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예불(禮佛), 부처님께 예배드림

장백산-1 2016. 8. 20. 17:31

예불(禮佛), 부처님께 예배드림


五大山의 무상(無相) 禪師가 법당 안에 있는 부처님께 절을 하고 대중에게 말했다. “그대들은 진흙으로 

만든 佛像을 보면 곧바로 방아를 찧듯 진흙佛像에 절만 하고 아무런 生覺도 하지 않는다. 自己 분상에 

각각 한 분씩의 부처님이 있는 줄은 전혀 모르고 있다. 虛空에서 온 많은 옛 부처와 옛 觀音이 밤낮으로 

육근(六根) 門頭에서 빛을 내뿜고 땅을 진동하고 있다. 가고 머물고 앉고 눕는 네 가지 行爲 속에 많은

옛 부처와 예 관음이 함께 드나들면서 털끝만큼도 서로 벌어지거나 벗어나지 않았거늘, 어찌 이 부처 이

관음에게 예배하여 절하는 것을 배우지 아니하고 도리어 진흙 덩어리인 佛像 위에서 살 궁리를 하는가?


그대들이 만약 허공에서 온 많은 옛 부처와 예 관음에게 절을 할 수 있다면 절하는 그 행위는 바로 그대

들 自身의 마음에 절을 하고 예배를 올리는 것이다. 그대들이 비록 전도망상(顛倒妄想)의 마음이라는 

生覺이나 마음이라고 할지라도 꺼꾸로 된 그 虛妄한 生覺이나 마음 그것은 本來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광대(廣大)하고 텅~빈 청정(淸淨)한 眞理의 몸 卽, 法身이다. 미혹했을 때도 미혹한 적이 없고 깨달아도 

깨달은 적이 없기에 전도망상도 모든 부처님과 더불어 조금도 모자람이 없다.


다만 그대들이 因緣으로 이루어진 對相 境界를 탐착한 까닭에 태어남도 있고 죽음도 있으며, 미혹함도 

있고 깨달음도 있게 되었다. 만약 한 순간 회광반조(回光返照)할 수 있다면 곧바로 삼세의 모든 부처님

과 같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佛)는 네 마음(心)에 있거늘 어리석은 사람들은 마음 바깥에서 부처

(佛)을 구하네. 마음 안에 값을 매길 수 없는 보물, 부처를 품고도 한 평생 쉴 줄 모르네.’라고 한 것이다.”


- 인천보감(人天寶鑑)



예불(禮佛)이란 부처님을 공경하고 예배하는 一切의 行爲, 儀式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공경할 부처님은 

어디에 계십니까? 法堂 안에 모셔진 돌부처, 금부처, 나무부처, 진흙부처, 합성수지부처가 부처입니까?

그 모든 불상(佛像)들은 부처를 본떠 이미지화한 形像이지 부처님이 아닙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에게 

부처님과 부처의 가르침을 傳하기 위해 方便으로 내세운 이정표, 등대, 方向을 가리키는 손가락과 같은 

것이 佛像입니다. 길을 찾는데 도움을 주는 里程標가 아무리 고마워도, 그 이정표를 法堂에 모셔놓고 

절을 하는 것은 지나친 것을 넘어선 촌극입니다.


참된 부처(眞佛)는 바로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인 이 마음입니다. 바로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인

텅~빈 이 마음, 眞佛은 스스로는 일정한 모양이 없습니다. 지금 여기 매순간 눈앞에 드러난 모양이 바로 

이 순간 마음의 모양입니다. 法堂에 모신 佛像은 지금 여기 매순간 눈앞에 드러난 그러한 마음의 모양 

중에 하나에 불과할 뿐입니다. 佛像만이 法身부처님의 모습이라고 執着하는 순간 나머지 모든 모양은 

法身부처님의 化現한 모습이 아닌 것이 됩니다. 이름과 모양에 執着하면 둘이 없는 마음, 둘이 없는 法

처님을 마음과 마음 아닌 것, 부처와 부처 아닌 것으로 스스로 갈라놓게 됩니다. 일체 중생이 마음 

아닌 것이 없고, 일체 중생이 부처 아닌 것이 없습니다. 즉, 心佛扱衆生 是三無差別, 마음 부처 중생 이 

셋은 조금도 다르지 않고 조금도 차별이 없습니다.


모양이 없는 이 마음, 이 부처, 바로 눈앞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를 어떻게 만나 어떻게 공경하는 

禮佛을 드릴 수 있을까요? 바로 지금 이 순간 이렇게 보고, 이렇게 듣고, 이렇게 냄새 맡고, 이렇게 맛

보고, 이렇게 느끼고, 이렇게 생각하는 이 자리 여기에 이 마음, 이 부처님께서 항상 영원하게 출몰

(出沒)하고 있습니다.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인 이 마음, 이 부처는 自己 자신과 털끝만큼도 벌어져 

있지 않은 하나의 대상이기 때문에 파악을 할래야 도무지 파악을 할 수가 없는 겁니다. 그러므로 이 

우주 삼라만상만물 중에 둘이 없는 自己가 바로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인 이 마음, 이 부처입니다. 

언제나 自己 가운데서, 이 마음 안에서, 이 부처를 떠나지 않습니다. 공경 받을 대상도, 공경하는 자도, 

공경하는 행위가 모두 이것 이 하나 이 마음 이 부처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뿐입니다.


이 마음, 이 부처, 이 자기를 깨닫는 것이 진정한 부처님,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의 현존, 無始無終

으로 영원히 파동하는 우주근원에너지정보場께 절을 올리는 것입니다. 이 깨달음이야말로 부처님의 

은혜를 알고, 부처님께 은혜를 갚고, 부처님을 공경하는 일입니다. 이 마음, 이 부처, 이 자기가 本來 

나고 죽는 바가 없고, 本來 미혹한 바가 없었다는 事實을 깨닫는 것이 예불하는 것입니다. 깨닫고 나서

보면 고정된 실체가 없는 虛妄한 生覺, 妄想 分別心이 사라진 것일 뿐, 깨달음이라는 새로운 物件을 

찾았거나 얻은 것이 아니기에 깨달은 것도 따로 없는 것입니다. 언제나 변함이 없는 것이 바로 이 마음, 

이 부처, 이 자기, 바로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뿐입니다.


이같은 事實을 分明히 깨달으면 法堂 안의 佛像부처님뿐만 아니라, 지금 여기 매순간 마주하는 모든 

對相 境界들인 化身부처님에게서 法身부처님, 眞理의 몸을 친견할 수 있습니다. 삼라만상 두두물물이 

바로 眞理의 몸, 法身부처님이 온갖 現象으로 現示한 모습을 드러내어 設法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든 世上萬事가 부처님을 만나 뵙고 부처님을 공경하고 있는 것입니다. 눈 한 번 

깜빡거리고, 숨 한 번 들이쉬고 내쉬고, 밥숟가락 젓가락을 들어 올리고 내리는 일이 모두 法身부처님

의 作用, 불사(佛事), 佛供  아닌 것이 없습니다. 處處法堂이요 事事佛供입니다. 사람들과 이야기 하고, 

이런저런 시비 분별 비교 판단 해석 헤아리기를 좋아하고 즐기는 生覺 망상 망념 번뇌 잡념 의식 마음

즉, 알음알이(識), 분별식, 분별심, 분별의식, 지견, 견해, 이해, 지식을 일으키는 일이 무진장한 진언과

경전을 염송(念誦)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스스로 이 마음(心), 이 부처(佛), 이 自己(衆生) 이 셋이 조금도 다르지 않다는 事實을 깨닫는 순간 온 

宇宙 삼라만상만물이 생생하게 생동하는 살아있는 텅~비어 淸淨한 法身부처님의 몸이 됩니다.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부처님, 삼세제불(三世諸佛), 수억만의 부처님들이 바로 그 때 함께 同時에 成佛하는 

것입니다. 虛空이 虛空으로 돌아오고, 물이 물로 돌아오고, 自己가 自己로 돌아왔을 뿐입니다. 부처가 

부처를 보고, 부처가 부처를 듣고, 부처가 부처를 느끼고, 부처가 부처를 압니다. 아무리 보고, 아무리 

듣고, 아무리 느끼고, 아무리 알아도 아무것도 본 것이 없고, 아무것도 들은 것이 없고, 아무것도 느낀 

것이 없고, 아무것도 안 것이 없는 것입니다. 마음, 부처, 자기 즉,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는 어떤 

흔적도 남기는 법이 없습니다.


바로 이럴 때 어느 부처님을 향해 절을 올려야 합니까?


- 몽지님 / 가져온 곳 :  카페 >무진장 - 행운의 집

'자기계발과 마음공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완전하고 완벽한 지금 여기, 法身, 眞理의 몸  (0) 2016.08.20
빈~손(空手)  (0) 2016.08.20
바로 지금 여기에 신비함이 있다  (0) 2016.08.20
이름과 모양과 실존  (0) 2016.08.20
통제 Control  (0) 2016.08.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