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화엄경(華嚴經)

장백산-1 2017. 3. 16. 00:10

화엄경(華嚴經)


대승불교 초기의 경전이다. 석가모니의 성도(成道)의 깨달음을 가장 훌륭하게 드러낸 최고의 경전으로 

손꼽히고 있다. 원제는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이다. 우리나라 화엄종의 근본경전이다. 불교

전문강원의 대교과(大敎科)에서 가르치고 있다.


한역본(漢譯本)은 권수에 따라 세가지가 전한다. 북인도 출신인 중국 동진(東晋)때 승려 불타발타라(佛陀

跋陀羅)의 "60화엄", 당나라때 승려 실차난타(實叉難陀)의 "80화엄", 반야(般若)의 "40화엄"이 그것이다. 

여기서 "40화엄"은 "60화엄"이나 "80화엄"의 입법계품(入法界品)으로 완역본이 아니다. 동아시아에서는 

"60화엄"이 가장 널리 유포되어 있다. 화엄경은 부처가 되기 위한 수행과 화엄처럼 피어나는 인과응보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을 교주로 한다. 4세기쯤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60화엄"은 7처(處·설법장소) 8회(會·설법횟수) 34품(品·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중국에서는 이 경을 바탕

으로 6세기에 현수종(賢首宗)이란 화엄종이 창종되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원효와 의상이 이 경전을 연구, 

화엄종을 개창했다. 법화경과 더불어 한국 불교의 2대 경전이다. (현대불교 미디어센터)



화엄경 (上) / 김호성<동국대 교수>


“하나가 전체요 전체가 하나(一卽一切 一切卽一)” 


한걸음에 여래의 지위 들어간다  상즉논리로 돈오 체계있게 설명 


선불교는 일상언어의 논리와는 다른 논리를 갖고 있다. 비논리의 논리이다. 중국의 한 선사는 노래했다. 

“회주(懷州)의 소가 벼를 먹었는데 익주(益州)의 말이 배부르네.” 도대체 무슨 말인가? 여기서는 공간의 

관념도, 자타의 관념도 모두 무너진다. 좀더 쉬운 말로 하면, “한 걸음에 여래의 지위에 들어간다”고 바

꾸어 말할 수 있다. 어떻게 저 높은 부처님의 경지를, 감히 중생이 한 걸음에 들어갈 수 있단 말인가? “한 

걸음에 여래의 지위에 들어간다”는 말은 선불교의 기본입장을 천명한 것이다. 중생과 부처 사이에 가로

놓여 있는 어떠한 간극도 무너뜨린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하단 말인가? 이에 대해서는 두가지 차원의 

이해가 가능하다. 첫째는 논리적 차원이며, 둘째는 철학적 차원이다. 우선 논리적 차원을 살펴보자.


한 걸음에 곧바로 여래의 자리에 들어가는 자는 중생이다. 따라서 이 인용구 속에는 여래와 중생의 존재

가 같이 가정(假定)되어 있다고 볼 수 있으며, 그 양자는 일치한다는 의미이다. “중생이 곧 부처다.” 이는 

선불교가 내세우는 깃발이면서 동시에 화엄이 내세운 깃발이기도 하다. “중생이 곧 부처”라는 명제에서 

중생을 하나(一)로 본다면 부처는 무량(無量)이라 해야 할 것이다. 중생이 부처라는 것은 곧 하나가 무량

이라는 말이다.


이같은 논리를 <화엄경>에서는 “하나 가운데 무량을 알고 무량 가운데 하나를 안다”라고도 말하고, 또 

“하나는 능히 무량이 되고 무량은 능히 하나가 된다”고도 말한다. 전자는 포함관계이고, 후자는 동치(同値)

관계이다. A와 B가 서로를 포함하고 있다(相入)는 것은 A와 B가 같다(相卽)는 말이다. 이러한 논리를 ‘상즉의 논리’라고 부르는데, 그렇게만 말하는 까닭은 상즉이라는 개념 속에 이미 상입의 뜻이 들어와 있기 때문이다. 


“하나가 전체이고 전체가 하나”라는 말은 상즉의 논리를 총론적으로 말한 것인데, 이러한 논리는 다시 공간·시간·성불과 관련하여 각론적으로 전개된다. 공간적으로는 하나의 티끌이 시방세계에 포함될 뿐만 아니라 “하나의 티끌 속에 시방세계가 다 포함된다”고 말하며, 시간적으로는 “일념이 무량겁이며 무량겁이 곧 일념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공간론이나 시간론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성불론이다. 공간론과 시간론 역시 “초발심이 곧 깨달음”이라 말하는 성불론(成佛論)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요청되기 때문이다. 


중생이 한 걸음에 여래의 지위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한다면 선불교는 애시당초 성립할 수 없었을 것이다. 돈오(頓悟)는 선불교의 생명이다. 그같은 돈오를 가능케 하는 논리적 근거가 바로 <화엄경>의 ‘상즉의 논리’이다. 논리적으로 볼 때, 선불교의 돈오는 상즉의 논리 위에서 건립된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나와 무량의 동일함을 증명할 수 있는 것일까? 부처와 중생이 동일시될 수 있는 것은 부처도 부처가 아니고 중생도 중생이 아니기 때문이다. 부처가 부처가 아니며, 중생이 중생이 아니라는 것은 자기정체성의 부정, 자기동일성의 부정에 다름 아니다. 부처가 부처가 아니라는 것은 부처가 공이라는 말이며, 중생이 중생이 아니라는 것은 중생이 공이라는 메시지다.


따라서 중생이 부처라는 것은 공과 공의 동일성을 의미한다. 공은 공이다(0=0). 이러한 동어반복은 당연히 참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공의 논리는 선불교에 깊은 영향을 미친 <금강경>과 같은 반야부 경전에서 널리 설해지고 있음은 주지하는 바이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논리적인 차원에서 볼 때 선불교의 돈오는 가까이는 <화엄경>의 상즉의 논리가 있었기에 가능했으며, 다시 상즉의 논리는 반야부 경전에서 설해지는 공의 논리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반야 → 화엄 → 선불교”로 이어지는 사상사의 계보를 그릴 수 있게 된다.



화엄경 ( 中) / 김호성<동국대 교수>


“자성이 청정하면 깨달음 온다” 

-선과 화엄 하나되는‘성기사상’제시-


선불교의 모토는 중생이 곧 부처라는 것이다. 사람들의 마음을 바로 가리킨다(直指人心)거나 성품을 보아서 부처를 이룬다(見性成佛)라고 쓰여진 선불교의 깃발은 그같은 소식을 나타내 보이고 있다. 이에 대한 논리적 차원의 이해는 앞에서 살펴본 바 있는데, 이제 철학적 의미를 살펴보기로 하자. 선가에서 말하는 “곧바로 여래의 지위에 들어간다”는 것은 도대체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인간을 바라보는 선불교의 관점이 따스하기 때문이다.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 죄도 많고, 업도 많은 존재인가? 아니면 성스러운 존재인가? 이 문제에 대한 대답에 따라서 종교가 달라지고, 한 종교 안에서도 종파가 달라진다. 인간관에 따라서 수행법(구원론, 修證論)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유식불교가 번뇌의 존재로부터 인간을 바라보고 수행체계를 세우고 있다면, 선불교는 ‘인간은 부처다’ 라고 규정하면서 그 나름의 수행체계를 세워간다. 불교 안에서는 선불교 외에도 대표적으로 <화엄경>에서 인간은 청정하다고 말한다. 유식불교가 인간을 겉으로부터 보고 있으므로 상종(相宗)이라 불린다면, 화엄불교는 인간을 속으로부터 관찰하기에 성종(性宗)이라 이름된다. 이른바, 육조혜능이 “마음자리에는 본래 허물이 없고, 본래 어지러움도 없으며, 본래 어리석음도 없다”고 말하였을 때에도 인간을 저 깊은 속에서부터 바라보았기에 가능한 선언이었다. 돈오(頓悟)의 입장이다. 이렇게 볼 때, 본래 성품이 청정하다는 것은 선에서 말하는 돈오의 가능성이고, 전제조건인 셈이다. 아니, 자성의 청정이 곧 깨달음이고 선이다. 


<화엄경>에서 이렇게 자성청정을 말하고 있지 않다면, 돈오를 주장하는 선불교의 입지(立地)는 없을는지도 모른다. 이러한 선불교의 철학적 배경을 이루는 것이 <화엄경>의 성기(性起)사상이다. 성기라는 술어는 60권본 <화엄경>의 보왕여래성기품에서 유래한다. “어떠한 중생도 그 몸에 여래의 지혜가 완전히 들어가 있지 않은 중생은 하나도 없다. 그러나 사람들은 상념에 집착하기 때문에 여래지를 깨닫지 못한다. 상념에 집착하는 것을 떠나면, 일체지(一切智)·무사지(無師智)는 집착이 없으므로 다시 나타날 것이다.” 이러한 성기사상을 나타내기 위해서 ‘성기품’은 여러 가지 비유를 들고 있는데, 그 중의 백미는 미진경권유(微塵經卷喩)이다. 


“예를들어, 불자여 삼천대천세계의 크기 만큼 큰 경전이 있다고 하자. (----) 진실로 저 큰 경전이 하나의 극미(極微)의 먼지 속에 들어가 있다고 하자. 저 하나의 극미의 먼지 속에 저 큰 경전이 들어가 있는 것과 같이, 다른 모든 극미의 먼지 속에도 그만큼의 큰 경전이 그 안에 들어가 있다.”


물론, <화엄경>의 성기사상은 그 기초에 여래장사상이 놓여있음은 사실이다. 그러나 여래장이 가능태를 나타내고 있다면 성기는 현실태를 말한다. 여래장이 잉태의 순간을 말하는 것이라면, 성기는 출산의 순간에 초점을 맞춘 것이라 할 수 있으리라.


먼지라 하였던 것이 사실은 알고보니까 경전이었던 것처럼, 모든 인간은 곧 부처이다. 이같은 관점에서 화엄은 현실을 긍정하며, 현실이 곧 절대라고 본다. 선종의 황금시대를 구가했던 마조스님이 ‘평상심이 도(平常心是道)’이며, ‘일체가 곧 진리’(一切皆眞)라 말하였던 데에는 이같은 성기사상이 그 배경에 놓여있었음을 알 수 있다. 


성기, 이 자리에서 선과 화엄은 만난다,즉 하나가 된다(禪嚴一致). 여러 선사들이 화엄을 좋아했던 까닭이 여기 있는데, 한국선은 더욱 그같은 전통을 잘 잇고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화엄경 <下> / 김호성<동국대 교수>


“보현행 실천이 화엄삼매” 

-보리가 무심히 나타난 게 해인삼매- 


<화엄경> 속의 어떤 가르침이 선불교 속으로 들어가게 된 것일까? 이러한 문제에 대한 해답을 논리적 측면과 철학적 측면으로 나누어 살펴보았다. 이제는 마지막으로 수행적 측면을 살펴보기로 하자. 화엄의 수행론은 무엇인가? 우선 머리에 떠오르는대로 적어보자. 


<화엄경>에는 수많은 삼매가 제시된다. 삼매야말로 선과 깊은 관련을 갖고 있는 것 아닐까. 또 각종각양의 보살행이 강조된다. 대승경전 중에 그 어떤 경전도 보살행을 설하지 않음이 없지만, 그래도 그 폭과 깊이에 있어서 <화엄경>만큼 곡진(曲盡)한 경전도 없을 것으로 생각된다. 적어도 열번씩은 반복되는 강조의 수사학(修辭學)을 생각해 보라. 특히, 그 극적 전범을 우리는 보현보살의 행원 속에서 보고 있지 않은가. 이리하여 앞에서 제기한 질문은 다시 ‘선과 보현행의 관계’에 대한 물음으로 바뀌게 된다. 


그런데 주의할 것은 보현행 역시 성기와 맥이 이어져 있다는 사실이다. <화엄경>을 대표하는 이들 두 사상은 다시 해인삼매와 화엄삼매로 치환해서 생각해 볼 수 있다. 후대 중국의 주석가들에 의해서 해인삼매는 총정(總定)으로 평가받아 왔는데, 동시에 그것은 결과로서 얻어지는 선정(果定)인 것으로 평가된다. 그런데 <화엄경>에서 ‘해인삼매’가 설해지는 맥락 중의 하나가 ‘성기품’이라는 점은 수행적 측면에서 논의되는 해인삼매가 사실은 성기와 잇대어져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성기품’의 한 게송은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모든 법이 허공과 같아서 / 아(我)도 아니며 무아(無我)도 아님을 요달하여 모든 법을 등각(等覺)하는 것이다. / 비유하면 모든 대해에 모든 중생들의 모습이 두루 나타나므로 / 일체인(一切印)이라 설하는 것이다. / 시방세계 중의 모든 중생류는 / 무상보리의 바다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는 것이다.” 일체인이 곧 해인이다. 다시 이러한 해인삼매는 정혜등지(定慧等持)라고 볼 수 있다. 중국 선종의 육조(六祖)가 말한 것처럼, 선은 바로 정과 혜가 하나로 어우러져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같은 점에서, 모든 삼매가 바로 선의 세계 아님이 없지만, 해인삼매 속에서 우리는 선적 취의(趣意)를 확연히 확인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중국 화엄종의 제4조 징관(澄觀)이 해인삼매를 “보리가 무심(無心)히 돈현(頓現)함“으로 이해하는 것도 그같은 특성을 파악했기 때문이리라. 이같은 해인삼매에 대하여, 그의 사상이 선사상과 연결된다고 평가되는 의상(義相)은 <법계도기>에서 2번에 걸쳐서 언급한다. 


첫째는 왜 법계도는 그림에 의지하는가 하는 문제와 결부되어서 논해진다. 그같은 질문에 대해서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 역시 이 해인삼매에서 우러난 것임을 보이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이는 해인삼매가 곧 성기임을 말하는 것이다. 둘째는 <법계도>의 운문 부분인 법성게에서 “해인삼매 중에 들어갈 수 있어야 부사의한 행을 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 부분은 바로 이타행을 설하는 맥락이다. 


이를 종합하면, 해인삼매는 성기로서 화엄삼매의 보현행으로 나아가는 전제, 내지 출발점이 된다고 말할 수 있다. 화엄의 이타행, 즉 보현행을 <화엄경>에서는 화엄삼매로 말하고 있는 바 그 내용에 있어서 저 십우도의 열번째 그림 입전수수(入纏垂手)와 무엇이 다를 것인가. 깨침을 얻은 선사가 다시 저잣거리로 들어가 중생을 교화한다는 십우도의 그림은 일반의 선입견과는 달리 선이 독선(獨善)의 길에서 마감하는 것이 아니라 널리 중생의 바다를 향해서 나아가는 출발임을 말해준다. 


경허(鏡虛)와 같은 선사들의 무애행을 보현행의 실천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도 그같은 배경이 있기 때문이다. “성기 = 해인삼매” → “보현행 = 화엄삼매”의 구조는 곧 “돈오 → 만행(漸修)”의 구조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이같은 화엄사상의 선적 취의와 실천지향성을 ‘화엄선(華嚴禪)’이라 부른다. 미래불교의 명운은 선과 화엄의 조화, 즉 화엄선에 달려있는 것으로 나는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