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몸이 밥, 온몸이 물
설봉(雪峰) 스님은 “밥 광주리 옆에 앉아 굶어 죽은 사람, 물가에서 목말라 죽은 놈”이란 말을 했다.
현사(玄沙) 스님은 “밥 광주리 속에서 굶어 죽은 놈, 물속에 머리까지 처박고 목말라 죽은 놈”이란
말을 했다. 두 분 스님이 하신 말씀을 거론하고는 운문(雲門) 스님이 말했다.
“온몸이 밥이고, 온몸이 물이다.”
- 운문광진선사광록(雲門匡真禪師廣錄)
眞理, 法, 깨달음, 본래면목, 주인공 진짜 나, 근원의 나, 본래의 나, 본래면목, 주인공, 본성, 본래마음
본심, 진심, 법성, 불성, 신성, 진성 등의 방편의 이름으로 가리키려는 것을 사람들에게 전달하는데 사
용하는 言語나 文字라는 수단 방편이 얼마나 不完全한 道具인지는 조금만 생각해 보면 금방 알 수 있
습니다. 우리말 속담에 “ ‘아’ 다르고 ‘어’ 다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인간의 언어, 말과 글은 ‘아’와
‘어’라는 음성과 문자의 변별적 자질, 즉 이원적 대립, 상대적 차별에 의해서만 이해가 가능합니다.
다시 말해, 언어, 의미, 개념, 사고, 지식, 지견, 견해, 이해, 알음알이(識), 分別識, 분별심, 분별의식은
二元性에 기반한 앎이기 때문에 애초부터 본래부터 全一的인 것, 絶對的인 것을 表現할 수가 없습니다.
전일적이고, 절대적이라 말하는 것 자체가 비(非)-전일적이고, 비(非)-절대적인 것을 짝하지 않고는
어떤 의미도 가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화 속에서 설봉 스님은 “밥 광주리 옆에 앉아 굶어 죽은 사람, 물가에서 목말라 죽은 놈”이라는 말을
했습니다. 眞理를 바로 눈앞에 두고도 깨닫지 못한 사람들에게 대한 方便的인 가르침의 말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에는 밥과 사람, 물과 사람의 이원성을 극복하지 못한 치명적 오류가 있습니다.
眞理와 眞理를 깨닫고자 애쓰는 사람이 따로따로 分離되어 있다면 그 말은 진리와 비(非)-진리의 對立
이 가능하단 의미가 됩니다. 아직 진리를 깨닫지 못한 사람은 비(非)-진리라는 대립항에 속하기 때문
입니다. 그렇다면 진리와 진리를 깨닫고자 애쓰는 사람 사이의 거리를 메꾸기 위한 노력, 수단 방편이
필요합니다.
“밥 광주리 속에서 굶어 죽은 놈, 물속에서 머리까지 처박고 목말라 죽은 놈” 이라라는 말을 한 현사
스님의 말은 설봉 스님의 그것 보다 좀 더 진리에 가까운 듯 하지만, 여전히 二元性을 극복하지는 못
했습니다. 진리와 그것을 깨닫고자 애쓰는 사람 사이의 거리는 사라졌지만 아직 限界가 남아 있습니
다. 微細하지만 진리란 것이 하나의 對相 境界, 타자(他者)라는 分別心, 분별의식, 알음알이(識), 지식,
이해, 견해, 지견이라는 시비 분별 비교 판단 해석 헤아리는 사량분별심이 남아 있습니다. 밥 속에,
물속에 사람이 들어 있지만 그 本質에 있어서는 서로 다르기 때문에 여전히 둘로 남아 있습니다. 아직
까지 이름(名)과 모양(相, 色)에 따른 差別 分別이라는 二元性을 극복하지 못했습니다. 여전히 밥을
먹고 물을 마셔야 할 사람이 分離되어 따로 남아 있습니다.
“온몸이 밥이고, 온몸이 물이다.”라는 말을 한 운문 스님 말이 그나마 봐줄만 합니다. 진리를 깨닫고자
애쓰는 사람이 곧바로 진리 자체라는 말입니다. 진리와 비(非)-진리 사이의 거리, 사이, 간격, 경계가
없다는 말을 한 것입니다. 주관과 객관의 二分法的 二元性의 對立이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이 말을 긍
정 또는 부정하는 순간 다시 주관과 객관, 진리와 비-진리로 나뉘고 分別됩니다.
명민한 언어 철학자였던 비트겐슈타인은 “말로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란 명언을
남겼습니다만, 그 역시 침묵을 지키지는 못했습니다. 言語라는 방편 수단을 통해 진리를 표현하려 하
는 限 지저분한 흔적을 남길 수밖에 없습니다. 흔적을 지운다는 것이 또 다른 흔적이 되는 것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침묵을 지키는 것만이 능사는 아닙니다. 침묵 역시 언어의 對立 項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하면 언어에도 치우치지 않고 침묵에도 떨어지지 않을 수 있을까요? 언어에도 속하지 않고
침묵에도 속하지 않아야, 언어에도 걸림 없고 침묵에도 걸림 없을 수 있습니다. 다음 예화를 보십시오.
법안(法眼) 스님이 수산주(修山主)에게 물었습니다. “털끝만큼이라도 어긋나면 천지 차이로 벌어진다
는 말을 그대는 어떻게 理解하는가?” “털끝만큼이라도 어긋나게 되면 천지간의 차이로 벌어집니다.”
“그렇게 이해해서야 어떻게 깨닫겠는가.” “저는 그렇다 하더라도 스님은 어떻습니까?”
“털끝만큼이라도 어긋나게 되면 천지간의 차이로 벌어진다.” 그러자 수산주는 법안스님에게 절을
하였습니다.
법안 스님은 “털끝만큼이라도 어긋나게 되면 천지간의 차이로 벌어진다.”라고 말을 했지만, 아무 말도
말을 한 것이 아닙니다. 수산주는 법안 스님에게 아무 말 없이 절을 하였지만 아무 말도 말을 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말을 했지만 아무 말을 한 말이 없고, 말을 하지 않았지만 모든 말을 다 말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선사에게 가서 물었습니다. “길을 찾기 위해 왔습니다.”
선사가 말했습니다. “그대가 길이고 진리고 깨달음이고 진실한 생명이다.”
말귀를 알아듣지 못하겠다면 기꺼이 한 대 때려드리겠습니다.
- 몽지님 / 가져온 곳 : 카페 >무진장 - 행운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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