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포함한 이 세상 모든 것이 본래 부처다
사람을 포함한 이 세상 모든 것이 본래 부처(本來佛)인데 본래부터 이미 완전무결한 부처인지를 미처 모르기 때문에 눈 앞에 보이는 모든 것이 촉목보리(觸目菩提), 즉 눈 앞에 보이는 이 세상 모든 것이 전부 다 깨달음(보리 菩提)인데, 그것들이 내 눈에는 깨달음으로 안 보이고 분리 분별이 된 것들, 즉 마이크로 보이고, 사람으로 보이고, 시계로 보이고, 컵으로 보이고 집으로 보이고 차로 보이고, 하늘로 보이고, 땅으로 보이고, 산으로 보이고, 강으로 보이고, 바다로 보이고, 동물로 보이고, 식물로 보이고, 돌로 보이고, 달로 보이고, 해로 보이고 한단 말이지요. 그런데 이게 이 세상 모든 것이 전부 다 '하나의 부처(一佛, 一佛乘)'로 보여야 되는데, 하나의 부처가 드러나 이 세상 모든 것들로 확인돼야 하는데, 나에게는 온갖 것들로 분리되고 분별된 대상들로 보인다 이 말입니다.
그런데 ‘내 눈에는 이 세상 모든 것, 이것이 왜 부처로 안보이지?’ ‘나에겐 아직까지 이 세상 모든 것들이 여전히 중생의 눈으로만 보이지?’ 그 궁금증을, 그 모르겠음을 모르지요. 답이 없습니다. 방법이 없습니다. '하나의 부처' 자리는 특정한 방법을 통해 갈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냥 몰라야 되는 거예요. 의식(意識)을 굴려서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야 됩니다. 그냥 몰라야 되는 거지요, 도저히 모르겠다.
그런데 아무것도 몰라야 되는데, 앉아 있어야지만 더 많이 몰라지나요? 누워있어야만 더 많이 몰라지나요? 그냥 모르는데 뭘 그렇게 애써야지 몰라져요. (죽비를 치며) 이게 이 소리가 부처인지 모르면 그냥 모르는 거지 앉아서 막 힘을 쓰고 ‘저 소리가 왜?’ ‘저 소리를 몰라야지 몰라야지.’ 라고 애쓴다고 더 몰라지는 게 아닙니다. 그냥, 그냥 모르는 거니까. “뜰 앞에 잣나무가 도(道)다.” 이렇게 얘기하면 뭔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잖아요, 그냥. 그냥 그렇게 모르겠으면 되는 겁니다.
‘뜰 앞에 잣나무가 도(道)다’, 라는 말은 자꾸 뜰 앞에 잣나무라는 말이 뭘 뜻하는 건지를 해석할 수 있잖아요. 그러니까 ‘뜰’ 이게 도(道)입니다. '뜰'을 생각하지 말고 , 기억을 더듬어서 '뜰'을 그림 그리지 말고 '뜰'이라는 상(相, 이미지, 그림, 想)을 깨고 그러고 나면 '뜰'이 되었던 '뜨'가 되었던 뜨가 나오기 이전에 쌍디귿이 막 나오기 시작하려고만 해도 벌써 쌍디귿 그것이 부처라는 것이지요. 말의 뜻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이 마음공부는 앉거나 누워서 하는 이런 게 더 잘되거나 하는 이런 공부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인도에서 요가수행, 선정주의라는 것이 워낙 오랫동안 있어왔던 수행이다 보니까. 한국에 불교가 들어올 때 산신각(山神閣) 같은 거 그냥 수용해줬잖아요. 불교가 다른 나라의 신앙을 타파하지 않고 그 한국의 문화들을 다 인정해주고 들어왔습니다. 타국 문화와 싸우면서 들어오지 않기 때문에 석가모니 부처님도 인도에서 타종교가 그냥 좀 다른 걸 할지라도 인도의 토속적인 어떤 문화나 이런 것들을 크게 배격하지 않았습니다. 그게 어찌 보면 격의불교(格儀佛敎)라는 표현을 쓰는데 불교가 중국으로 넘어올 때 중국의 전통사상 뭐 노자, 장자, 노자 이런 분들의 사상 을 가지고 불교를 처음 이해하기에는 좀 까다로웠던 과도기적인 시간이 있었거든요.
그런 어떤 격의(格儀), 어떤 모습들이 어느 나라에나 있습니다. 그것은 부처님이 기존에 있던 사람들이 전부다 요가수행이나 뭐 요런 걸 다 하고 있으니까 전부 다 윤회가 어떻다고 하고 있으니까. 그걸 전면으로 아니다, 이렇게 하면은 그 인도의 모든 사람들이 너무 거부감이 심해지니까. 그걸 그냥 전면으로 딱 깨지 않은 것이지요. 부처님은 어찌 보면 그 선사 스님들과는 좀 다른 방편을 썼어요.
선사 스님들은 아니면 아니다, 라고 딱 끊어버립니다. 과감하게 딱 끊어버리고 법을 바로 드러내버려요. 그런데 부처님은 아주 친절하고 자상하고 잘못하는 사람이 있어도 하나하나 가르쳐주면서 그런데 이것이 선에서는 노파선(老婆禪)이라고 너무 노파심이 심해서 하나하나 가르쳐주는 선을 노파선이라고 불러요. 너무 하나하나 자상하게 막 가르쳐주는 게 물론 그게 어느 정도의 좋은 효과를 보는 수도 있지만 바로 발심(發心)이 제대로 된 제자들에게는 그런 노파선이 오히려 도움이 안 된다는 거지요. 그래서 자신의 근기에 따라서 어떤 방법이 더 좋은지는 자신이 알 수가 없어요. 어떤 분은 그냥 불교의 비읍(ㅂ) 짜도 모르는 사람, 깨달음에는 관심조차 없는 사람, 그런 사람이 되었든 누가 되었든 일단은 공부하겠다고 발심(發心)하면 그게 그냥 아예 일도 모르게 해버립니다.
(죽비를 치며) 이게 부처야, 확인해. 방법 없어. 이게 부처니까 이게 왜 부처인지 알아봐. 그런데 생각은 하면 안 돼. 앉았던 뭐 서던 마음대로 해라. 그런데 생각은 하면 안 되니까 하여간 이게 왜 부처인지 알아봐라. 네가 숨을 쉬고 있잖아. 누가 숨을 쉬는지 알아와. 생각으로 알면 절대 안 돼. 이렇게 얘기해요. 그러고 하루쯤 있다가 와서 어찌 알아봤어? 이러면 말을 이제 꺼내기 시작하지요.
이 머리로 자꾸 정리를 하려고 하니까. 아 숨을 쉬는 놈을 가만히 관찰해보니까 이게 뭐 있는 거 같기도 하고 없는 거 같기도 하고. 바로 한대 맞고 말을 못하게 만들어버립니다. 아니야, 아니야 틀렸어, 틀렸어 다 틀렸다고 하는 거지요, 계속해서. 그러면 이 사람은 이 스승에 대한 믿음이 굳건하면, 아휴 진짜 난 이런 건 태어나서 해본 적이 한 번도 없네. 뭔 방법도 없고 그냥 뭐 어떻게 하라는 말도 없고
그냥 뜬금없이 그냥 알아오라는데 뭐 어쩌라는 거야. 그런데도 머리는 없는 것처럼 하라니까, 생각은 할 수가 없는데 뭘 어쩌라는 얘기야, 도대체. 그러면서 진도가 하나도 나가지 않는데, 진도가 일도 나가지 않지요. 공부가 되는 거 같은 느낌이 일도 없어요. 그냥 멍하니 멍청하게 그냥, 그냥 모르겠는데 뭘 모르겠는 건지도 모르겠어요. 내가 뭘 찾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는 거예요, 그냥.
내가 여기서 왜 이러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고 저 놈이 시키니까 그냥 하기는 하는데 내가 왜 이러고 있어야 되는지도 모르겠고 그냥, 그냥 말 그대로 진짜 일도 모르겠는. 그렇게 시키는 경우에 오히려 더 빨리 딱 확인하는 사람도 있을 수도 있고. 그런데 또 그렇게 하면은 사람들이 분별(分別)하는 습관 때문에 아무리 그렇게 얘기를 해줘도 사람들은 계속해서 앉아가지고 자꾸 머리를 굴린단 말이지요.
그러고 도대체 이걸 뭘 어떻게 하라는 지도 모르고 무조건 앉아라고만 하니까 너무 답답해서 다 뛰쳐나가버리는 경우가 많단 말이지요. 그러니까 이제 약간의 구조를 설명해주는 것이지요. 우리 분별(分別)의 구조, 분별심(分別心) 때문에 당신이 괴로워하고 있다. 모든 괴로움은 이 분별(分別)하는 마음 때문에 생겨난다. 그러니까 그 분별심(分別心)을 멈추는 것이 이 마음공부의 핵심이다.
그럼 분별을 어떻게 멈추게 해야 되느냐? 모든 것을 다 생각해서 분별하려 하니 분별을 딱 멈추게 하기 위해서 이러한 숙제를 주는 거다. 그런데 그거를 생각으로 따지면 당연히 안 되지 않겠느냐? 그러니까 지금 뭔가 알고 싶은데 모르겠다, 라는 것은 모르겠다, 라는 말은 분별심(分別心)이 작동하지 않는다는 소리다. 그러니 모르겠음을 유지해봐라. 모르겠는 그 마음을 버텨라. 버텨서 계속 모르겠음을 그냥 쭉 끌고 가라. 조금 모르다가 너무 힘드니까 너무 힘들거든요. 너무 지치고. 그러니까 예전의 식이 자꾸 발동을 해요. 그러니까 조금 힘드니까 아휴 좀 쉬었다 해야지 하고 또 자다가 하거나. 또 너무 힘드니까 아휴 머리 좀 시켜야지 하고 막 tv보고 뭐 무슨 주식보고 뭐∼ 연예인이 어쩌고 정치가 어쩌고 막 얘기 한참 하다가 또 친구랑 놀다가 술도 한잔 마시다가 또 이제 시간 나니까 또 한 번쯤 하고. 이래도 나쁘진 않은데. 안 하는 거보다 훨씬 나은데. 안 하는 거보다 훨씬 낫지요.
그러나 진짜 내가 한번 탁 공부를 한번 해봐야지 하고 발심(發心)이 딱 동반됐을 때는 약간의 힘을 줘서 너무 과하게 힘을 주면 안 되고 병이 되니까. 약간의 노력을 해서 조금 내가 그런 어떤 외적인 것들을 조금 줄여보자. 다른 데에 대한 관심사를 좀 줄여보자. 그러고 늘 여기가 뭔가 풀리지 않는 숙제를 늘 안고 있는 그게 화두(話頭)거든요, 그게 화두가 들렸다, 라는 표현을 쓸 수가 있는 거지요. 공부가 되고 있는 거고. 그게 굳이 말한다면 수행하고 있다 라고 표현할 수가 있어요.
그런데 그렇게 모르고 있으면 지하철을 타고 집에 갈 때도 남들은 스마트폰을 하고 있지만 나는 멍하게 허공을 응시하면서 아니면 눈을 감고는 뭔가 풀리지 않는 숙제를, 뭐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으니까. 속 터져 죽긴 하겠는데. 속 터져 죽겠는 것을 그냥 안고 있는 거예요, 그냥 안고 가는 겁니다, 그냥. 그게 공부니까. 그래서 그것이 수행이지 앉거나 눕는 것이 수행이 아닙니다.
또 좌불을 배우고자 한다면 앉아있는 부처를 흉내 내려고 하면 부처는 정해진 모양새가 아니다. 정해진 모양이 있는 게 부처가 아닙니다. 요 앞에 있는 이 불상 이거 부처 아닙니다. 어떻게 저런 모양이 부처가 될 수 있겠어요. 내 안에 있는 불성(佛性)이, 이 불상 모양이겠어요? 저 불상 모양이겠어요? 불성(佛性)의 모양이 저와 같은 불상 모양이겠어요? 불성은 모양이 없습니다. 크기도 없고요.
그런데 저렇게 모양으로 만들어 놓은 불상은 얼마나 그 뭐랄까? 말도 안 되는 방편(方便)이에요, 쉽게 말하면. 왜냐면 불성(佛性)이 저런 모양을 하고 저렇게 생기지 않았잖아요. 부처(佛)가 저런 모양을 하고 저렇게 생긴 게 아니잖아요. 생긴 게 없잖아요 부처는. 부처는 생긴 모습이 없는데 저런 모습으로, 거룩한 모양으로 딱 만들어놓으니 이런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은 절에 와서 불상 앞에서 절을 합니다. 여기 절에 있는 불살, 생김새에 생긴 모습에, 우리들도 그렇잖아요.
집에서 수행하는 거는 왠지 좀 집중도 덜될 거 같고 영험도 없을 거 같고, 절에 와서 이렇게 하면 그래도 좀 더 내가 영험이 있을 거 같고 느낌이 그런 거지요, 느낌이. 부처는 안방에 있으나, 화장실에 있으나, 누워 있으나, 서 있으나, 불상 앞에 와서 앉아있으나, 내 집 화장실에서 큰일을 볼 때나, 언제나 어디서나 부처는 훼손되는 바가 없습니다. 그래서 부처는 정해진 모양새가 없습니다.
머무르지 않는 법(無住法)에서는 취사선택을 해서는 안 된다. 머무르지 않는 법, 무주법(無住法)이라고 하잖아요. 무주법(無住法)에서는 그 어떤 것에도 머물러선 안 된다. 취사, 아무리 좋은 부처님 가르침이라고 해도 거기에 그걸 취해서는 안 된다. 취하고 거기 머물러서는 안 된다. 하물며 앉는 거에도 취해가지고 앉아있는 모습을 취하고 앉아있는 모습에 머물러서 좌선을 해야만 부처가 된다 라는 것을 그 모습을 취한다면 말이 되겠느냐.
그대가 좌불을 흉내 내려고 한다면, 앉아있는 부처를 흉내 내려고 한다면, 그것은 곧 부처를 죽이는 일이다. 왜냐하면 앉아있는 좌불상(坐佛像을 흉내내려는 것은 참된 부처가 아닌 부처를 가리키는 가짜의 허망한 손가락을 흉내 내려고 하는 것과 똑같으니까. 만약 앉은 부처의 모습, 좌불상(坐佛像)에 집착한다면 깊은 이치, 참된 부처에는 통하지 못할 것이다.
법상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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