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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유정법(無有定法, 이 세상에 정해진 것은 없다)

장백산-1 2018. 5. 26. 21:55

무유정법(無有定法, 이 세상에 정해진 것은 없다)


이 세상에는 특정(特定)된 것이 없다, 특별하게 정해진 법(法)이 없다는 것이 불교, 즉 석가모니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이 말은 석가모니부처님 가르침이라고 할 만한 특정된 무엇, 특별하게 정해진 무엇이 있다는 말이 아니라, 어떤 한 사람이 어떤 한 가지 일에 머물러 집착해서 그것에 사로잡혀 구속되어 있다면 그 집착으로 인해서 스스로 고통속에 빠져 있다면 그 사람에게 말을 해주길 허망한 그 집착심으로 인해서 네가 고통스러워하는 거니까 네가 구속되어있는 그 집착심을 내려놓아야 한다고 일러줘도 그래도 어리석게 허망한 그 집착심을 못 버린다는 겁니다.


네가 집착을 해서 고통스러워하고 있는 어떤 것 그게 영원할 거 같은가? 이 세상 모든 것은 생겨난 것이기 때문에 생겨난 것은 고정되어있지 않고 끊임없이 변해서 언젠가는 반드시 소멸된다는 사실이 제행무상(諸行無常)이다. 우주만물은 항상 같은 것으로 있지 않는다. 우주만법은 고정불변하는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기에 끊임없이 변해간다. 항상하는 것이 아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은 원래는 텅~비어 공(空)한 모습으로 인연 따라 아주 잠시 잠깐있는 것 처럼 보일 뿐이지 진짜로 실제로 있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사실이 그러니까 있는 것이 아닌 그것에 집착을 해봐야 그 집착의 결과로 너만 괴로울 뿐이니까 붙잡고 있는 그 집착심을 버리는 게 네가 편안하고 행복할 수 있는 길이다 라고 가르쳐주다 보니까, 그 가르침, 방편(方便)으로 연기법(緣起法), 삼법인(三法印), 중도(中道), 공사상(空思想), 불성(佛性), 부처(佛), 본래면목 등의 교리처럼 보이는 방편들이 등장했을 뿐이지 불교는 이런 교리, 방편을 주장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불교는 오로지 단 한 가지 중생이 집착해 그 집착에 얽매여있는 사로잡혀 있는 것을 사람마다의 근기에 따라 적절한 방편을 사용해서 그 구속에서 풀려나게 도와주는 것 뿐입니다. 집착이라는 구속에서 풀려나게 해주는 방편이 위에서 언급한 연기법, 삼법인(제행무상, 제법무아, 일체개고),중도,공사상, 불성, 부처, 본래면목 등입니다. 사람마다 걸린 병(病)이 제각각 다 다르기 때문에 치료하는 방법도 제각각 다 다를 수밖에 없는 겁니다.


예를 들어 공사상에 집착하는 사람, 즉 이 세상 모든 것이 텅~비어 공하다, 아무것도 없다는 공허감에 빠져있는 사람한테는  무슨 그런 말을 하느냐, 아무것도 없기는 뭐가 없느냐. 불성(佛性)이라는 것이 분명하게 있다. 부처라는 것이 분명히 있다. 본래면목이 분명히 있다. 그러니 이것을 찾아야 한다 이렇게 이런 것이 있다고 말을 해줘야 하지요.


거꾸로 부처도 있고 열반도 있고 해탈도 있고 지혜도 있고 깨달음도 있다고 집착하는 사람들한테는 부처도 없고 열반도 없고 해탈도 없고 지혜도 없고 깨달음도 없다고 말을 해줘야지요. 이것이 반야심경에 나오는 무지역무득(無智亦無得), 즉 원래 지혜도 없고 깨달음도 없다라는 방편의 가르침입니다. 이런 방편을 사용해서 있다는 환상을 깨주는 겁니다. 반야공사상의 방편으로 해탈 열반이라는 것조차도 집착해서 구속당하지 못하게 철저하게 깨부수어주는 겁니다.


이것은 마치 부모가 어린 자식들에 항상 방편을 사용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방편을 자식들에게 쓰다가 시간이 지나 어는 정도 성숙하게 되면 사용했던 방편들을 깨부수어주어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와같이 말이나 글로 표현된 것은 전부 다 방편(方便)입니다. 따라서 성현들의 말과 글, 그리고 당시 제자들, 후세 사람들이 저술한 모든 경전은 모든 종교를 떠나 전부 다 방편(方便)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래서 결국엔 방편인 경전 속 모든 내용도 전부 다 깨부수어버려야만 할 것이지 그 방편에 속박을 당해서는 결코 안될 것입니다. 달을 보라고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키는데 달은 안보고

손가락만 보는 어리석은 짓을 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법상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