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이 나라에서는 염치(廉恥)를 모르는 인간들의 기만적이고 한심한 작태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동안 국가와 국민을 능멸해 온 핵심인물들이 국회 청문회장에 불려 나와 보여주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자니 노엽다 못해 슬프기까지 했습니다.
청문회를 보는 내내 저들이 정녕 ‘부끄러움’이 무엇인지 모르는 인간들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내 눈에 그들은 ‘법(法)’을 잘 알거나 법 전문가들의 조력을 충실하게 받고 있는 사람들로 보였습니다. 그들의 대답은 이미 범죄의 구성요소를 철저히 파악해 죄(罪)와 벌(罰)을 피할 수 있는 답변들로 채워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부끄러움은 법의 조문으로 규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부끄러움은 문장으로 규정했다 하여 생기고 종이에 기술되지 않았다 하여 소멸하는 것이 아닙니다. 부끄러워할 줄 아는 마음과 행동은 오히려 ‘사람다움’의 추구에서 출발합니다. 내가 아는 한 지난날과 행동을 부끄러워할 줄 아는 생명의 특성은 오직 인간에게만 있는 고유한 성(性)입니다. 쥐나 너구리, 닭, 돼지가 부끄러워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내가 노여운 것은 그들의 몰염치 때문이고, 인간애를 지닌 한 인간으로서 그들에게 갖는 안타까운 마음은 그들이 스스로 인간 고유의 성(性)을 내동댕이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으로서 권력과 물질을 누리는 삶의 반열을 얻고 유지한다 하여 좋은 삶을 사는 것이 아님을 그들은 모르고 있습니다. 오히려 우리 인간 안에 깃들어 있는 고유하고 유일한 성(性), 불교적 표현으로는 불성(佛性)을 발견해 그 성(性)을 발현하고 실천하며 살아갈 때 그 삶이 참으로 좋은 삶임을 그들은 조금도 알지 못하는 존재들입니다. 그래서 나는 지난 호의 글에서 그들을 숲에 빗대어 기생식물과 반기생식물로 표현했습니다.
이제 여기 110여년 전 한없이 무기력한 시대를 살았지만 기생이나 반기생의 식물처럼 사는 것을 단호히 거부했던, 진정 부끄러움을 알았던 몇 사람을 소개해 보겠습니다. 1905년 11월 이완용을 비롯한 이른바 기생식물 같은 선택을 한 을사오적에 의해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장지연 선생은 그달 20일자 ‘황성신문’에 이런 논설을 썼습니다. “오호라. 개돼지 새끼만도 못한 소위 우리 정부 대신이라는 작자들이 이익을 추구하고, 위협에 겁을 먹어 나라를 파는 도적이 되었으니, 사천년 강토와 오백년 종사를 남에게 바치고 이천만 국민을 남의 노예로 만들었으니…. 아, 원통하고도 분하도다. 우리 이천만 남의 노예가 된 동포여! 살았는가? 죽었는가?” 부끄러움을 아는 언론인의 비분강개가 이랬습니다.
또한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한 안중근 의사는 평소 “이익을 앞에 두고는 옳고 그름을 생각하고, 위험한 상황에서는 내 목숨을 내놓는다(見利思義 見危授命)”라는 신념을 견지하신 것으로 유명합니다. 옳고 그름을 팽개치고 사익을 추구하는 데 혈안이 된 기생과 반기생적 군상들에게 내려치는 죽비가 이렇습니다. 그리고 구례 산골에 살았던 시골 선비 매천(梅泉) 황현 선생은 늑약이 맺어진 나라의 선비로 사는 것이 부끄럽다며 “인간 세상에 글 아는 사람 노릇하기 어렵기만 하다”라는 절명시를 남기고 자결했습니다.
옛적 언론인과 교육자, 심지어 시골의 선비조차 이토록 부끄러움을 참을 수 없어 했는데, 오늘날의 사태에 기생과 반기생의 형태로 연루된 이 시대의 선비들은 부끄러움을 모른단 말인가 묻고 싶습니다. 그간 언론이 어떠했는지? 검찰과 관료는 어떠했는지? 정치인들은 어떠했는지 묻는 것입니다.
누군가 내게 잘못을 저질러 놓고는 주인의 눈치를 보더라는 경험을 전하며 개는 부끄러움을 아는 것 같다 했습니다. 그것은 개가 부끄러움을 아는 때문이 아닐 것입니다. 오히려 끝없이 야단을 듣거나 얻어맞는 경험이 축적된 탓일 것입니다. 오히려 두려움 때문인 것이지요. 그러니 부끄러움을 모르는 존재들에게는 두려움이 필요합니다. 두려움을 느끼게 해야 같은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 것이지요. 부끄러움을 아는 시민들의 연대와 참여만이 그 두려움을 주는 역할을 할 것으로 확신합니다.
김용규 숲철학자 happyforest@empa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