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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道)는 닦는 것이 아니라 본래부터 있던 것이 지금도 있을 뿐이다(本有今有)

장백산-1 2018. 11. 5. 02:07

도(道)는 닦는 것이 아니라 본래부터 있던 것이 지금도 있을 뿐이다(本有今有)


도(道)는 닦는 것이 아니다. 도(道)를 닦아서 도(道)를 이룬다고 한다면, 닦아서 이루는 것은 다시 무너질 것이니 이는 곧 성문(聲聞)과 같다. 그렇다고 닦지 않는다고 하면 그는 곧 범부(凡夫)와 같다. (선어록과 마음공부 p174)


본래부터 있던 것이 지금도 있을 뿐이니(本有今有), 수도(修道)나 좌선(坐禪)은 필요치 않다. 수도나 좌선에 의지하지 않으면 이것이 바로 여래청정선(如來淸淨禪)이다.  (선어록과 마음공부 p174)


절에 오시는 사람들은 도(道) 닦으러 절에 오잖아요. 그런데 도(道)는 닦는 것이 아니랍니다. 닦아서 이룬다고 하면 인위적으로 조작해서 만드는 것이니까. 어떤 것을 새롭게 만든다고 하면 그것은 인위적인 조작으로 새롭게 만들어진 거니까 닦아서 만들어진 거니까 언젠가는 반드시 사라질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인연법(因緣法), 연기법(緣起法), 인연과보법(因緣果報法)에 의하면 인연 따라 만들어진 이 세상 모든 것은 인연생(因緣生), 인연멸(因緣滅)이라고 하듯이 인연 따라 생겨난 이 세상 모든 것은 인연이 다하면 소멸합니다. 그래서 불교에서 이 세상을 가리켜서 인연법(因緣法), 인과법(因緣果報法), 연기법(緣起法)이다 라고 할 때는 그런 어떤 인연법, 인과법, 연기법이라는 어떤 뭐 법칙성을 강조하려고 하는 것이기보다는 인연 따라 생겨나고 인연 따라 그 과보를 받는 그러니까 이 세상 모든 것은 인연이 다하면 사라질 수밖에 없는 허망하고 무상한 실체가 없는 것 이라는 얘기를 하기 위해서 입니다. 


이 진리(眞理), 참된 법(法)은 인과법(因果法), 인연법(因緣法), 연기법(緣起法)이 아니라 비인비과법(非因非果法)이라고 해서 원인을 제공해서 그에 따른 결과를 내는 것이 아니라는 거지요. 즉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에서 우리가 보기에는 어떤 사람은 훌륭해 보이고, 어떤 사람은 깨달음에 가까워 보이고, 도력이 높아 보이고, 법력이 있어 보이고, 또 나는 그렇지 못해 보이고. 이렇게 세간상에서도 그렇고 출세간에 대해서도 그렇고 다 사람들은 분별하고 차별하는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분별하고 차별하는 마음 그것은 사람들이 분별하고 차별해서 보니까 그런 분별 차별이 있는 거처럼 보이는 것일 뿐이지 사실은 이 세상 모든 것, 우리 모두가, 일체 모든 존재가 전부 다 본래부터 이미 완전한 부처라는 것이지요. 닦을 필요가 없이 본래 이미 완전한 부처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그래서 부처는 도(道)는 닦아서 이루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부처, 도를 닦아서 부처, 도를 이루려고 하면 그 사람은 성문, 소승 수행자로 지ㅐㄴ정한 수행자가 아니라는 얘기지요. 


그런데 이제 더 어려운 얘기는 ‘그렇다고 닦지 않는다고 하면 그는 곧 범부와 같다.’ 그러니까 닦지 않아서도 안 된다는 얘기입니다. 닦아서도 안 되는데 닦지 않아서도 안 되면, 그러면 “이제 어떻게 해야 되지요?” “닦아야 됩니까?” “닦지 말아야 됩니까?” 닦아야 되면 소승(小乘)일 뿐이거든요. 그런데 닦지 않으려 하면 그건 또 범부(凡夫)일 뿐이고. 그래서 불교에서는 ‘하되 함이 없이’ 해야 한다고 그렇게 얘기를 하고요. 공부를 하되 내가 공부했다, 라는 상(相)이 있으면 그건 전혀 공부하는 사람이 아니지요. 왜냐면 상을 깨는 공부가 이 공부인데 그 상을 깨는 공부를 하면서 ‘나는 상을 깨는 공부를 잘했어.’ ‘나는 상을 깨는 공부에 성공했어,’ 라고 여기는 것 자체가 또 다른 상을 만들어내는 것이지요. 


얼마 전에 어디 글을 읽다 보니까 연구를 해봤더니 내가 수행한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아상(我相)이 되게 높더라. ‘수행한다,’ ‘공부한다,’ ‘뭐 명상한다,’ 라고 여기는 사람은 자신은 ‘수행하는 사람이다’, 라는 ‘명상하는 사람이다’, 라는 그런 어떤 상(相)이 일반인들 보다 더 높더라는 것이지요. 그런 사람들은 그 만큼 깨부숴야 할 것이 더 많아지는 거지요. 아상(我相)을 깨는 게 마음공부인데. 이 세속적인 것을 깨부수는데 출세간적인 뭔가를 또 쥐고 있는 거지요. 그래서 나의 정체성을 아주 출세간적인 것을 추구하는 어떤 위대한 사람인 것처럼 조작해내는 것과 같은 것이지요.


그래서 하되 하지 말아야 한다 이렇게 또 얘기하면 너무 이제 ‘도대체 어쩌라는 거지?’ 이제 이런 생각이 드는데. 그래서 선(禪)에서는 이제 조계종(曹溪宗) 이러면은 조계(曹溪), 육조 스님의 어떤 후손이다. 육조 스님의 법을 이은 종단이다. 뭐 이런 뜻입니다. 


그러나 진리, 도(道),법(法)은 바뀌지 않습니다. 즉 석가모니부처님 당시에는 부처님께서 법을 그대로 이렇게 드러내주시고 법을 보여주시고 이 현상세계(現象世界) 사람들이 현상에 집착하기 때문에 괴로움이 생기니까, 현상세계 사람들이 집착하고 있는 모든 것들(현상)에 대한 집착을 다 깨버려주는 법문을 하십니다. 연기법(緣起法), 야 네가 집착하고 있는 이 세상 모든 것이 인연 따라 생겨난 거라서 인연이 다하면 사라질 거야 그것들응 연기(緣起)된 허망한 것이다.


그래서 너라는 존재? 너는 네가 부자가 되면 좋을 거 같고 이렇게 생각하지만, 너라는 존재는 실체가 아니라 인연 따라 생겼다 인연 따라 사라지는 무상(無常)이고 무아(無我일 뿐이다. 네가 쥐고 있는 모든 것들 제행무상(諸行無常)이고 제법무아(諸法無我)라서 네가 영원히 가질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 나라는 존재도 언젠가는 사라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사실 지금 내가 돈이 많아서 행복하다고 여기는 사람도 그것 또한 사실은 일체개고(一切皆苦)이다. 언젠가 사라질 거니까, 제행무상(諸行無常)이고 제법무아(諸法無我)니까 반드시 사라질 것이기 때문에 괴로운 것(一切皆苦)이다. 내가 쥐고 있는 모든 것은 다 괴로운 것이다. 나는 내가 행복하다고 여길 때는 내 감정, 감각이 행복하거나 색(色) 수(受) 상(想) 행(行) 식(識)이라고 하는 이 다섯 가지(오온 五蘊)을 '나'라고 여기니까, 좋은 느낌이 일어날 때 내가 행복하다고 여기고, 또 좋은 생각, 좋은 지식이 많을 때 뭐 의지나 의도대로 뭔가 이루어지거나 그럴 때 행복하다고 여기지만, 그 또한 실체적인 것이 아니라 인연 따라 잠깐 생겼다 사라지는 이 오온(五蘊)이라는 것이 왜 공(空)한 것인지(오온개공 五蘊皆空)를 또 꾸준히 설명을 하고 있고. 또 눈 귀 코 혀 몸 뜻이라는 육근(六根)과 내 바깥에 있는 색 성 향 미 촉 법이라는 이 대상을 끊임없이 좇아가고 있는 바깥을 향해서 추구하는 삶을 사는 중생들에게,


그렇게 지금까지 추구하고 사는 모든 삶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를 육근, 육경, 12처, 18계라는 가르침을 통해서 끊임없내가 추구하는 바깥에 있는 것(六境)도 허망한 것이고, 나라는 존재(六根)도 허망한 것이고, 내가 일으킨 생각, 의식(六識)이라는 것도 전부 다 허망하다는 것을 끊임없이 설해주는 것이지요, 그래서 어디에도 집착하지 못하게. 왜냐면 집착하기 때문에 괴로움이 생겨나니까, 어떤 것도 욕망하지 못하게. 그렇게 해서 결국에 우리가 지금까지 쥐어왔던 모든 것들은 집착해서 만들어진 것이고, 그걸로 인해서 내가 괴로운 것이다. 본래 괴로울 필요가 전혀 없는데도 불구하고 내가 이 세상을 살아오면서 내 바깥에 있는 것들이 진짜라고 여기니까, 내가 진짜라고 여기고 내 바깥에 있는 것이 진짜라고 여기니까, 나에 집착하고 남들과 자꾸 비교하고 더 나은 나를 만들려고 내 바깥에서 더 많은 것들을 내 걸로 끌어들이려고 막 애를 쓰며 살고, 그 마음 때문에 괴로움이 생겨난 것이다. 그게 12연기(十二緣起)거든요. 어리석으니까 어리석은 행동을 자꾸 하게 되고 거기서 어리석은 의식이 생겨나고 그러면서 거기에서 육근 육경 육식이 생겨난다. 


나라는 존재 또 바깥에 있는 어떤 대상 그것을 접촉(接觸)하려고 하고 접촉하려고 하는데서 그것을 내가 가지려고 하고 취(取)하려고 하는 의식이 생겨나고. 거기에서 좋은 느낌을 가진 것은 내가 더 가지려고 애착하고 싫은 느낌이 있는 것은 더 밀쳐내려고 애쓰고 좋은 거를 애착하다가 그것이 취착, 취로 옮겨가고 그래서 내 걸로 만들려는 마음을 일으키고. 그런데서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들, 즉 모든 생사법(生死법, 生滅法)이라는 것이 생겨났다. 그게 바로 괴로움의 원인이다


그래서 괴로움의 원인을 12가지로 나눠서 12연기(十二緣起)를 설명을 하고 그렇기 때문에 육근, 육경, 12처 18계 라는 게 전부 다 공(空)하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설함으로써 어디에도 집착하지 못하게 만들어서 괴로움의 원인(原因)을 제거하게 해주는 것이지요. 괴로움의 원인을 하나하나 제거하도록 해서... 부처님의 법문은 끊임없이 내가 쥐고 있는 것이 바로 괴로움의 원인이라는 사실을 자각하게 해서 사람들로 하여금 괴로움의 원인들을 다 제거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12연기를 통해서 계속해서 사람들이 어느 것도 쥐지 못하게 만들어서 고집멸도(苦集滅道)라는 이 괴로움의 원인을 설해서 그 원인을 제거하게 만들어서 결국에는 괴로움이 소멸된 상태, 괴로움이 사라진 상태, 즉 괴로움이 없고 완전한 행복의 상태, 그런 상태를 가도록 하는 것인데. 그것을 그냥 괴로움의 소멸이 괴로움을 소멸하는 것이다. 이렇게 얘기하면 사람들이 ‘괴로움의 소멸이구나,’ 그냥 이렇게만 생각하니까, 이제 하나의 미끼처럼 사람들을 좀 꼬시기 위해서 괴로움의 소멸을 열반 해탈 이러면 ‘야 내가 열반, 깨달음을 얻을 수 있구나.’ 뭔가 이렇게 거창해 보이잖아요. 그러니까 사실은 열반(涅槃) 해탈(解脫)이라는 개념은 괴로움에 묶여있는 것에서 풀려나 자유로와진 것이고, 활활 타오르는 분별 망상 번뇌의 불길을 훅 불어 껐다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이 모든 욕망과 집착 같은 것들을 다 그냥 내려놨다는 거 그래서 괴로움의 삶에서 괴로움이 소멸된 삶, 자유로운 삶으로 바뀌는 것 이게 해탈(解脫)이고 열반(涅槃)입니다. 말은 되게 거창한 것 같지만 지금 제가 말씀드린 이것이 초기불교에서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설명하신 가르침이거든요. 이처럼 초기불교에서 부처님께서는 끊임없이 제자들에게 그 어떤 것도 집착(執着)하지 못하게 나와 남, 아(我)와 아소(我所), 나와 내 것이라는, 또 나와 내 바깥에 있는 모든 것들 어디에도 집착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내가 집착을 가지고 집착의 대상을 취하고 또는 싫어하는 것은 버리는 취사(取捨)하는 마음으로 이 세상을 내가 내 마음으로 조작하는 것이지요, 의식을 가지고. 그걸 육식(六識)이라고 표현을 했습니다. 


눈으로 형색을 보자마자 좋고 싫고를 나눠놓고 좋은 건 집착하고 싫은 건 버리려고 하고, 소리를 듣자마자 좋은 소리는 취하고 싫은 소리는 버리려고 하고, 좋은 음식은 맛보고 싫은 건 맛보지 않으려고 하고, 좋은 건 내 걸로 만들어서 감촉을 느끼려고 하고 그렇지 않은 건 버리려고 하고, 또 의식으로도 그렇게 부녈을 하고. 이렇게 내 의식(意識)으로 조작하는 모든 것 자체가 바로 허망한 육식(六識)일 뿐이다. 마음이 만들어낸 환상(幻想)일 뿐이라는 것을 지속적으로 이야기를 함으로써 사람들이 집착하고 있는 것은 딱 끊어버리도록 그렇게 설해줌으로써 이제 이끌어주는 것이지요.


그래서 고(苦)와 고(苦)의 소멸을 지속적으로 설명을 하셨고. 그 당시 사람들은 지금처럼 이렇게 뭐 화려한 볼거리가 많고, 육근(六根)을 자극하는 것들이 끊임없이 넘쳐나고, 잠시도 쉬지 않고, 뭐 스마트폰, tv, 온갖 화려하고 재미난 것들, 맛있는 먹거리, 육근(六根)을 자극하는 아주 화려한 육경(六經)들이 많은 시대가 아니다 보니까, 또 인도는 더우니까 할 게 없어요. 그러니까 그 더운 날 뭔가 바깥으로 내 의식을 사로잡는 게 없다 보니까 공부하기가 훨씬 수월한 여건이기도 했고. 또 그 당시 이제 부처님이 계셨다 보니까 부처님의 그런 법문을 듣고 많은 사람들이 빨리빨리 깨달을 수 있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이제 중국으로 넘어오면서 그것들이 부처님이 열반하신 이후에 너무 막 현학적으로 법에 대한 해석으로만 몰두하고 머리를 가지고 분별(分別)하는 데만 몰두함으로써 바른 법(法)은 있으나 그 바른 ㅂ법(法)을 가지고 깨닫는 사람들은 없게 되는 그런 상황이 되었고.


그래서 이제 중국에서 선(禪)이라는 것이 육조 혜능 스님을 비롯해서 나옴으로써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이라고 하는 부처님 당시도 똑같습니다. 부처님의 법문을 듣고 바로 깨달았는데 선(禪)에서도 선(禪)의 어떤 바른 법문을 듣고 깨닫는 이런 어떤 법이 피어나면서 한 몇 백년간 그 혜택을 받은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있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깨달음을 얻었고 그러고 나서 뭐 길게는 한 천년 정도쯤 넘어가면서 부터는, 지금 이제 이천 년이 넘었는데 한 천년 넘게 바른 법이 또 이제 많이 사장(死藏)되고 그러다 보니까 석가모니부처님이 열반하시고 나서 아비달마(Abhidharma) 불교라해서 머리를 가지고 법(法)을 시비 분별 비교 판단 해석하는 불교에 치우쳐있었다 보니까 바른 법이 드러나지 않았던 것처럼 그 이후에 선(禪)이 사라진 이후의 천년은 어찌 보면 불교에서는 좀 서양의 중세 암흑기라고 하듯이, 불교에 어찌 보면 좀 암흑기 같은 시대입니다. 바른 깨달음은 없는 시대다 보니까, 바른 깨달은 도인이 별로 없는 시대다 보니까 깨달음이 없으면 사람은 당연히 의식이 활동할 수밖에 없거든요.


의식(意識)을 가지고 할 수 있는 것은 이 두 가지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부파불교에서 연구에 몰두하는 건 바른 법이 아니라는 그 경험치 때문에 그런지 모르겠지만, 중국 사람들과 인도 사람들의 어떤 다른 점인지는 모르겠으나. 그 이후에는 의식으로 추구하는 불교를 하지 않는 대신 조작(造作)하는, 수행해서 수행이라는 방편을 통해서 깨달음에 이르는 길을 찾아가는 끊임없는 어떤 방법론에 치우치는. 그래서 수행이라는 것이 그 이후 천 년 동안 수행불교(修行佛敎) 그게 이제 조금 더 더 왜곡(歪曲)되게 되면, 이제 기복불교(祈福佛敎)까지 나아가면서 지금까지 왔고. 지금의 시대는 우리가 그것을 무분별하게 그냥 불교는 이런 것이구나 하면서 접했던 불교가 바로 수행불교, 기복불교, 교리불교(敎理佛敎)를  접해 왔었던 것이지요. 


그러다 보니까 이런 선(禪)의 황금기 때 하던 법(法)의 본질(本質), 도(道)의 본질, 진리의 본질, 깨달음의 본질, 부처의 본질, 근본성품의 본질,참나의 본질을 바로 드러내주는 선(禪)의 용어들이 처음엔 되게 낯설 수가 있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 다음에 있던 말처럼 ‘본래부터 있던 것이 지금도 있을 뿐이다.’ 즉 법(法), 진리(眞理)는 제가 이제 굳이 법, 진리라고 말로 표현을 했을 뿐이고, 석가모니부처님께선 법(法), 진리(眞理)를 열반(涅槃) 해탈(解脫)이라고 표현을 했을 뿐이고, 또 선(禪)에서는 법(法), 진리(眞理)를 본래면목(本來面目), 자성불(自性佛), 본성, 자성 등으로 표현을 했을 뿐이지,

그런 표현에 해당하는 무언가를 우리 머릿속으로 그리려고 해서는 그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거는 ‘아 내가 아무리 정교하게 그려내도 그것은 허망한 착각(錯覺)이고 분별(分別)일 뿐이고 그려낼 수가 없는 것이구나.’ 라는 사실을 자각해서 ‘진리가 뭔지?’ ‘열반이 어떤 것인지?’ ‘깨달음이 어떤 것인지.’ 에 대해서는 ‘나는 모른다.’ 하고 ‘깨닫고 나면 그때 가서 알겠지.’ 하고 그냥 탁 덮어둬야 돼요, ‘모른다.’ 하고


선(禪), 법(法), 도(道), 진리, 깨달음, 부처, 근본성품, 참나, 열반 해탈, 본래면목, 자성불, 청정법신, 근본성품, 자성, 등을 조금이라도 ‘야 이거 알거 같다.’ ‘이런 거 같다,’ ‘저런 거 같다.’ 라고 하면 완전히 그것에서 멀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그래서 본유금유(本有今有)라는 말은 본래 있던 것이 지금도 있을 뿐이다. 본래 있던 우리 자성, 본성, 본래면목, 본래 부처, 법, 선, 도, 깨달음, 부처, 열반 해탈, 자성불, 자성, 청전법신, 근본성품이라는 말을 했는데 초기불교식으로 말하면 이 모든 단어들은 괴로움(苦)의 소멸(消滅)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지금까지 괴로움이 있는 삶을 살았는데 괴로움 없이도 당연히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지요.


괴로움 없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가능성이 누구에게나 있다는 것이지요. 괴로운 삶은 내가 의식(意識)으로 조작해낸 거기 때문에 괴로움이 없는 삶은 본래 이미 있는 겁니다, 본래 있는 거 본유(本有), 본래부터 있는 것, 즉 자성, 본성, 불성, 본래면목, 참나, 진리, 도, 법, 선, 열반 해탈, 자성불, 자성, 깨달음, 청정법신, 부처 이것은 본래부터 이미 완전하게 있는 것이고 단 한 번도 우리에게서 벗어난 적이, 없어진 적이 없는 것이기 때문에 지금 여기서도 당연히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본래 있던 것이 지금도 있는 것이다(本有今有)라고 해서 어떤 좌선도 수행도 필요없다는 말을 육조스님이 한 것입니다.


-법상스님 설법, 국방부 원광사아카데미-2018.7.6)-1 녹취 by 하이얀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