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충기 문자와 삼성의 그물망
2018년 7월 8일 10:30 오후
장충기 삼성 미래전략실 사장을 ‘형님’이라 부르며 그에게 문자를 보내 누군가의 대학 입학 추천서를 부탁했던 박재완 전 기획재정부 장관. 지난 4월, 뉴스타파는 박 전 장관을 찾아가 누구를 위한 추천서였는지를 물었지만 그는 끝내 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 후 뉴스타파에 한 통의 제보가 들어왔다. 박재완이 부탁한 추천서는 사위의 미국 대학 입학을 위한 것이었다는 내용이었다.
삼성에서 정기적인 선물과 업무상 편의를 받아온 박재완은 삼성이 삼성전자 백혈병 사건으로 골머리를 앓던 2010년 10월, 노동부장관 재임 중 국회에 출석해 “삼성전자의 노동환경과 백혈병 발병 간에는 통계적 유의성이 없다”고 삼성에 유리한 발언을 했었다. 그렇게 직분을 이용해 삼성을 도왔던 그는, 공직을 떠나고 얼마 뒤 삼성전자 사외이사를 맡으며 아예 삼성맨으로 변신했다.
뉴스타파가 입수한 ‘장충기문자’에는 총 134명의 각계각층 엘리트들이 장충기와 주고받은 문자내용이 들어 있다. 정치인과 관료, 언론인과 법조인, 그리고 학계 인사까지 모두 우리 사회를 대표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삼성에게서 정기적으로 선물을 받고 인사와 협찬 청탁 등을 했으며, 일부는 삼성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발을 벗고 나서 삼성을 도왔다.
뉴스타파는 지난 4월부터 총 6차례에 걸쳐 ‘장충기문자’를 연속보도한 바 있다. 보도 이후 뉴스타파에는 여러 제보가 들어왔고, 큰 반향도 이어졌다. 대부분 삼성에 장악된 사회 현실을 개탄하고 장충기와 청탁성 문자를 주고받은 엘리트들을 비판하는 내용이었다.
뉴스타파는 지난 보도 때 다루지 않았던 문자, 보도 이후 반응 등을 모아 두 달에 걸쳐 추가 취재를 진행했다. 지난 방송 때 만나지 못했던 장충기문자 속 엘리트들을 끈질긴 잠복 끝에 결국 만나 인터뷰를 시도했다. 이를 통해 삼성이 한국 사회 지배를 위해 짜놓은 촘촘한 그물망을 추적했다.
‘삼성 홍보맨’ 강민구 서울고법 부장판사를 만나다
장충기 문자로 삼성과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의 유착 관계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이건희 삼성 회장의 큰 딸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 부부의 이혼소송을 맡았던 강민구 판사다. 삼성 제품을 홍보하는 유투브 동영상을 만들어 장충기에게 보내고, 동생의 인사청탁을 부탁하는 문자를 장충기에게 보낸 사실이 뉴스타파 보도로 확인되면서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조사, 처벌하라는 요구가 곳곳에서 제기됐다. 하지만 법원은 요지부동이었다. 취재진은 최근 강 판사를 직접 만나 해명을 요구했다.
뉴스타파가 입수한 ‘장충기문자’ 477건은 2014년 말부터 2017년 초까지 장충기 사장이 우리 사회 곳곳의 엘리트들과 주고받은 내용이다. 상당수 문자가 삼성 관련 각종 이슈들과 시기적으로 맞물린다.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이른바 ‘이학수법’으로 불린 부당이득환수법 등과 관련된 이슈들이다.
2015년 2월, 당시 야당이었던 새정치민주연합 박영선 의원은 ‘특정재산범죄수익 등의 환수 및 피해구제에 관한 법률안’, 이른바 ‘이학수법’을 발의했다. 횡령이나 배임으로 제3자가 취득한 이익이 50억 원 이상일 경우 국가가 환수할 수 있도록 한 이 법에는 여야 의원 104명이 서명했다. 이 법이 통과된다면, 이건희-이재용으로 이어지는 삼성그룹 경영승계는 치명적인 타격을 입게 될 상황이었다.
‘장충기문자’에는 삼성 총수 일가의 명운이 걸린 이 법안을 막기 위해 삼성과 장충기가 얼마나 숨가쁘게 움직였는지를 보여주는 내용이 곳곳에 들어 있다. 장충기는 법안을 발의한 박영선 의원은 물론 이 법안과 관련된 국회의원들에 대한 정보를 실시간으로 수집했다. 정보수집 대상에는 여야, 진보-보수가 따로 없었다.
뉴스타파는 취재과정에서 당시 한 야당의원이 해당 법안 발의에 강하게 반대했었다는 주장도 들을 수 있었다. 법안에 관여했던 사람들은 이를 ‘삼성로비의 정황증거’로 기억하고 있었다. 이들이 지목한 사람은 바로 박범계 현 민주당 의원이었다.
그러나 박 의원은 뉴스타파와의 정식인터뷰는 거절한 채 서면으로 “사실이 아니다”라는 입장을 전해왔다.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의 구원 투수들
장충기문자는 이재용 삼성 부회장의 경영권 승계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을 돕기 위해 재계와 언론, 그리고 학계가 어떻게 한 몸이 되어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는지도 잘 보여준다.
‘이학수법 논란이 벌어진 직후인 2015년 5월 26일, 삼성은 계열사 간 시너지 창출이란 이유를 내세우며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을 발표했다. 그리고 국민연금은 물론 임직원들까지 동원해 합병을 밀어 붙였다.
당시 대부분의 언론은 외국계 투기자본의 행태를 비판하는 식으로 삼성을 도왔다. ‘삼성을 돕는 것이 곧 애국’이라는 식의 압박전술이었다. 이승철 전 전국경제인연합회 부회장이 장충기 사장에게 보낸 문자에는 당시 언론이 왜 이런 식의 보도를 쏟아냈는지, 그 이유를 알게 해 주는 중요한 열쇠가 들어 있다.
한마디로 동아일보 등 언론을 움직여 국민연금을 압박하고 삼성을 돕는 여론을 조성하겠다는 내용이다. 그렇다면 이승철의 문자내용대로 보도는 이뤄졌을까.
뉴스타파 확인결과, 동아일보는 실제로 문자가 전달되기 직전인 2015년 7월 8일과 9일 ‘경영권 방패 없는 한국기업’이라는 제목의 기획기사 8건을 연속 보도했다. 삼성물산 합병을 외국계 투기자본 대 국익의 싸움으로 몰면서 국민연금이 삼성을 돕는 것이 국익을 위한 일이라는 주장을 담은 내용이다. 전경련 이승철 전 부회장이 문자메시지에서 얘기한 바로 그 기사로 추정된다.
게다가 비슷한 시기 동아일보의 발행과 편집 등을 총괄하는 임채청 동아일보 대표이사는 장충기에게 자사 기자가 확인한 국민연금의 합병 찬성 결정을 전달하고, 이를 축하하는 문자를 보내기도 했다. 동아일보가 삼성물산 합병과 관련해 삼성 혹은 전경련 측과 사전 교감을 가졌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증거다.
취재진은 해당 기사를 작성한 기자들과 동아일보 측에 기사가 보도된 경위, 대표이사가 장충기에게 보낸 문자에 대한 입장 등을 묻는 질문을 하고, 질의서도 보냈다. 하지만 동아일보 기자들은 하나같이 “노 코멘트”라며 답변을 거부했고, 동아일보도 한 달이 넘도록 아무런 답변을 하지 않았다. 동아일보와 비슷한 맥락의 기획기사를 냈던 조선일보와 매일경제는 뉴스타파에 “삼성이나 전경련의 요청을 받고 작성한 기사가 아니다”라는 답변을 보내왔다.
우리 사회 곳곳에 포진한 삼성맨들도 삼성물산 합병을 위해 분주하게 움직였다. 삼성그룹 출신으로 KBS 이사장 등을 지낸 손병두 호암재단 이사장, 황영기 전 금융투자협회장 등이다. 이들은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을 돕기 위해 노력한 자신들의 활동상황을 장충기에게 상세히 전했는데, 주로 삼성을 돕는 기자회견을 조직한다거나 삼성물산 합병을 반대했던 주진형 당시 한화증권 대표를 설득했다는 등의 내용이었다.
당시 황영기는 금융투자자와 금융기관 보호를 위해 설립된 금융투자협회의 대표였지만, 삼성물산 주주들에게 막대한 피해가 예상되는, 합병을 찬성하는 내용의 인터뷰까지 해 가며 삼성을 도왔다. 역시 삼성물산 사외이사였던 윤창현 서울시립대 교수는 자신이 사외이사를 맡고 있는 삼성물산이 엄청난 손실을 볼 수밖에 없는 합병을 앞장서서 밀어 붙였다. 삼성물산 주주 입장에선 모두 배임의 책임을 물을 수도 있는 행태였다.
취재진은 이들도 일일이 찾아가 입장을 물었다. 그러나 삼성물산 합병과정이 총체적인 범죄행위였음이 드러난 지금도 이들은 취재를 거부하거나 “문제가 될 만한 일을 한 사실이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삼성맨’ 변신 엘리트 144명 분석...전직 검찰총장에 장차관 수두룩
뉴스타파는 삼성이 어떻게 우리 사회를 관리해 왔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공직을 떠난 뒤 삼성에 경영자로 참여했거나 사외이사를 맡았던 사람들을 조사했다. 삼성그룹 계열사 중 상장사 16개를 분석대상으로 삼았다. 기간은 삼성비자금 사건이 터진 2007년부터 2017년까지다.
확인결과 총 144명의 고위 관료와 정치인, 언론과 학계 출신, 그리고 판검사들이 퇴직 후 삼성의 사외이사나 경영진으로 변신한 사실이 확인됐다. 교수 등 학계 인사가 62명으로 가장 많았고 전직관료가 43명으로 뒤를 이었다.
그 중에는 장차관을 지낸 인사가 수두룩했다. 박봉흠 전 기획예산처 장관, 권오규, 박재완 전 기재부장관, 김성진 전 해양수산부 장관, 김영섭 전 관세청장, 김성진 권태균 최규연 전 조달청장, 김정관 전 지식경제부 차관 등이었다. 이들 중 박봉흠, 권오규, 박재완, 김성진 전 장관은 장충기문자에도 등장하는 사람들이다.
법조계 인사도 19명이 확인됐다. 송광수 전 검찰총장, 송정호 전 법무부장관, 김영철 전 대구고검장, 문효남 전 부산고검장, 문성우 전 대검 차장, 정진호 전 법무부 차관 등 검찰 고위직을 지낸 인사도 9명이 확인됐다.
국회의원을 지낸 정치인도 2명이 확인됐는데, 지난 19대 국회에서 삼성 총수 일가의 삼성전자 지배력을 크게 약화시키는 이른바 ‘삼성생명법’ 개정을 반대했던 박대동 전 의원은 지난 해부터 삼성화재 사외이사직을 맡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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