道 <마음>이란? ① - 지유 스님[[知有哲柱]]
무엇이 自己 <마음>인가? - 지유 스님
佛法은 <本來> ‘자기(自己)’의 모습을 말함이요. 本來 自己의 모습을 보도록 가르친 것이 佛敎이다.
왜 本來 自己의 모습을 보아야 하는가? 自己의 모습을 ‘봄’으로서 日常生活 중에 일어나는 거의 모든
문제가 根本的으로 해결되기 때문이다. 自己의 모습이란, 곧 <마음>을 말한다.
<사람마다 마음이 없는 사람 있어요?>
‘마음’이 어떤 것이기에 마음을 ‘봄’으로서 일상생활 속의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가? ‘마음’은 모든 것,
삼라만상(森羅萬像)의 根源이요, 일체 모든 것은 마음에서 시작되어서 마음으로 돌아간다. 一切唯心造
三界唯心, 萬法唯識이다.
과거, 현재, 미래의 무한한 시간<無量劫>과 南西北方 사유상하四維上下(시방세계, 우주, 이 세상)의
無限한 空間과, 有無 大小 長短 彼此 생사 거래 주객 선악 빈부 고저 음양 시종 건병 미추 순역 심신
지우 신의 등등의 無限大의 分別相 差別相과 희비고락 喜悲苦樂등 無限한 감정의 생멸, 이 모든 것이
‘한 마음’ 속의 기멸起滅이기에 ‘마음’은 이 모든 것을 超越하여 일체 모든 것의 根本이 된다.
<마음은 사라지지 않아요>
시간과 공간을 초월超越한 ‘마음’이란 어떤 것인가?
인간이 영위하는 日常生活에 있어서 눈을 통해서 色과 모양을 보고, 귀를 통해서 소리를 듣고, 코를 통
해서 냄새를 맡고, 혀를 통해서 맛을 보고, 피부를 통해서 촉감觸感을 알고, 좋고 나쁜 것을 알며, 온갖
生覺(識)을 할 줄 아는 자(者)! 말하자면 모든 意識活動, 意識作用의 '본체本體'를 이름 하여 ‘마음’이라
고 부르는 것이다.
의식의 활동, 의식작용의 본체本體인 ‘마음’은 모양(形體)가 없고 物質 아니기에, 눈을 통해서 볼 수 없고
손으로 잡을 수도 없는 것이다. 의식활동, 의식작용<느낌 감정, 생각 망상 번뇌 잡념 상상 이미지, 욕망
욕구 충동 의도 의지, 분별심 알음알이(識) 분별의식> 一切가 끊어진 곳이니 도무지 마음은 인간의 의식
활동, 의식작용으로는 결코 미칠 수가 없는 것이다.
모양도 없고 생각이 미칠 수 없는 곳에 <차면 찬줄 알고 뜨거우면 뜨거운 줄 아는> 靈知, 本來知, 根本知
가 뚜렷하게 분명하게 昭昭靈靈(소소영령)하니, 이 영지靈知, 本來知, 根本知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
永遠한 自己 ’의 참 모습이다.
<소리가 나면 소리를 알아 듣는 것(者)이 있잖아요, 그것이 마음(心), 道입니다 >
修道<공부>란? 道를 수련한다는 말이고, ‘마음(心)’을 道라고도 한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道이며, 깨
달음(覺)은 무엇을 깨친다는 것인가? 참선 염불 다라니 관법 화두에도 간화선 묵조선 또 다른 종교들도
있다. 결국 무엇을 얻기 위해 공부를 하는가?
무엇이 '마음' 즉, <自己>인가?
마음을 닦으려면 우선 '마음'이란 어떤 것인지 마음의 정체正體를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다.
시제법공상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 시고 공중무색 무수상행식
是諸法空相 不生不滅 不垢不淨 不增不減 是故 空中無色 無受想行識
마음은 영원히 불생불멸 부증불감 불구부정임으로 生老病死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 중생은 자기 生覺에
사로잡혀서 자기 마음이 자기 생각으로 가려져있기 때문에 자기 근원인 마음, 근원을 보지 못하고 만다.
어떤 공부를 하던지 일단 마음<자기, 근원>을 確認하고 나서 공부를 해야 할 것이다.
그릇을 닦는데 있어 닦을 그릇이 어떤 것인지도 모르고 아무 돌멩이나 집어들고 닦으면 그릇을 닦았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마음의 正體, 나의 근본을 롱바로 알지 못하고 자기 나름대로 헤아려 세상
을 분별하는 生覺<망상 번뇌 환상>을 마음인 줄 알고 닦고 있으면, 마음을 닦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마음
을 더럽히고 어둡게 하는 결과가 될 것이다.
무엇이 '자기'<마음>인가?
좌선을 하고 있다면 벽을 보고 있는 놈, 소리가 나면 소리를 듣고 있는 놈, 냄새를 맡아 아는 놈, 소금이
짠 줄 아는 놈, 사과 맛이 시고 달고 한것을 아는 놈, 이놈이 바로 찾고자 하는 자기(마음)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마음’을 알 수 있는가 ?
알고자 하는 자체自體<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에 현존하는 나>가 바로 마음(자기)인 것이다.
무엇을 알고자 하는 生覺이 일어날 때, 그 生覺을 쫓아가면 생각의 끝이 없다. 아무리 알아보려 애를 쓰고,
몸부림치고, 생각을 많이 해보아도 점점 더 어지럽고 복잡하고 수고로울 뿐, 미궁속으로 빠져든다. 이것을
일러 <기우멱우騎牛覓牛>라고 소를 타고 있는 자가 소를 찾고 있다는 어리석음을 지적하는 말이다.
그러니 시비 분별 비교 판단 해석 헤아리기를 좋아하는 생각 망상 번뇌 잡념 의식 마음 즉, 알음알이(식),
분별심 분별의식을 쫓지 말고 生覺이 일어나는 그 본바탕 자체自體를 돌이켜서 보아야 한다. 이것을 일러
<廻光返照화광반조>라고 말한다.
생각하는 자체를 돌이켜 보면 그 실체를 찾을 수가 없다. 찾을 수 없는 그 곳에 생각이 아닌 신령한 영지
靈知, 근본지, 본래지가, 또렷또렸<昭昭靈靈>하지 않은가! 이 靈知가 모든 의식활동, 의식작용의 본체
本體, <본래면목>인 본래‘마음’이다.
생각을 돌이켜서 생각이 아닌 영지靈知를 보니, 이 영지는 이제 비로소 얻은 것이 아니라, 지금 이대로
본래부터 이미 완벽한 부처였던 것이다. <본래성불> <無智亦無得 以無所得故>
다만 <깨달아야 되겠다> 마음 속 생각에 사로잡혀執着 있는 바람에, 생각 아닌 밝고 밝은昭昭靈靈한 靈知
본래마음을 미처 보지 못했던 것뿐이다.마음속 생각에 집착妄執하고 있는 것을 환상幻想이라 하겠다.
<생각의 실체가 있다면 가져와 보라. 생각은 그림자이지 실체가 없다>
환상幻想에 가로막혀<遮蔽차폐> 생각<幻>이 아닌 본래마음, 영지를 보지 못한 것이니,
마음속의 환상을 탁 놓아 버리면, 眞心 本來마음, 靈知는 자연스럽게 저절로 드러나게 된다.
마음 속 생각 환상은 生滅하기에 허망하나, 眞心은 永遠不滅 常住不滅, 不生不滅이며 眞實이다.
이 진심眞心이 바로 자기의 참된 모습이요, 부처-Buddha 佛陀(불타)라고 부르는 것이다.
마음속에 집착固執하고 있던 생각 幻想을 놓아버리고 진심眞心을 보니, 이 ‘眞心’은 한 번도 난 일도,
죽은 일도 없었다.<無始無終 不生不滅 > 났다, 죽었다 하는 것은 마음속의 ‘생각 환상’이 일어나고
(生) 사라진(滅)한 것일 뿐이다.
생각은 波動하는 에너지로 천만번 일어나고 멸하더라도, ‘진심’은 생각 망상 환상을 따라서 나거나 사라
지는 일이 없으니 생사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것이다.<無生死>
생각을 돌이켜서 생각 아닌 마음을 보면 ‘마음’에는 일체 망념妄念 망상 환상 번뇌의 흔적을 찾아 볼 수
가 없다. 일체상一切相이 끊어졌으니 공적空寂이요, 그 가운데에 신령스러운 앎 영지靈知<차면 찬줄
알고 더우면 더운 줄 아는 것>이 있으니, 이것을 일컬어서 “진공묘유眞空妙有”또는 “공적영지空寂靈知”
라 말 한다.
공적영지空寂靈知의 마음은 지극히 고요하고도 神靈스럽다. 어지러운<散亂> 곳이 아니니 공적空寂
이라 하고, 감각感覺 지각知覺을 할 수 없는 木石과는 다르기에 영지靈知라 말하는 것이다.
맑고 고요하고(湛然圓寂) 靈知한 마음속에 한 생각<파도>이 일어나 그 생각을 쫓고 집착貪着<사로잡
히는>하는 바람에, 본래 공적영지空寂靈知한 마음<거울>을 잊어버리고, 생각은 다음 생각으로 계속
번지고 많아지니 마음은 점점 산란散해져, 어지러운 생각이 ‘영지靈知’를 가리니 점점 어두워진 것이다.
어지러우니亂 마음이 不安하고 어두우니 어리석은(癡치) 것이다.
그 불안한 마음에서 벗어나겠다고 이 생각 저 생각으로 발버둥친<取捨分別>것이 더욱 마음<靈知>을 어
지럽게 했으니, 점점 더 어두워져 공적영지空寂靈知했던 마음이 혼침惛沉과 산란散亂으로 변한 것이다.
⇒ 제가 하는말 알아듣습니까?.. 제가 지금 어렵게 말하고 있습니까?..영어나 무슨 문자를 쓰지 않고 듣기
쉬운 우리말로 쉽게 말한다고 하는데 이해가 됩니까?.
혼침惛沉과 산란散亂속에 짓고 있는 生覺이 生死가 되어 因果를 되풀이 하니 이 輪廻가 과거, 현재, 미래
라는 時間이 되고, 나와 남의 差別로 동서남북, 사유상하<十方世界, 우주, 이 세상>이라는 空間이 되어,
숮한 生死에 輪廻하게 된 것입니다.
무한한 生死에 輪廻하고 있는 중에, 좋은 일도 있고 나쁜 일도 있고, 좋을 때는 福이라 하여 즐거워하며,
나쁠 때는 재화災禍라 하여 괴로워하는 희노애락喜怒哀樂 길흉화복吉凶禍福의 온갖 일들이 있었다.
이 좋고 궂은 일들이 어디로부터 왔는가 하면, 이미 지나간 過去宿世에 자기가 지은 행업行業이 原因이
되어 現在의 자기에게 나타난 것이며, 또 現在 자기가 짓는 行業이 미래의 果報로 나타나는 것이니,
<欲知前生事 今生受者是 欲知來生事 今生作者是> 이는 누구로부터 받거나 다른 곳에서 온 것이 아니다.
이를 因果應報라고 한다. 밭에 콩을 심으면 콩이 나고, 팥을 심으면 팥이 나듯이 自己가 지은 業을 자기가
받는 것이니, 좋지 않은 환경을 만났다 할지라도 원망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자포자기自暴自棄가 되어서
도 안 될 것이다.
지금의 자기自己는 過去의 결과果이며, 同時에 未來의 원인因이니, ‘지금’ 當下가 가장 소중한 시기라 하
겠다. <歷千劫而不古 亘萬歲而長今, 行行本處 至至發處, 卽時現今 更無時節 總無實法>
아무리 역경逆境에 놓여있다 할지라도 지금에 노력하여 善에 힘쓴다면 未來의 善은 약속된 것이며, 또한
지금 現在 최선最善의 환경이 過去 선인善因에 依해 얻었다 할지라도 因緣이 다하면 없어지고 마니 돌이
켜 보면 生死의 輪廻라는 생각 망상 환상은 허무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 금강경 마지막 말씀<제 32분 應化非眞分> 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보시를 했더라도 보시했다는 생각에 사로잡히지 말라>
수보리야! 만약 어떤 사람이 한없는 삼천대천세계에 칠보(七寶)로 가득히 보시dana를 했다고해도
어떤 선남자 선여인이 보살심을 내어 이 경이나 사구게를 받아 지니고 읽고 외어 다른 사람을 위해
풀이하여 준다면 그 복덕이 앞의 복덕보다 훨씬 뛰어난 것이다.
須菩提 若有人 以滿無量阿僧祗世界七寶 持用布施 若有善男子 善女人
發菩薩心者 持於此經 乃至 四句偈等 受持讀誦 爲人演說 其福勝彼.
어떤 생각에도 사로잡히지 말고, 여여한 그대로 동요치 말지니라. <不取於相 如如不動>
어째서 그러한가? 일체현상계 즉, 有爲法은, 꿈이요 환상이요 거품이요 그림자와 같으며 아침이슬과
같고 번갯불과 같으니, 응당 이렇게 관찰해야 하느니라. 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
是觀
이렇게 일체 현상계, 이 현실세상을 관찰觀察해 본다면 좋은 환경에 혜택받았다고 들뜰 것도 없고,
최악의 밑바닥 환경에 떨어졌다고 해서 슬프고, 괴로워할 필요나 이유도 없는 것이다.
얻고 잃는 일은 因緣에 맡기고,<不取於相>해서 마음이 動搖동요함이 없으면<如如不動> 그 마음이
바로 道, 본래마음에 계합(契合)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마음속 생각에 집착執着하여 그 생각을 쫓고, 생각을 쫓아간 것이 生死가 되어 善도 되고,惡도 되어
그 과보果報를 받아 因果가 계속 반복해서 되풀이되니, 이것이 한없이 生死에 윤회輪廻한 것이다.
수많은 生死를 輪廻하다 보니 思量分別의 허망虛妄함과 인생의 무상함無常을 느끼게 되어 영원불멸
永遠不滅을 구해 보겠다고 몸부림쳐보나, 수고만 할 뿐, 生死를 윤회하는 것에서 벗어나는 데에 아무
런 효과가 없는 것이다.
한없이 애를 쓰고 노력하는데도 왜 그런가? 그것은 生死 輪廻의 原因을 몰랐기 때문이다.
과거의 석가모니불-Gautama Siddhrtha도 이 생사문제 때문에 출가하여, 생사의 탈출구를 사방으로
찾으시다가 <雪山修道>그것이 헛된 일이며<心外無法> 생사의 原因은 마음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마음’을 깨달아 생사라는 생각 망상 환상의 윤회의 고리를 끊어버린 것이다.
⇒ 여기에서 ‘마음’ 이란 무엇입니까? 이름이 마음이지 그 마음은 ‘나’ 자신 아닙니까?
여기에 지금 ‘마음’이 없는 사람 즉, 나 없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러니 마음 바깥에서 마음을 찾지
말아라. <且要自信 莫向外覓>
마음을 깨달았다는 것은覺, 많은 생각 생각 끝에 생각이 아닌 마음을 본 것(견성見性)을 말한다.
생각<환상>은 시시각각時時刻刻으로 변하고 끊임없이 기멸起滅을 지속하고 있으나, ‘마음’은
한 번도 생겨난 일도 없고, 없어진 일도 없고, 달라진 적이 없다.
그렇다면 生死란 무엇인가 ? 生과 死가 있다는 分別 妄想은 마음속의 생각<生覺 幻想>이다. 난生줄로
알고, 죽은死 줄로 알고, 온來 줄로 알고, 간去 줄로 알고 있는 허망한 환상 생각이 生과 死이다. '생각'
은 幻想이니 生死去來는 실체가 없는 허망한 그림자(幻影)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마음 하나를 미迷하여 무변無邊의 번뇌煩를 일으킨 사람을 중생衆生이라 부르고,
마음 하나를 깨달아서 무변無邊의 묘용妙用을 일으킨 사람을 제불諸佛(모든 부처)라 부른다.
마음이 미迷하면 마음이 생각 망상 환상 번뇌가 되고, 마음을 깨달으면 마음이 妙用이 된다는 말이다.
마음이 迷惑하면 생사의 輪廻를 하게 되고, 마음을 깨달으면 해탈解脫 즉, 自由人이 되었다고 한다.
마음이 미迷했다는 것은, 마음속의 생각(相)에 마음이 가려서 마음을 보지 못한 것을 말하고,
마음을 깨달았다는 것은, 마음속의 생각을 치워서 相이 붙을 자리가 없는 본 마음을 본 것을 말한다.
‘마음’을 깨치지 못하고 마음을 보지 못하는 原因은 마음속의 생각[相, 幻想]이 가려서이니,
생각을 털어버리면 바로 생각 아닌 마음이 된다. <應無所住而生其心>
생각 아닌 곳에 능히 감각感覺할 줄 아는 영지靈知가 뚜렷昭昭靈靈하다.
<차고 더운 것을 저절로 아는 것이지, 생각으로 아는 것이 아닙니다>
이 영지靈知가<생각하고 관계없이 알아요> 불생불멸不生不滅의 自己요. 生死와 상관없는 영원의
안식처安息處인 것이다. 간절히 찾던 영원불멸의 마음은 사람마다 갖추어 있고, 또 미물곤충에서
무생물에 이르기까지 일체중생이 다 갖추어 있다고 한다. <蠢動含靈 皆有佛性>
⇒ ‘마음’이 대상을 접하여 과거 현재 미래 온갖 생각을 짓지만 온갖 생각 망상 환상은 ‘나’는 아
니다. 生覺은 어디까지나 마음에서 일어난[生] 幻想[覺]일뿐입니다. 生覺은 實體 없이 지나가는
그림자(幻影)에 불과할 뿐인 것이기에 실체가 없는 생각 망상 환영 환상을 ‘나’로 잘못 알지 말아
야 합니다.
그런데 중생은 마음속 망상 집착妄執의 구름에 마음이 가려져서, <제일 가까운 곳에 있는> 이 좋은
寶物을 못 보고 삼독三毒心<貪,瞋,癡>에 홀려 속아서 환幻想과 같은 실체가 없는 生死가 있다고
여기는 生覺에 輪廻하며 신음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불쌍히 여기신 부처님이 중생의 마음을 가리고 있는 구름을 걷어 주기 위해 法Darma을
說하여, 본래부터 이미 완벽하게 갖추어 있는<완전한> 마음에 들어가게 한 것이 중생제도이다.
중생을 제도를 한다고 해서 부처님이 중생을 대신하여 제도濟度하는 것은 아니다. 만일 부처님이
중생을 제도한다고 하면 과거에 부처님들이 한량없었다는데 많은 부처님들이 왜 우리를 제도하지
않았겠는가?
부처님의 말씀<對機說法>을 듣고 우리 마음속 智慧의 門를 열어 생각 번뇌망상 환상을 걷어 없애,
자기自己가 스스로 자기를 제도濟度하는 것이다. <從聞思修 入三摩地>
부처님은 病을 잘 아는 의사와 같아서 병에 따라 약을 주었는데도<應病與藥응병여약>
환자가 藥을 먹지 않아서 病이 낫지 않는 것은 의사의 허물이 아닌 것이다.
<我如良醫 知病設藥 服與不服 非醫咎也>
⇒ 불법을 아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된다 실천으로 이어져야 한다.<聞思修> 2012. 3.18 ~ 8.19
♧ 장졸의 노래[張拙秀才頌]
지혜 빛이 고요히 항하의 모래를 두루 비추니 성현이나 범부나 다 텅~빈 한 집안 일세.
한 생각 내지 않으면 온전히 전체가 드러나고 육근이 움직이면 구름에 가려지고 마네.
혜광적조편하사 성성범범공차가 慧光寂照遍河沙 聖聖凡凡空此家
일념불생전체현 육근재동피운차 一念不生全軆現 六根纔動被雲遮
♧ 출처: 무심한.. 블로그 http://blog.daum.net/seontea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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