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즉비(卽非)의 논리

장백산-1 2017. 11. 5. 18:10

즉비(卽非)의 논리


2,000여 년 전 인도에는 중관학(中觀學)이라는 심오한 불교철학(佛敎哲學))이 발달했다. 그리고 중관학에 이어 유식학(唯識學)이라는 불교심리학(佛敎心理學)이 발달했고, 또 그에 뒤지지 않은 인명학(因明學)이라는 논리학(論理學)이 발달했다. 지금에 와서도 그 당시의 이론체계 정연한 철학이나 심리학, 논리학 수준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지만 논리학도 대단히 정밀하게 발달해 있었다. 그래서 불교교의도 이들 철학 심리학 논리학의 뒷받침에 의해 과학적인 교리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 수준 높은 논리학(論理學)의 전모가 <금강경>에 잘 나타나 있고, 특히 즉비(卽非)의 진술에 탁월한 논리전개를 보인다. ‘卽非’란 즉(卽)하되 비(非)해야 된다는 말인데, 한 생각이 일어나면 그 생각을 바로 지켜보는 것이 즉(卽)이고, 이때 이 일어나는 생각이라는 現象이 고정불변하는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니 일어나는 생각이라는 현상 거기에 휘둘리지 말고 그 생각이라는 현상은 꿈, 허깨비, 신기루, 물거품, 그림자, 이슬, 번개 같은 일어났다 사라지는 허망한 것으로 그렇게 바로 보라는 말이 곧 비[非]이다.


<금강경>에서「A는 A가 아니다. 다만 이름이 (A )뿐이다.」이런 형식의 문장에서 「A는 A가 아니다」라는 부분이 즉비(卽非)이다. 이러한 즉비(卽非)의 논리를 전개하는 까닭은, 대상 경계에 접촉(觸)하자마자 수(受)가 일어나고 受에 이어 애(愛)―취(取)―유(有)의 연기되는 과정을 밟지 말고―즉, 觸 受 愛 取 有가 연기되는 과정에 휘둘리지 말고 끄달리지 말고, 초연한 상태에 머물 수 있는 마음의 힘을 기르는 것이 마음공부이니, ‘즉비(卽非)’가 바로 그 마음공부의 요체이다.


즉비(卽非)란 어떤 개념(槪念)이나 명제(名題)를 세웠다 하면 세운 즉시 개념이나 명제를 부정―지양함으로써 어떤 대상에 끄달리지 않고―집착하지 않고 개념이나 명제를 초월할 수 있도록 돕는 논리전개이다. 즉공(卽空)과 같은 맥락이다. 즉, 卽非는 새로운 개념이나 명제의 부정이라기보다 얼마든지 다른 측면이 있다는 것을 드러내고자 하는 논리이다.


<금강경(金剛經)>에 “컵은 컵이 아니고, 그 이름이 컵이다”라는 문장형식의 구조적 표현이 거듭 반복되고 있다. 그 이유는 어떤 개념(槪念)을 즉시 부정 지양(否定止揚)함으로써 어떤 대상에도 집착함이 없이 걸리지 않고―끄달리지 않고, 개념이나 명제를 초월(超越)할 수 있는 방편으로 삼는 것이다. 卽非의 핵심은 개념이나 명제를 부정하는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대상 경계를 고정불변하는 실체로 여겨 그 대상 경계에  매몰되거나 집착해 고통의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경계하고자 함이다. 이는 어떤 존재이든 그것을 고정불변하는 실체로 파악하면, 그 개념(槪念)에 집착, 고착, 한정되어 갖은 고통이 따르는 일을 면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컵을 대하되 그 컵이 컵(만인 것)이 아니고 꽃을 꽂아두는 꽃병일 수도 있다고 생각함으로써 일방적으로 컵에 매달리는―끄달리는 번뇌 망상 분별하는 마음, 분별심, 분별의식에서 벗어나게 도와주는 방편(方便)이 즉비(卽非)의 논리(論理)이다.


사람들의 일상생활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떤 대상 경계와 마주치면(觸 촉), 곧 기분이 나쁘거나(苦), 좋거나(樂), 나쁘지도 좋지도 않은 덤덤하거나(捨) 등의 고, 락, 사(苦樂捨)의 세가지 느낌, 삼수(三受)에 빠진다. 그리고 수(受)에 연이어 애(愛)―취(取)―유(有)의 緣起的인 과정을 밟으면서 괴로운 육도윤회(六道輪廻)를 경험하게 된다. 이것이 우리 인간들의 삶이고 자화상이다. 그러니 어떤 대상 어떤 경계 어떤 상황에 마주치더라도(觸) 그 즉시 卽非의 논리를 발휘해 수―애―취―유에 허망하게 떨어지지 말라는 말이다.


다시 <금강경>으로 돌아가서, 상(相)을 극복하기 위한 방편(方便)이 즉비(卽非)의 논리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일상의 삶에서 육근(六根 : 눈, 귀, 코, 혀, 피부, 생각 마음)이 六경(六境 : 모양 색깔, 소리, 냄새, 맛, 감촉, 현상)을 마주치면 육식(六識 : 눈의 의식, 귀의 의식, 코의 의식, 혀의 의식, 피부의 의식, 종합적으로 분별하는 의식)이 일어나서 개념(槪念)과 명제(名題)에 나라는 존재가 있다고 여기는 착각, 즉 주관(主觀)인 아상(我相)―고정관념(固定觀念)을 갖게 된다. 예컨대 눈(眼根)이 여자(色境)을 보는 순간, 아! 저것은 여자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된다(眼識). 연이어서 그 여자에게 빠지게 되고(愛)―집착하게 된다(取). ‘예쁜 여자! 나에게 딱 맞는 여자!’ 이런 상(相)―고정관념이 형성돼, 거기에 빠져들어―집착해서 다른 생각을 할 마음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무조건 집착을 해서 매달리는 것이다.


흔히 영화 같은 데에서 첫눈에 반해 처음 본 여자에 집착하는 장면을 볼 수 있다. 이럴 때, 즉 여자를 보는 순간 즉비(卽非)의 논리를 발휘해서, “여자이지만 여자가 아니고 그 이름이 여자일 따름이다.”라고 마음을 돌리라는 말이다. 그 게 즉비(卽非)의 논리이다.


예쁜 여자라고 인식(認識)하게 된 순간 마음에 든다는 느낌(受)을 가지고, 덤벼들어 연애하고(愛), 기어이 결혼해(取), 아내로 삼았더니(有), 그 여자는 마음이 헤퍼서 낭비가 심하고, 아무 남자하고나 바람을 피기가 일쑤여서 내가 괴로움에 휩싸이게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짝을 잘못 만나면 패가망신하기 십상이다. 따라서 함부로 여자에 집착하지 말고, 일단 예쁜 여자를 보면, 예쁜 여자는 얼굴값을 한다더라고 즉비(卽非)의 논리라는 방편을 발휘하라는 말이다. 그리하여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여자를 관찰을 해서 마음에 들면, 그때 가서 연애를 하든지 결혼을 하든지 하라는 말이다.


<금강경>에는 이런 「A는 A가 아니다. 단지 이름이 (A )이다.」라는 형식의 즉비(卽非)의 논리라는 방편을 전개하는 문장이 자주 나타난다. 이런 구조의 문장을 처음 접하는 사람의 경우, 즉비(卽非) ~ 시명(是名)의 논리 방편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아 혼란스러워한다.


<금강경> 제13분 여법수지분(如法受持分)에 “여래(如來)가 설한 반야바라밀은 곧 반야바라밀이 아니다. 다만 그 이름이 반야바라밀일 뿐이다(佛說般若波羅蜜 卽非般若波羅蜜 是名般若波羅蜜)”라는 구절이 있다. 이는 「A는 A가 아니다. 다만 이름만 A일 뿐이다.」라는 구조이다. 이 구절은 ‘반야바라밀’이라는 말에 집착해서 '반야바라밀'에 얽매이거나 끄달리면 그것은 반야바라밀을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반야바라밀은 반야바라밀이 아니고 다만 이름만 반야바라밀일 뿐이라는 말이다. 반야바라밀이라는 이름이나 반야바라밀이라는 그 말 속에 깨달음(本覺), 부처(拂), 여래(如來), 진리(眞理)가 담겨 있다고 생각하면 않된다는 말이다.


<금강경> 내용 속이나, 석가모니부처님 말씀 속에 깨달음, 부처, 여래, 진리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깨달음, 부처, 여래, 진리는 이 세상 모든 것, 세간 일체와 분리되어 있지도 않고 벗어나 있지 않다. 우주삼라만상만물, 이 세상 모든 것, 세상만사 모두가 깨달음, 부처, 여래, 진리이자 불법(佛法, 부처인 것), 본래 부처(本來佛)이다. 그러니 반야바라밀이라고 이름에만 깨달음, 부처, 여래, 진리가 있을 것이라고 여기는 어리석은 생각에 매달리지 말라는 말이다. 그리고 몸으로는 불교신자답지 않은 행동을 하면서, 입으로만 반야바라밀을 아무리 외운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런 자가 반야바라밀을 외운다고 해서 좋은 과보를 받을 수는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 자가 생각하는 반야바라밀은 허울만 있는, 다만 이름만이 방편의 반야바라밀일 뿐이다.


그리고 석가모니부처님이 설한 반야바라밀은 어디까지나 깨달음, 부처, 여래, 진리를 가리키는 방편으로 하신 말씀이므로 반야바라밀이라는 말에 특별한 깨달음, 부처, 여래, 진리나 좋은 기운이 있으리라 믿어 반야바라밀이라는 언어에 매달리면 무조건 좋은 징조가 있을 것이라는 엉뚱한 기대를 가지지 말라는 경고이다, 허망하게 그런 착각을 하지 말라는 말이다. 진정한 반야바라밀은 반야바라밀이라는 이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불자 자신이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그 곳에 있다. 즉, 설법을 하는 방장(方丈) 스님의 법문 속에 반야바라밀이 있는 것이 아니라 참다운 불자답게 생각하고 말하고 행하는 그곳,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의 현존, 자기 자신에 진정한 반야바라밀이 있다는 말이다.


위의 문장들에서 반야바라밀’이란 말이 나오자마자, “여래가 설한 반야바라밀은 곧 반야바라밀이 아니다.”라고 부정을 하는 이런 형식이 즉비(卽非)의 논리이다. 특히 마음공부에 있어서는 쉽게 집착하지 않고 쉽세 휘둘리지 않고 쉽게 끄달리지 않는 충분한 지관(止觀)이 형성돼야 한다. 쉽게 끄달리는 것은 대개 번뇌 망상 분별에 속아넘어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상황에 직면하면 즉비(卽非)의 논리를 발휘해야 한다. 그래야 어떤 상황, 어떤 대상 경계에도 쉽게 끄달리지 않는다. 그리고 지관(止觀)을 하라는 말이고, 잘 생각해 보라는 말이다.


인간의 불행은 한결같이 상황, 대상, 경계라는 '그 무엇'에 집착함으로써 빚어지는 법이다. 따라서 그 상황이 설령 긍정적인 낙수(樂受)의 상황이라고 하더라도 일단 즉비(卽非)의 논리를 통해 마음을 열어 여유를 갖는 것이 바람직하다. 곧 즉비(卽非)의 논리는 꿈, 허깨비, 신기루, 물거품, 그림자, 이슬, 번개 같은 이 세상 현실의 고통과 구속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고락(苦樂)의 양변을 모두 지양하고 중도(中道)의 진리를 지향하는 비장이요, 지혜인 것이다.  


-성불하십시오. 작성자 아미산(이덕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