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지금이 바로 그 때

장백산-1 2018. 1. 5. 14:37

지금이 바로 그 때 / 법정스님


얼마 전 방송사의 한 기자가 저를 보자 물었습니다. “스님은 미래에 대해 어떤 기대를 갖고 계십니까?”

저는 평소대로 대답했습니다. “나는 언제나 오늘을 살고 있을 뿐 미래에 대해선 어떤 기대 관심이 없소.”


저는 솔직히 내일이라는 미래에 대해서 전혀 기대를 하지 않고 관심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미래에 대한 어떤 계획도 없습니다. 그저 하루하루를 그렇게 살아갈 뿐입니다. 누구에게나 바로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 뿐이지, 미래라는 다른 어떤 그때가 별도로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와같은

사실은 임제 선사의 법문 뿐만이 아니라, 석가모니부처님과 조사들이 한결 같이 말해 온 眞理입니다.


21세기가 되었든 또 무슨 세기가 되었든, 그 시절이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순간순간 찰나찰나 여기 이 자리에서 이렇게 살고 있을 뿐입니다.


"지나간 과거를 따라가지 말고 오지 않은 미래를 기대하지 말라.

한번 지나가버린 과거는 이미 버려진 것,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다.

다만 지금 여기의 일을 자세히 잘 살펴, 잘 알고 익히라.

어느 누가 내일의 죽음을 알 수 있으랴."


《아함경》에 나오는 석가모니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지나가버린 과거에 집착하지 말고, 아직 오지도 않은 미래에 대해서 미리 불안해하거나 가불해 쓰지 

말라는 말입니다. 다만 지금 여기의 일을 자세히 잘 살피고, 잘 알고 익히라는 가르침입니다.


매년 이맘 때 쯤이면 새해맞이를 하겠다고 몰려든 많은 사람들 때문에, 동해안 일대의 호텔과 숙소들이 

이미 예약이 다 끝난다고 합니다. 이런 현상을 해(日)가 알면 그런 사람들을 보고 웃을 것입니다. 어제 

뜬 해와 오늘 뜬 해가 다른 해입니까? 똑같은 해입니다.


이런 어리석은 현상은 분별(分別)을 하고 분석(分析)을 하기를 좋아하는 서양 사람들의 호들갑에 지

지 않습니다. 서양 사람들은 늘 분별을 하고 분석을 하는 그런 것 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지구상에서 

맨 처음 해가 뜨는 곳이 남태평양 무슨 섬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서양 사람들이 해가 뜨는 장면을 보

려고 그 섬으로 기를 쓰고 간다고 합니다.


동양에서는 일찍이 해(日)가 뜨는 그런 것에 대해서 별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소위 서양의

문명이 온 지구를 휩쓸다 보니 대한민국 국민들도 거기에 오염되어서 같이 놀아나고 있는 것입니다.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의 ‘16관법(十六觀法)’중에 해가 뜨는 광경을 보는 관법, 즉 ‘일상관(日想

觀)이 있습니다. 돈과 시간을 낭비하면서 수고스럽게 뉴질랜드나 동해안에 갈 것 없이 방 안에 앉아서, 

자기 마음속에 떠오르는 해를 보라는 말입니다. 마음속에 떠오르는 해는 바람이 부나, 비가 오나, 구

름이 끼나, 아무 상관이 없는 해입니다.


마음속에 떠오르는 해를 보는 것, 그것이 진짜 해돋이입니다. 그렇지만 허공에 떠오르는 해, 그 해는

구름이 끼거나 비가 오면 보이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인간의 마음속에 갖추어져 있는데, 굳이 마음 

밖에서 무엇을 찾지 말라는 가르침입니다.


물론 허공에 떠오르는 해도 보고 달도 봐야겠지만, 덩달아서 해맞이를 한다고 그렇게 휩쓸리는 것은 

현대인들이 갖고있는 허약한 마음의 병입니다.


찰나찰나 순간순간 나에게 주어진 시간과 세월을 지금 여기서 어떻게 보내고 있는가? 이것을 살피는

것이 가장 소중한 일입니다. 허공에 해 뜨는 일만이 아니라, 세상에서 떠드는 일을 내가 관여해야 할 

일인지 아닌지 스스로에게 물어야 합니다. 그래서 내가 관여해야 할 세상 일이라면 기꺼이 동참해서 

거들고, 그러지 않아도 될 세상 일이라면 자기 삶을 자제할 줄 알아야 합니다.


전라남도 영광 불법사에서 출가해 호남 일대에서 살았던 학명(鶴鳴)선사의 어록 가운데 세월에 관해

읊은 구절이 있습니다.


"묵은해니 새해니 분별(分別)하지 말게

 겨울 가고 봄이 오니 해 바뀐 듯하지만

 보게나, 저 하늘이 달라졌는가

 인간들이 어리석어 꿈속에 사네."


개인(個人)의 삶과 전체(全切) 인류(人類)의 삶을 되돌아보십시오. 인류(人類)란 무엇입니까? 개개인

의 집합체(集合體)입니다. 너와 나로 분리되고 분별된, 그들의 집합체입니다. 일찍이 옛적 성인들은 

이런 개체(個體)와 전체(全切)의 상관관계(相關關係)에 대해서 말해 왔습니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불교의 《화엄경華嚴經》입니다. 《화엄경》은 개체(個體)와 전체(全切)의 상관관계를 여러 가지의 

비유를 통해 자세히 밝히고 있습니다.


화엄사상(華嚴思想)을 압축해 놓은 신라시대 의상 스님의 법성게(法性偈)에 실린 몇 구절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법성원융무이상 제법부동 본래적 (法性圓融無二相  諸法不動本來寂)’

법(法, 이 세상 모든 존재, 이 세상 모든 것, 이 세상 모든 현상)의 근본성품은 모든 현상의 근원이며, 

모든 현상의 근원인 근본성품은 본래부터 원만하고 막힘이 없기 때문에 원래 분리 분별 차별이 없다

는 뜻입니다. 그 뜻은 이 세상 모든 것과 이 세상 모든 것의 근본성품은 움직임이 없어 본래부터 고

하고 질서가 정연하다는 뜻입니다.


‘일중일체다중일 일즉일체다즉일 (一中一切多中一  一卽一切多卽一)’

하나 속에 이 세상 모든 것이 있고 이 세상 모든 것 속에 하나가 있으니, 하나가 곧 이 세상 모든 것

이고 이 세상 모든 것이 곧 하나를 이룬다는 뜻입니다. 논리적인 비약이 심한 말처럼 들리지만 깊이 

참구해 보면 그 의미를 알 수가 있습니다. 여기에 조화와 균형의 소식이 있습니다.


‘일미진중함시방  일체진중역여시 (一微塵中含十方  一切塵中亦如是)‘

먼지 하나 속에 우주가 다 들어 있고, 일체의 먼지 먼지마다 속에 온 우주가 다 들어 있습니다.


어떤 누가 우리들 곁에서 사라졌다고 할 때, 그 개체만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 모두의 어떤 

일부분이 사라진 것입니다. 나 한 사람이 곧 전체 인류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내가 곧 전체 우주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가 곧 모든 것이고 모든 것이 곧 하나를 이룬다고 했지 않습니까?


-1999년 12월 12일 길상사 창건 2주년 법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