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정부의 잘한 정책

"우리 시계는 아직도 2009년 1월20일"

장백산-1 2019. 1. 19. 14:14

[용산참사 10년] "우리 시계는 아직도 2009년 1월20일"

권혁준 기자 입력 2019.01.19. 07:00


"진실 드러나기 전까지 아플 수도 멈출 수도 없어""진상규명, 책임자 처벌.. 죽은자 명예도 회복해야"

17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열린 '빈민생존권 쟁취 투쟁결의대회'에서 참가자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2019.1.17/뉴스1 © News1 박세연 기자

(서울=뉴스1) 권혁준 기자 = 2009년 1월19일, 서울시 용산구 한강로 2가의 남일당 건물에서는 재개발에 반대하는 지역철거민 등 30여명이 보상대책을 요구하며 망루에 올랐다. 이튿날 새벽 경찰은 강제진압을 강행했고, 이 과정에서 예상치 못한 화재가 발생했다. 철거민 5명과 경찰 1명 등 6명이 숨지고 20여명이 다친 이른바 '용산참사' 사건이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지만 '그날'을 겪은 이들의 시계는 여전히 '2009년 1월20일'에 멈춰 있다. 6명의 생명을 앗아간 그날을 기억하는 이들은 10년이 지났지만 변한 것이 없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용산참사 10주년을 앞둔 17일 서울 용산구 한강로2가 주상복합 건물 건설현장인 용산참사 현장 앞 에서 고 양회성씨 부인 김영덕씨가 호떡 장사를 하며 자리를 지키고 있다. 2019.1.17/뉴스1 © News1 박세연 기자

◇연기 자욱했던 그날 새벽…"이러다 죽지 싶었다"

이충연 전 용산4구역 철거민대책위원장(46)은 그날 밤이 무척 추웠다고 기억한다. 그는 "영하의 온도에 바람도 강해 체감온도가 영하 15도 정도는 됐던 것 같다"면서 "망루에 오른 사람들이 모여 난로를 쬐고 있는데 갑자기 사방에서 물대포가 날아오면서 순식간에 아비규환이 됐다"고 회상했다.

이 전 위원장의 어머니이자 참사 희생자 이상림씨의 부인인 전재숙씨(75)는 "망루에 올라가면 대화가 이뤄지고, 해결이 되서 내려올 줄 알았다"면서 "올라간 지 하루도 안 돼 그렇게 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고 말했다.

용산에 '연대투쟁'을 하러 왔던 김창수씨(45)는 망루에 오래있을 계획도 아니었다고 한다. 그는 "같은 철거민의 입장으로 잠시 돕겠다는 생각이었다. 나랑 비슷한 생각으로 오신 분들이 꽤 있었다"면서 "그런데 갑자기 경찰이 들이닥쳤고, 불이 났다. 연기가 자욱하고 열기가 올랐다. 이러다 죽는 건가 싶었다"고 기억했다.

희생자 양회성씨의 아내 김영덕씨(63)는 오전 6시쯤 집을 나서 용산으로 향했다. 당시 거주하던 서울 관악구 봉천동에서 차를 몰고 이동한 김씨가 현장에 도착한 시각은 오전 10시. 평소 같으면 10분만에 도착할 거리지만, 용산 일대 도로가 꽉 막혀 있었고 무려 4시간이나 소요됐다.

김씨는 "용산 주변 도로가 너무 많이 막혀서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다. 현장에 있는 사람에게 전화를 해보니 울면서 말을 제대로 못하더라"면서 "차라리 차를 놓고 걸어갔어도 그것보단 더 빨리 도착했을텐데 싶었다"고 회상했다.

용산참사10주기 범국민추모위원회와 유가족들이 15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 국회의원회관에서 '용산참사 10주기, 강제퇴거 피해자 증언대회' 토론회를 마친 뒤 기습 기자회견을 벌이고 있다. 2019.1.15/뉴스1 © News1 김명섭 기자

◇고난의 연속…"정권 바뀌면 달라질까 했는데"

순식간에 가족과 동료를 떠나보낸 이들은 연속된 고난에 낙담해야했다. 유가족의 동의도 받지 않은 채 부검이 진행됐고, 살아남은 이들은 모두 구속됐다.

이 전 위원장은 "한 사람 부검하는데 3시간이 걸린다는데, 5명을 부검하는데 도합 2시간 반밖에 안 걸렸다. 사인도 '화재로 인한 사망'이 전부였다. 갈비뼈가 부러지고 손목이 절단되는 등 의심스러운 게 너무도 많았지만 그냥 그렇게 끝났다"고 말했다.

김창수씨는 "그곳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전부 범죄자가 됐다. 화재의 책임을 물어 '공동정범'으로 처리됐다"면서 "내 스스로 책임이 있다고 인정이 된다면 받아들이겠지만,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며 한숨을 쉬었다.

용산 참사 당시 서울지방경찰청장직을 맡고 있었던 김석기 전 서울청장은 오사카 총영사, 한국공항공사 사장 등을 거쳐 2016년에는 '금뱃지'를 달았다. 김 전 서울청장이 과잉진압의 책임을 져야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던 유가족들은 또 한 번 분노하고 좌절했다.

김영덕씨는 "당시 국회의원 유세현장까지 찾아갔지만 사과 한 마디 듣지 못했다"면서 "최근에도 방송에 나와 '용산 참사같은 일이 다시 일어나더라도 똑같은 방법으로 진압하겠다'는 말을 했다. 똑같이 사람을 또 죽이겠다고 하는 사람이 국회의원을 하고 있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2017년 5월, 정권이 교체되고 경찰조사위원회, 검찰 과거사위원회가 꾸려졌지만 남은 이들은 "아직 갈 길은 멀다"고 입을 모은다.

전재숙씨는 "조금이나마 기대를 했지만 바뀐 건 없다. 여전히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이 되지 않고 있다"면서 "국회의원들도 마찬가지다. 용산에서 힘들어할 때 100명도 넘는 의원들이 찾아와 손 잡아줬지만, 정작 김석기가 국회의원이 된 후로는 누구도 '사퇴'를 얘기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17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열린 '빈민생존권 쟁취 투쟁결의대회'에서 참가자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2019.1.17/뉴스1 © News1 박세연 기자

◇"'테러리스트' 낙인 벗기 위해서라도"…산자의 '부채'

그날 이후 이들의 삶은 완전히 바뀌었다. 넉넉하진 않아도 소소한 행복을 느끼며 살던 이들의 삶은 무척이나 팍팍해졌다.

김영덕씨는 "그 날 이후 내 삶은 바닥까지 왔다. 남편과 두 아들들과 함께 할 때는 돈이 없어도 행복했는데, 남편이 그렇게 되고 나서는 모든 걸 혼자 짊어지는 것 같다. 삶의 균형이 깨졌다"고 말했다.

전재숙씨도 "남편은 멀리 떠났고 아들은 전과자 낙인이 찍혔다"면서 "나이가 많아 안 아픈 곳이 없지만, 진실이 드러나기 전까지는 아파도 아플 수 없고, 불편해도 안 움직일 수 없다"고 했다.

지난 2017년 12월, 정부는 용산 참사 당시 처벌 받은 25명을 특별사면했다. 하지만 '도심의 테러리스트' '폭도' 등으로 규정된 '사회적 낙인'은 아직 지워지지 않았다.

이 전 위원장은 "우리가 폭도이고 억지를 쓴다는 인식, 어린 자식들조차 학교에서 손가락질 받는 현실이 가장 힘든 부분이었다"고 말했다.

그렇기에 이들은 아직도 할 일이 남아있다고 말한다. 산 사람 뿐 아니라 죽은 사람의 명예도 회복해야한다는 '부채의식'이다.

전재숙씨는 "진상규명이 반드시 이뤄져야만 억울함이 조금이나마 풀릴 것 같다"며 "돌아가신 분들은 편안하게 잠들고, 남은 문제는 산 사람이 어떻게든 해결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김창수씨도 "그 당시 망루에 올랐던 사람들은 그저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단지 삶의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우리 얘기를 알리기 위해 그런 선택을 했다는 걸 알아줬으면 한다"고 전했다.

starburyny@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