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적 시민민주주의

시민이 개헌 주도한 아이슬란드..이런 게 '주권자 권리'

장백산-1 2016. 11. 15. 22:57
경향신문

[70창간기획-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인가]

시민이 개헌 주도한 아이슬란드..  이런 게 ' 주권자 권리'


김형규 기자 입력 2016.11.15 22:12

[경향신문] ㆍ시민 통치는 가능한가

‘11·12 박근혜 퇴진 촉구 시민대행진 추진위원회’에 참여한 시민들이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박근혜 대통령을 국정농단 책임자로 지목하고 스스로 퇴진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정지윤 기자 color@kyunghyang.com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인가? 질문을 받은 하승수 변호사(비례민주주의연대 운영위원)는 “우리의 삶과 일상이 누구에 의해 어떻게 결정되고 있느냐”고 되물었다. 어떤 나라가 민주공화국인지를 분석하는 틀 중 하나는 ‘누가 지배하는가’이다. “민주공화국은 다수의 국민들이 참여해서 공동체의 문제를 결정하는 것인데 지금 과연 누가 결정하고 누가 지배하고 있죠?” 그에게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 아니다. 과두제이다. 재벌, 기득권 정치세력, 행정·사법관료, 기득권 언론이라는 소수가 다수의 시민을 지배하는 사회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는 최악의 소수 지배를 보여준다. 박근혜 대통령과 ‘비선 실세’ 최순실씨(60)는 청와대를 비롯한 국가기관을 총동원해 사익을 추구했다. 재벌들은 800억원이 넘는 돈을 갖다 바쳤다. 그 대가로 막대한 이익을 챙긴 혐의가 드러나고 있다. 정부는 꼭두각시 역할에 충실했다.

■왜 주권자인 시민은 결정 못하나

민주공화국이라면 중요한 사회적 의제나 국가 정책 결정은 주권자의 뜻에 따라야 한다. 박 대통령 집권 기간 이뤄진 정부의 주요 정책 결정 과정은 대부분 비민주적이고 독점적이었다.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사드) 배치, 개성공단 폐쇄, 한·일 위안부 졸속 합의가 그랬다. 노무현 정부 때 시작된 제주 강정마을 해군기지 건설, 이명박 정부 때 불거진 밀양 송전탑 건설도 강행했다. 박명림 연세대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위안부 합의는 3년 정도 비교적 잘 지켜오다가 국민이나 이해당사자들의 의사를 듣지 않고 마치 군주의 의사 결정처럼 급전환했죠. 사드 배치도 한·중관계와 남북관계를 고려해 잘 지켜오다가 밀실 결정으로 급변침하는 식이었고요. 개성공단 역시 전쟁이 난 것도 아닌데 입주기업들의 권리나 이익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하루아침에 전면 폐쇄 방침을 발표했습니다. 결정 과정은 전혀 민주적 절차를 따르지 않았고, 국민의 이익을 국가가 보장하는 공화주의도 찾아볼 수 없었죠.”

자신의 생명과 재산이 걸린 문제에서조차 직접 이해당사자인 주민들은 들러리 신세였다. 정부가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는 정책을 반대하면 집단이기주의로 매도됐다. 소수 지배 권력은 정책에 반대하는 이들을 나머지 국민과 분리시킨 뒤 ‘외부세력’ ‘불순세력’으로 몰아 공격했다. 새누리당 정진석 원내대표가 지난 10월 광화문광장에서 세월호 참사와 고 백남기 농민 관련 농성을 하는 사람들을 향해 “국가 공권력 추락이 빚어낸 부끄러운 자화상”이라고 공격한 것이 대표적 사례다.

이택광 경희대 교수는 “경북 성주에 사드를 배치하자는 결정이 누가 어떻게 논의해 이뤄진 것인지 시민들은 알 방법이 없다”며 “이런 식의 밀실 합의와 일방적 통보에 대해 시민들이 항의하면 경찰력을 투입해 찍어누르고 공안정국을 조성해 돌파하는 것이 정부의 반복된 행태였는데, 이런 권위적 통치는 공화주의와 거리가 멀다”고 말했다.

■생명·재산 보호 못하는 국가

박근혜 정부는 시민의 생명과 재산 보호라는 국가의 기본 책무에서부터 무능하고 소홀했다. 304명의 생명이 죽어가는 걸 온 나라가 눈 뜨고 지켜봐야만 했던 세월호 참사가 불과 2년 전이다. “민주공화국이 아니라 그냥 국가의 부재를 보여주는 사건”(한상희 건국대 교수)이었다. 해경을 해체하고 국민안전처를 신설했지만 지난 9월 경주 강진 때도 ‘정부의 부재’가 드러났다. 재난 대응 컨트롤타워가 없고 각 부처가 따로 노는 난맥상은 되풀이됐다. 시민들은 국민안전처 홈페이지나 공영방송의 재난특별방송보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지진 관련 정보를 더 많이 얻었다.

원자력발전소 사고를 우려하는 여론이 비등할 때도 원전 사업자인 한국수력원자력과 기상청은 “안전하다” “그럴 일 없다”는 말만 반복했다. 며칠 지나지 않아 진앙에서 반경 50㎞ 안의 고리·월성 원전 인근에 활성단층이 존재하고, 이 단층에서 최대 규모 8.3의 지진이 발생할 수 있다는 비공개 정부 보고서 내용이 경향신문 보도로 공개됐다. 시민들에겐 ‘위험의 자기결정권’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저마다 SNS에서 ‘생존 배낭’ 꾸리는 방법을 검색해가며 각자도생을 꾀할 수밖에 없다.

지난 2월 개성공단 전면 폐쇄는 헌법의 ‘재산 보호’ 의무(23조)를 저버린 사건이기도 했다. 북한 핵 도발 제재를 명분으로 공단을 폐쇄하면서 입주기업들은 하루아침에 사업 근거를 잃었다. 이들은 정부의 갑작스러운 공단 폐쇄가 적법 절차를 위반하고 재산권을 침해한 위헌 행위라며 지난 5월 헌법소원을 청구했다.

이들이 추산하는 손해액은 1조5000억원이 넘는다. 그러나 북한은 이후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을 포함해 20발이 넘는 미사일을 발사했고 5차 핵실험도 강행했다. 안보 대치가 격화되는 속에서 개성공단만 희생양이 된 꼴이다.

지배와 통치의 도구 ‘안보 상업주의’도 다시 봐야 한다. 1972년은 “정치적으로는 유신, 경제적으로는 중화학공업정책, 조세 및 복지정책에서는 소득세와 기업 부담을 줄이고 간접세에 의존하는 저부담, 저복지 체제가 도입된”(장덕진 서울대 교수) 해였다. 독재 체제를 옹호할 때도, 노동자들의 단체행동을 제한할 때도 ‘72년 체제’가 내세운 핵심 가치가 안보였다.

정권의 안보는 ‘민주공화국’의 그것과는 다르다. ‘안전보장’의 줄임말인 안보는 사전을 보면 ‘외부의 위협이나 침략으로부터 국가와 국민의 안전을 지킨다’는 뜻이다. 혁명사를 전공한 최갑수 서울대 교수는 근대 이후 모든 국가의 최우선 목표는 구성원의 안전보장이었다고 설명한다.

“국가의 존재 이유는 인간의 기본권을 지키는 것이다. 기본권은 결국 사람의 생명을 말하는 것이고 그와 관련된 자유와 안전을 포괄한다. 프랑스대혁명 이래 모든 혁명의 인권선언과 근대국가의 헌법에 안전에 대한 내용이 포함된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국민의 안전을 보장하지 못한다면 국가로서 존재 가치가 없는 것이다.”

최 교수는 “헌법 전문에 ‘우리들과 우리들 자손의 안전과 자유와 행복을 영원히 확보할 것을 다짐’한다고 돼 있다”며 “한국은 헌법 선언과는 달리 내부로부터 국가의 기본 가치를 허물고 있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는 한국이 근대국가로서 최소한의 공적 시스템도 갖추지 못했다는 걸 드러냈다. 통치와 지배 문제에다 대의민주주의 제도의 한계를 보여준다. 시민의 지배와 통치는 불가능한가. 주권자인 시민은 거리로 나가 촛불을 드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것일까.

■권력 분산과 직접민주주의 확대로 가야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은 직접민주주의 요소를 강화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관에 맞서는 민의 대항체로 전국적 차원의 시민의회를 구성하는 것도 고려해볼 만하다”며 아이슬란드의 예를 들었다. 아이슬란드는 2010년 무작위로 선발한 시민 1000여명이 헌법 개정을 주도한 경험이 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책임을 규명하고 대안을 마련하라는 요구가 커질 때였다. 이 실험은 기성 정치세력에 대항하는 ‘해적당’의 약진으로 이어졌다.

국민투표 활성화와 국민발의제, 사법부 수장 직선제, 검찰총장 직선제 같은 대안도 나왔다. 박경신 고려대 교수는 “이명박 정부의 4대강 사업만 해도 국민이 직접투표 등으로 결정에 참여할 수 있었다면 결과에 관계없이 민주주의 학습의 기회가 됐을 것”이라며 “대법원장과 검찰총장 등 사법부 고위직도 평판사·평검사들이 투표로 뽑은 ‘최고사법위원’들이 임명하는 식으로 바꾼다면 사법부의 불신이 지금보다는 많이 줄어들 것”이라고 했다.

김상봉 전남대 교수는 지방자치의 급진적 강화를 대안으로 내놨다. 김 교수는 “중앙정부가 독점한 국가 권력과 예산을 인구 비례에 따라 다 나눠야 한다”며 “지방자치단체들이 무상급식, 반값등록금, 기본소득 등 다양한 복지·사회 정책을 두고 선의의 경쟁을 하게 만들면 자연스럽게 권력이 시민을 위해 봉사하는 민주공화국의 정신이 구현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여러 지식인들은 주권재민을 현실화할 방안으로 한결같이 기존 권력의 분산을 꼽았다. 문자 그대로 공화국을 ‘모두의 것’으로 만들기 위한 방안이다. 시민의 자기 통치가 가능하려면 정치·경제 권력을 보다 평등하게 나눠야 한다는 것이다.

박명림 교수는 “헌법에서 가장 중요한 게 주권재민 원칙”이라며 “이걸 실현하려면 대통령 권력과 행정부 권한이 입법부를 압도하는 지금의 권력구조부터 바꿔야 한다”고 했다. 주권자인 국민의 뜻을 위임받은 의회가 우위에 서서 대통령 권력을 견제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박 교수는 “의회 강화를 위해선 의원 숫자를 지금보다 배 이상 늘리고, 현재 행정부가 독점한 인사·예산·정책·감사권 중 최소한 절반 이상은 의회가 가져와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권력의 구성과 감독·감시와 관련된 업무를 행정부로부터 독립시켜 입법-사법-행정부에 이은 제4부로서 ‘감독부’를 설치하자는 제안도 했다.

■특별취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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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규 기자 fidelio@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