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마음의 본성(本性)과 견성(見性)의 문제

장백산-1 2019. 1. 30. 14:09

마음의 본성(本性)과 견성(見性)의 문제


― 불교의 공적영지(空寂靈知)와 견성(見性), 독일관념론의 사행(事行)과 지적 직관(知的 直觀)의 비교 ―


1) 글, 한 자 경*


Ⅰ. 들어가는 말


이 세계는 내가 이 세계를 바라보든 보지 않든, 세계를 의식을 하든 의식하지 않든 동일한 모습으로 존재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세계를 인간 의식 또는 인간 마음으로부터 독립적이고 객관적인 실재(實在)로 간주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또한 이 세계가 인간의 인식기관 및 인식능력에 의거하여 이렇게 보여지는 세계라는 것을 알고 있다. 지렁이나 박쥐가 보고 아는 세계, 천인이나 천신이 보는 세계는 사람들이 보고 아는 이 세계와는 완전히 다른 세계일 수도 있을 것이다. 따라서 사람들은 이 세계를 인간 의식, 인간 마음이 그려내는 환상 세계, 인간 마음에 의존적인 세계로 간주하기도 한다.


이렇게 보면 인간 마음과 이 세계와의 관계에서 인간 마음은 이중적 의미로 이해되고 있다. 이중적 의미의 인간 마음의 하나는 객관으로서의 세계에 대면하여 그로부터 수동적으로 인상을 받아들이는 주관적 마음이고, 다른 하나는 주관과 객관, 나와 세계 둘 다를 자발적 능동적으로 산출해내는 주객포괄의 마음이다. 전자를 마음a, 후자를 마음A라고 하자.


주관/능연식            객관/소연경

마음a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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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A


주객 분별의 현상세계는 마음A의 활동성(活動性)에 따라 형성된 세계로 이 현상세계는 마음A를 떠나서는 존재하지 않는 가상세계(假像世界)이다. 이점에서 마음A와 이 현상세계(가상세계)는 이 세계를 비치는 거울과 그 거울에 비쳐진 상(相), 이 세계를 보는 눈과 그 눈을 통해 보여진 이 세계에 비유될 수 있다. 거울이 없이는 세계도 없고, 눈이 없이는 세계도 없다. 사람들 마음의 본성(本性)은 바로 마음A의 활동성(活動性)이다.


불교나 서양 형이상학(독일관념론)이나 인간의 본성(本性)을 마음a가 아닌 마음A로 밝히고자 한다. 현상세계 안에서 사람들이 집착하는 주와 객, 능과 소, 자와 타라는 분별 대립은 극복되고 지양되어야 할 허망한 분별(妄分別)이며, 궁극적으로 주와 객 미분별의 무분별지(無分別智) 또는 주객 포괄의 절대적 동일성(同一性)에 도달해야한다고 보는 것이다. 인간의 근원적 마음을 주와 객이라는 분별 대립 속에서 대상에 따라 응하는 수연(隨緣)의 마음a가 아니라 주객분별 대립의 현상세계 너머 절대와 무한의 불변(不變)의 마음A로 간주하는 것이다.1) 이런 마음A의 활동성(活動性)을 불교는 ‘공적영지(空寂靈知)’라고 하고, 독일관념론은 ‘사행(事行)’이라고 한다. 공적영지, 사행은 주객으로 분별 이원화된 현상세계를 산출해내되 공적영지, 사행 그 자체는 현상적인 주와 객이라는 분별 대립과 능소라는 분별 대립을 넘어선 능동적 활동성이며 자아의 자기정립이다.2) 공적영지, 사행 그것은 일체 중생 안에서 본래부터 이미 작용하고 있는 마음의 근원적(根源的) 활동성(活動性), 본성(本性)이며 본각(本覺)이다.


그러나 본성(本性)이 이미 영지(靈知)이고 각(覺)이라면, 본성은 사람들ㅇ에게 이미 알려져 있는 것이 아닌가? 달리 견성이 필요한 까닭이 무엇인가? 본성이 이미 본각이라면, 다시 깨닫기 시작하는 시각(始覺)은 왜 필요한 것인가? 이는 우리에게 영지와 본각이 있어 마음의 활동성을 의식하기는 하지만, 영지와 본각을 바로 마음의 활동성으로서 인식하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거울은 상을 비칠 뿐이며, 눈은 세계를 볼뿐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거울에 비쳐진 것, 눈에 보여진 것만을 보고 알 수 있으며, 따라서 거울에 비쳐진 것, 눈에 보여진 것만을 있는 것으로 간주한다. 마치 꿈을 꾸는 의식이 있어야 꿈꾸는 세계가 있지만 꿈속에서는 꿈꾸는 세계가 꿈인 줄을 모르듯이, 사람들은 마음A로서 우리가 사는 이 현상세계를 만들어 그 안에서 마음A와 이 현상세계를 의식하며 살아가지만 정작 이 현상세계가 자신의 마음A가 만든 가상(假想)의 현상(現像)임을 알지 못한다. 이같은 무지(無知)가 자신의 본성(本性)을 알지 못하는 무명(無明)이다. 이 현상세계 가상현실을 보는 눈(마음A)은 눈 자신을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하기에, 주객 분별의 이 현상세계 가상현실을 그 자체로 실체로서 존재하는 실유(實有)로 착각한다. 꿈속의 나(견분 見分)와 꿈속의 세계(상분 相分)을 실아(實我)와 실법(實法)으로 간주한다. 이것이 아집(我執)과 법집(法執)이며, 이 현상세계를 독립적 객관 실재로 정립하는 독단(dogma)이다.3)


불교와 독일관념론은 인간 본성을 능동적 활동성의 마음A로 보지만, 우리의 일상적 의식이 망집과 독단에 빠져있음을 간과하지 않는다. 불교와 독일관념론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것은 본성을 가리는 무명을 벗어 망집과 독단을 극복하는 것이다. 무명에서 명으로의 전환, 본성의 확인, 견성(見性), 자기 직관, 지적(知的) 직관(直觀)이 요구되는 것이다. 자신의 본성을 현상세계를 형성하는 마음A의 능동적 활동성으로서 깨달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견성 내지 지적 직관은 어떻게 가능한가? 세계를 보는 눈이 과연 눈 자신을 볼 수 있는 것인가? 꿈을 꾸는 의식이 꿈을 꾸고 있는 동안 그 꿈이 꿈이라는 사실을 스스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인가?


마음a/주/능연식      세계/객/소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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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A : 마음의 본성 : 꿈꾸는 마음

               

마음A의 확인 : 견성(본성의 직관) : 깨어나는 마음


이하에서는 불교와 독일관념론에 따라 인간 본성(本性)은 현상초월적 마음A라는 것(제2장), 그렇지만 사람들은 일상적으로 그 현상초월적 마음A의 활동성(活動性)을 곧바로 인간 본성으로서 직관하여 알지는 못한다는 것(제3장)을 살펴본다. 이 점에서 불교와 독일관념론의 관점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인간의 본성(本性)을 확인하는 견성(見性)의 방식에 있어 독일관념론과 불교는 서로 다른 길을 간다. 절대(絶對)와 무한(無限)의 마음A를 확인하는 방식에 있어 외적인 실천적 행위와 내적인 종교적 수행, 자아 경계의 무한한 확대와 자아경계의 단적인 소멸이라는 서로 다른 길을 가고 있음을 살펴볼 것이다(제4장). 이는 곧 절대자아로 나아가기 위한 경계의 수평적 확장과 자아경계를 넘어서는 수직적 초월의 차이이기도 하다. 끝으로 그러한 차이가 가지는 의미를 생각해보며 글을 맺기로 한다(제5장).


Ⅱ. 마음의 본성(本性) : 성(性)


1) 불교 : 공적영지(空寂靈知)


인식 주관인 자아(自我)가 인식 객관인 세계(世界)에 대해 갖는 앎(認識)은 주(主)와 객(客)이라는 분별 구도 속에서 성립하는 분별적 앎(分別認識)이다. 분별적 앎(分別識)은 명자(종자/개념)와 언설(말)에 따라 시설된 분별상(分別相) 차별상(差別相)이며, 심연상[心緣相, (상분/표상)]이고 경계상(境界相)이다. 따라서 객관 세계인 이같은 분별상 차별상 심연상 경계상은 망유(妄有)이고 가유(假有)이며, 실유(實有)가 아니다.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인식(認識)하는 세상이 이처럼 사람들의 헛된 경계지음에 따른 망분별상(妄分別相)임을 자각하는 것은 그런 망념을 떠나 진실에의 추구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능소의 분별, 개념에 따른 분별상 차별상을 여의고 나서 남겨지는 진실(眞實)은 과연 무엇인가?


일체의 모든 법은 오직 망념에 의하여 분별 차별이 있으니, 만약 망념을 여의면 일체의 경계상이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일체의 법[이 세상 모든 현상(것, 존재, 대상, 경계)]은 본래부터 언설상(言說相)을 여의고, 명자상(名字相)을 여의고, 심연상(心緣相)을 여의어서, 궁극적으로는 평등(平等)하고 변하거나 달라지는 것도 없으며 파괴될 수도 없는 것이다.4)


분별 번뇌 망념에 의한 일체의 분별상 차별상을 여의고 남겨지는 무망념, 무분별, 무차별의 진실, 평등하여 변하거나 멸하지 않는 진실은 과연 무엇인가?  사람들의 일상적 의식에 있어 주와 객, 능과 소라는 분별 대립이 없어지고 능연식과 소연상이 사라지면, 그 자리에 남겨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일체가 멸(滅)한 고요함, 즉 적멸(寂滅)이며 공(空)이다. 일체가 적멸(寂滅)이며 공(空)함을 공적(空寂)이라고 말한다.


마치 거울에 비친 허상이 사라지면 그 상의 비침도 함께 사라지고 결국 텅~빈 무상( 상이 사라진 無相)의 거울만 남게 되듯이, 사람들의 일상의 의식에서 의식의 대상인 객관세계의 사물을 제거하면 의식의 대상인 객관세계를 의식하는 의식인 주관적 의식의 작용도 함께 사라지면서 텅~빈 허공(虛空)만 남는다. 그 텅~빈 허공, 텅~빈 거울이 공적(空寂)이다. 불교에서 공(空)은 단순한 없음(無)이 아니다. 적정열반(寂靜涅槃)이 아무 것도 없는 일체가 소멸했음을 뜻하는 것이 아니며, 공(空)의 깨달음, 공관(空觀)이 아무 것도 보지 않고 아무 것도 깨닫지 않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말이 끊어지고 상(相)이 사라진 그곳, 주와 객이라는 분별 대립이 사라진 그곳이 비로소 마음의 본성이 드러나는 곳이다.


거울에서 거울에 비친 상들이 사라지고, 상의 비침이 사라진다고 해도 거울 자체는 거울 스스로를 비치고 있다. 비쳐진 상(소연/상분)과 상의 비침(능연/견분)의 근저에 거울의 자기비침(자증분)이 있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람들의 의식에서 일체의 대상이 사라지고 대상의식도 사라진다 해도, 사람들의 본래마음 자체는 거울의 자기 비침처럼 각성(覺性), 각조(覺照)로서 본래마음 스스로에게 자각되어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불교가 능연식(能緣識)과 소연경(所緣境)이 사라져 허공(虛空)처럼 드러나는 공적(空寂)을 단지 무정(無情, 시비 분별 비교 판단 해석 함이 없음)의 추상적 공간으로가 아니라 허공 그 자신의 공성(空性)을 스스로 신묘하게 자각하는 성자신해(性自神解)의 자기자각성으로 이해하는 까닭이다. 모든 분별상 차별상이 사라진 공(空)으로서의 마음을 원효는 차별적 다양성을 떠났기에 ‘일(一)’이라고 하고, 성자신해를 지녔기에 ‘심(心)’이라고 하여 ‘일심(一心)’이라고 칭한다.


염정(染淨)의 모든 법은 모든 법의 본성이 둘이 아니고 진망의 이문에 다름이 있을 수 없기에(일체의 차별상을 떠났기에) 일(一)이라 이름하며, 차별상 분별상이 없는 것이 모든 법 중의 실(實)로서 허공(虛空)과 달리 본성 스스로 신묘하게 알기에(성자신해) 심(心)이라고 이름한다.5)


이처럼 불교에서 공(空)은 추상적 허공(虛空), 단순한 없음이 아니라, 비어있되 텅~비어있는 그 자체가 신령한 앎(靈知)을 지녀 어둡지 않은 허령불매(虛靈不昧, 미혹하지 않은 신령한 앎)이며, 이 허령불매의 성자신해가 바로 일체 중생의 진면목(眞面目, 본래면목)이자 일체 중생 마음의 본성(本性)이다. 마음의 본성(本性)은 현상적 분별상 차별상(分別相)이 사라질 때 더불어 사라지는 그런 현상적(現像的) 존재가 아니다. 거울에서 온갖 색상과 모양인 상(所緣相)들이 다 멸하고 따라서 그 상들의 비침(능연식, 能緣識)도 함께 사라져도 그 상의 바탕에 거울 자체의 무색 무형의 비침이 남겨지듯이, 사람들의 대상의식의 근저에는 그런 대상적 현상들의 출현을 가능하게 하되 대상의식 그 자체는 현상들로 환원될 수는 없는 마음의 자기 활동성이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지눌도 원효가 강조한 일심(一心)의 성자신해, 즉 마음 자체의 자기 활동성에 주목한다. 지눌은 대상적 의식작용의 근저에서 일체의 망념과 차별상을 떠나 대상적 의식작용 그 자체는 고요히 텅~비어 있되 대상적 의식작용 자기 자신을 자각하는 신령한 앎이 작용하고 있음을 주장한다. 마음의 체(體)는 고요한 텅~비어있음인 공적(空寂)이며, 마음의 본래적 용(用)은 신령한 앎인 영지(靈知)이다.6) 이와 같이 일체의 분별과 개념, 말, 문자, 망상, 망념을 떠나 존재하는 마음의 본래적 자기 활동성(活動性)을 ‘공적영지(空寂靈知)’라고 말한다.


이 세상 모든 것이 사라져 육근(六根 : 눈, 귀, 코, 혀, 피부, 마음)과 육경(六境 : 모양, 소리, 냄새, 맛, 촉감, 모든 현상), 일체의 망념 나아가 갖가지 모양과 갖가지 명언이 모두 구할 수 없으니, 이것이 어찌 본래 공적이 아니고 본래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모든 법이 다 공(空)한 곳에 신령스런 앎(靈知)이 어둡지 않아 무정(無情)과는 달리 성(性)이 스스로 신령스럽게 아니, 이것이 바로 그대의 텅~비고 고요하며 신령스럽게 아는(空寂靈知), 청정한 마음의 본체다.7)


이 공적영지(空寂靈知)인 마음A가 바로 인간 마음의 본성(本性)이고 인간의 본래면목(本來面目), 진면목(眞面目)이며 부처와 조사(祖師)가 비밀히 전한 법인(法印)이라 말한다.8) 공적영지(空寂靈知)는 경험적 차원의 주관적 의식과 객관적 존재, 정신과 물질, 나와 너, 나와 세계의 이분법(二分法)을 넘어선 절대평등(絶對平等)의 무분별지(無分別知)이다. 주와 객, 능과 소의 분별을 넘어선 무분별이고, 이분적 상대성을 넘어선 절대이며, 상대적 차별성을 벗어난 평등이다.


주관적 의식               객관적 의식대상

인식(견분)                존재(상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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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A : 공적영지[空寂靈知, (자증분, 自證分)]


일상적으로 사람들이 이분화 이원화하는 인식과 존재, 정신과 물질, 마음과 몸의 분별은 공적영지(空寂靈知)의 마음 위에 그려진 상들의 분별상 차별상, 거울 속에 비쳐진 상들의 분별상 차별상일 뿐이다. 사람들의 일상적 의식은 차별적 분별적 상에 접해서만 깨어있으며 그 분별상 차별상이 사라질 때 일상적 의식은 덩달아 사라져 버리므로 오로지 현상적 상들만을 실재라고 간주하는 대상의식의 차원에 머물러 있다.


그러나 그 대상의식의 순간에도 의식 자체는 나와 너, 주와 객의 차별상 일체를 포괄하는 거울 자체처럼 공적영지(空寂靈知)로서 작용하고 있다. 차별적 색상들을 지우고 나면 비로소 드러나는 무색의 바탕도 실은 본래 처음부터 거기 있었던 것이듯이, 차별적 상들을 여의고 발견되는 거울 자체의 비침도 처음부터 상을 비치던 바로 그 비침이었듯이, 공적영지(空寂靈知)의 마음은 주객 분별의 대상의식에서도 언제나 함께 있는 바탕마음이다. 다만 마음은 자기 자신을 텅~비어있는 것으로 의식할 뿐이며, 따라서 사람들이 주목하여 확인하지 못할 뿐이다.


공적영지(空寂靈知)로서의 마음 활동을 바로 그런 것으로서 확인하고자 하면, 의식에서 의식대상을 없애 능소의 분별을 넘어서면서도 잠들지 않고 의식의 깨어있음을 유지하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야 능연상과 소연상이 멸한 후 남겨지는 마음의 허령지(虛靈知)가 의식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불교는 공적영지(空寂靈知)를 주장하면서 사람들 각자가 수행을 통해 자신 안의 공적영지(空寂靈知)를 확인하는 견성(見性)에 이를 것을 요구한다.


2) 인간 본성에 관한 독일관념론 : 사행(事行)


서양철학에서 능과 소, 주와 객이라는 분별 분리를 넘어선 절대(絶對)를 인간 마음의 심층 활동성으로 포착하려는 시도는 ‘초월적 관념론’에서 발견된다.9) 칸트가 ‘초월적 통각’ 또는 ‘순수 통각’이라고도 하는 ‘초월적 자아’는 주와 객이라는 분별 대립의 경험적 현상세계를 구성하는 현상초월적 주체이다. 그것은 그 자신에 의해 구성된 현상세계를 바라보는 세계의 한계선에 있는 눈이라고 할 수 있다.


현상세계를 구성하고 현상세계를 바라보는 이 초월적 자아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나(주관)라고 간주하는 경험적 자아와 구분되어야 한다. 경험적 자아는 객관세계에 대면해 있는 현상의 한 부분으로서의 자아, 주와 객이라는 분별 대립 속의 자아(마음a)이며, 초월적 자아는 그러한 주와 객, 세계와 경험자아라는 분별을 포괄하는 현상초월의 자아(마음A)인 것이다. 바로 이 주객 동일성으로서의 초월적 자아를 발견하기 위해 피히테는 주와 객으로 분리 분별된 일상적 의식차원에서 출발하여 다음과 같이 묻는다.


주체인 나와 나의 앎의 대상인 사물과의 끈은 무엇인가?10)


그리고 그는 주와 객,  능과 소를 매개하는 끈을 주체-객체성 또는 주객동일성으로서 ‘자아’로 간주한다. 주객동일성으로서의 자아는 주객대립으로 주어지는 현상적인 경험적 자아와 구분되는 초월적 자아이다.11)


나 자신의 본질이 곧 이 끈이다. 나는 주체이며 객체이다. 그리고 이 주체-객체성, 앎의 자기 자신에로의 귀환이 곧 내[피히테]가 자아라는 개념으로서 지시하는 것이다.12)


자아는 주체와 객체의 필연적 동일성, 즉 주체-객체이다. 자아는 어떤 매개도 없이 단적으로 그것이다.13)


주관과 객관, 인식과 존재, 사유원리와 존재원리가 동일한 이 자아의 활동성을 피히테는 ?지식론?에서 행위(Handlung)와 사실(Tatsache)를 결합하는 근원적 활동성으로서의 사행(事行/Tathandlung)이라고 부른다. 사행은 “단적으로 그 자신의 존재를 근원적으로 정립하는”14) 자아의 활동성이다. 자아에 있어서는 자기정립의 행위와 그것의 존재가 구분되지 않는다.


자아의 자기 정립은 순수 활동성이다. 자아는 자기 자신을 정립한다. 그리고 자신에 의한 단순한 정립에 의해 존재한다. 그리고 그 반대도 성립한다. 자아는 존재한다. 그리고 자신의 단순한 존재에 의해 자신의 존재를 정립한다. 이렇게 자아는 행위하는 자이며 동시에 행위의 산물이다. 자아는 활동적인 것이며 동시에 활동성에 의해 산출된 것이다. 행위와 사실이 하나이며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자아가 존재한다는 것은 사행의 표현이다.15)


자아의 이 자기정립에 근거해서 비로소 그 안에 나 아닌 세계가 비아(非我)로서 반정립될 수 있고, 그 결과 세계 아닌 나(가분적 자아/경험적 자아/주관)와 나 아닌 세계(가분적 비아/경험세계/객관) 간의 대립과 종합의 관계가 가능해지는 것이다. 이처럼 절대자아의 자기정립인 마음A의 활동성은 주객이원화된 구조 안에서 발생하는 대상의식으로서의 마음a의 작용에 앞서 작용하는 근원적 활동성이다. 자아의 이 활동성이 일체 현상이 가지게 되는 실재성의 근원이 된다.16)


경험적 자아             경험적 대상세계

(의식)행위               사실(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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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A : 사행(事行, 능동적 활동성)


사행(事行)으로서의 자아의 자기정립은 주와 객, 인식과 존재의 현상적 이원화에 앞서 동일 근원으로서 자기 자신을 정립하는 순수 자기활동성이다. 앞서의 거울 비유로 말하자면 주객 분별 대립의 현상적 세계(가분적 비아)와 그에 마주한 경험적 자아(가분적 자아)는 거울 속의 상(소연경/상분)과 그 상의 비침(능연식/견분)에 비교될 수 있다. 반면 그런 현상존재를 정립하는 절대적 자아의 자기활동성인 사행은 그러한 거울의 능연과 소연을 여의어도 남겨질 거울 자체의 고요한 비침(寂照)의 활동성에 비유될 수 있다. 자아의 자기정립의 활동성은 현상적인 능소분별, 현상적 자아와 현상적 비아의 분별이 있는 곳에는 이미 현상의 가능근거로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능소분별의 현상적 차별상 넘어 작용하고 있는 절대 자아의 사행이 인간 마음의 본성 또는 정신의 근원적 활동성으로 간주된다.


이상 불교의 공적영지(空寂靈知)나 독일관념론의 사행(事行)이 주객 분별 대립 이전에 현상세계 자체를 가능하게 하는 마음의 본성, 초월적 자아의 근원적 활동성이라는 것을 논하였다. 그것은 중생 누구에게나 본래부터 이미 갖추어진 마음의 빛이며 근원적 자기자각성이고, 따라서 ‘불성(佛性)’이며 ‘본각(本覺)’이다. 본각의 차원에서 보면 본래부터 이미 누구나 불성을 갖춘 부처, 깨달은 자이다.


그러나 중생 모두가 이미 깨달은 부처라는 말은 거짓이다. 불성이 있다는 것과 그것을 깨달아 안다는 것은 서로 다른 말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불성 내지 본각을 깨달아 아는가 모르는가 인데, 본성을 깨달으면 부처요 본성에 미혹하면 중생이니, 중생은 본각은 있되 그 깨달음의 시각(始覺)이 없기에 부처가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어떤 방식으로 본성의 깨달음에 이를 수 있는 것인가? 공적영지나 사행을 상을 비추는 거울 자체의 고요한 비침, 적조(寂照)에 비유할 때 또는 현상세계를 보는 눈의 활동성에 비유할 때, 이제 문제는 세계를 보는 눈이 과연 눈 자신을 볼 수 있는가, 눈이 눈 자신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Ⅲ. 본성에의 무지(無知) : 무명(無明)


1) 마음의 활동성의 자기의식


인간의 본성은 공적영지 내지 본성 자기정립의 절대적 활동성으로서의 마음이다. 본성이 마음이라는 것은 그것이 사물과 달리 스스로를 자각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마음 자체가 어떤 방식으로든 알려지는 자각성 내지 의식성을 특징으로 하기 때문이다. 공적영지는 “중생의 본래적인 자각성”17)으로서 이미 자각되어 있고 알려져 있는 것이다. 이점에서 공적영지는 중생 누구나 본래부터 이미 완전하게 갖추고 있는 본각(本覺)이다. 따라서 사람들은 이미 그것을 알고 있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무엇이 공적영지(空寂靈知)이냐는 물음에 대해 지눌은 다음과 같이 답한다.


지금 내게 그렇게 묻고 있는 바로 그것(너의 마음)이 공적영지(空寂靈知)의 마음이다. 왜 반조(返照)하지 않고 밖에서 겅적영지의 마음을 찾으려 하는가.18)


공적영지(空寂靈知)의 마음이 무엇이냐고 묻는 그 마음 자체가 바로 공적영지(空寂靈知)의 마음이다. 이미 갖고 있으면서 왜 밖에서 공적영지의 마음을 찾고, 공적영지의 마음을 이미 알고 있으면서 왜 공적영지의 마음이 무엇인지를 묻는냐는 말이다. 그러나 이처럼 공적영지의 마음, 본각이 이미 갖추어져 있다면, 다시 무엇을 깨달아야 하는 것일까? 본각이 이미 각이라면, 다시 시각(始覺)이 필요한 이유는 무엇인가?19)


독일관념론 역시 인간은 누구나 ‘나는 나다’라는 자기의식과 더불어 자신의 능동적 활동성에 대한 의식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 데카르트는 그것을 ‘나는 생각한다’의 자기의식으로 표현하였으며,20) 칸트는 그것을 다른 모든 표상을 수반하는 것으로서의 ‘나는 생각한다’의 표상으로서 “자기 활동성의 단순한 지적 표상”이라고 말한다.21)


자아의 자기활동성에 대한 자기의식성을 독일관념론자들은 ‘지적 직관’이라고 부른다. 누구나 ‘나는 나다’라는 자기의식을 가지고 있으므로 실천적으로 행위할 때 자기 자신을 수동적 규정성이 아닌 능동적 활동성으로 의식한다. 이 능동성의 의식을 수동적인 감성적 직관과 구분하여 지적 직관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마음의 능동적 활동성에 대한 자기의식인 지적 직관이 있기에 자기 반성적인 철학적 사유 역시 가능하다고 주장한다.22)


나는 행위들에 있어서 나의 자기의식의 지적 직관이 없이는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하며 손이나 발도 움직일 수가 없다. 오직 이 직관을 통해 나는 내가 그것을 한다는 것을 안다. 오직 그것을 통해 나는 나의 행위와 그 행위에 있어서의 나를 그 행위의 객관으로부터 구분한다. 자신에게 어떤 활동성을 부여하는 자는 곧 이 직관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다. 그 안에 삶의 기원이 있으며, 그것이 없으면 죽음이다.23)


우리에게 지적 직관이 없었다면 우리는 항상 우리의 객관적 표상에 사로잡혀 있었을 것이며 어떠한 초월적 사유, 초월적 구상력도 없었을 것이고 이론적이든 실천적이든 간에 철학도 없었을 것이다.24)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본성을 이미 다 통찰하여 알고 있는 것인가? 견성은 이미 성취된 것인가? 만일 이처럼 자아가 사행(事行)으로서의 자기자신의 정립의 활동성을 이미 알고 있다면, 독단은 왜 발생하는 것인가?


2) 자기의식과 자기인식(지적 직관)의 구분


그러나 칸트의 관점에서 보면 독일관념론자들이 주장하는 지적 직관은 자아의 자기활동성에 대한 자기의식일 뿐 자기 인식이 아니다. 자기활동성에 대한 직접적 통찰로서의 직관이 아닌 것이다. 이점에서 칸트는 자기의식과 자기인식을 구분한다.


자기 자신의 의식(意識)은 자기 자신의 인식(認識)과는 다르다.25)


자기의식은 자기활동성에 대한 의식일 뿐, 그런 활동성으로서의 자기 자신을 직접 바라보는 직관이 아니다. 따라서 그것을 지적 직관이라고 할 수 없다. 사행이라는 자기정립의 활동성을 세계를 보는 눈의 활동성, 눈의 봄이라고 본다면, 눈이 활동하는 이상 눈의 자기의식은 있는 것이지만, 문제는 그러한 활동성으로서의 눈이 눈 자신을 다시 볼 수 있는가, 눈이 자기 자신을 직관하고 확인하여 아는 자기인식에 이를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칸트는 인간이 인간 자신의 정신의 활동성을 직관적으로 확인하여 알 수 있는 가능성을 부정한다. 인간은 자신을 자율적이고 능동적인 주체로 의식하며 살아가기는 하지만, 그런 능동적 활동성 자체를 직관할 수가 없다. 인간이 자기 자신을 내적으로 직관할 경우에도 내적 직관형식으로서의 시간형식에 따라 직관할 뿐이며 따라서 그렇게 직관된 자아는 결국 시간형식 하에 주어진 현상적 자아, 대상화된 과거의 주체일 뿐이기 때문이다. 만일 인간이 그 자신의 활동적 마음A를 그 자체로 직관하여 인식할 수 있다면, 인간은 감성적이 아닌 지적 직관도 가졌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에게 그런 직관은 없다. 칸트는 그것은 신적 존재에게나 가능한 직관이라고 본다. 인간이 지적 직관의 결여로 자기인식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은 결국 인간은 신이 아니라는 말이다. 결국 인간은 인간 자신에게 신비로 남을 뿐이다.26)


반면 독일관념론자들은 칸트가 구분한 자기의식과 자기인식의 차이를 간과 내지 무시하고 자기인식의 ‘지적 직관’을 자기의식의 의미로 해석한다. 그들이 인정하는 지적 직관은 칸트적 의미로는 자기의식에 해당하며, 칸트적 의미의 지적 직관은 그들에게도 부정되고 있다.


내가 그것(자아의 자기활동성/사행)을 근원적으로 의식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 나는 나의 행함을 직접적으로 의식한다. 단 그것을 그런 것으로서 의식하는 것이 아닐 뿐이다.27)


자신의 정신의 활동성을 의식하되 그것을 그런 것으로서 의식하지 못한다는 말은 자기활동성의 의식은 있지만, 그 활동성을 그런 것으로서 아는 자기 인식은 없다는 말이다. 마음의 자기활동성이므로 그 활동성은 우리에게 의식되어 있다. 우리는 영묘한 자기의식, 영지를 가지고 있다. 우리 자신의 본성은 본각이기에 이미 자각되어 있는 것이다. 다만 우리는 그 본성을 바로 그런 것으로서 알지 못할 뿐이다. 결국 문제는 마음의 활동성이 바로 공적영지이기에 마음이 스스로 자신을 알긴 알면서도 자신을 바로 그런 공적영지로서 알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무엇을 아는 것’과 ‘무엇을 바로 그런 것으로서 아는 것’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공기 속에 사는 자는 공기를 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공기를 안다고 해서 그것이 곧 공기를 공기로서 안다는 말은 아니다. 공기를 바로 그런 공기로서 알 수 있기 위해서는 공기가 없는 상황에 직면하여 공기와 공기 아님 또는 공기 있음과 공기 없음의 차이를 알아야만 한다. 공기 아님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예를 들어 숨을 멈추어 공기 없음을 경험한 후에야, 비로소 이것이 공기가 아닌 것이 아니라 공기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 때 비로소 공기를 바로 그런 것으로서 아는 것이다. 그러나 공기를 공기로서 알 때 비로소 공기를 알게 되는 것은 아니다. 공기 아님을 알 수 있기 위해 이미 공기를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공기를 공기로서 알기 전에 이미 공기를 알아야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무엇을 그 무엇으로서 알기 위해서는 그 무엇과 더불어 그 무엇의 부정을 함께 알 수 있어야 한다. 그 무엇에 그것을 그것 아닌 것과 구분짓는 한계가 그어져야만, 그것을 그것 아닌 것이 아닌 것, 바로 그것으로서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마음의 활동성을 의식하되 그것을 바로 그런 것으로서 의식할 수 없는 것은 우리가 우리 마음의 활동성을 벗어난다거나 멈추어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의 자기의식[자아의 자기정립의 활동성]을 결코 추상할 수가 없는 것이다.28)


모든 차별상은 색에 의해, 경계선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다. 일체의 색과 경계선이 사라지면, 각각의 바탕이 결국 하나로 통하게 된다. 일체 현상을 포괄하는 바탕, 우주 전체를 감싼 허공은 끝 또는 한계가 없기에, 그것이 있다는 것과 없다는 것이 구분되지 않는다. 그와 같이 한계 없는 무한, 상대 없는 절대의 허공이 바로 우리 자신의 마음A이다. 그 마음의 한계 밖에 나설 수 없는 이상, 그 무한과 절대의 마음이 없지 않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가 없다. 우리는 마음 밖으로 나갈 수가 없다. 마음은 마음을 추상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음을 의식하면서도, 누구나 ‘나는 나다’라는 자기의식을 가지면서도, 마음을 바로 그런 절대와 무한의 마음으로서 의식하지는 못하는 것이다.


마음이 자기 자신을 바로 그런 것으로서 알지 못함이 바로 자기 자신에 대한 무지인 무명(無明)이다. 따라서 중생은 본각(공적영지)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그런 것으로서 자각하지 못하는 무명의 불각(不覺) 상태에 있다. 무명이 있기에 불각이고, 불각이 있으므로 다시금 시각(始覺)이 요구되는 것이다. 어떻게 중생이 자기 자신의 본성을 바로 그런 것으로서 자각하는 견성에 이를 수 있는 것인가? 무한의 마음이 어떻게 자기 자신을 바로 그런 것으로서 알 수 있는 것인가?


피히테는 마음을 마음으로서 의식하는 길을 마음이 스스로 마음 아닌 것을 설정하는 것, 즉 자아가 자아 안에 비아를 반정립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한계 없는 무한, 상대 없는 절대가 스스로 한계를 긋고 스스로 상대화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자아는 세계를 산출한다. 그것이 비아의 반정립, 현상세계의 산출이다. 그렇게 산출된 반정립된 현상세계, 즉 비아를 다시 부정함으로써 자아는 자기 자신을 비아 아닌 자아로서 확인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불교에서도 마음이 자기 자신을 마음으로서 자각하는 길은 공적의 마음A로부터 그 안에 등장하는 주객대립의 현상세계를 부정함으로써이다. 마음A를 바로 그런 것으로서 알지 못하는 무명으로 인해 인간은 주객, 능소의 망분별에 따라 자아와 세계를 실유로 집착하여 업을 짓고, 그 집착적 업력에 따라 다시 분별적 자아와 세계가 형성되어 윤회가 계속된다. 업력에 따라 윤회할 오온이 형성되며 그 오온에 상응하는 기세간이 형성되는 것이다. 윤회를 벗어난다는 것은 가상의 현상세계로부터 그것의 부정으로서 그 근원인 마음A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마음A를 바로 그런 것으로서 확인하게 된다.


이렇게 보면 주객, 능소 분별의 현상세계는 무분별적 마음A가 그 자신의 자기 확인에 이르기 위해 형성한 가상이고 현상이다. 다만 그 가상의 현실을 실유라고 생각하며 거기 매달려 있는 한, 무분별적 마음A로의 복귀, 반조(返照), 자기 확인은 발생하지 않는다. 가상을 형성하는 것은 다시 그것을 부정하여 그것 아닌 것으로서의 무분별적 마음을 확인하기 위한 것이다. 생멸의 가상으로부터 불생불멸의 진여(眞如)에 이르고자 함이며, 상으로부터 성에 이르고자 함이다. 그래서 절대자아는 자신 안에 비아(非我)를 반정립하고 다시 그 비아를 부정하여 비아 아닌 자아를 확인하고자 하며, 일심(一心)은 무명 속에서 윤회하면서 육도의 기세간을 형성하지만 결국은 육도윤회를 벗어 해탈경지에 이르고자 하는 것이다. 마음A로서의 자신의 본성의 확인이 곧 견성이다.


견성을 위해 스스로 현상을 만들고 다시 부정하는 것, 무한과 절대의 마음에 이르기 위해 스스로 한계선을 그어 유한화한 후 다시 그것을 부정하는 것은 독일관념론과 불교가 마찬가지이다. 다만 어떤 방식으로 유한을 부정하고 무한으로 나아가는가의 방법에 있어 차이가 있다.


Ⅳ. 본성의 확인 : 견성


1) 독일관념론 : 실천적 행위의 길


피히테에 따르면 무분별적 마음A의 활동성, 절대자아는 그 자체로 인식되지 않는다. 따라서 자신을 바로 자기 자신으로서 인식하기 위해 마음A(절대자아)는 스스로 자아의 자기정립에 이어 자아 안에 비아를 반정립한다. 그렇게 해서 절대 자아 안에 비아가 반정립되면며, 절대자아는 가분적 자아와 가분적 비아로 분할되며, 그 둘 사이에 하나가 다른 하나를 규정하는 대립과 투쟁의 역사가 시작된다.


가분적 비아에 의해 가분적 자아가 규정되는 과정이 인식이며, 반대로 가분적 자아가 가분적 비아를 규정하는 과정은 실천이다. 가분적 자아가 가분적 비아에 의해 규정되는 인식과 달리 실천행위에서는 자아가 비아(객관 현상세계)를 규정하고 부정함으로써 비아를 자아화하여 자아의 영역을 확장시켜나간다. 이처럼 비아를 부정하는 실천 과정에서 자아는 자기 자신을 비아 아닌 것으로서, 즉 자아로서 확인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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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적 자아의 자기동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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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분적 자아     가분적 비아

←---------------              비아가 자아를 규정(자아의 부정): 인식 

----------------→            자아가 비아를 규정(비아의 부정): 실천


이와 같이 절대자아는 자기 확인을 위해 자아 아닌 비아를 반정립하고 다시 실천행위 속에서 그 비아를 부정함으로써 자신을 비아 아닌 자아로 인식하게 된다. 그러나 그처럼 자아와 비아의 투쟁적 관계 속에서 비아의 부정으로서의 실천적 행위를 통해 확인되고 확보되는 자아는 비아와 대립해 있는 가분적 자아(마음a)이지 절대 자아(마음A) 자체가 아니다. 왜냐하면 여기에서 비아의 부정은 바로 가분적 자아의 확장일 뿐이며, 이는 결국 한 가분적 자아에서 그 보다 더 확대된 가분적 자아에로의 경계선의 이동일 뿐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자아와 비아가 대립해있는 현상세계 내에서의 수평적인 경계이동일 뿐이지, 가분적 자아와 가분적 비아 둘 다를 포함하는 현상 전체의 부정을 통해 절대자아에로 나아가는 그런 수직적 초월은 아닌 것이다. 결국 경계 자체를 초월해서 절대자아에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가분적 자아의 경계를 절대자아 쪽으로 이동하여 가분적 자아의 영역을 무한히 확장함으로써 절대자아에로 접근해가는 것일 뿐이다.


그러나 비아가 완전 부정되어 절대 자아의 통일성에 이른다는 것은 피히테에 있어서는 하나의 이념일 뿐이지, 현실이 아니다. 자아는 오직 비아가 부정되는 과정에서만 자아로서 확인되기 때문이다. 비아가 남아 있는 한에서만 그 비아의 부정으로서 자아의 활동성이 자각되는 것이므로, 자아는 대상세계와의 투쟁관계 하에서만 대상 아닌 자아로서 의식되는 것이다. 결국 비아 부정의 순간 절대자아는 자아로 작용하긴 하지만, 비아 부정을 통해 확인된 자아란 절대자아가 아닌 확장된 가분적 자아일 뿐이다. 절대자아는 가분적 자아의 무한한 확장이 지향하는 궁극지점으로 이념으로만 작용할 뿐이다. 이와 같이 해서 피히테에 있어서는 절대자아가 완전한 자기인식에 도달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절대자아의 단적인 자기인식, 자기동일성의 확보는 추구해야할 이상일 뿐 실현가능한 현실은 아닌 것이다.


이처럼 절대자아의 자기 확인, 마음A의 자기인식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독일관념론 역시 칸트적 의미의 지적 직관을 부정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인간에게 가능한 직관은 현상의 직관일 뿐이고, 가능한 의식은 인식에 있어서나 실천에 있어서나 대상의식일 뿐이다. 그러므로 마음A를 그 자체로서 의식에 포착하는 지적 직관이란 불가능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쉘링은 자아를 확인하는 자기인식의 길을 부정한다. 정신의 활동성(그는 이 자기의식을 지적 직관이라고 칭했음)은 자기의식의 방식으로 의식될 뿐, 그것 자체가 그런 것으로서 직관되지 않는다. 즉 그것을 바로 그런 것으로서 의식할 수는 없다는 말이다. 마음A는 주객동일성으로서 의식의 조건은 되지만, 그 자체가 의식대상으로 주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지적 직관은 절대적 자유와 마찬가지로 의식(意識) 안에 나타날 수 없다. 왜냐하면 의식은 객체를 전제하는데 반해, 지적 직관은 그것이 아무런 객체도 가지지 않는다는 것에 의해서만 비로소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29)


우리가 자아로서 활동하지만 그것이 의식 안에 포착되지 않는다는 말은 우리가 우리 자신의 마음의 활동성을 바로 그런 것으로서 직관하지는 못한다는 말이다. 우리는 마음A의 근원적 활동성으로서 살아간다. 그러나 그 활동성을 직접 직관하여 아는 것이 아니라 사유 속에서 추론하여 반성적으로 아는 것일 뿐이다. 마음A는 사유의 대상이지, 직관대상이 아니다. 우리의 의식은 오직 대상의식으로서만 가능하므로 그 자체가 바로 그런 것으로서 의식되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우리의 일상적 의식의 한계라고 볼 수 있다.


2) 불교 : 종교적 수행의 길


불교에서 견성(見性)은 성(불성)을 직접 관하는 것으로, 그것은 성에 대한 추론적 사유가 아닌 직접적 직관을 의미한다. 견성(見性)은 인간 마음의 근원적(根源的) 활동성(活動性)인 공적영지(空寂靈知)에 대한 사유가 아니라 공적영지에 대한 직관이어야 한다. 그 직관은 비량(比量)이 아닌 현량(現量)이되 단순히 경험적인 감각이나 지각과는 구분되며 단순한 자기의식으로서의 자각(自覺)과도 구분되는 현량, 즉 정관(定觀)이다. 나아가 공적영지를 주객을 포괄하는 마음 자체의 자기활동성이며 의식 자체의 자기의식성이라는 의미에서 자증분이라고 본다면, 견성은 다시 자증분을 바로 그런 것으로서 확인하는 증자증분이 된다.30)



능연식(견분)        소연경(상분)   :  일상의식(대상의식)/감각, 지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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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변식 자체(자증분) : 마음A=인간의 본성/자각

            

자증분의 확인(증자증분) : 본성의 확인=견성/정관



대상의식 아닌 자기의식으로서의 공적영지를 바로 그런 것으로서 확인하는 증자증분은 어떤 방식으로 발생하는가? 그것은 선정을 통해 얻어진 직관인 정관이므로 수행을 필요로 한다. 그렇다면 어떤 방식의 수행인가?


주객과 능소의 분별 대립 너머 그 둘이 분리되지 않은 자증분을 그 자체로서 확인하고자 하는 것은 나와 세계, 인식과 존재가 하나로 통합되어 있는 그 지점에 의식을 가지고 도달하고자 하는 것이다. 현상적으로 일체가 서로 분별 분리되어 있는 의식표층을 통과하여 마음 심층에 도달하여 무분별의 지점에 이르고자 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일상적 의식은 주와 객, 능과 소라는 분별 대립의 구도로 되어 있다. 능연의 주관적 의식활동은 소연의 객관적 의식대상을 가지며, 후자가 없이는 전자가 성립하지 않는다. 의식의 대상이 없으면, 의식의 활동도 없다. 육경이 멸하면 육식도 따라 멸함이 경식구민(境識俱泯)이다. 의식의 활동이 언제나 의식의 대상을 지시하며 의식대상과 함께 한다는 것, 의식대상이 없는 의식활동이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서양 현상학은 ‘의식의 지향성(指向性)’이라고 칭한다. 먹히는 대상이 없으면 먹는 것이 아니듯이, 의식의 대상이 없으면 의식활동이 없는 것이다. 먹는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먹는 것을 뜻하듯이, 의식한다는 것은 무엇(지향적 대상)인가를 의식한다는 말이다. 따라서 의식대상이 없어지면 그 대상의식도 따라 없어지면서, 의식 자체가 잠들어 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공적영지나 지적 직관을 인식 차원에서 확인하자면, 이러한 우리의 일상적인 주객대립구도의 의식의 한계를 넘어서야 한다. 의식대상이 없이도 대상의식이 아닌 방식으로도 의식이 의식으로서 활동할 수 있는 것인가? 대상없는 의식이 가능한가? 자신의 본성, 공적영지를 발견하기 위한 수행이 곧 적성등지법(寂惺等持法)이다. 마음의 내용, 마음의 상들을 지워나가면서 마음 대상이 사라질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따라서 혼미한 혼침에 빠져들지 않고 깨어있도록 하는 것, 그렇게 함으로써 마음 자체를 발견하는 것이다.


초저녁이나 밤중이나 새벽에 고요하게 대상을 잊고 단정하게 앉아 바깥 상을 취하지 말고 마음을 거두어들여 안으로 비추어 본다. 우선 고요함으로써(적) 반연하는 생각을 다스리고, 다음에는 또랑또랑함으로써(성) 혼침을 다스린다. 혼침과 산란을 고루 제어하며 나아가 취하고 버린다는 생각도 없어야 한다.31)


우리의 일상적 의식방식에 있어서는 의식객체가 사라지면 의식작용도 함께 사라지면서 의식은 잠들어버리고 만다. 생각을 없애면 혼미하여 잠드는 것이다. 의식은 늘 대상의식 차원에 머물러 있고, 공적영지는 직관되지 않으며, 따라서 그 동일성은 의식이 아닌 존재, 마음이 아닌 몸의 차원으로 간주되고 마는 것이다.32) 그렇지만 그것이 공적영지라고 불리는 것은 그것이 곧 마음작용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문제는 의식에서 대상을 없애서 대상의식차원의 의식이기를 멈추어 적(寂)이 되면서도, 그 의식이 잠들지 않고 깨어있어 성(惺)을 유지하는 것이다. 이러한 적성등지법은 정확히 무엇을 시도하는 것인가?


우리의 일상적인 대상의식에 있어 뇌파는 β파라고 한다. 이는 대상에 따라 사이클이 바뀌면서 빠른 속도로 움직이는 불안정한 파이다. 여기에서 바깥으로 향한 의식을 되돌려 안으로 향하게 되면 의식은 더 이상 대상에 따라 움직이는 대상의식이 아니라 의식 자체를 의식하는 내부의식이되는데, 이 때 고요한 평정을 갖춘 뇌파는 좀 더 긴 파장의 α파가 된다. 그런데 그렇게 의식이 고요해지면, 즉 의식에서 의식대상을 없애 무념(無念) 무상(無想)의 상태, 한마디로 무심(無心)이 되다 보면, 우리는 곧 잠들게 된다. 경이 없으면 식도 없기 때문이다. 잠든 수면뇌파는 파장이 더 길어지면서 θ파로 바뀌고 그 때 우리는 꿈의 세계로 빠져든다. 꿈에서는 자신의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자신의 폭넓은 내적 의식세계를 마음껏 돌아다닌다. 그러다가 잠이 더 깊어지면 더 이상 꿈도 꾸지 않아, 외부의식도 내부의식도 멎어버린 무의식 단계가 된다. 이때 뇌파는 아주 긴 파장의 δ파가 된다.


우리의 두뇌파장이 β에서 α파, θ파로 바뀜에 따라 우리가 더 이상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잠들고 마는 까닭은 우리가 이미 강도가 강한 대상적 자극에 익숙해져서 내적인 미세한 자극들에 둔감해져 그것들을 더 이상 감지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생명활동만이 있는 원초적 상태에서는 δ파나 θ파 정도의 내적 자극만이 있을 것이며, 그런 미세한 자극들도 모두 감지됬을 것이다. 그러나 강력한 외적 자극으로 인한 β파에 익숙해진 이상 우리는 그런 자극이 있는 β파 상태에서만 깨어있고 그런 감지가능한 자극이 없으면 더 이상 깨어있지 못하고 잠을 거쳐 무의식에 빠져들고 만다. 따라서 우리에게서 실제 작동하고 있는 생명활동은 우리 자신에게 전혀 의식되지 않으며, 그것은 모두 무의식 차원의 활동으로 간주되고 의식 또한 그런 활동과 분리된 것으로 간주되어, 결국 존재와 의식, 생명과 사유를 이원론적으로 분리하게 된 것이다.33)


이에 반해 적성등지법은 그와 같은 분열을 넘어서려는 시도라고 볼 수 있다. 이미 무의식으로 화해버린 존재와 생명을 다시 의식화하여 마음A의 활동성으로 확인하고자 하는 것이다. 의식의 대상을 지워 고요한 적정상태(적)에 들어가면서도 깨어있음(성)을 유지하려는 것은 두뇌파장이 α파, θ파 나아가 δ파가 되면서도 잠들지 않고 깨어있다는 것이다. 각성상태를 유지하면서 깊은 내면의식과 나아가 무의식에까지 들어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깊은 내면의식에서는 시간 공간을 초월하게 되며 무의식에서는 나와 너, 나와 세계의 이원화된 분별의식을 초월하게 된다. 이는 의식이 깨어있는 채로 내부의식을 통과하여 무의식의 세계 또는 무심의 경지로 나아가고자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외부의식과 내부의식과 무의식의 세계를 자유자재로 들락거릴 수 있게 되며, 무의식상태에서 자율적으로 작동하던 신경들을 모두 의식하여 비자율화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이렇게 해서 주와 객, 능과 소의 분별을 넘어선 마음A의 활동성을 그 자체로서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자기 자신의 본 모습을 직관하는 것이다. 그 때 비로소 외부의식에서의 분별적 나를 벗어나 그 보다 더 심층에서 작용하는 식 자체를 바로 그런 것으로서 보게 된다. 이런 식으로 의식이 각성된 채로 꿈의 세계에 들어가니 깨어있음과 꿈이 둘이 아님을 알게 되고, 의식이 각성된 채로 죽음과도 같은 무의식의 세계에 들어가니 의식과 무의식, 삶과 죽음이 둘이 아니고 하나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이는 곧 마음의 자연발생적인 흐름과 동요를 막아 고요한 지(止)를 유지하면서도 그 안에서 마음이 깨어있어 사태를 명료하게 의식하고 주목하는 관(觀)의 수행과도 상통한다. 사념처관 역시 적성등지법의 방식으로 의식 심층에서 작동하는 마음A를 바로 그런 것으로서 의식하여 알고자 하는 수행법이다.34) 나아가 사선(四禪)과 사무색정(四無色定)의 경지도 마찬가지로 깨어있는 의식으로서 무분별적 경지에 들어 그것을 마음A로 확인하는 적성등지의 수행법이다.35) 이처럼 의식내용을 없애면서도 깨어있는 의식을 유지하여 대상의식 아닌 자기의식에 도달하여 자기 자신의 본성을 확인하는 것이 불교적 수행이다. 이는 주객을 분별하는 경계선 자체를 부정하고 멸함으로써 무분별의 경지로 넘어서는 것이다.


경험적 자아로서의 마음a의 상태에서 보면 의식대상이 없을 때 의식은 잠들고 만다. 그럼에도 마음은 경험적 자아와 경험적 세계를 포괄하는 활동성으로서 작용한다. 현상적 차별성이 사라진 후 드러나는 바탕, 상이 멸하고 드러나는 성은 공적이면서 영지의 마음이다. 우리 각각이 그런 공적영지의 마음이기에 우리는 누구나 자기 자신을 경험적 규정성을 넘어선 자유로운 능동적 주체로 의식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그런 빈마음으로 의식한다. 마치 물 속의 물고기가 물을 알 듯이 우리는 우리 마음을 안다.


그러나 물 속에 사는 물고기가 물밖에 나서보지 않고 물을 물로서 확인할 수 있겠는가? 이 세계가 마음이 만든 세계라면, 세계를 벗어나지 않고, 삶을 떠나지 않고, 어떻게 세계와 삶의 경계에 선 마음을 마음으로서 알아 볼 수 있단 말인가? 그럴 수 있기 위해서는 세계를 벗어나고 삶을 벗어나는 경지, 살아서 죽는 생사불이의 경지에 이르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마음을 마음으로서 아는 견성(見性)은 바로 그러한 경지를 말할 것이다. 적성등지법은 그런 견성을 위한 수행법이다


Ⅴ. 마치는 말


불교나 독일관념론이나 인간의 본성을 주와 객으로 분별하는 이전의 절대적 무분별의 마음A로 보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불교는 절대적 무분별의 마음A를 공적영지(空寂靈知)라 부르고, 독일관념론은 그것을 사행(事行)이라 칭한다. 현상세계를 형성해내는 마음의 활동성인 것이다. 그렇게 산출된 현상세계는 다시 근원으로 돌아가기 위해 부정된다. 그 부정을 통해 마음 A는 자신을 그런 것으로서 확인하여 알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에게 있어서는 비아의 현상세계를 부정하는 방식, 비아 아닌 것으로서의 자아를 확인하는 길이 서로 다르다. 하나는 자아 확인의 길을 구체적 삶의 실천 과정으로 보며, 다른 하나는 마음 자체의 직관, 깨달음의 과정으로 본다. 따라서 하나는 현상세계 변혁을 위한 변증법적 실천윤리에 주목하게 되고, 다른 하나는 내적 깨달음을 위한 수행론에 주목하게 된다. 하나는 비아를 부정하고 자아를 확장함으로써 절대자아에 이르려고 하고, 다른 하나는 자아와 비아의 구별 자체를 없앰으로써 절대 일심에 이르려고 한다. 이처럼 도달하고자 하는 절대적 마음A는 마찬가지이지만, 그 도달 방식에 있어 독일관념론과 불교는 서로 다른 길을 가게 되며, 따라서 그 다른 길을 따라 확인된 것도 사실은 서로 다른 것이다.


독일관념론에 있어 자아 비아의 투쟁속에서 비아를 부정하면서 확인하는 자아는 결국 현상 너머의 마음A가 아니라 현상 안에 등장하여 자기를 무한히 확장시켜 나가는 마음a일 뿐이다. 여기서 마음A의 절대자아는 도달될 수 없고 확인될 수 없는 이념이고 이상일 뿐이다. 인간은 그 이념을 향해 전진해가지만 그 전진은 역사 안에서 완료될 수 없는 무한전진일 뿐이다. 역사는 자아와 비아와의 투쟁이다. 비아의 현상세계를 자연(自然)으로 보면 인류의 역사는 자연을 부정하고 극복하여 그것을 자아화, 인간화, 문명화하는 자연과의 투쟁과정이 된다. 그리고 자아의 완전 승리로서 비아가 완전히 부정되어 자아의 절대적 동일성에 이른다는 것은 인류 역사의 끝을 의미한다.


이에 반해 불교는 현상적 자아와 현상적 세계 간의 갈등에 있어 그 경계를 자아확장의 방식으로 이동해가는 것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36) 보다 인간화된 현상세계의 건설, 보다 아름다운 꿈의 기획이 아니라, 현상으로부터의 초월, 꿈으로부터의 깨어남을 지향하기 때문이다. 불교는 이러한 초월과 깨어남을 성취가능한 것으로 본다. 석가가 깨달음을 통해 생사윤회를 넘어섰듯이 인간 누구나 석가가 설한 그 방식대로 수행하기만 하면 결국은 그런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불교적 관점에서 보면 무명을 벗어나고 꿈으로부터 깨어나는 마음A의 자기확인이 있지 않다면, 즉 진정한 견성(見性)이 있지 않다면, 현상적 자아(마음a)의 무한한 자기확장 그리고 비아(非我)의 부정은 아집에 가득찬 폭력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불교는 외적으로 세계를 향해 자기를 실현하려 하기 전에 내적으로 자기 자신의 본성을 여실히 깨달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독일관념론자들은 왜 초월적 자기확인을 시도하지 않고 수평적 자아확장에만 몰두하는 것일까? 왜 의식의 절대적 비약, 수행을 통해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어서는 경지를 추구하지 않은 것일까? 그것은 서양 형이상학의 전통에서 초월(超越)은 오직 신(神)의 몫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서양 형이상학 철학에서는 삶과 죽음의 분리, 마음과 몸, 영과 육의 갈등은 인간으로서는 극복할 수 없는 한계이며 운명으로 간주된다. 반명에 불교에서의 깨달음의 추구는 그러한 인간 운명에 대한 도전이다. 견성하여 성불한다는 것(見性成佛)은 삶과 죽음이라는 분별 경계를 넘어선다는 것, 기독교적 견지에서 말하면 신(神)이 된다는 것을 뜻한다. 어느 길이 인간의 실상을 제대로 파악한 것인가? 그에 대한 답은 오로지 자신의 일생을 걸고 진지하게 수행한 사람만이 알 수 있을 것이다.


자료출처: 불교학연구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