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자신의 보배창고 (자가보장, 自家寶藏)

장백산-1 2017. 12. 23. 16:04

자신의 보배창고 (자가보장, 自家寶藏)


옛날부터 이 마음공부는 한 마디 말 끝에 문득 터득하는 것(언하대오 言下大悟)을 귀히 여겼습니다.

그것을 잘 보여주는 일화가 다음과 같이 마조어록(馬祖語錄)에 전해내려옵니다.


월주(越州)의 대주혜해(大珠慧海)가 처음 마조(馬祖, 709~788)를 찾아뵙자 마조가 그에게 물었다.

“어디에서 오는가?”  “월주의 대운사(大雲寺)에서 옵니다.”

“이곳에 무엇을 하려고 왔는가?  “불법(佛法)을 구하려고 왔습니다.”

“자기 집의 보배창고는 돌아보지 않고 자기 집을 버리고 밖으로만 돌아다니면서 무슨 불법을 구하

겠다고 하는가? 내게는 단 한 물건(物件)도 없는데 무슨 불법을 구하려 한다는 말인가?”

대주가 마조의 이 말에 절하고 물었다. “무엇이 저의 보배창고(자가보장, 自家寶藏)입니까?”

 

“지금 나에게 그렇게 묻는 바로 그놈이 그대의 보배창고이다. 그놈에게는 이 세상 모든 것, 만법(萬法),

일체법(一切法)이 갖추어져 있으므로 조금도 부족함이 없고, 쓰임이 자유자재(自由自在)하여 어디에도

걸림이 없는데 어째서 그대의 보배창고인 그놈을 놔두고 그놈 바깥에서 보배창고인 그놈, 즉 불법(佛法)

을 구하고 찾겠다고 하는가?”  대주혜해가 마조의 이 말끝에 자신의 본래의 마음, 불법(佛法), 부처(佛),

자신의 보배창고인 그놈, 진리(眞理), 도(道), 깨달음(覺)을 스스로 터득하고서는 자기도 모르게 뛸 듯이 

기뻐하며 마조에게 절을 하였다.


이 세상 대부분의 사람들은 본래마음(本心), 불법(佛法), 부처(佛), 진리(眞理), 도(道), 깨달음(覺),

자신의 보배창고인 그놈, 본래면목(本來面目), 무아(無我), 진아(眞我), 참나, 본래의 나, 주시자(注視者),

전시안(全視眼), 무일물(無一物), The all seeing eye, oneness, 일자(一者), 신(神), God 등의 이름으로 

부르는 것을 어리석게 자기 바깥에 별도로 특별하게 있는 것으로 여기기 때문에 자신 밖에서 찾습니다.


본래마음, 불법, 부처, 진리, 도, 깨달음, 자신의 보배창고인 그놈, 본래면목, 무아, 진아, 참나, 본래의 나,

주시자, 전시안,무일물, The allseeing eye, oneness, 일자(一者), 신, God 이라는 이름이 있으니까 그 이름

에 해당하는 대상 경계 사물이 객관적으로 독립적인 실체로 있을 것이다 라는 착각 때문에 내 바깥에서 

찾는 것입니다.


그러나 본래마음, 불법, 부처, 진리, 도, 깨달음, 자신의 보배창고인 그놈, 본래면목, 무아, 진아, 참나,

본래의 나, 주시자, 전시안, 무일물, The all seeing eye, oneness, 일자, 신, God,  하느님, 하나님 

이라는 이름에 해당하는 것이 찾을 수 있고 구할 수 있는 대상 경계 물건이라면 그런 대상 경계 물건은 

다시 잃어버릴 수도 있는 것이고 놓쳐버릴 수도 있는 것이기 때문에 안심(安心)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과거 현재 미래라는 삼세의 모든 부처님들과 모든 조사 스님들이 고구정녕하게 말씀하셨듯이 본래마음, 

불법, 부처, 진리, 도, 깨달음, 자신의 보배창고인 그놈, 본래면목, 무아, 진아, 참나, 본래의 나, 주시자,

전시안, 무일물, The all seeing eye, oneness, 일자, 신, God, 하느님, 하나님 이라는 이름은 다른 것이

아닌 자신의 마음을 가리키는 도구, 방편, 수단일 뿐입니다.


내 마음을 내버려두고 어떻게 내 마음 바깥에서 내 마음을 찾겠다 하고 구하겠다고 말할 수 있단 말입

니까? 본래마음, 불법, 부처, 진리, 도, 깨달음, 신, 하느님, 하나님, 참나, 무아, 본래의 나를 찾고 구하는 

지금 당장 바로 여기 내 마음을 떠나서 무슨 특별한 또 다른 마음이 있을 수가 있습니까?


사실이 이와 같기 때문에 불법(佛法)을 구하려고 마조에게 왔다는 대주혜해에게 마조 스님은 ‘자기의 

보배창고를 돌아보지 않고 자신의 보배창고 바깥에서 무슨 불법을 찾는가?’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자기에게 없는 것을 찾고 구하지 말고 자기에게 본래 이미 완전하게 있는 것을 돌아봐야만 합니다.

본래마음, 불법, 부처, 진리, 도, 깨달음, 신, 하느님, 하나님, 참나, 무아, 본래의 나 라는 것이 있다면 

언제나 바로 <지금 여기> 나에게 있어야 합니다. 지금 여기 나에게는 없던 것이 언젠가 미래에 생기는 

것이라면 그것은 한계가 있는 것이고, 부분적인 것이며, 불완전한 것이기 때문에 결코 완전무결한 불법, 

본래마음, 부처, 진리, 도. 깨달음, 신, 하느님, 하나님, 참나, 무아, 본래의 나 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본래 이미 완전하게 있으면서 이 우주, 이 세상에 둘이 없는 것은 바로 지금 여기의 내 마음뿐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것이 바로 지금 여기의 내 마음입니까? 바로 지금 여기서 이 글을 읽으면서 생각하는 

그놈이 무엇입니까? 언제나 바로 지금 여기서 이와 같이 읽고 생각하고 작용을 하는 이놈이 무엇입

니까? 누가 부르면 “네!” 하고 대답하고, 배가 고프면 저절로 배가 고픈 줄 아는 이놈이 무엇입니까?


결코 찾을 수 없고, 구할 수 없으며, 배울 것도 없고, 익힐 것도 없는 것 하나가 분명하게 지금 여기 

있지 않습니까? 아무리 쓰고 써도 닳아 없어지지도 않고 줄지도 않는 것 하나가 확실하게 지금 여기

있습니다. 이 하나라고도 할 수 없는 하나는 불생불멸(不生不滅)로 살아있을 때도 새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고 죽었을 때도 어디로 사라져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본래 이미 나에게 완전하게 갖춰져 있는 이놈을 스스로 터득하지 못하고 이놈 밖에서만 이놈을 찾고 

있으니 어찌 어리석고 허망한 짓을 하고 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내 마음을 내 마음 밖에서 

찾는다면 결코 내 마음을 찾을 수 없지만, 자신의 본래 모습, 진실한 모습, 본바탕이 이 텅~빈 바탕

순수한 마음, 텅~빈 바탕 진공의식, 바로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의 현전인 줄 터득한다면 찾지 않은 

채로 찾은 셈이고, 구하지 않은 채로 구한 셈입니다.


옛 선지식들이 “찾으면 없지만, 찾지 않으면 언제나 있다.”라고 한 말의 뜻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제 아셨습니까? 알았다고 해도 방망이 30대를 맞아야 하고, 모르겠다고 해도 방망이 30대를 맞아

야 합니다. 


-몽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