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적 시민민주주의

[100만 촛불] 실업·여혐·차별..분노한 청년·여성들 '저항' 중심에 서다

장백산-1 2016. 11. 14. 01:19

경향신문

[100만 촛불] 실업·여혐·차별..분노한 청년·여성들 '저항' 중심에 서다

윤승민·이유진·이진주 기자 입력 2016.11.13 22:57 수정 2016.11.14 00:23 댓글 156

[경향신문]

주먹 대신 촛불 지난 12일 서울 광화문 일대에서 열린 촛불집회에 참가한 시민들이 박근혜 대통령 퇴진을 요구하며 촛불을 들고 있다. 이준헌 기자 ifwedont@kyunghyang.com

■집회 문화 바꾼 ‘시민항쟁’의 주역들

한국 사회에서 청소년, 그리고 여성들은 입시지옥과 취업지옥, 유리천장과 여성혐오에 시달리며 이른바 ‘헬조선’의 희생자이자 실패자로 규정되곤 했다. 그러나 그들이 ‘11·12 100만 촛불 항쟁’의 주역이었다. ‘1020세대’와 여성들이 평화시위를 주도했다. 창의적이고 재치 있는 문구와 구호도 그들의 작품이다. 분노의 목소리에 축제의 흥을 불어넣은 것도 청소년과 여성들의 몫이었다.

지난 12일 오후 집회 전부터 서울 광화문 일대에서는 교복을 입은 중·고등학생들이 눈에 띄었다. 경기 의정부시에서 온 정재형군(16)은 ‘대한민국 권력은 국민에게 있는가’라는 손팻말을 들고 서서 “세월호부터 국정교과서에 이르기까지 참을 수 없이 화가 났다”고 말했다. 학교 점퍼를 입은 채 깃발을 들고 참여한 대학생과 청소년들도 많았다. 대학생 조단원씨(24)는 “나만큼이나 변화를 말하고 싶은 사람이 많다는 연대감을 느꼈다”고 말했다.

젊은이들은 평화롭고 흥겨운 집회 분위기를 주도했다. 청소년 단체들은 박근혜 대통령의 연설문을 패러디한 ‘국민의 뜻이 우주의 뜻이다’라는 글귀가 적힌 별모양 풍선을 주변에 나눠줬다. 청소년들은 ‘경축 박근혜 20대 지지율 0%’ ‘민중총궐기에 나온 것은 이 모든 의지를 우주에 담아…’ 등의 손팻말을 직접 제작해 들고 나왔다. 손팻말과 광장에 붙은 포스트잇에는 1020세대가 익숙한 소셜미디어에 쓰이는 ‘해시태그(#)’가 눈에 띄었다.

광화문광장에서 오후 2시부터 방송인 김제동씨의 사회로 열린 ‘청년이 함께하는 만민공동회’에서는 “일본 친구가 너희 나라는 마법사가 진행하는 나라라더라” “(대통령이) 한국의 10·20대 의식을 일깨웠다” 등 청소년들의 촌철살인이 이어졌다. 내자동 로터리 등에서 경찰과 참가자들이 몸싸움을 벌이며 맞설 때는 “밀지 맙시다”, “경찰차를 두드리지 맙시다”, “평화시위 합시다”라는 젊은이들의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그들의 문제의식과 메시지도 가볍지 않았다. 강원 철원군에서 온 18세 고등학생은 인파 속에서 경찰을 향해 “여러분이 지켜야 하는 것은 국민들이지 무능한 박근혜씨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자유발언대에 오른 시민들 가운데 10대 청소년들이 꽤 있었다.

여성의 참여도 두드러졌다. 집회 참여자 중 여성 비율이 절반에 육박할 정도다. 전국여성연대 등 9개 여성단체들은 이날 ‘여성·장애인·청소년 등 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비하가 없는 집회’를 제안했다. 행진 대열 한쪽에서 “박근혜 병X년”이라는 여성을 비하하는 욕설이 섞인 구호가 나오자 다른 쪽에서는 “여성과 장애인을 비하하는 말이니 하지 말라”는 목소리도 나왔다.

공식 집회가 끝난 후 쓰레기를 주운 사람들도 주로 10·20대였다. 이들은 대형 쓰레기봉투를 자비로 사서 직접 쓰레기를 줍고 행인들에게 “쓰레기를 주우세요”라고 외쳤다. 행진 인파가 오간 거리는 별도로 청소를 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깨끗했다. 여자친구와 함께 이날 광화문광장을 찾은 권재현씨(25)는 “2002년 월드컵 이후로 함께 모여서 한목소리를 내는 게 처음”이라며 “오자마자 가슴도 벅차고 우리가 할 수 있다는 마음도 들었다”고 말했다.

중앙대 이나영 교수(사회학)는 “1987년 민주화 체제의 세대들은 폭력을 당하며 살아왔기 때문에 과격한 저항 방법이 내재돼 있다”며 “젊은 세대들은 그 이후 발전한 성숙한 시민의식을 감각적으로 체득한 채 태어나 질서 있는 저항을 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가족과 처음 나온 60대 주부 “대통령이 최순실 하수인 아니냐…1번 찍은 것 후회”

박선자씨(69·서울 강북구)는 박근혜 대통령 퇴진을 요구하는 ‘100만 촛불집회’에 참여하기 위해 큰아들, 손자, 손녀와 함께 12일 서울 광화문광장에 나왔다.

2남1녀를 키우며 주부로 살아온 박씨는 “69년 평생 처음으로 집회에 나왔다”고 했다. 그는 “옛날에 민주화운동하고 이럴 때는 살림하느라 바빠서 못 나왔다. 나올 시간도 없고 안 나갔다”고 말했다. 그런 박씨가 이날은 촛불집회에 나가고 싶다고 큰아들을 설득했다. 그는 “내가 가자고 그랬다. 안 그러면 나 혼자라도 간다고. 최순실이 나라를 쥐고 흔드니까 나왔다”고 말했다.

박씨는 “최순실이 너무 나라를 농락했다”며 “어이가 없다. 세상에 못 배운 우리도 농간에 안 넘어간다. 그런데 대통령이 최순실의 농간에 넘어갔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고 한탄했다. 그는 “(대통령은) 지식인 아니냐, 지식인. 그런 대통령이 최순실한테 놀아났다는 것은 진짜 이해가 안 간다. 박근혜가 최순실의 하수인 아니야”고 말했다.

박씨는 지난 대선에서 기호 1번(박 대통령)을 찍었다. 그는 “이럴 줄은 몰랐다”며 “잘할 줄 알았다. 배신감이 든다”고 했다. 또 “다들 괜히 찍었다고 한다. 우리 동네 사람들은 다 후회한다. 한 사람도 후회 안 하는 사람이 없다”고 말했다.

박씨는 이날 밤 추위를 대비해 머리엔 붉은색 털모자를 쓰고 목엔 스카프를 동여맸다. 그는 많은 인파가 모인 광화문광장을 바라보며 “살면서 이런 광경은 처음 봤다”고 말했다. 가족들과 광장 한편에 자리 잡은 박씨는 지나가는 집회 참가자들을 향해 ‘박근혜 퇴진’이 쓰인 손팻말을 흔들어 보였다.

박씨는 이날 오후 9시가 지나 가족들과 집으로 돌아갔다. 박씨는 13일 경향신문과의 통화에서 “집회에 참가해보니 이렇게 가다가 정말로 세상이 바뀔 것 같더라”며 “집회는 좋았지만 다시는 이런 사태가 없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쓰레기 줍던 10대의 울분 “공부를 해도 나중에 가치 없는 사회가 될까 두려워요”

지난 12일 서울 광화문 일대에서 열린 ‘100만 촛불항쟁’에 참가한 고교 2학년생 오원준군(18)은 공식 행사가 끝난 뒤 거리에서 친구들과 함께 쓰레기를 주웠다.

오군은 “광화문역에 도착했을 때 쓰레기를 정리하는 대학생들이 멋있어 보였다”며 “페이스북에 올라온 집회 현장에 버려진 쓰레기 사진들이 떠올라 친구들과 종량제 봉투를 사서 왔다”고 말했다. 그는 “수차례 집회에 참여했지만 쓰레기를 치운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했다.

오군은 “세월호 참사가 있은 지 2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진실규명을 요구해야 하는 상황이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았다”며 “우리가 공부를 하더라도 나중에 가치가 없어진 사회가 되는 게 아닌가 하는 두려움에 집회에 나가고 있다”고 말했다. 오군은 “이번 비선 실세 사태로 박근혜 대통령을 지지했던 분들은 물론 국민 모두가 바보가 됐다”고 말했다. 그는 특히 “우리는 잠도 못자고 공부하는데 최순실씨 자식은 아무렇지 않게 명문대에 들어간다”며 “한 사람이 이화여대에 들어간 게 문제가 아니라 배후에 훨씬 더 많은 일들이 있을 거라는 생각에 화가 나서 참석했다”고 말했다.

오군은 “이번 집회 현장에서 경찰을 밀치기 위해 ‘비켜라 비켜라’ ‘밀어라. 뒤에서 밀어야 뚫지’라고 말하는 분들이 있었는데 나는 따라하지 않았다”며 평화시위를 강조했다. 그는 “한 명이라도 다치면 우리에게 엄청난 손해이고 경찰도 마찬가지”라며 “집회에는 어떤 폭력도 사용해선 안된다”고 말했다.

오군은 “내 친구들은 물론 정치에 관심 없었던 10대들도 언론 기사를 찾아보고 집회에 나온다”며 “박 대통령이 납득할 만한 해결책을 보여줘야 국민의 화도 가라앉고 학생인 저희들도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지 않겠나”라고 말했다. 오군은 13일 경향신문과의 통화에서 “오늘 새벽 2시까지 쓰레기 치우고 나니 지하철이 끊겨서 편의점에서 컵라면 먹고 첫 차를 타고 집에 갔다”면서 “함께한 친구들도 뿌듯해 해 다음 집회에서도 또 치우겠다”고 말했다.

<윤승민·이유진·이진주 기자 jinju@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