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제 모습대로행복수업 / 법상 스님
그렇기에 내가 지금 행하고 있는 이 직업이,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이 일이 어떤 의도에 의해서 행해지고 있느냐 하는 점이 중요해집니다. 똑같은 공무원일지라도, 똑같은 사회봉사자일지라도 똑같은 일을 하고 있을지라도, 또 똑같이 절에 와서 절을 하고 있을지라도 그 의도가 중요합니다. 개인의 행복과 성공을 위한 것이냐, 아니면 보다 많은 이들의 행복과 평화를 위해서 하는 것이냐 하는 그 의도가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행위 자체를 중요시 여기기보다는, 행위 이면에 있는 의도를 중요시 여깁니다. 어떤 의도로 그 행동을 했느냐, 그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겉으로 봤을 때는 아주 무자비하게 보이는 행동일지라도, 그것을 깨달음을 얻은 큰스님들이 했을 때는 무자비하다고 생각하지 않거든요. 저의 은사 스님께서는 제자들을 가르치실 때 아주 엄하십니다. 너무 엄하셔서 아주 소문이 자자하게 날 정도입니다. 뺨을 때리는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고, 때로는 거친 욕설도 하시고, 저 때만 하더라도 종종 맞았는데, 저의 윗대 사형 스님들의 얘기를 들어 보면, 지금 우리들이 잘 알고 있는 아주 유명하고 훌륭한 스님들, 그 스님들 또한 은사 스님 밑에서 공부할 때는, 거의 하루도 안 맞은 적이 없다고 그래요. 옛날에 군생활을 하다 보면, 하루라도 안 맞으면 잘 때 오히려 불안하다고 얘기를 하잖아요, 그야말로 그것처럼 하루라도 은사 스님께 안 맞는 날이 없다는 거예요. 그 정도였다는데 지금 와서 그 사형 스님들의 얘기를 들어 보면 은사 스님이 그렇게 무서웠던 것에 증오를 품고 있다거나, 아주 미운 마음을 품고 있다거나, 어떻게 사람이 그럴 수 있는지 원망한다거나 이런 것이 없습니다. 정말 신기하게도 그런 것들이 없습니다. 그 의도를 알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화를 내고, 때로는 매를 들고 하시는 그 의도, 그 이면에 있는 의도가 우리를 이끌어 주기 위해서, 깨달음으로 이끌어 주기 위해서라는 것을 우리는 그 무엇보다도 분명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것에 대해서 마음을 쓰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떤 마음을 갖고 그 행위를 하느냐 하는 그 이면의 의도가 중요합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똑같이 직장 생활을 하더라도, 똑같이 어떤 일을 하더라도 어떤 마음으로 하느냐, 그 이면에 어떤 의도를 가지고 할 것이냐 하는 이것을 분명하고 명확하게 기준을 세워 둘 필요가 있습니다. 사랑과 자비라는 바탕의 의도에 따라 회사 전체를 돕기 위해 일하는 사람이라면, 똑같은 직장 생활에서 똑같이 월급 받고 똑같이 일하는 것일지라도 거기에 무한한 공덕이 붙고 무한한 복이 쌓인다는 말이예요. 그런데 똑같이 월급 받고 똑같이 일했는데 어떤 사람은 하나 복이 안 붙는다는 말입니다. 오히려 마음으로 죄를 지으면서 그 일을 할 수도 있지요. 그러니까 겉에 드러난 일을 똑같이 하더라도 전혀 차원이 달라지는 겁니다. 어떤 사람은 그 일을 통해 사랑을 나누고 있지만 어떤 사람은 그 일을 통해 이면에서는 고통과 화와 짜증을 세상으로 내보내고 있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깨달음을 얻은 자를 볼 때 그 사람이 깨달음을 얻었는지 아닌지 알 수가 있겠습니까? 알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깨달음을 얻은 자는, 너무나도 평범해집니다. 우리와 다를 것이 없어요.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라고 하잖아요. 그러니까 평상심으로 사는 겁니다. 지극한 평상심으로. 깨달음을 얻었다고 해서 길거리에서 휙휙 날라 다니거나, 우리가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신통 자재함을 부리거나, 여러분 눈을 가만히 쳐다보고는 ‘내년을 조심하십시오. 사업에 투자하지 마세요!’ 라고 하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너무나도 똑같고 평범해지지만, 그 평범함 가운데 비범함이 스며 있는 겁니다. 그런데 중생들은 평범함 가운데의 그 비범함을 모르죠. 똑같이 밥 먹고 일하고 청소하고 똑같이 사니까 말이예요. 그러나 이 이면에 담긴 의도는 우리와는 천차만별로 차이가 납니다. 똑같은 일을 하더라도 일체 중생을 향한 대자대비심, 동체대비의 마음으로 하기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 이면의 의도가 어떠냐에 따라서 우리의 삶은 동일한 행위를 하더라도, 그 결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똑같은 행위 속에 이 우주를 먹여 살릴 만한 큰 대자비의 마음이 들어 있을 수도 있고, 또 똑같은 행위 속에 겉으로 봤을 때는 자비의 행을 하고 있지만 그 이면에는 복을 까먹는 행동을 하는 사람들도 있는 거죠. 그래서 이 사랑과 자비라는 게 중요한데, 우리가 보통 깨달음이라고 말 할 때, 깨달음은 바로 자비심 그것 자체를 의미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깨달음을 얻었다고 할 때는 그것 자체가 완전한 동체대비심, 완전한 자비심, 일체 모든 중생을 향한 완전한 자비심의 실천, 이것을 의미한다는 것이죠. - 행위 자체보다 그 이면의 의도가 중요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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