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향기 메일

문 없는 문

장백산-1 2017. 3. 16. 18:31

문 없는 문 - 정호승

 

문 없는 문을 연다

이제 문을 열고 문 밖으로 나가야 한다

문 안에 있을 때는 늘 열려 있던 문이

문 밖으로 나가려 하자 갑자기 쾅 닫혀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문 없는 문의 문고리를 당긴다

문은 열리지 않는다

돋움발로 겨우 문 밖을 바라본다

 

어디선가 잠깐 새소리가 들릴뿐 어떤 풍경도 보이지 않는다

오래 전에 내 손을 잡고 문 안으로 들어온 사람과

그 사람이 가슴에 가득 안고 들어온 산과 바다가 있는 풍경도

어느새 나를 버리고 문 밖으로 나가 보이지 않는다

 

눈물은 나지 않는다

이제 굳이 문 안으로 걸어들오던 때를 그리워할 필요는 없다

문 안에서 늘 문이 닫힐까봐 두려워하던 나를

문 안에서 늘 문 밖을 바라보며 살아온 나를

이제 와서 탓하지는 말아야 한다

 

문 없는 문의 손잡이를 다시 잡는다

문은 없어도 문은 열린다

 

- 시집 <포옹> 2007.창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