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이(理)와 사(事)가 하나되어 分別이 없으니

장백산-1 2016. 10. 19. 02:05

理事冥然無分別 (이사명연무분별)

이(理)와 사(事)가 하나되어 分別이 없으니

 

마음이 마음인 데서 보면 마음이 인식 주관으로 한정 된듯 하지만, 이 마음이 그대로 온갖 대상도 되고,

대상이 대상인 데서 보면 마음이 인식 대상으로 한정 된듯 하지만, 이 대상이 그대로 일체 만상으로 나

나난 마음일 뿐이니 마음에서 따로 대상을 대상에서 따로 마음을 나눌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와 같은 관계를 명연(冥然), 곧 차별을 꿰뚫고 混然一體로 하나가 된다고 하였습니다. 

 

이 세상이 하나로 원융(圓融)한 한모습이니 온 宇宙, 온 세상 그대로가 비로자나 부처님, 淸淨한 法身의 

世界인 것을 本來面目이라고도 말하고 이(理)라고도 하며 또한 마음(心)이라고도 말합니다. 그래서 화

엄경에서 三界(욕계, 색계, 무색계), 즉 온 세상이 단지 마음일 뿐[三界唯心]이라고도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마음을 거울에 비유하는 경우가 많은데 對相을 떠나 거울만으로 존재할 수 있는 마음이 있다고 생각

해서는 안 됩니다. 대상이 마음의 얼굴이라 하여 대상과 마음 두 거울이 마주 보고 서로 비춘다(兩鏡雙

照 야경쌍조)라는 비유를 들어서  말한 적이 있습니다.

 

마음과 대상이 마음이라고 하는 하나된 장(場)에서의 마음과 대상일 때의 마음이 여기서 말하는 마음

이지, 대상을 떠나 홀로 존재할 수 있는 마음이 아닙니다.

 

이제 마음의 얼굴(본래면목)을 알 수 있습니다. '갑'이 보이면 '갑'이 마음의 얼굴이요, '을'이 보이면 '을'

이 마음의 얼굴입니다. 잠시도 멈추지 않고 모든 모습으로 나툰 마음의 얼굴이 또한 그대로 대상의 얼굴

인 줄 알게 됐습니다.

 

그러면서도 마음은 마음이고 대상은 대상이니, 마음과 대상이 因緣의 장(場)에서는 하나이나 마음이 있으

므로 대상이 있고, 대상이 있으므로 마음이 있다는 根本緣起의 法則이 여기서도 그대로 적용되기 때문입

니다.

 

이 原理가 이(理)인데, 이 理가 성립되는 이유도 마음이 마음이 아니고 대상도 대상이 아닌, 곧 마음이라는

獨立된 實體가 없고 對相이라는 獨립된 實體도 없기 때문에 理가 성립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마음이 독

립된 실체가 있는 마음이 아닌 데서 마음이며, 대상도 독립된 실체가 있는 대상이 아닌 데서 대상임을 여실

히 아는 것이 스스로를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옛스님들께서는 마음 밖에서 眞理를 찾는 경우를 외도(外道)라고 말 하였습니다. 마음이 마음이면

서 그 마음이 一切 萬像으로 化顯한 것을 華嚴의 法界緣起라고 했으며, 마음마음이 겹쳐진 세계가 重重無

盡法界라고 했습니다.

 

마음과 대상은 또한 그대로 眞如空性의 자기 화현이기에 空性인 듯하면서 마음으로 대상으로 나투고, 마음

인 듯 대상인 듯하지만 그대로가 空性을 나투고 있으니 空性과 마음과 대상 그 나툼의 관계를 하나되어 분

별이 없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사실 空性을 이해시키기 위해 이(理)와 사(事)로 나누고는 있습니다만, 理 그대로 事이고 事 그대로 理인 

상태이기 때문에 부득이 方便上으로 理와 事로 나눈 줄을 알아야 겠습니다.

 

이것은 言語가 갖는 限界를 극복하기 위한 方便으로, 언어표현이되 언어로서만 이해되어서는 안 되고 

자신의 삶에서 그대로 드러나야 하는 실천의 세계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안다는 것은 실천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실천하지 않는 앎이란 앎이 아닙니다. 물론 知識과 

智慧로 나누기도 합니다만 실천이 담보되지 않으면 知識이든 智慧든 마찬가지로 아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지혜일치란 쉽지 않기 때문에 理致를 아는 것은 바로 되지만 理致를 그대로 實行하는 데는 차근

차근 익혀야 한다[理卽頓悟 事非頓徐]고 <능엄경>에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緣起實相의 理法界에서 보면 이(理)와 사(事)는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낱낱 現象의 나툼인 사(事) 

대로가 연기실상의 이(理)이기 때문입니다. 곧 理가 있고 事가 있는 것도 아니며 事가 있고 理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理와 事는 圓融한 한모습이며  事를 貫通하고 있는 理인 공(空)에 의해서 사사(事事)가 

다시 圓融한 한 모습이 됩니다.

 

이 事事에 圓融한 삶이 삼매(三昧)의 삶이며, 如來의 無量한 生命, 영원한 생명이 중생과 사물 마다에 그대

로 깃들어 있고 동시에 온 우주에 충만해 있는 것입니다. 온갖 현상, 온갖 모습이 있는 그대로 부처님, 여래

의 무량한 생명, 영원한 생명의 化顯이기 때문에 사물과 사물, 중생과 중생의 원융한 모습이 아니라 부처님

과 부처님의 圓融한 모습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수행자가 보리심(菩提心)을 낼 때는 깨닫겠다는 그 마음은 수행자의 중생심(衆生心)에서 나

오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과 부처님의 지혜광명인 불성(佛性)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수행 하는 마음 그대로 

佛性이지, 佛性이 수행하는 마음에 의해서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한 마음 한 衆生 한 事物 

그대로가 곧바로 佛性이지(心佛及衆生 是三無差別), 마음 중생 사물 그 안쪽 어딘가에 숨어 있는 것이 佛性

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때문에 처음 보리심을 낼 때 그것이 그대로 온전한 佛性인 줄을 확실히 알아차려야 합니다(初發心時便正覺).

이 같은 사실을 아는 것을 신심(信心)이라고 합니다. 이 信心 그대로 온전한 佛性이며 이것은 온 중생들의 

생명의 빛을 그대로 나툰 것이기 때문에 처음 보리심을 낸 수행자는 일체 중생을 다 제도하겠다는 원력을 

세울 수밖에 없습니다. 보리심과 대원력으로 나서는 수행의 첫발이 부처님의 세계를 이루는 원인이자 결과

가 되는 것도 이런 까닭입니다.

 

大願力이란 모든 중생이 스스로의 生命體이면서 우주법계가 한 生命으로 관계 맺고 있음을 여실히 아는

데서 출발합니다. 여기서 앎이란 실천을 뜻하기 때문에 발심수행자란 보리심에 대한 확실한 믿음과 대원

력의 실천이 항상 함께하는 사람입니다.

 

正和 스님  -마음 하나에 펼쳐진 우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