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와 같이 관찰하라(如是觀) - - 월호 스님
불교는 관찰(觀察, watching)의 종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금강경> 사구게의 핵심 게송은
‘일체유위법 여몽환포영 여로역여전 응작여시관(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
인데, 이 글귀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를 뽑는다면 바로 ‘관(觀)’입니다. 사람들은 관찰을 통해서 삶을
업그레이드(upgrade) 시킬 수가 있습니다.
무엇을 관찰해야 삶을 업그레이드 시킬 수 있나? 몸뚱이의 무상(無常)함을 관찰하고, 찰라생 찰라멸로
일어나고 사라지는 마음의 무상(無常)함을 관찰하고, 관찰자를 관찰하는 겁니다.
몸뚱이는 태어나서(生) 늙고(老) 병들어(病) 죽고(死),
마음은 일어나서(生) 머물다(住) 변화해서(異) 사라지고(滅),
우주는 형성되어(成) 머물다(住) 무너져서(壞) 텅~비게되는(空)
이치(理致) 이것이 바로 진리(眞理)입니다.
진리를 관찰하는 관찰자는 다만 관찰만 할 뿐이지 진리에 대해 시비 분별 비교 판단 해석하지 않습니다.
관찰자는 “낙엽이 지면 아, 낙엽이 떨어지는구나.” 하고 그냥 관찰만 할 뿐이지, 낙엽이 떨어지니까
“슬프다” 또는 “즐겁다” 이렇게 시비 분별하지 않습니다. 몸이 늙어가면 ‘몸뚱이가 늙어가는구나.’ 이렇게
관찰만 할 뿐이지, 몸뚱이가 늙어가니까 “서럽다”라는 분별하는 생각을 일으키지 않고 늙어감을 다만 관찰
만 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관찰자의 삶은 평화롭습니다. 고통과 즐거움이라는 분별심을 일으키지 않키에 여여(如如)하게
대처합니다. 괴로우면 ‘괴롭다’고 시비 분별 없이 관찰만하고 즐거우면 ‘즐겁다’고 시비 분별 없이 다만
관찰만 할 뿐입니다. 고통과 즐거움을 관찰한다고 해서 고통과 즐거움이 금방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괴로우면 괴롭다고 관찰만 하고 즐거우면 즐겁다고 관찰만 합니다.
“몸뚱이가 아프다” 또는 “마음이 즐겁다,” 하고 아픔과 즐거움에 자신의 닉네임을 붙여서 관찰합니다.
OOO의 몸뚱이가 아프고, OOO의 마음이 즐거운 것이지, 관찰자가 아프고 즐거운 것이 아닙니다.
다만 관찰자의 입장에서 OOO의 몸과 마음을 관찰하고 있는 것일 뿐입니다.
이와 같이 관찰자의 입장에서 OOO의 몸과 마음을 관찰할 때 거기에 ‘나 OOO’는 없습니다. 나 OOO가 보는
것이 아니고 눈이 보는 것입니다. 내가 듣는 것이 아니고 귀가 듣는 것입니다. 안. 이. 비.설 .신 . 의(眼, 耳.
鼻, 舌. 身. 意)가 모두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다만 육근( 안 이 비 설 신 의)의 작용이 있을 뿐, 안 이 비 설
신 의 작용 거기에 ‘나’는 없다고 하는 말입니다.
출처 : 불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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