없다"고 말하는 것이니,
따라서 '있다' '없다' 분별하는 말들이 다 쓸데없는 군말인 거예요. 결국 지금 면전에서 또렷또렷한 事物을
보는 것은 영락없는 '청맹과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서, 지금 당장, 보고 듣는 가운데 반연(攀緣)하고
분별(分別)하고 집착(執着)하는 짓을 그만둘 수만 있으면, ― 순전히 그것만으로 ― 머지 않아 마음의 하늘
에 <지혜의 태양>이 우뚝 솟아날 것입니다. 다시 별다른 수승한 재능이 있는 게 아니니, 명심하세요.
* * *
안에서 일어나는 마음도, 저 바깥에 있는 듯이 보이는 모든 경계도 모두가 꿈속의 꿈처럼 실다움이
없는 환상 환영임을 거듭거듭 분명히 사무쳐야 합니다. 인연 따라 생겨나는 온갖 법은 무생(無生)이라,
자체성(自體性), 실체성(實體性)이 없어서, 꿈과 같고 환(幻)과 같다는 사실을 철저히 사무쳐서, 이
세상 모두가 <망령된 범정>(妄情)으로 '있음'이 되었음을 안다면, 곧 <만법이 유식>(萬法唯識)임을
깨친다면, 지금 면전의 모든 法은 일거에 얼음이 녹아내리듯 하여 더는 그 마음을 얽매는 일이 영원히
없을 것입니다.
<꿈, 환(幻)과 같은 경계에 억눌려서 꼼짝 못하는 것>도 <꿈, 환(幻)과 같은 만법(萬法) 밖으로 훤칠하게
벗어나서 걸림이 없는 것>도 모두가 꿈속에서 일어나는 일과 조금도 다름이 없다면, 도무지 <이것>과
<저것>을 바꿔치기 할 일이 무엇이 있겠으며, 모든 일이 뜻대로 되건, 뜻대로 되지 않건 걱정할 일이 무
엇이 있겠어요?
여몽삼매(如夢三昧)란, 그것이 <존재>이건, <일어나는 일>이건 막론하고 그 모두가 꿈, 환(幻)임을 철저
히 꿰뚫어 본다면, 세상만사(世上萬事)가 <지금 여기 있는 이대로 아무 일도 없는 것>이므로 그 마음이
저절로 고요하여져서, 이것이 곧 삼매(三昧)가 아니겠어요?
그러므로 누군가가 말하기를, 「'여몽삼매'가 잘 안 된다」고 말한다면 이야말로 '난센스'가 아니고
무엇이겠어요? <잘 되어도> <잘 되지 않아도>, 또 <고요한 마음이 되어도> <고요한 마음이 되지 않
아도> 그 모두가 꿈, 환(幻)인데 세상만사가 어떻게 되던지 무슨 걱정이 있겠어요?
그러기에 고인이 이르기를, 「 세상만사가 꿈이요, 환(幻)인 줄 알았으면 그것이 곧 여읨(離)이요, 다시
별다른 방편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했던 겁니다. 그러므로 입으로만 해탈할 것이 아니라, 지금 이
대로의 세간상(世間相, 세상 모습)이 꿈이요 환(幻)임을 철저히 사무쳐서, 일거(一擧)에 만법 밖으로
벗어나 동서남북으로 마음껏 소요(逍遙)한들 무슨 거리낌이 있겠어요?
* * *
경에 이르기를, 『 불법은 '마음'으로써 종(宗)을 삼고, 문(門)이 없음으로써 법문(法門)을 삼는다.』
고 했습니다. 이 말의 요체(要諦)는 <이 세상은 마음뿐인(唯心) 도리>를 가장 간결하게 표현한 말이라고
할 수 있겠어요.
잘 모르겠거든 <꿈속의 일>을 생각해 보세요. 꿈속에 나타나는 모든 것은, 그것이 생각이 있는 것이건
생각이 없는 것이건 간에 꿈속에 나타나는 모든 것은 마음(心性)이 변(變)해서 나타난 것임이 분명한데,
그런데 꿈을 꿀 때엔 이것들이 모두 마음 밖에 ― 마음과는 별개의 존재로 ―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습니까?
결국 <나> 까지 포함한 산하대지(山河大地) 삼라만상(森羅萬象)이 모두 마음이 변해서 나타나 보이는,
마음의 변현(變現)이라는 事實을 깨닫는 것이 <성스러운 가르침>(聖敎)의 근본이며, <마음>이 萬法의
根本임을 깨닫는 것, 즉 <유심의 도리>(唯心之理)를 일러서 최상승법문(最上乘法門)이라고 하는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있는 이유입니다.
마음의 성품, 심성(心性)은 항상하여 사라짐이 없음, 즉 상주불멸(常住不滅)하여 한치도 변(變)함이 없는
데, ― <바다물>은 움직이지 않는데 인연(因緣)을 따르면서 종일 출렁거리는 파도의 모습을 보이듯이 ―
마음이 바깥 경계를 따르면서 종일 망령된 생각, 망상(妄想)을 일으키니, 사람들이 움직임 없는 심성
(心性)을 밝히지 못했기 때문에 이 생각생각이 나(生)되 <남이 없음>(無生)의 이치를 좀처럼 깨치지
못하는 겁니다.
「마음이 나면 갖가지 법이 나고, 마음이 멸하면 갖가지 법이 멸한다(심생종종법생 심명종종법멸)」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만법이 유식>(萬法唯識)임을 철저히 밝혀서 모름지기 온갖 法에 執着하지 않아야
합니다. ― 알건 모르건, 믿건 믿지 않건, 깨닫건 깨닫지 못했건 막론하고, <마음의 성품, 心性>은 결코
늘고 주는 일이 없음을 깨달아서 홀연히 만법 밖으로 벗어나면 이 사람을 일러서 달관(達觀)한 사람이라
하고, 득도(得道)한 사람이라 하는 겁니다.
「마음이 그대로 부처요, 마음밖엔 진실로 한 법도 없음을 알아야 한다」고 했으니, 본래 스스로
온전해서 전혀 보태고 덜고 할 일이 없는 <마음>을 공연히 들볶아서, 마음 밖으로 헛되이 마음을
구하여 내닫는 마음을 지금 당장 쉬기만 한다면 어찌 다시 성불하지 못할까를 걱정하겠습니까?
* * *
이 세계는 본래 <지금 있는 이대로>가 참되고 如如하고 淸淨하여서 본래 아무 일도 없는 게 실상
(實相)입니다. 제자가 스승에게 묻습니다. 「 이 세상은 본래 청정본연(淸淨本然) 하거늘, 어찌하여
이다지도 시끄럽고 어지럽게 되었습니까?」 하니,
스승이 대답하기를, ··· 「'마음'이 있기 때문이니라.」 했습니다.
「 '만법이 유식'(萬法唯識)이니, 곧 일체만법이 다만 妄靈된 意識의 分別로 헛되이 지어진 것이므로
모름지기 執着하지 말라.」고 한 것이 성교(聖敎)의 근본이건만, 지혜가 없고, 업의 뿌리가 깊은 범부
가 이 수없이 반복되는 경책(警責)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 순간에도 여전히 시끄럽고 고달픈 이 세간상
(世間相)을 실체(實體)로 오인하고 집착하여 벗어날 줄 모르니 참 딱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인연으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모든 것은 덧없고 실답지 않아서 볼만한 것이 본래 없으며, 인연으로
말미암지 않는 것은 무위(無爲)이므로 본래 보는 것이 아니니, 결국 이 세상사는 진·속(眞俗) 미·오
(迷悟) 범·성(凡聖)을 가릴 것 없이, 그 모든 이름과 모습(名과 相)이 몽땅 텅~빈 이름뿐임을 철저히
사무쳐서,
안으로 원하고 구하는 마음이 없고, 밖으로 상대할 경계가 없으니, 허공처럼 텅 트인 법계(法界)에
다시 무슨 일이 있겠어요?
모름지기 지각작용(知覺作用)을 좇으면서 면전의 또렷또렷한 형상을 반연(攀緣)하고 分別하는 짓
을 당장 그만두고, 문득 회심(廻心)하여 나의 심성(心性)이 상주(常住)함을 보면 그것이 바로 <여여
한 본래 부처>(眞佛如如)이니, 다시 더 무엇을 찾고 구하고 하겠어요? 더욱 분발해야 합니다.
* * *
<부처님의 가르침>(聖敎)은 '마음'으로써 근본을 삼고, 문(門)이 없음으로써 법문(法門)을 삼는다고
했습니다. 이 말의 요점은 ― 세상에서 보통 알고 있듯이― 이 몸과 마음을 수고롭게 해서, 그 보람으로
훗날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이 전혀 잘못된 생각을 털어 내기 위한 것인데, 어찌 보면 이 말은
여시아문(如是我聞)으로 시작되는 팔만사천 법문을 통틀어, 가장 중요한 말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왜냐하면, 매사에 첫걸음을 잘못 내디디면 갈수록 점점 근본에서 멀어질 터이니, 이야말로 큰 일이
아니겠어요? 그런데 놀랍게도 대부분의 불자(佛子)들이 이 대목에서 길을 잘못 들고 있는 게 현실
이니, 참 딱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요컨대, 「'마음'이 바로 '부처'요, 마음 밖에 따로 부처가 없으니, 모름지기 밖으로 내달으면서 '부처'
를 찾지 말라」고 한 말의 참뜻을 요약하면, 「마음이 있는 생령(生靈)은 다 지금 있는 이대로 '부처'
아님이 없다」는 뜻이며,
또한 이 '마음'이라는 것도 다만 <모든 것을 환히 아는, '앎의 성품'>이니, 예컨대, 물을 마셨을 때에
'차다'고 알고 '뜨겁다'고 아는, 바로 그 마음이 '부처'인 겁니다. 그런 성품을 새삼스럽게 배워서 얻
어야 하겠어요?
이것이 바로 누구에게나 본래 구족하게 갖추어져 있는 <신령스런 깨달음의 성품>(영각성靈覺性)이며,
이 영각성을 '깨달음'이라고도 하고, 도(道)라고도 하며, '부처'라고도 하는데, 영각성 여기엔 본래 이름
이 없는 겁니다.
'부처'란 '마음'을 밝히고 근본성품을 보아서 모든 일을 끝낸 사람을 말하는 것이니, 왜냐 하면,
「마음이 나면 온갖 법이 나고, 마음이 멸하면 온갖 법이 멸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모든 세상사는 마음이 억지로 分別해서 지어낸 것임을 알아서, 이 세상만사에 집착하지 말라는
게 바로 <만법이 유식>(萬法唯識)이라는 가르침의 참 뜻인 겁니다. 세상만사가 모두 「그대가 그렇
다고 하면 그렇고, 그렇지 않다고 하면 그렇지 않은데, 그대들은 어째서 그리도 걱정이 많은가?」
라고 한 고인이 말도 이 뜻을 밝힌 것이며,
나아가 「만법은 그대가 있다고 하면 있고, 없다고 하면 없느니라」고 했으니, 있고 없는 것까지도
그대의 한 찰나 한 생각에 달렸다면, 신통묘용(神通妙用)이 이에서 더할 게 어디 있겠어요?
이렇게 무한량한 마음을 너무 옹색하게 만든 건 전혀 중생의 미혹(迷惑) 때문입니다. 모름지기 불법은
학습이 아님을 명심하세요.
* * *
「의미가 있다」고 하건, 「의미가 없다」고 하건 이와 같은 분별은 나의 소견(所見)일 뿐입니다.
사람은 事物을 直接 볼 수가 없고, 記憶의 形態로 저장되어 있던 과거의 체험속에서 눈앞의 사물과
비슷한 기억을 찾아내서는, 그 기억을 보는 겁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 눈 먼 소경이 코끼리를 만지는 우화가 있지 않습니까? 코끼리의 배를 만지작
거리던 소경은 한참 더듬던 끝에 <바람벽 같다>고 하고, 다리를 만지던 소경은<둥근 기둥 같다>고
하거든요. 이 때, 그들이 본 것은 코끼리 자체가 아니라, 과거에 이미 체험했던 기억의 파편들 중에서
비슷한 기억을 찾아내어, 그 기억을 보고는 말하고 있는 거예요.
불법의 유식론(唯識論)에서는 이것을 상분(相分)이라고 해서, 봄(見)에 대한 사람들의 착각을 바로
잡고 있습니다. 따라서 사람들의 모든 소견(所見)은 자기의 업식(業識)으로 투영(投影)한 <업의 그
림자> (業影)를 보고 있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기에 옛 성현들이 이르기를, 「<참된 봄>(진견 眞見)은 봄이 없고, <참된 들음>(진문 眞聞)은
들음이 없다」고 했던 겁니다. 그러므로 참된 수행자라면, 보고 듣고 하는 가운데서 생겨난 헛된 지견
(知見)에 얽매여서 <청정한 제 성품>(淸淨自性)을 어둡히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 * *
만법이 유식일 뿐입니다.(萬法唯識) 즉 일체삼라만상이 다 중생의 한 찰나 한 생각에 매어있다는 말이에요.
잘 모르겠거든 <꿈> 생각을 해 보세요. 꿈속의 모든 게, 유정(생각이 있는 것)이건 무정(생각이 없는 것)이
건 다 마음이 변해서 나타나는 게 아니겠어요?
그런데 사람들이 꿈을 꾸고 있는 동안에는 그것이 제 마음이 변해서 투영(投影)하는 그림자임을 알아차
리지 못하고, 꿈속에서 일어나는 일이 실제(實際)인 줄 착각하기 때문에 집착을 하게되는 거죠.
이 세상도 꿈과 마찬가지 에요. 이 세상이 몽땅 중생의 업식(業識)으로 말미암아 중생의 마음 속에 투영
(投影)된 허망한 신(행동) 구(말) 의(생각 마음 의식)인 삼업(三業)의 그림자(業影)인데, 사람들이 제
마음 속에 나타난 삼업의 그림자를 가리켜, 저 바깥에 있는 경계라고 보는 바람에 하늘 땅 사람 삼라
만상이 마치 실제(實際)인 것처럼 사람들의 마음을 현혹하기를 수 천 만 년 동안 그렇게 전도된 의식
(意識)으로 살아왔던 겁니다.
금강경(金剛經) 말미에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지요? 그냥 건성으로 들어선 안될 게송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일이 다 꿈과 같고 허깨비 같고 물거품 같고 그림자 같으며, 또한 이슬 같고 번개 같나니,
마땅히 이 세상 모든 것을 이렇게 보아야 하느니라 ―(일체유위법 여몽환포영 여로역여전 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 )
이 게송의 뜻만 깊이 이해해도 실체가 없는 허망항 이 세상 일체 존재에서 홀연히 벗어나, 금강과 같은
'본래 마음'을 회복할 수 있다는 게 금강경의 요지입니다.
<한 생각 일어나면 온갖 법이 따라서 일어나고, 한 생각 사라지면 온갖 법이 따라서 사라진다>(心生種
種法生 心滅種種法滅)고 했으니, 이 세상이라는 게 실체가 있는 게 아니고, 다만 사람의 한 찰나 한
생각 마음에 매어 있음을 알 터인데, 다시 무엇을 망설이겠어요?
* * *
우선 진정한 의미의 출가(出家)란, 실체가 없는 이 몸과 마음으로 어떤 공덕이나 편의함을 얻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런 마음가짐이야 서툰 장사꾼의 심보지, 그걸 어떻게 참된 구
도자(求道者)의 마음가짐이라 할 수 있겠어요? 따라서 제대로 된 수행자에게 있어서는 이른바 발심(發心)
이라는 말의 뜻도 세속의 그것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發心'이란, 말 그대로 「'마음'을 밝혔다」는 뜻이며, 따라서 <'마음'이 그대로 '부처'인 도리>를 깨달아
마침으로써, <삼계가 오직 '마음'일 뿐이요>,(三界唯心)이요, <만법이 오직 유식>(萬法唯識)인 도리를
체달하여, 「'마음밖에는 티끌만한 한 법(法)도 없어서, 구할 것도 버릴 것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
마친 사람의 마음을 일러서 "發心 했다"고 말하는 겁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끊임 없이 <보다 나은 경지>, <보다 안정된 경지>, <보다 훌륭한 경지>를 구해
마지 않을 테니, 어느 세월에 쉴 분수가 있겠습니까?
그러기에 고인이 이르기를, 「지금 이대로인 것 같으면 빠르거니와, 심행(心行)을 일으키면 더디니라」
했던 겁니다. 모름지기 일승보살(一乘菩薩)은 구경(究竟)의 열반을 증득하는 일이 없다는 사실을 분명
하게 알아야 합니다. 일승종(一乘宗)에 있어서는 시작도 없고 끝도 없어서, 영겁에서 영겁으로 흐르는
시간의 흐름이 몽땅 한 때(一時), 한 찰나이며, 고금(古今)이나 완급(緩急) 등의 모든 분별은 모두 중생의
망상(妄想)의 소산(所産)임을 밝히는 겁니다.
따라서 과정(過程)이 그대로 결과(結果)이니, 일체시 일체처에 그 어디가 '佛事' 아닌 것이 있겠어요?
더욱 분발하세요. 처처법당 사사불공(處處法堂 事事佛供)입니다.
* * *
알음알이(心, 意, 識) 뿐 아니라, 만법은 본래 '자체의 성품'(自性)이 없는 건데, 사람들이 만법의 실상
(實相)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만법을 실유(實有)로 오인하고 집착을 일으키고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마음'에 비친 것이면 그것이 무엇이건 간에 다 꿈, 환(幻)과 같은 것이어서 고정불변하는 실체
(實體)가 없다는 事實을 분명히 깨달아야 합니다. 때문에 만법(萬法)이 유식(唯識)이라고 한 거구요,
그러니까 만법이 유식이라는 말은 이 世上의 心理的 物理的 一切 現象은 몽땅 '마음'으로 헛되이
지어진 고정된 실체가 없는 것이므로 모름지기 철저히 집착하지 말라는 뜻으로 이해하면 됩니다.
요컨대, 일체법은 본래 성품이 없는 것이므로, 보내고(遣) 나서야 비로소 없는 게 아니고, 망상이나
번뇌나 업장 등이 본래 스스로 없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지금 이렇게 주고 받는 문답도
모두 잠꼬대와 같은 것으로서, 꿈속에서 일어나는 그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겁니다.
사람들 각자가 모두 이 <나>를 환화공신(幻化空身)이라고 하면서도 생각을 하고 말을 하고 하는
나라는 主體가 있다고 믿고 그런 나를 <나>라고 여기고 있으니, 참 딱한 일입니다. 허깨비가 무슨
生覺이 있고 作用을 일으킬 수 있겠어요?
그러기에 '붓다'도 말하기를, 「화신불(化身佛)은 말하는 者가 아니다」라고 했던 겁니다.
'화신부처(化身佛)'도 말하는 자가 아니거늘 하물며 중생이겠습니까.
'법시'(法施), 즉 <법을 베풂>이란 습득(習得)해서 이미 알고 있는 식견(識見)을 말로 표현하여
전하는 게 아닙니다. 만약 그런 게 설법이라면 이 세상의 강의나 강연과 무엇이 다르겠어요?
요컨대, '法施'란 순수히 천진(天眞)한 본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법시이라야 참된 법시임을 알아야
합니다. 다만 중생들이 숱한 이론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그 치우친 이론을 부셔주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이론으로써 이론을 척파하는 것일 뿐이니, 이 방편의 말을 가지고 왈가왈부한다면 그는 곧 말에
떨어진 사람이요, 법문을 들을 줄 모른다는 핀잔을 면키 어렵습니다.
* * *
스스로 <마음 뿐>(唯心)이라고 하면서도 그 말의 깊은 뜻을 깨달아 살필 생각을 않으니, '성스러운
가르침'(聖敎)이 그저 한갓 헛된 한 토막 지견으로만 떠다닐 뿐, 전혀 아무 공덕도 없으니, 참 딱한
일입니다.
요컨대, '불법'(佛法)의 요체는 <만법이 유식>(萬法唯識)이므로 이 세상에는 집착할만한 한 법도 없다는
사실을 밝히는 것뿐이에요. 즉 한 생각이 일어나는 곳을 알건 모르건, 아픈 자가 있건 없건, 이 세상에 태
어났건 태어나지 않았건, 그 모두가 다만 중생의 정식(情識)으로 허망하게 비추어내는 ― 마치 꿈처럼 幻
처럼 말이에요 ― 실체가 없는 것일 뿐임을 분명히 깨달아 알아서, 더 이상 현혹되지 않기만 하면 당장에
어엿한 '부처'의 출흥을 맞이하게 될 것이니, 능히 근량에 감당할만한 사람이면 모름지기 시간도 노력도
들임이 없이 몰록 깨달아 들어가는 이 향상(向上)의 외길을 어기지 말아야 합니다.
* * *
천지가 온통 <부처 몸>이고, 모든 '존재'와 '일어나는 일'이 전부 불사(佛事)일 뿐인데, 여기서 벗어나서
어디로 가려는 겁니까? ― 견문각지(見聞覺知)하는 모든 일이 마치 꿈속에서 보는 것과 다름이 없는데,
사람들이 어리석어서, 현재 目前에 전개되고 있는 現象을 실재(實在)인 양 오인하여 집착을 일으키기
때문에 시비득실(是非得失)의 망집(妄執)에서 헤어나지를 못하는 겁니다.
따라서 세간법(世間法)이나, 출세간법(出世間法)이나 모든 法이 텅~빈 이름일 뿐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삼계가 유심>(三界唯心)이요, <만법이 유식>(萬法唯識)이라고 한 게 아니겠습니까?
결국 <참된 출가>란 빛깔과 소리가 天地間에 가득해도 그것들을 상대로 전혀 허(虛)와 실(實)을 가릴
게 없다는 사실을 꿰뚫어볼 수 있으면 그것을 <출가>라 하는 겁니다.
따라서 <지금 있는 이대로>인 것 같으면 빠르겠지만, 만약 조금이라도 조작을 일삼던가 대처(對處)한
다면 곧 어긋나고 맙니다. 뭣하러 쓸데없이 '황금'을 가지고 다른 '황금'과 바꾸려고 애쓰겠어요?
* * *
<참된 이치>(진리 眞理)는 이것이 말 그대로 참되고 여여(如如)하기 때문에, ― 즉 생겼다 사라졌다, 있었
다 없었다, 알았다 몰랐다 하는 變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것을 「참되다」고 말하는 게 아니겠어요?
그런데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이 세상 만물은 끊임없이 생성과 소멸이 이어지는 이른 바 무상(無常)한 것
임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인연 따라 생주이멸(生住異滅)이 되풀이되는, 허망한 존재라는 사실
입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한 가지 예를 들어보죠.
― 여름 날, 해변 가 백사장에 어린이들이 마냥 즐겁게 뛰놀고 있는 광경을 떠올려보세요. 그들은 산도
만들고, 길도 만들고, 다리도 만들고, 또 모래 성(城)도 만들면서 재미있게 노는데, 이 때, 이들은 <없던
게 생겨났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다간 해가 저물어서 어린이들이 집에 돌아갈 때가 되면, 산도 집도 모래성도 다 발길로 뭉개버리
고는 <있던 게 없어졌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 때, 이런 광경을 지켜보는 어른들은 어떻습니까?
<모랫벌>은 늘 본래의 모습 그대로고, 조금도 새로이 생겨나거나, 있던 것이 없어진 것이 없다는 걸
잘 알지 않습니까?
결국 인연 따라 생겼다 사라졌다 하는 것들은, 사실은 생겨난 일도 없이 생겨나고, 사라지는 일도 없이
사라지는 것인데, 범부들은 이것이 실제로 생겨났다 사라졌다 하는 것으로 오인하고 집착하는 겁니다.
이와 같은 사실을 꿰뚫어보는 지혜를 갖춘 사람은 종일 산하대지(山河大地) 삼라만상(森羅萬象)을 또렷
또렷하게 보면서도, 實際로는 먼지 티끌 하나 보는 것이 없는 겁니다. 말하자면, 있고 없는 양변(有無兩
邊)을 넘나드는 데 전혀 거리낌이 없는 거죠. 그리니, <있는 것>도 취하지 않거늘, 어찌 하물며 <없는 것
>을 취하겠어요? 함부로 허망한 지견을 굴리면서 <성스러운 뜻>(聖旨)을 어둡히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 * *
이것은 세속에서의 유물론(唯物論)과 유심론(唯心論)의 논쟁 차원을 넘지 못하는 질문이군요. 이런 내용
은 본 문답 코너에서 다룰 명제가 아닙니다.
유물론자가 말합니다. 「모든 존재는 '물체'가 근본이고, '마음'은 그 물체에 의지해서만 기능(機能)한다.
따라서 물체만이 참되고, 마음은 허망한 것이다」
유심론자가 말합니다. 「좋다! 그렇다면 당신이 주장하는 그 유물론도 '마음'으로 고찰해서 주장하는 것
이니, 당신의 주장대로라면, "나의 주장은 허망한 것이니 믿을 게 못된다"고 스스로 말하고 있는 꼴이니,
이야말로 전형적인 자가당착이 아닌가?」 ···
이런 논쟁은 세속의 말 많은 논객들에게 맡기세요. 고인은 말합니다. 「마음이 나면 만법이 나고, 마음이
멸하면 만법이 멸한다」··· 이 말씀에 이의를 제기할 여지가 있습니까?
마음이 아니면 유물론이니, 유심론이니 하는 따위의 논의가 어떻게 세워지겠어요? 그러므로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萬物의 根本인 영각성(靈覺性)>은 마음(心), 意識, 生覺도 아니고 物質도 아니면서 能히 모든 因緣에
感應하여 마음 의식 생각도 나투고 물체도 나투되, 마치 빈 골짜기가 소리 따라 메아리를 뱉어내듯이
그렇게 내는 것이니, 이 <앎의 성품>인 영성(靈性)을 세간법을 따라 <마음>이라고 이름하는 것일 뿐,
靈性거기엔 본래 일체의 '이름'도 '형상'도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진리(眞理)를 밝히는 데 뜻을 두었거든 모름지기 世間法을 배우지 말 것이며, 세간법을 앞세워 진리에
접근하려고 하는 헛된 시도를 그쳐야 합니다. 그것은 마치 모래를 쪄서 밥을 짓겠다는 것과 다르지 않
으니, 될 일이 아니지 않겠어요?
* * *
혼돈(混沌)이 꿰맨 자국도 없이 두 갈래로 나뉘었으니, 나뉘었으되 일찍이 <둘>인 적이 없고, 합해도
<하나>가 아니니, 과연 이것이 무엇일까요?
고불(古佛)의 法이 본래 일여(一如)하여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니건만, 미혹한 중생이 <연생(緣生)이
무생(無生)인 도리>를 알지 못하고 헛되이 면전에서 있음(有)을 취하여 이것을 고유의 성품을 가진
실체로 오인하여 분별하고 집착하면서부터 피차(彼此) 자타(自他) 내외(內外) 등의 망령된 생각이
미혹의 두꺼운 구름이 되어 중생의 마음을 가리게 된 겁니다.
잘 이해가 되지 않거든 꿈 생각을 해 보세요. 꿈속에 나타난 온갖 사물은 유정(有情) 무정(無情)을
막론하고 그것이 모두 마음이 變해서 나타난 것이 아닙니까?
그러나 꿈을 꾸고 있는 동안엔 꿈 속 이 모두가 <제 마음>인 줄 알지 못하고, 저 바깥에 각기 고유의
성품을 가진 실체로 존재하면서 <나>와 상대하고 있는 <남>으로 보이기 때문에, 이것들과 어울리면
서 한바탕 꿈 판을 엮어내는 게 아니겠어요?
그러다가 문득 꿈에서 깨면 이것이 본래 '한 마음'일 뿐이요, 결코 따로따로였던 적이 없었음을 알게
됩니다. 이것을 억지로 계합(契合)이니, 명합(冥合)이니 하고 이름짓지만, 본래 <둘>이었던 적이 없
었으니 지금에 다시 <하나>가 되는 일도 있을 수 없고, 결국 허공이 허공에 합하듯이, 천지가 온통
<나> 혼자 뿐임을 알게 되면 이것이 바로 상주불변(常住不變)의 법성신(法性身)이 드러나는 순간이요,
비로소 <참 나>가 이루어지는 순간입니다.
요컨대, 면전엔 진실로 한 法도 없음을 알아서, 유심(唯心)의 도리를 철저히 사무치는 일, 이것이야말로
성교(聖敎)의 요체(要諦)임을 명심하고, 망령되이 지각작용(知覺作用)을 좇으면서 밖으로 내닫는 일은
지금 당장 그만두어야 합니다.
* * *
<마음뿐인 도리>(唯心)를 깨치면 이 세상의 온갖 잡다한 일들이 ― 그것이 좋은 일이건 궂은 일이건,
마땅한 일이건 마땅찮은 일이건 막론하고 ― 모두 <참 마음>(眞心)의 거울에 비친 망념(妄念)의 그림
자임을 알게 됩니다. 그러니 다시 무엇을 가릴 게 있겠어요?
한 걸음 성큼 물러서서 法界 全切를 조망(眺望)해 보세요. 거기엔 옳은 일도 있고 그른 일도 있으며,
깨끗한 것도 있고 물든 것도 있어서, 그야말로 凡夫와 聖人이 함께 살고, 용(龍)과 뱀이 섞여 있음을
보게 됩니다.
이 雜多한 것들이 혼재(混在)하면서도 아무 충돌도 없이 한결같이 갈무리되어 있기 때문에 그 이름이
법계(法界) 즉, 眞理의 世界가 아니겠어요? 그러니까 <밖으로 두리번거리면서 구하는 마음>도 있고,
회심(廻心)하여 <하나의 참된 주처>(一眞住處)를 얻어서 미동도 하지 않는 마음도 있고, ···
그러나 이 모두가 오직 <한 마음> 가운데의 일이요, 결코 마음밖엔 티끌 만한 한 法도 없음이 分明하니,
이것이 바로 유심(唯心)을 말하는 근거입니다. 모름지기 마음을 밝히고 성품을 본다면 다시 무슨 일이
있겠어요?
* * *
부처님은 일찍이 중생을 위한 적이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마음이 곧 부처요, 마음이 곧
법이니>, 만약 마음 밖에서 부처를 찾던가, 마음 밖에서 법을 구한다면 이것은 '마음'도 모르는 사람
이거늘 어찌 '부처'를 이룰 수 있겠어요?
제일의(第一義)의 유심(唯心)을 깨치면 진실로 마음밖엔 티끌 만한 한 법도 없음이 진실이니, 만법이
성품이 없고, ― 중생도 성품이 없어서 생사(生死)도 없는 겁니다. 천지가 허공처럼 텅 트여서 티끌
하나 없거늘, 어디에 중생이 있어서 병에 걸리고, 또 고치고 할 일이 있겠어요.
이에 이르면 이른 바 고인이 이르기를, 「병이 없으니 약이 필요 없다 하노라」 하는 경지입니다.
醫士도 患者도 둘 다 아직 무명(無明)에 갇혀서 <생사의 바다>(生死海)에서 헤어나지 못했을 때에는
그저 지금처럼 <사대(四大)로 된 몸>을 <사대로 된 국토>에 의지해서 사는 수 밖에 없으니, 상정(常
情)에 따라서 성의껏 진료하면 되겠지요.
그러나 기필코 부처님의 큰 法에 뜻을 둔 선비라면, ― 환자의 근기를 살펴가면서, ― <몸과 입과 뜻>
(身口意)을 굴리면서 삶을 영위하는 <나>라는 주재(主宰)가 없음을 일깨워 주어서, 그로 하여금 이
<오음의 몸>(五陰身)에서 벗어나도록 도울 수 있다면 그에서 더한 구원이 또 어디 있겠어요?
그러므로 모름지기 먼저 <자기 자신>을 구하는 일이 급함을 알 것입니다.
* * *
제대로 된 수행자의 공부는 가장 높은 정점(頂點)에 머물지 않고, 뜻(意)은 <그윽한 뜻>(玄義)을 머물러
두는 法이 아닙니다. 그저 <평상한 마음>(平常心)이 도(道)이니, 모름지기 마음에 수승(殊勝)한 지견이
생겼거든 얼른 보내 버리고, 결코 그에 의지하거나 머물거나 해서는 아니 됩니다. 그것이 바로 천진(天
眞)한 영성(靈性)을 어둡혀서 다시 <생사의 바다>(生死海)에 침몰하는 짓이에요.
어머니 배 밖에 나와서 지금까지 보고 듣고 해서, 기억의 형태로 축적한 일체의 지견을 ― 그것이 세간법
이건 출세간법이건 막론하고 ― 몽땅 잊을 수만 있으면, 그리하여 <만겁에 변함 없는 성품>으로 하여금
스스로 빛을 방광(方光)하게 하되, 일체의 이치나 도리가 그 성품에 간여(干與)할 여지가 없게 할 수만
있다면, 부처 지혜는 바로 앞에 나타나서, 얻음도 없고 배움도 없는, 그것이 바로 '부처'인 겁니다.
* * *
一乘이건 아니건 불문하고, 구경각(究竟覺)은 학인에 의해 증득되는 게 아닙니다. 바꿔 말해서 증득되는
것은, 즉 깨달은 바가 있고, 얻은 바가 있는 것은 <참된 깨달음>이 아닌 것입니다.
만약 누군가가 나름대로 수행을 하다가 무엇인가를 깨달았다고 한다면, 분명히 그것은 <마음을 밝히고,
성품을 본 것>이 아니라, 평소에 머리 속에서 갈구하던 이상(理想)의 경지가 헐떡임의 소용돌이 속에서
문득 어느 한 순간 화현(化現)한 망정(妄情)에 지나지 않는 것임을 믿으세요.
또한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데는 일체의 有爲의 노력이 미치지 못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요컨대
眞理는 '생각 의식 마음'으로 깨달을 수 없고, 몸으로 행할 수 없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 몸도 마음도, 나아가서 이 세계도 몽땅 빙소와해(氷消瓦解)하여, 천지간에 안팎으로 도무지 의지할
데가 없이 되어야 비로소 구경(究竟)에 상응(相應)할 수 있는 조그만 가능성이 생겼다고 할 수 있겠죠.
그러니 그것이 3,000 배건 10,000 배건 그것은 범부나 외도들이 유위의 공덕을 바라고 하는 망령된
행위에 불과하니, 도무지 허깨비와 같아서 實體가 없는 이 몸과 마음을 까닭 없이 수고롭게 해서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깨달음이니, 해탈이니, 열반이니, 성불이니 하는 일체의 생각을 다 놓고, 놓았다는 생각마저 없어서,
이렇게 문득 <생각 없는 무심정>(無思無心定)에 들 수 있으면 道를 깨치기가 빠르겠으나, 만약 그렇지
않고, 유심(有心)으로 道를 구한다면 그야말로 당나귀 해가 되어도 깨칠 분수가 없습니다.
* * *
제 입으로 <마음 뿐>이라고 하면서도 여전히 <옳은 지견>과 <삿된 지견>을 分別하고, <활짝 트임>과
<콱 막힘>을 가리니, 참 딱한 일이군요. ― 그러고 보면 딱할 일도 없겠군요 ― <마음의 성품>(心性)은
스스로 온전하여 작용이 없으면서, 다만 인연에 감응하여 온갖 형상(形相)을 꿈처럼 幻처럼 나투는 것
이므로, 따라서 움직임 없는 <본래 성품>(本性)에 依持하여 드러나는 모든 현전상(現前相)은 미·오(迷
悟) 염·정(染淨) 간에 자체성(自體性)이 없어서, 오직 <참된 하나>를 여의지 않는 겁니다.
<신령한 앎>(靈知)은 본래 스스로 환히 알므로, 수행자가 새삼 알아내고 밝히고 할 것이 없는 겁니다.
그저 마음이 <있다>고 하면 있고, 마음이 <없다>고 하면 없는 것이니, 온갖 <그렇고> <그렇지 않음>
이 전혀 나의 한 생각에 매었거늘 다시 허망한 바깥 경계에 마음을 뺏길 일이 무엇이겠어요?
일체가 <마음뿐임> 즉, 삼계유심, 만법유식임을 철저히 사무쳐서, 그저 한 순간이라도 조작 없는 마음
에 맡겨서 순히 흐를 수만 있다면, 곧장 해탈의 땅을 밟을 것이니, 모름지기 아무리 수승한 지견이 생
겼더라도 돌보지 말고, 곧장 <생각 없는 무심정>(無思無心定)에 드는 것만 못하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 * *
설사 의근(意根)이 완전히 둘러빠지고, 세간의 흐름을 남김 없이 끊어버렸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끝내
본분납자(本分衲子)의 행리(行履)할 곳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참 지혜'는 일찍이 문턱을 넘은 일이 없
으며, 따라서 학인이 보고 듣고 읽고 하면서, 또는 체험을 통해서 얻은 일체의 알음알이는 '둘째 달'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학인이 자기의 공부에 대해 말합니다. 「 저는 알았습니다. 즉 안으로는 나(生)는 마음이 없고, 밖으로는
온갖 법진(法塵)이 제 성품이 없어서, 티끌 만한 한 법도 상대할 만한 법이 없음을 저는 알았습니다.
따라서 저는 내외명철(內外明徹)하여 시방삼세(十方三世)에 걸릴 것이 없는 적멸 속에서, 쉬고 쉬고 또
쉬어서 쉬었다는 생각도 쉬었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말을 들은 명안종사(明眼宗師)는 일언지하에 잘라 말합니다. 「 그대가 얻은 적멸
(寂滅)은 진정한 <구경의 적멸>이 아니요, 그대가 쉬었다고 말하는 것은 <올바른 쉼>(正休)이 아니니라」
「 허물이 어디에 있습니까?」
「 깨닫기 전엔 시끄러웠다가 깨닫고 난 다음에야 적멸해졌다면 그것은 생멸법일 뿐 아니라,
<시끄러운 때>와 <적멸한 때>에 시간의 옮김이 있음이니, 이는 무시지문(無時智門)을 어김이요,
또한 <쉬었다>고 말하는 것도 만약 그것이 일승보살이라면, <쉬지 못함>도 보지 않고
<쉬지 못하는 자>도 보지 않으며, 또한 <쉬게 된 것>도 보지 않고 <쉬게 된 자>도 보지 않게 되어서,
비로소 <일찍이 문턱을 넘은 일이 없는 '참 지혜'>의 비춤 없는 비춤에 상응하는 것으로서,
바야흐로 비로소 <조금은 쉬었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니라」
·이 문답을 잘 깨달아 살펴서, 모름지기 <신령한 근원>을 등지고 허망한 지견놀이에 침몰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기에 고인이 이르기를, 「 <안 바>(所知)가 있고, <얻은 바>(所得)가 있음은 참된 깨달음이
아니니라」고 거듭거듭 경책하신 바이니, 제대로된 수행자라면 모름지기 구하는 바가 없어야
함을 명심해야 합니다.
* * *
'마음'은 남(生)이 없고, 말은 끝내 불요의(不了義)이니, 만약 학인이 '생각'과 '말'을 여의지 못한다면,
즉 정식(情識)으로 헤아리고 더듬는 것으로는 결코 진리에 상응할 수 없다는 사실을 철저히 사무쳐야
합니다.
만법이 인연생기(因緣生起)라, 자체의 성품이 없어서 도무지 주재자(主宰者)가 없는 가운데, 이 육신의
허망한 인연 때문에 온갖 바람이 생기고, 그 바람이 빌미가 되어서 끊임없는 의증(疑症)이 생기는 거예요.
<유심(唯心)의 도리>를 깨치면 모든 경계는 사라지고, 안팎이 명철(明徹)하여, 천지간에 티끌 하나 걸릴
게 없는, 그야말로 <하나의 참된 법계>(一眞法界) 뿐인데 다시 무엇이 남아 있어서 마음에 그림자를 드
리우겠어요?
따라서 마음이니 경계니 하는 것은 다 정량(情量)으로 나툰 바요, 나아가서 <주(住)함이 있음>과 <주함이
없음>, <믿음>과 <믿지 않음>, 깨달음과 미혹함, 나아가서 ― <있음>과 <없음> 등이 모두가 정량으로 헛
되이 分別한 빈 이름뿐인지라, 전혀 실다운 법이 아닌 겁니다.
그러므로 <생각 없는 정혜력(定慧力))>으로써만이 감당할 바요, 생사법(生死法)이나, 인과법(因果法)
을 좇으면서 정식으로 헤아림은 전혀 본분납자의 행리(行履)가 아니니, 마땅히 신구의(身口意)에 의탁
함이 없이 <작용이 없는 지혜>(無作智)에 잠잠히 합하는 길만이 제대로 된 수행자의 나아갈 길임을 명
심해야 합니다.
그러기에 고인이 이르기를, 「견문각지의 지각작용(知覺作用)을 좇는 자는 걸음걸음마다 귀신과 사귀
리라」고 했던 것이니, 모름지기 조작함이 없이 마음(靈覺性)으로 하여금 스스로 빛나도록 해야 합니다.
아무리 수승한 지견이라도 한갓 허망한 정견(情見)에 불과하니, 결코 제대로 된 수행자라면 마음 둘 바
가 아닌 겁니다.
* * *
흔히 마음이 산란하게 흩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마음을 한 데 모아야 겠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게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범부나 외도들이 항용 떨어지기 쉬운 함정이에요. 이들은 움직임과 고요함
이 전혀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저 마음이 좀 시끄러우면 금방 이것을 찍어눌러서
고요하게 하려고 애씁니다.
그래서 명상(瞑想)이니, 심지어 참선 공부를 한다는 친구들까지 어설픈 명상의 시늉을 본뜨고 있으니
참 딱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생각생각이 <남(生)이 없는 도리>(無生法忍)를 분명히 밝혀서,
경계를 대할 때마다 마음 속에 나타나는 그 숱한 형상(形相)들이 모두 실체가 없는 <업의 그림자>(業影)
임을 간파(看破)한다면 다시 무슨 근심하고 걱정할 일이 있겠어요?
그러므로 유심(有心)도 무심(無心)도 다 아닌 줄 알아서 그 어느 쪽에도 머물지 않는다면 그 때에야 비로
소 조금은 무심해졌다고 할 수 있겠죠. 행여라도 무심에 도달하기 위해서 애쓴다면 그것은 마치 물속의
달그림자를 건지려고 애쓰는 것과 다름이 없으니 무슨 소용이겠어요?
모름지기 지금 당장 문득 쉴지언정, 다시 무심이니, 무아니 하여 보다 나은 어떤 경지를 향해 일을 꾸민
다면 이것은 매우 사된 길에 떨어지는 것이니, 제대로 된 수행자라면 이 부분에서 길을 잃지 않도록 각별
히 삼가서 조심조심 얇은 얼음판 위를 걷듯 해야 합니다.
* * *
진리(眞理)는 참으로 말이 없습니다.(이런 말도 자칫 진리를 훼손하는 결과를 나을까 걱정이군요) 따라서
지난날의 여러 성현들이 학인들을 제접(提接)할 때 베푼 方便도 어디까지나 이 <말이나 문자로 드러내 보
일 수 없는 것>을 어쩔 수 없어서 말이나 문자를 이용해서 표방한 것이므로, 그와 같은 方便의 말씀이나
현시(示現) 가운데서 비밀한 뜻을 알아차릴 지언정, 결코 그 가운데서 어떤 묘한 식견을 얻으려고 한다면
이것은 큰 잘못입니다.
그런데 요즘의 학인들은 대부분 이 方便의 말씀에 현혹돼서그 말속에서 묘한 이치를 찾으려고 애쓰니,
참 딱한 일입니다. 최상승(最上乘)의 유심(唯心)의 법문에 든 이는 '깨달음'도 '미혹함'도 다만 마음의
거울에 投映된 명암(明暗)의 자취, 그림자일 뿐임을 알아서, 그 어느 쪽에도 머물지 않을 수 있으면,
이런 사람을 일러 '깨달은 사람'이라 하는 겁니다.
요약컨대, 허망을 알아보는 것이 수행이요, 참과 허망이 한 근본임을 알아서 마음이 이 쪽 저 쪽 분별
하지 않게 되면 곧 근본성품(根本性稟)이 저절로 드러나는 것이니, 결코 유위(有爲)의 공력을 들여서
애쓴 보람으로 얻어지는 게 깨달음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참된 깨달음'이나 '본래의 성품'이 어찌 범부의 상량(想量)의 대상이 될 수 있겠어요? 그러므로 말이나
문자로 미치지 못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결코 알려고 하거나, 말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면 머리에 뿔이
난다고 고인들은 경책했던 거예요.
<모르는 그것>이 가장 친절합니다. 문득 모든 法을 몽땅 쉬기만 한다면, 그리고 그 쉰 자리에도 머물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부처'와 조금도 다를 게 없으니, 다시 무엇을 찾고 닦고 할 일이 있겠어요?
* * *
여읠 줄 알면 法이요, 法을 알면 '부처'라」(知離卽法 知法卽佛)고 했습니다. 모든 '이름' (名)과 '모양'(相)
과 '망상'(妄想)은 이것이 범부의 살림살이이니, 이 모두가 오직 중생의 망정(妄情)의 소산임을 알아서 이
를 여읠 줄 알면 이것이 곧 '法'이라는 것이니,
그러므로 '法'의 '본래법'(本法)은 '法'이랄 것도 없고, '法'이 아니랄 것도 없는 거예요. 따라서 '법'에 대하
여 이러쿵 저러쿵 지견을 굴리면서, 알아낸 바가 있고 깨달은 바가 있으면 이 모두가 속절없이 '둘째 자리
'임을 분명히 알아서 결코 이에 머무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아무리 훌륭한 식견(識見)도 생각 없음만 못한 것이니, 왜냐하면 공부하는 사람이 어느 날 문득 수승(殊勝
)한 지견이 생겼을 때, 이에 머물러서 놓을 줄 모른다면 이 사람은 '마음'도 알지 못하니, 어느 세월에 깨달
을 분수가 있겠어요?
'마음'이 곧 '부처'요, '마음'이 곧 '법'이니,(卽心卽佛 卽心卽法) 결코 '마음'을 떠나서는 단 하나의 법도 없거
늘, 만약 '마음'으로 알아낸 바 법이 있고, 깨달은 바 법이 있다면, 이 사람은 '마음' 밖에서 '법'을 보는 것이
니, 어찌 법집(法執)에서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지금 당장 <제일의의 유심>(第一義唯心)을 깨쳐서 한 생각에 일체를 좌단(坐斷)하면 다시 그 무슨 법이
남아 있기에 알고 모르는 양변에서 이 쪽 저 쪽 할 일이 있겠어요? 결국 한생각이 나면 온갖 법이 나고,
한 생각이 멸하면 온갖 법이 멸하는 것이니, 문득 '마음의 근원'을 돌이킬 수 있으면 만법은 저절로 '마음
의 근원'에 귀착하여 더는 이 마음을 어기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 * *
이 세상의 모든 일은, 그것이 유정이건 무정이건, 또 그것이 존재이건 일어나는 일이건 막론하고,
그 모두가 오직 인연으로 말미암을 뿐이요, 거기에 <행위의 주체>(行爲主體)도 없고, <수용의 주체>
(受用主體)도 없는 거예요.
즉 '짓는 자'(作者)가 있어서 작업을 지어나가는 게 아니라, 이 모두가 꿈 같고 幻 같은 '인연생기(因緣
生起)'라는 말이에요. '짖는 자'(作者)가 없는데 어떻게 '일'이 혼자서 이루어지겠어요? 또 '받는 자'가
없는데 누가 있어서 일의 성패에 대해 일희일비하겠어요?
그래서 연생(緣生)은 무생(無生)이라고 하는 건데, 이 '남이 없는 이치'(無生之理) 가운데서 다시 무슨
숙명론을 운운합니까? 일체만법이 다만 허깨비처럼 낫다가 허깨비처럼 사라져서, 시종일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거예요.
이와 같이 시종 공적(空寂)한 가운데, 무명중생들은 늘 무슨 일이 일어났다고 아우성치면서, 이리 저리
헛손질 하고, 바꿔치기하고 하면서 헛되이 설치기를 쉬지 못하는 게 바로 가엾은 중생의 고달픈 살림살
이에요.
이 몸을 <나>로 여기고 있는 한, 그래서 이 '육신의 인연' 때문에 기갈(飢渴) 한서(寒暑) 병고(病苦) 등이
마치 꿈처럼 환처럼 있는 것인 줄 알지 못하고, 즉 이 世上이 몽땅 생사(生死)가 그대로 열반(涅槃)인 佛
國土임을 알지 못한다면, 그 꿈속에서 제 아무리 훌륭하고 대단한 식견이 생긴다 한들 무슨 소용이겠어
요? 그래서 빨리 훌쩍 꿈에서 깨라고 하는 겁니다.
* * *
스스로가 '일승법문'이라고 하면서 무엇을 그렇게 알아들은 게 많습니까? 통틀어 '한 마음' 뿐인 '법계'
는 이미 안팎과 자타가 없어서, 알 것도 없고 모를 것도 없는 겁니다.
모든 '형상'이 있는 것과 '이름' 있는 것이 모두가 중생의 망상으로 헛되이 지어진 것임을 알았으면,
모름지기 기억해 짊어지고 다니면서 보고 듣고 하는 가운데 헛된 분별을 일으키면서 '마음'을 어둡히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일체만법이 오직 <참된 하나>일 뿐이어서, ― 원인과 결과, 옛과 이제, 먼저와 나중, 깨달음과 미혹함,
생사와 열반, 번뇌와 보리 등의 일체의 이름과 뜻이 <한 마음의 근원>으로 돌아가 원융됨을 본다면
천지간에 다시 무엇이 있길래 장애를 이룰 일이 있겠어요?
'진리(眞理)'는 본래 말이 없고, 알만한 것도 없고, 볼만한 것도 없기 때문에 항상 스스로 온누리에 두루
충만하여, <환과 같은 지혜>를 일으켜서 <작용 없는 작용>을 지어나감으로써 뜻에 맡겨 중생을 대현
(對現)하여 모든 함령(含靈)을 이롭게 하되 전혀 공력(功力)을 들이는 일도 없고, 가고 오고 하는 수고도
없는 게 바로 무진장(無盡藏)한 <자기의 보배>, 자가보장(自家寶藏)인데,
사람들이 어리석어서 집안의 보배를 내팽개치고, 허망하게도 보배창고 밖으로 내달으면서 헛된 복이나
구하고 있으니, 어느 세월에 성인의 뜻을 헤아릴 수 있겠어요?
아무리 좋은 일도 일 없음만 못하니, 모름지기 그 '마음'을 눈동자 간직하듯 잘 보존한다면, <참된 깨달음>
은 항상 본래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에 있었는데 제가 혼자 알아차리지 못했었다는 것을 곧 알게 될
것입니다.
* * *
천지가 온통 <부처 몸>이고, 모든 '존재'와 '일어나는 일'이 죄다 불사(佛事)일 뿐인데, 벗어나서 어디로
가려는 겁니까? ― 견문각지(見聞覺知)하는 모든 일이 마치 꿈속에서 보는 것과 다름이 없는데, 사람들
이 어리석어서, 현재 목전에 전개되고 있는 현상을 실재(實在)인 양 오인하여 집착을 일으키기 때문에
시비득실(是非得失)의 망집(妄執)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겁니다.
따라서 세간법(世間法)이나, 출세간법(出世間法)이나, 모두가 텅~빈 이름일 뿐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삼계가 유심>(三界唯心)이요, <만법이 유식>(萬法唯識)이라고 한 게 아니겠어요?
결국 <참된 출가>란 모양(빛깔)과 소리가 천지간에 가득해도 전혀 허(虛)와 실(實)을 가릴 게 없다는
사실을 꿰뚫어볼 수 있으면 그것을 <출가>라 하는 겁니다. 따라서 <지금 있는 이대로>인 것 같으면
빠르겠지만, 만약 조금이라도 조작을 일삼던가 대처(對處)한다면 곧 어긋나고 맙니다. 뭣하러 쓸데없
이 '황금'을 가지고 '황금'과 바꾸려고 애쓰겠어요?
* * *
화엄경 뿐 아니라, 모든 경전에서 펼쳐 보인 설법의 요지는 한 마디로 「'진실'이란 없는 것이니,
모름지기 집착하지 말라」는 말로 요약됩니다.
화엄경(華嚴經)이라는 경전의 이름이 뜻하는 바는, 곧 '마음'(華 꽃)으로 장엄된 세계라는 뜻이에요.
'마음'밖에는 티끌 하나 없는 게 진실이니(삼계유심三界唯心, 만법유식萬法唯識) 그래서 일체유심조
(一切唯心造)라고 말한 게 아니겠어요. 따라서 「'마음'이 그대로 '法'이요」 「'마음'이 그대로 '佛(부처)'
라」고 한 것이니, 그러므로 '마음'을 가지고 마음 바깥에서 '마음'을 구하고, '법'을 구하고, '부처'를 구
하고 한다면 이것은 전혀 '마음'을 모르는 짓이니, 어느 세월에 깨달을 분수가 있겠습니까?
'불법'은 결코 배워서 아는 게 아니라, 본래 온전히 갖추어져 있는 '진실'을 지혜의 눈으로 밝혀내는
것임을 명심하세요. 거듭 말하건대, '불법 공부'는 학습이 아닙니다.
* * *
모든 존재의 본질은 '있음'도 아니고 '없음'도 아니면서, 근본성품이 인연을 따라서 때때로 '있음'도
나투고 '없음'도 나투는 겁니다. 마치 요즘 같은 따뜻한 날씨에는 "하!" 하고 입김을 뱉으면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지만, 만약 한 겨울의 쌀쌀한 날씨에 그렇게 한다면 여러분은 분명히 하얀 입김을 볼 수
있을 겁니다.
사실은 이 때, 입김은 똑 같은 입김인데 다만 날씨라는 인연을 따라서 <있는 모양>으로도 나타나고
<없는 모양>으로도 나타나는 것 아닙니까? 그렇다면 입김의 진짜 모양은 과연 있는 걸까요, 없는 걸
까요? 이 화두를 잘 살펴보세요. 사실은 진실은 결정적으로 '있다'고 말할 수도 없고, '없다'고 말할
수도 없다는 걸 곧 알 수 있을 겁니다.
그러므로 '眞理'에서 보면 이 세상은 本來 아무것도 없지만, 근본성품이 인연(因緣)을 따르기 때문에
마치 있는 듯이 보일 뿐인 게 꿈, 허깨비, 신기루, 물거품, 그림자, 이슬, 번개 같은 이 세상, 現實世界,
가상현실(假想現實, virtual reality)인 거예요. 딱히 결정적으로 '있다'커니, '없다'커니 말할 수는 없지
만, 다만 근본성품이 인연(因緣)을 따르기 때문에 경우에 따라서 '있다'고 말하기도 하고, '없다'고 말
하기도 하는 겁니다.
그러니 어느 쪽이든 간에 실제(實際)로는 텅~빈 말만 있고 실체(實體)는 없는 것이므로, <있고 없는
양변>에서 치우치게 집착해서는 안된다는 게 <성스러운 가르침>(聖敎)의 참 뜻임을 알아야 합니다.
* * *
설사 일체의 생각이 완전히 쉬어서 아주 '고요한 경지'를 얻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여전히 의근(意根)
으로 법진(法塵)을 分別하는 것일 뿐입니다. <진정한 고요함>, 즉 '구경의 열반'은 결코 학인에 의해서
증득되어지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중생은 <생각 없음>으로써 '무심'이라 하지만, 여래는 <지금 현재 중생이 치성하게 생각을 굴리고 있는
이대로인 채로 생각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압니다. 즉 <참된 하나>의 자리에서 보면 유심(有心)과 무심
(無心)이 결코 두 법이 아닌 거예요. 뿐만 아니라, 온갖 법이 이 '참된 하나'를 벗어나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므로, 따라서 온갖 법은 '자체의 성품'이 없는 것이어서, 서로 알아보고, 서로 도달하고 하는 일이
본래 없는 것임을 잊지 마세요.
이 세상 모든 것들, 우리들, 우주삼라만상만물이 오직 허망한 생각 의식 마음으로 분별(分別)함으로써
생겨나는 허깨비와 같은 존재임을 안다면 무엇을 다시 확인하고 증득하고 할 일이 있겠어요? 온갖 것 다
내려놓고 그저 푹 쉬세요.
* * *
공부하는 사람은 모름지기 '여래의 심행(心行)'을 행해야 합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가령 '무심'을 말할
때에도 '여래의 무심'을 행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如來의 無心'은 凡夫들의 '無心'과 어떻게 다를
까요.
잘 들으세요. 여래는 중생이 지금 치성하게 생각을 굴리고 있을 때에도 그것이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는
걸 분명히 압니다. 다시 말해서, '생각하는 것'이 그대로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라는 말입니다. 즉 <여래
의 무심>과 <중생의 분별 망상 번뇌 생각이 그대로 생각함이 아닌 것>과는 같은 뜻인 거예요.
<작용이 그대로 작용이 아닌 지혜>, 이것이 곧 '부처 지혜'의 작용인 겁니다.
중생의 마음과 부처의 마음이 둘이 아닌데, 사람들이 이 사실을 알지 못하고, 언제나 '유위'와 '무위',
'유심'과 '무심', '유루'와 '무루'를 두 갈래로 인정해서 늘 이 쪽, 저 쪽 분별하느라고 쉴 틈이 없는 겁니다.
온갖 것은 끝내 '참된 하나'를 벗어나는 게 아니라는 걸 잊지 마세요.
모든 분별과 차별은 전적으로 중생의 '망심'에 의한 분별 때문에 있게 되는 겁니다.
출처 : 현정선원 / 大愚禪師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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