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여보게, 한 판 잘 놀고 가시게…”

장백산-1 2017. 7. 7. 12:41

The Sciencetimes

이강봉 편집위원 July 07, 2017


“여보게, 한 판 잘 놀고 가시게…”


편리(便利)와 선(善) 중독에서 벗어나야


[편집자 註]

인문학과 과학이 서로 협력, 미래를 만들어가는 인문강좌 행사가 최근 줄을 잇고 있다. 가장 주목을 받고 있는 행사는 한국학연구재단이 주최하는 ‘석학과 함께 하는 인문강좌’. 학문 간 경계를 넘어, 세상과 대화를 시도하려는 적극적인 노력이 엿보이고 있다. <사이언스타임즈>는 석학들이 진행하는 인문강좌를 연재한다.



석학 인문강좌 : 김형효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에 따르면 인간에게는 두 종류의 지능이 있다. 과학기술적 지능과 도덕적(윤리적) 지능이 그것인데, 이 두 가지 지능을 통해 인류는 문명을 발전시켜왔다. 


과학기술적 지능의 매력은 편리성이다. 과학기술을 적절히 활용할 경우 인류는 편리한 삶을 살 수 있다. 그러나 이 편리성만을 지나치게 강조하다 보면 술이나 마약처럼 그것 없이는 견디지 못하는 병적 중독 상태에 빠진다. 


도덕적 지능도 마찬가지다. 도덕적 지능을 통해 세상을 선과 악으로 구분하고, 이를 통해 세상을 구원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근거가 모호한 善만을 지나치게 강조할 경우 인간은 善의 병적 중독 상태에 빠진다.


善의 중독 상태에 빠진 사람들은 모든 것을 선과 악으로 구분한 후 선을 위한 투쟁으로 일관하면서, 사회를 두 쪽, 세 쪽으로 갈라놓고, 결국 전쟁과 같은 피투성이의 역사를 만들어간다. 그동안의 인류 역사가 이를 말해주고 있다. 


인간 본성을 잃으면 중독현상이 발생


2017년 6월 20일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열린 ‘석학과 함께 하는 인문강좌’에서 김형효 교수는 ‘놀이하는 마음’이란 제하의 강연을 통해 인간이 ‘본성(혹은 본능)’을 잃으면, 이 같은 편리성과 善의 유형의 중독현상이 발생한다고 말했다.


지난 강의에서는 김 교수는 ‘본성’에 대해 본성을 자아중심의 욕망이나 명령이 아니라, 무의식적으로 내리는 탈 인격적 욕망. 자아중심의 이익추구가 아닌 우주적 일심(一心)의 존재론적인 욕망 등으로 정의한 바 있다.


김 교수는 인간의 본성에 대해 설명하면서 원효대사(元曉大師, 617~686)의 ‘금강삼매경론(金剛三昧經論)’을 인용했다. 이 논전에서 원효는 인간의 논리적 일관성이나 도덕적 근엄함을 휴지통에 버리라고 말하고 있다. 


“어떤 사유가 절대로 영원불변한 자기 고유성을 가질 수 없고, 자기 고유성을 주장하는 순간, 그는 자기 것에 얽매인 고집과 남에 대해 자기가 변치 않음을 내세우려는 아집만을 증가시킬 뿐”이라고. 


금강삼매경론에 따르면 어떤 사람이 자신의 생각을 결코 변치 않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고, 또 자기 생각을 변치 말라고 믿게 하는 것도 어리석은 일이다. 실상의 세계가 환영(幻影)의 세계이며, 또한 이 환영으로 엮어져 있을 뿐이다.


인간의 자기 고집의 일관성은 자기 고집의 일관성일 뿐 타자를 수용하는 보편성과 거리가 멀며, 도덕적 주관의 근엄함은 그 근엄함을 우상숭배하는 것, 즉 무니에(1905~1950, Mounier)가 말한 근엄함의 우상숭배와 같다고 김 교수는 말한다.


이 세상 모든 것은 ‘환유’에 불과


이 세상의 모든 것이 기본적으로 환유(換喩, 그리스어로 motonymy)에 불과하기 때문에 옳고 그름(是非)를 내 세우던가 선과 악을 투쟁적으로 내 세우는 사람들에게는 이 세상 모든 것이 다 일말의 꿈과 같고, 아침이슬과 같다고 말했다. 


“자기 것이 없고, 상대의 수준에 따라 노닐 수밖에 없는 이 세상에서 놀이 이외에 무엇이 유효할 수 있는가. 그런 점에서 사람들은 노자의 도덕경 1장에 나오는 무위(無爲)의 놀이, 즉 존재가 없으면서 있는 것처럼 보이는 진공묘유(眞空妙有)의 놀이를 하고 있는 것과 같다”고 김 교수는 말한다.


노자는 도덕경 6장에서 天地가 불인하여 만물로써 추구(芻狗)를 삼고, 聖人도 불인하여 백성으로서 추구(芻狗)를 삼는다고 말했는데, 이 때 추구란 볏짚으로 만들어놓은 개 모양을 말한다. 제사를 지낼 때는 이 추구를 상전처럼 떠받들다가, 제사가 끝나고 나면 길을 가는 사람들이 이 추구를 밟고 지나가도록 내버려 두었다. 


김 교수는 이 추구의 이야기가 “어떤 개념(槪念)도 그 개념의 자기 고유성을 끝까지 지키는 것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라며, “인간 역시 저 추구처럼 인간이라는 개념의 고유한 의미를 불변적으로 지니는 것이 아니라, 늘 이중적인 존재 방식을 안고 다닌다”고 말했다.


내가 어제 착한 사람이었다고 해서 오늘과 내일 계속 善人이 되리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으며, 인간은 노자가 말한 것처럼 선과 악의 요소를 양면적으로 구비하고 있다는 것. 어느 한쪽 면만을 가지고 있다고 여기는 것은 도덕주의자들의 대단한 ‘낭만적 착각’이라고 말했다.


김 교수는 인류가 ‘편리성(便利性)의 중독’, ‘선(善)의 중독’에서 빠져나오기 위해서는 존재론적인 사유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존재론적 사유는 인류 구원의 길 


존재론적인 사유는 人間 本質에 대한 기억을 말하는 것이며, 인간 본질에 대한 그 기억은 일반적 기억력의 회복과 같은 그런 의미가 아니라고 설명했다. 


존재론적인 사유인 인간 본질에 대한 기억은 프랑스 인류학자 레비스트로스(1908~1991, Levi-Strauss)가 말한 야생적 사유, 우리 안에 흐르고 있는 무의식적 사유, 융(1875~1961, Jung)의 대극적 사유, 하이데거(1889~1976, Heidegger), 데리다(1930~, Derrida)가 말하는 자연적 사유와 다르지 않다는 것. 


이 존재론적 사유인 인간 본질에 대한 기억은 인간들 모두가 한 곳으로 집중해서 달려가는 일원적 사유가 아니며, 서로 투쟁하거나 무시하는 이원적 사유도 아니다. 존재론적 사유는 세상만물의 대칭성(對稱性), 즉 본질(本質)을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가능하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이날 강연에서 다음과 같은 말들로 그동안 진행돼왔던 4번의 ‘존재와 소유’에 관한 강연을 마감했다. 


“아침이슬 같고, 허깨비 같고, 번개 같은 세상을 놀이하고 유희하는 마음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야지, 오직 자기 생각만을 기준으로 삼아 모든 것을 근엄하게, 엄격하게 따져 묻는 도덕군자인양 설교하는 것보다 더 위선적인 것은 없다.”


“우파적인 편리함의 길도 곧 편리주의로 둔갑해버리고, 좌파적인 도덕윤리의 길도 사회적 정의의 善을 독선주의의 국물로 말라먹는 이 세상에서 사람들을 구원하는 길은 선인과 악인이 함께 꿈, 허깨비, 물거품, 그림자, 아침이슬, 번개 같은 이 세상을 한바탕 질펀하게 잘 놀고 간다는 마음가짐 이외에 다른 방편이 없을 것이다.”


김 교수는 경봉대선사(鏡峰大善師)가 남긴 법어집에서 “여보게, 한판 잘 노시고  이 세상 떠나시게”라는 말보다 더 우리 인간들을 살려주는 법어가 없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