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나귀가 되어버린 사람들
인간을 제외한 그 어떤 동물도 지루함을 느끼지 못한다. 예를 들어 들소나 당나귀는 지루함을 모른다. 그들에게는 지루함을 느낄 지성이 없기 때문이다. 오직 인간만이 지루함을 느끼고 지루함을 안다. 또한 오직 인간만이 웃을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 지루함과 웃음은 동전의 양면이다. 그러나 그대가 따르는 수도승, 이른바 그대가 믿는 종교인들은 지루함도 모르고 웃을 줄도 모른다. 그들 종교인들은 들소나 당나귀가 되어버린 것이다.
길을 걸어가면서 고개를 들어 하늘, 별, 달, 태양, 구름, 날아가는 새를 바라보곤 했던 한 철학자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고개를 들고 위만 쳐다보면서 걷던 그 철학자는 당연히 길을 가던 사람들과 부딪치거나 뭔가에 걸려 넘어지기 일쑤였다. 그리고 그 철학자는 사람들과 부딪칠 때마다 그 사람한테 다음과 같은 말을 하는 게 습관이 되었다.
“당신은 당나귀입니까? 뭡니까?”
그 철학자는 명성이 자자한 철학자였기 때문에 그와 부딛친 사람들은 그냥 못이기는 척 지나갔고 그에게 별다른 대응을 하지 않았다. 어느 날, 그 철학자가 실제로 당나귀와 부딪히는 일이 벌어졌다. 당나귀와 부딛친 그는 여느 때처럼 ‘당신은 당나귀입니까? 뭡니까?’라고 말하려던 찰나였다. 그런데 그가 고개를 내리고 앞을 바라보더니 크게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이런, 당신은 정말로 당신(당나귀)이로군요. 내가 달리 뭐라고 말할 수 있겠소.”
세상으로부터 도피한 사람들은 그들이 종교인이던 아니던 지루함과 웃음을 모르는 당나귀나 들소가 되기 마련이다. 그들은 인간의 보편적인 수준의 자각과 감수성을 갖지 못하고 그 수준 이하의 인간으로 추락한 자들이다. 그래서 세상을 도피한 사람들은 인간의 지루한 삶조차 느끼지 못하는 일상을 살아가는 것이다. 세상을 도피한 사람들에게는 웃음도 없고 지루함도 없다. 그들은 인간으로서의 고귀함을 잃고 지루함도 웃음도 모르는 동물로 퇴화해버린 것이다. 물론 동물로 퇴화해버린 그런 사람들의 삶은 이런 저런 근심 걱정이나 고민이 적을 것이다. 따라서 그들의 삶은 일종의 고요한 평온에 둘러싸여 있다. 하지만 지성이 없는 고요한 평온은 아무런 가치도 없다.
지성에 고요한 평온이 더해지면 붓다(覺者, 깨달은 자, 부처/佛)가 탄생한다. 지성이 결여된 고요한 평온함에서는 지루함도 웃음도 모르는 당나귀나 들소의 세계로 퇴화하는 삶만 남을 것이다.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에게 버젓이 이런 일이 벌어져 왔다. 세상을 도피한 사람들이 100퍼센트 비실용주의적 삶을 살면서 홀로 기도하고 또 기도하고, 명상하고 또 명상한다. 이런 비실용주의적 삶은 온전한 삶이 아니며 온전한 삶이 될 수도 없다.
다른 한 편으로는 수많은 사람들이 실용주의적인 삶만을 추구하다 보니 더 많은 재물, 더 많은 은행잔고를 늘려가고 있으면서도 자신들이 도대체 무슨 놀이를 하고 있는지 조차 모른다. 비록 실용주의적 삶만을 좆는 사람들이 더 많은 재물, 더 많은 통장잔고를 늘리는 놀이를 한다고 하지만 자신들의 그런 놀이에 너무 심각하게 빠져들고 있다는 사실 조차도 모른다. 그래서 재물과 은행잔고를 늘이는 놀이조차 거래의 대상이 된다.
사람들은 카드 놀이를 해도 그냥 순수하게 하지 못하고 꼭 돈을 건다. 그러면 카드 놀이는 심각해진다. 돈이 오고 가는 돈을 따거나 잃는 거래의 형태가 되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들은 돈이건 아니면 뭔가를 걸어야만 놀이를 한다. 자신의 놀이에 너무나 심각하게 빠져든 나머지 죽자 살자 뛰어드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이런 사람들은 아무도 순수하게 단순하게 흥겹게 놀이를 하지 못하는 것 같다.
세상은 실용주의적 활동을 하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진정으로 명상하고 기도하고 순수한 놀이를 하는 삶, 궁금증이나 경이로움을 느끼는 삶, 아무런 이유 없이 그저 기쁨이 차올라 별을 바라보거나 꽃을 감상하는 삶, 기타를 치거나 노래를 부르는 삶과 같은 흥겨움을 잃어버렸다. 이런 사람들의 삶도 역시 매우 궁핍하다.
나는 세상에 완전히 새로운 인간을 만들어내고 싶다. 새로운 인간은 궁핍하지 않고 진정으로 풍요로운 사람일 것이다. 그는 풍요로운 세상, 풍요로운 관계, 풍요로운 존재계의 온갖 도전들을 모두 받아들이면서도 침묵할 수 있으며, 흥겹게 놀이할 수 있고, 깊은 명상에도 들 수 있는 사람이다. 부디 도피주의자가 되지 말라.
올바른 교육은 이 세상에 진정으로 신성한 사람들을 새롭게 탄생시킬 것이다. 교육의 절반은 이 세상을 사는데 필요한 지식을 습득하기 위해서, 나머지 절반은 이 세상의 본질(근원)을 탐구하는데 실행되어야 한다. 그 둘은 깊은 통합과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그러면 그대는 지식을 쌓으면서도 자기 안에 늘 경이로운 지혜를 품고 살아갈 수 있으리라. 그 때 사람들은 이 세상, 존재계, 현상세계의 모든 신비를 알면서도, 여전히 존재계의 신비에 경이로움을 느낄 것이고 또한 이 현상세계를 드러내고 있는 현상세계의 배경, 즉 현상세계의 본질을 확인할 것이다.
오쇼의 <나는 누구인가> 중에서 by 오아시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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