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분명한 알아차림(正念)과 분명한 앎(正知)

장백산-1 2018. 9. 17. 14:31

분명한 알아차림(正念)과 분명한 앎(正知) - - 산빛노을(원광) 


분명한 앎을 빨리어로 삼빠잔냐(sampajañña)라고 합니다. 삼빠잔냐는 분명하게 아는 것 또는 여러 가지를 완전하게 아는 것을 말합니다. 이외에도 주의, 분별, 이해, 용의주도함이란 뜻이 있습니다. 분명한 알아차림을 한문으로는 정념(正念)이라고 하고 분명한 앎을 정지(正知)라고 합니다. 수행을 할 때 분명한 알아차림 하나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분명한 알아차림과 분명한 앎이 함께 작용하면 서로 부족한 부분을 보완할 수 있습니다.


명상을 할 때 분명한 알아차림이 아무리 많아도 부족하다는 것은 그만큼 분명하게 알아차리기가 어렵다는 현실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행에서는 분명한 알아차림(正念)과 분명한 앎(正知을 함께 해야 합니다. 이 정념과 정지가 서로 조화를 이룰 때 비로소 수행이 균형을 이룰 수 있습니다.


분명한 알아차림과 분명한 앎은 수레의 두 바퀴처럼 상호보완하는 작용을 합니다. 수레가 하나의 바퀴로 가기가 어렵듯이 수행도 정념과 정지의 적절한 조화가 필요합니다. 이것은 마치 새가 두 날개로 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분명한 알아차림과 분명한 앎은 상호의존적이라서 수행의 기본적인 구성 요건입니다.


분명한 알아차림(正念)은 대상(경계)를 겨냥하는 행위고 분명한 앎(正知)은 대상(경계)을 받아들여서 이해하고 분별 인식하는 행위입니다. 이때의 분명한 앎은 대상을 받아들여서 수용하는 지혜와 같습니다. 마음 하나가 적극적일 때 다른 마음은 대상을 수용해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처음에 알아차림으로 대상을 겨냥하고 분명한 앎으로 대상에 내려앉아서 대상의 여러 가지를 살필 때 알아차림이 지속되고 지혜(분명한 앎)이 증장합니다.


수행자가 분명한 앎을 할 대상은 다음과 같습니다. 앞으로 나아갈 때, 뒤로 돌아갈 때, 앞을 볼 때, 주위를 볼 때, 팔다리를 구부리거나 펼 때, 옷을 입고 벗을 때, 먹을 때, 마실 때, 씹을 때, 맛볼 때, 대소변을 볼 때, 가고, 서고, 앉을 때, 누울 때, 잠에서 깨어날 때, 말하거나 침묵할 때 등 생각(意), 말(口),행동(身)이라는 3가지 업(業), 즉 일상에서 행하는 모든 행위(三業)에 분명한 앎을 해야 합니다. 이처럼 분명한 앎은 일상의 모든 행위를 대상으로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분명한 앎을 일상의 알아차림이라고 합니다.


분명한 앎에는 네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목적에 대한 분명한 앎입니다. 둘째, 적합성에 대한 분명한 앎입니다. 셋째, 감각대상에 대한 분명한 앎입니다. 넷째, 미혹하지 않음에 대한 분명한 앎입니다.


1) 목적에 대한 분명한 앎


마음공부를 하는 사람은 항상 자기가 하는 행위(생각 말 행동)이 어떤 목적을 가지고 하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자신이 하는 일이 유익한 일인지 아니면 해로운 일인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이익이 있으면 하고  손해면 하지 말아야 합니다. 수행자라고 해서 이익과 손실을 따지지 말아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는 이익과 손실은 경제적인 측면이 아니라 도덕적인가 비도덕적인가를 살피고 지혜가 나는 일인가 아닌가를 살피는 것입니다.


수행을 하기 위해서 수행을 하는 장소에 가려는 마음과 가지 않으려는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도 이익에 대한 분명한 앎입니다. 수행을 하는 사람과 만나고 싶어 하거나 수행을 하지 않는 사람을 만나고 싶어 하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도 이익에 대한 분명한 앎입니다. 또 자신이 수행을 하는 것이 이익인지 이익이 아닌지를 알아차리는 것도 이익에 대한 분명한 앎입니다.


인간은 항상 이성적으로만 사고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항상 감성적으로만 사고하지도 않습니다. 이 두 가지 사고를 함께 하지만 사실은 어리석음으로 인해 감각적 욕망에 빠져 바르게 판단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래서 무슨 일을 할 때 먼저 대상을 알아차리고 다시 이 일이 이익이 있는 일인지 아니면 괴로움을 겪을 일인지를 지혜(분명한 앎)로 통찰해야 합니다.

 

2) 적합성에 대한 분명한 앎


수행자는 항상 자기가 하는 행위가 시간 장소 상황에 적절한지 알아야 합니다. 가지 말아야 할 시간에 가지 말아야 할 장소에서 만나지 말아야 할 사람을 만나는 것은 적절한 일이 아닙니다. 모든 일에는 때와 장소와 상대가 있습니다. 이런 상황 조건이 적절한지 살피는 것이 분명한 앎(正知)입니다.


사람들이 적절하지 못한 일을 할 때는 적절한 일을 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적절한 일을 할 때는 적절하지 못한 일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적절하지 못한 일을 할 때는 적절하지 못한 일을 해서 바람직하지 않고, 적절한 일을 하지 못해서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또 적절한 일을 할 때는 적절한 일을 해서 바람직하고, 적절하지 못한 일을 하지 않아서 바람직합니다. 이렇듯 잘된 행위는 두 가지의 이익이 있고, 잘못된 행위는 두 가지의 손실이 있습니다.


이상의 목적에 대한 분명한 앎과 적합성에 대한 분명한 앎은 일상생활을 하면서 여러 가지 경우에 대입을 하면 매우 유익할 것입니다. 그러면 어느 경우에도 지속적인 알아차림을 확립할 수 있습니다. 알아차림과 분명한 앎으로 선한 행위를 하면 선한 과보를 받아 괴롭지 않은 삶을 살 수 있습니다.


3) 감각대상에 대한 분명한 앎


수행자는 항상 자기가 하는 행위가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알아야 합니다. 감각대상에 대한 분명한 앎은 영역에 대한 분명한 앎입니다. 여섯 가지의 감각기관이 여섯 가지의 감각대상과 부딪칠 때 무엇을 대상으로 하는가가 중요합니다. 수행자에게는 자신에게 맞는 일정한 영역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수행자에게 필요한 대상입니다.


수행자는 항상 자신의 몸과 마음이 알아차릴 대상이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관념적인 것을 대상으로 알아차리면 관념에 머물러 지혜를 얻지 못합니다. 그러나 몸과 마음의 실재적인 것을 대상으로 알아차리면 지혜를 얻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수행자가 무엇을 대상으로 알아차릴 것인가를 살펴봐야 합니다.


만약 추론적이거나 증명할 수 없는 것이라면 감각의 영역을 벗어난 것입니다. 이런 대상은 수행자의 영역이 아닙니다. 수행자가 자신의 몸과 마음을 의지처로 삼아서 알아차리면 확실한 영역 안에 있기 때문에 괴롭지 않고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만약 마음이 자신의 몸과 마음을 대상을 하지 않고 밖으로 나갔다면 괴로움의 원인을 일으킬 위험이 따릅니다. 마음이 밖으로 나가면 내가 있다는 생각으로 대하기 때문에 탐욕, 성냄, 어리석음으로 대하게 됩니다. 그러면 안전한 영역을 벗어난 것입니다. 정신적 영역에서는 단지 정신적 영역에 그쳐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마음으로 인해 몸까지 아픕니다. 물질적 영역에서 는 단지 물질적 영역에 그쳐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몸으로 인해 마음까지 아픕니다.


수행자가 몸과 마음을 알아차릴 대상으로 삼는 것은 행복의 기본조건입니다. 행복은 과거나 미래가 아닌 현재에 있고, 현재에 있는 것은 오직 몸과 마음입니다. 그래서 실재하는 진실은 언제나 현재의 몸과 마음에 있습니다. 수행자가 자신의 몸과 마음을 알아차리면 가장 바람직한 영역 안에 있습니다.



4) 미혹하지 않음에 대한 분명한 앎


수행자는 항상 자기가 하는 생각 말 행동이라는 행위(身 口 意 삼업)이 미혹하지 않은지 알아야 합니다. 미혹하다는 것은 어리석음을 말합니다.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촉감을 느끼는 것이 내가 하는 것이 아니고 단지 감각대상(모양, 소리, 냄새, 맛, 촉감)이 감각기관(눈, 귀, 코, 혀, 피부)에 부딪치는 것일 뿐이라고 알아야 합니다.


앞으로 나아가고, 서고, 도는 것이나 구부리고, 펴는 것이 모두 내가 하는 것이 아니고, 단지 정신과 물질이 조건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라고 알아야 합니다. 자신이 하고 있는 모든 행위를 이렇게 분명하게 알 때 자아(나라는 것이 있다고 여기는 환상)가 없음을 알 수 있습 니다. 자아가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이 무아(無我)의 발견입니다. 바로 이러한 지혜가 어리석지 않은 분명한 앎입니다.

 

미혹하지 않음에 대한 분명한 앎은 실존에 대해서 분명하게 아는 지혜에 속합니다. 누구나 자아가 있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는 한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몸과 마음을 있는 그대로 분명하게 알아차리고 분명한 앎으로 이해할 때 내가 있어서 몸과 마음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압니다. 몸과 마음은 단지 원인(因)과 조건(緣)에 의해서 일어나고 원인과 조건이 다하면 사라지는 현상일 뿐이라고 아는 것이 무아(無我)의 바른 견해(正見)입니다.


미혹하지 않음에 대한 분명한 앎을 하기 위해서는 앞선 세 가지의 분명한 앎이 선행되면 자연스럽게 지혜가 성숙되어 네 번째의 분명한 앎을 이루게 됩니다. 특히 세 번째의 감각대상에 대한 분명한 앎을 확실히 하면 차츰 어리석지 않은 분명한 앎을 하게 됩니다. 이제 우리 모두는 분명한 알아차림(正念)과 분명한 앎(正知)을 삶속에 실천하여 지고의 행복을 얻도록 노력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