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이정미 전 재판관 "헌재는 잠자는 공주 볼에 키스하듯
헌법 정신 깨우는 곳"
김준영 입력 2017.06.08. 01:02 수정 2017.06.08. 10:01
“헌법은 그동안 법전 속에 묻혀 있었다. 헌법재판소는 잠자는 숲속 공주의 볼에 키스해 잠을 깨우는 왕자처럼, 우아하게 묻혀있던 헌법 정신을 살아 움직이게 하는 곳이다.”
헌정 사상 초유의 대통령 파면 결정을 내린 이정미 전 헌법재판관이 규정한 헌법재판소의 의의다. 지난 3월 재판관 퇴임 후 모교인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의 석좌교수로 초빙된 이 교수는 7일 서울 안암동 고려대 법학관 신관 501호에서 제자들을 대상으로 첫 강연을 했다.
━ "슬프지 않았다면 마음이 마비된 것"
이 교수는 탄핵 심판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을 파면한 결정문을 읽었다. 그는 “인간적으로 매우 고뇌가 컸다”고 했다.
“외압과 여론에 휘둘리지 않고 오직 기록과 헌법정신에만 기초해 결정을 내렸다. 그러나 한 나라의 대통령을 파면한다는 것이 슬프지 않다면 법률가로서 인간의 마음이 마비된 것 아닌가. 다시는 되풀이돼서는 안 될 슬픈 역사다.”
취임기념 특강으로 열린 이날 강의의 주제는 ‘헌법재판의 시각으로 본 우리의 삶과 비전’ 이었다. 그는 강의실을 가득 메운 300여명의 학생들에게 헌법재판소의 역할을 설명했다.
이 교수가 헌법재판관으로 활동한 ‘5기’는 탄핵 심판 외에도 통합진보당 정당 해산 심판, 간통죄 위헌 여부 심판 등 굵직한 판결을 다뤘다. 그는 ”선진국보다 한참 늦은 1988년에야 창설됐지만, 지금까지 840건의 법률에 대해 위헌 또는 한정 위헌 결정을 내렸다“며 ”권위주의 정권때 만든 법률, 남존여비 사상에 기초한 법률등을 하나하나 바로잡았다“고 설명했다.
━ "신상 털기는 인민재판처럼 위험한 일"
그는 사법권 독립의 중요성도 되짚었다. 탄핵 심판 변론 과정에서 대통령 대리인단이 3차례에 걸쳐 재판에 불출석하는 등 ‘재판부 흔들기’로 비칠 만한 행위가 이어지자 헌재소장 권한대행이었던 이 교수는 대리인단 측의 증인채택 요구를 직권 취소하는 등 소송지휘권을 발동했다.
이 교수는 “사법권 독립은 어떠한 경우에도 훼손돼서는 안 된다. 법치주의가 또다시 무너지는 일이다”며 “또 재판결정에 불만을 품고 신상 털기나 협박 등을 일삼는 사람들도 있는데, 이는 인민재판과 같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고 말했다.
그는 고려대 법대 출신의 첫 여성 사법고시 합격생이자, 역대 두 번째 여성 헌법재판관이었다. 이 교수는 “정당 해산 심판 때는 큰 애가 고3이었고, 탄핵 심판 때는 작은 애가 고3이었다. 당시 밤새워 일을 하는 경우가 많아 미처 신경을 쓰지 못했다”며 자녀에 대한 미안함을 표현했다.
━ "다시 태어나면 수학 교사 될 것"
이 교수는 어릴 때 수학교사를 꿈꾸다 고3 때인 1979년 10ㆍ26사태를 보고 법대 진학으로 방향을 틀었다. 수업 후 질의응답 시간에 한 학생이 “다시 태어난다면 판사와 교사 중 무엇을 하고싶으신가”라고 묻자, 이 교수는 “다시 판사의 삶을 살라고 하는 건…정말 못할 것 같다. 제가 수학을 좋아하니깐 수학선생을 해보고 싶다”고 답했다.
강의를 마친 뒤 학생 수십 명이 이 교수에게 다가가 ‘셀카’를 요청했다. 김규완 법학전문대학원장은 “나한테는 한 번도 안 그러더니, 학생들이 이 교수님을 마치 연예인 보듯 기쁘게 환영하는 것 같다”며 웃었다.
수업을 들었던 조송운(23)씨는 “이 교수님이 판결을 내리는 과정에서 느꼈던 인간적인 고민을 들을 수 있어 좋았다. 법조인을 꿈꾸는 학생이자 같은 여성으로서 큰 귀감이 됐다”고 말했다.
수업 후 기자와 만난 이 교수는 “과거 사법연수원 교수를 3년간 했는데, 그때가 가장 행복했다”며 “퇴임 후 후학을 양성할 수 있게 돼 감회가 새롭다. 이번 학기엔 특강 위주로 수업을 하고 다음 학기부터는 정규 수업을 맡아 학생들을 가르칠 예정”이라고 말했다.
김준영 기자 kim.junyou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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