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직지인심, 直指人心, 견성성불, 見性成佛

장백산-1 2019. 4. 3. 15:05

직지인심, 直指人心, 견성성불, 見性成佛


소를 몰며 밭을 간 평전보안 선사의 형수의 선문답


육조혜능 선사가 곧바로 마음을 가리켜(직지인심, 直指人心) 단번에 깨닫게 하는(견성성불, 見性成佛)

조사선(祖師禪)을 주창한 이래 중국의 선종(禪宗)은 빠른 속도로 발전합니다. 육조혜능 선사의 2세손인 

마조 도일에 이르러 수많은 제자들이 배출되었고 9세기에 이르러 조사선이 만개하기 시작합니다.


조사선이 만개했던 이 시대를 주름잡던 선사가 임제의현(臨濟義玄, ~867))과 덕산선감(德山宣鑑, 782~

865)입니다. 이들의 이름을 따 ‘임제할(臨濟喝), 덕산방(德山棒)’이라는 말이 회자되었는데, 그만큼 

조사선의 직접적(直接的)인 가르침이 중국에 널리 퍼져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덕산선감과 임제의현 선사는 여성 도인(道人, 禪知識, 禪師, 깨달은 사람)들과도 인연이 깊습니다.


덕산선감은 떡을 파는 노파와 선문답을 계기로 알음알이(知識)를 떨쳐버리고 자성[(自性), 본래마음, 

본성, 본래성품, 근본성품, 하나뿐인 성품, 一心, 본래의 나, 道, 진리, 깨달음, 보리, 부처, 禪, 眞心, 

眞性, 佛性, 法身, 淸淨心, 본래면목, 텅~빈 바탕자리, 눈앞, 目前,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의 현전, 

주인공, 無位眞人, 촉목보리(觸目菩提), 하나, 一者, oneness, 모든 것을 다 보는 눈, 전시안(全視眼),

원각도량(圓覺道場), 수월도량(水月道場), 여래(如來), 적멸(寂滅), 불생불멸, 상주불멸, 세상의 실상,

세상의 참모습]과 직접 만나게 되는 일대전환이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임제의현 선사는 고안대우 선사(禪師)와 황벽희운 선사 두 사람 사이를 오가며 세상의 실상, 깨달음을 

얻은 후 이곳 저곳으로 운수행각을 떠나게 되는데 도중에 여성 도인과 만나 공부를 다지는 인연을 갖게 

됩니다. 임제의현 선사가 평전보안(平田普岸) 선사를 찾아가는 길이었습니다. 평전보안 선사는 홍주 

사람으로 생몰연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는 백장회해 선사 문하에서 깨달음을 얻은 뒤 천태산의 빼어난 

경치에서 성현이 가끔 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천태산에 한 번 가보게 되었는데, 그 곳에서 움막을 짓고 산 밑에 조용히 살면서 공부했습니다. 

세월이 흘러 이 소식이 사람들에게 알려지자 나중에 큰 절을 짓고 평전선원(平田禪院)이라 이름하였

다고 합니다. 평전보안 선사가 남긴 말 중 지금까지 전해지는 유명한 구절이 있습니다.

“신령한 광명이 어둡지 않아서 만고에 빛나니, 이 문안에 들어와서는 알음알이를 내지 말라.”

神光不昧 萬古徽猷(신광불매 만고휘유, 入此門來 莫存知解(입차문래 막존지해). 신령한 빛이 어둡지 

않으니 영원토록(萬古) 훌륭한 지혜여(徽猷)! 이 문(門, 禪 공부)안에 들어와서는 분별하는 지식(知)과 

분별하는 이해(理解)로 진리, 깨달음, 자성, 본래마음, 본래의 나에 대해 묻지마십시오!


사찰의 일주문 주련으로 많이 쓰이는 선시(禪詩)입니다. 본래마음의 빛이 어둡지 않고 빛나서 언제나

어디서나 영원히 무시무종으로 항상 빛나고 있습니다. 이 마음을 깨달았다면 어떠한 알음알이도 두지 

말라는 가르침입니다. 알음알이가 조금만 남아있어도 이 본래마음이라는 밝은 빛을 가리기 때문입니다.

평전선사가 평전선원을 열고 학인들을 지도할 때 평전선사의 형수도 함께 생활하며 공부를 했던 것 

같습니다. 


임제의현 선사가 평전보안 선사를 찾아가던 길에 어느 날 밭에서 소를 모는 한 여인을 만납니다. 임제가 

그 여인에게 물었다. “평전(平田)으로 가려면 어느 길로 가야합니까?” 여인은 소를 한번 때리고는 답했다.

“이 소(牛)가 일러주는 곳으로 가십시오. 길이라면 나는 알지 못합니다.” 임제가 또 물었다. “평전으로 

가려면 어느 길로 가야합니까?” 여인이 답했다. “이 짐승은 다섯 살인데도, 오히려 쓸 수 없습니다.”

그러자 임제의현 선사가 자신의 마음속으로 말했다. ‘이상하군. 이 여인이 내게 쉽게 못과 쐐기를 뽑게 

하려는 뜻이 있군.’이라고.


그리고 평전보안 선사를 만나게 되었다. 평전보안 선사가 임제의현 선사에게 물었다. “조금 전에 나의 

형수를 보지 못했는가?”. 임제가 말했다. “이미 받아 마쳤습니다.”


-선여인전, 우바이지, 오등회원, 지월록-


평전(平田)은 보안 선사가 거처한 지역의 명칭이기도 하지만, ‘평평하여 좋은 땅’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위 대화에서 평전(平田)은 두 가지 뜻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먼저 임제는 평전 보안 선사가 있는 곳을 

물었을 것입니다. 이에 평전보안 선사의 형수는 선문답으로 응대합니다. 임제의현 선사가 평전을 찾은 

뜻은 본래마음밭을 분명히 새기기 위한 것이니, 형수는 소를 한 차례 때리면서 곧바로 평등한 본래의

마음밭을 가리켜 보인 것입니다. 그리고는 눈앞의 소를 따라 가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자신은 그 길을 

알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은 소를 타고 있습니다. 소(牛)에 비유하는 본래마음이 없다면 사람들은 단 한 걸음도 

뗄 수가 없을 뿐만이 아니라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에 존재할 수도 없습니다. 나도 이 본래마음을

바탕으로 해서 드러나고, 나의 모든 행위, 즉 분별하는 마음, 분별하는 생각, 말, 행동, 경험과 눈앞에

보이는 세상 모든 것들이 이 본래마음을 배경으로 해서 드러난 모습들입니다. 나 뿐만 아니라 이 세상

모든 것들이 전부 다 소(牛)라는 본래마음을 타고 있는 겁니다.


우습다. 소 탄 자여 소를 타고 다시 소를 찾는구나! 可笑騎牛子(가소기우자), 騎牛更覓牛(기우갱멱우).


소요태능(​逍遙太能) 선사의 이 禪詩처럼 우주삼라만상만물, 세상 모든 것들, 우리 모두는 이 본래마음 

가운데서 온갖 행위를 하고 있으면서도 다시 이 본래마음을 찾으려고 이리 저리 방황하고 있습니다. 

문득 물질적 정신적 모든 현상들, 이 세상 모든 것, 세상 모든 모습의 본바탕, 본래마음, 자성(自性)을 

확인하고 보고 나면 그동안 저질렀던 어리석은 행위에 저절로 피식피식 헛웃음이 납니다. 그렇지만 

깨달음은 스스로가 이 세상 모든 것의 실상, 참모습, 본래마음, 자성, 본래의 나에 대해 분명해지는 것

이지 이 세상 모든 것의 참모습, 본래마음, 자성, 본래의 나는 지식이나 생각으로는 결코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말을 사용해서 표현 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평전보안 선사의 형수는 평전(平田), 즉, 이 세상 모든 것의 참모습, 본래마음, 자성, 본래의 나로 가는 

길을 몰라서 모른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의 참모습, 본래마음, 자성, 본래의 나, 텅~빈 바탕자리,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의 현전은 이렇게 눈앞에 생생하고 분명하지만 본래 알 수 없는 것이기에

모른다고 대답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임제가 평전(平田)으로 가는 길을 묻자, 평전보안 선사의 형수는 

자신이 모는 소가 다섯 살이 되었는데도 쓸 수가 없다고 합니다. 본래마음은 이렇게 눈앞에 생생하게분명

합니다. 본래마음은 불생불멸, 상주불멸, 무시무종하기 때문에 한 살일 때나 두 살일 때나 백 살일 때나 

억겁의 나이일 때나 영원히 늘 눈앞에 생생하게 분명합니다. 본래마음은 내가 손쓸 수 있는 대상이 아닙

니다. 삶의 모든 모습, 이 세상 모든 모습, 우주삼라만상만물이 오직 본래마음뿐이지만, 본래마음은 따로 

떼어내어 내가 통제하거나 손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본래마음에 손을 쓰려는 분별하는 생각 마음이 

바로 본래마음이고, 손을 움직이는 것이 본래마음이며, 손을 쓸 대상도 본래마음뿐이지 본래마음과 분리

되어 따로 떨어져있는 것이 본래마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임제의현 선사는 여인이 한 말의 본뜻을 금방 알아들었습니다. 깨달음의 체험이 있었지만, 여전히 남아 

있는 분별의 못과 분별의 쐐기풀들을 모두 뽑아버리게 하려는 뜻이 있음을 간파한 것입니다. 바로 지금 

이 세상의 참모습, 본래마음, 자성, 본래의 나, 눈앞 텅~빈 바탕자리,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의 현전

말고 여전히 다른 어딘가에 이 세상의 참모습, 본래마음, 눈앞 텅~빈 바탕자리, 본래의 나, 자성, 도(道), 

깨달음이라는 것이 따로 있을 것이라는 허황된 환상을 뽑아내게 하려는 뜻이 있다는 것을 눈치챘습니다.


사람들이 생각으로 분별하여 따로 본래마음, 깨달음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마치 깊이 박힌 못, 잡초의

뿌리를 뽑아내어 완전히 고사시키기 어려운 쐐기풀과 같습니다. 특히 깨달음에 대한 추구, 완전한 상태에

대한 갈망은 오래오래 남습니다. 본래마음, 깨달음에 대한 이러한 추구와 갈망이 남아있는 한 그것을 

성취하기를 바라는 자아의식, 에고의식, 분별심은 아직 남아있는 겁니다.


본래마음, 깨달음을 갈망하고 추구하는 생각도 망상이고, 그것을 추구하는 나도 본래 허망한 존재감일뿐

이라는 망상임을 깨달아야 분별 차별로 이루어진 이 세상에서 훌쩍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임제가 평전보안 선사를 만나자 평전보안 선사가 조금 전에 자기의 형수를 보았느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임제는 이미 다 알아들었다고 말합니다. 평전의 형수, 평전, 소 모두가 본래마음, 깨달음을 가리키는 방편

(方便)일 뿐입니다. 우주삼라만상만물 모든 것이 본래마음뿐입니다. 임제선사의 말처럼 ‘손닿는 곳마다 

이것이고, 서있는 곳마다 이것, 본래마음, 깨달음’입니다(隨處作主, 立處皆眞). 그래서  평전보안 선사는 

임제의현에게 굳이 여기까지 일부러 와서 나에게 물을 것이 무엇이냐는 말입니다. 그러자 임제의현 선사

가 이에 화답한 말이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입니다. 그러나 본래마음을 체험했다고 하더

라도 분별된 모습의 현실세상을 벗어나 살아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살얼음판을 걷듯 조심하고 매사에 

밝아야 할 것입니다. 매일 것도 꺼리낄 것도 아무것도 없지만, 꺼릴 것 없음에 머물러서도 안되는 미묘한 

길입니다.


뒤에 감산덕청 선사가 임제의현과 평전보안 선사의 형수의 문답을 들어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짐승(소)

은 쉽지 않으니 본래 사나운 뿔에 무딘 발톱이네. 배고프면 밥을 먹고 배가 부르면 잠을 자니 설령 깨쳤다 

하더라도 코를 꿴 고삐를 당길 뿐이다. 눈이 닳도록 등 가득 비추어 어리석음을 매질하고 어리석음을 

채찍질하여도, 한 해 한 해 이 짐승을 부리기가 어렵다.


노래하여 말하였다. 아침엔 평전을 갈고, 저물면 평전을 타고 돌아오네.

바람이 불면 고기잡이 노래로 화답하고 달빛 받으면 덕석(牛衣)에 눕네.


- 우바이지-


이 짐승, 소(牛)란 바로 본래면목, 본래의 나, 깨달음을 가리키는 방편입니다. 오랜 세월 분별심에 사로

잡혀온 본래마음은 쉽게 분별심에서 벗어나기가 어렵습니다. 아무런 분별이 없는 본래마음을 체험했다

하더라도 오랜 세월 분별심에 길들여진 본래마음은 시시때때로 사납게 분별 망상 번뇌에 사로잡힙니다.

분별의 물결을 진실이라고 여겨 그것에 안주하려는 마음은 길들여지지 않은 야생의 동물과 같습니다. 

마치 성난 황소와 같은 분별하는 마음을 길들이는 일이 소를 모는 일(牧牛)입니다. 평전의 형수가 밭에서 

소를 모는 것이 바로 분별하는 마음을 분별없는 마음으로 길들이는 일입니다.


이 본래마음자리에서 거친 쐐기풀처럼 일어나는 분별 망상 번뇌를 즉시즉시 알아차려 밝게 보아 그것을 

진실하다고 여기지 않는 것이 소를 길들이는 것이고, 이것이 마음밭을 개간하는 공부입니다. 그렇다고 

이것을 위해 달리 하는 일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늘 평상시대로 삶을 살지만, 순간순간 분별 망상에서 

깨어있으려는 경종을 스스로 울리는 것입니다. 소가 엉뚱한 길로 들어가려 할 때 소의 고삐를 잡아당기는 

것과 같은 일입니다. 문득 본래마음을 체험하는 일은 소의 코에 코뚜레를 꿰어 고삐를 잡는 일이고, 코뚜

레를 꿰었으면 이전의 잘못된 착각에 길들여진 습관을 벗어나 이 세상의 참모습, 실상(공상 空相)에 부합

하는 습관으로 길들여져야 합니다. 이 일이 결코 작은 일이 아닙니다.


세상 만물, 과거 현재 미래 모든 공간이 바로 지금 여기에서 출몰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은 바로 지금 이 

본래마음에서 비롯됩니다. 모든 것이 이 텅~빈 바탕자리 하나뿐임을 깨달으면 분별되는 지금 여기 있는

모든 것들이 있는 그대로 꿈, 허깨비, 신기루, 물거품, 그림자, 이슬, 번개 같이 고정된 실체가 없는 것이

라는 사실을 스스로 깨우치게 됩니다. 이 사실에 익숙해지는 공부가 이어져야 분별 망상을 진실한 것이

라고 여기던 습관이 고쳐집니다.


세상 삼라만상만물 모든 것들은 늘 한결같은 본래마음, 일승(一乘, 단 하나의 승합차), 대승(大乘, 무한대

로 큰 단 하나의 승합차)를 함께 타고 있는 겁니다. 본래마음, 일승, 대승이라는 방편이 가리키는 이것이

없다면 세상만물은 눈앞에 이렇게 절대로 드러날 수 없습니다. 이 사실을 깨달아 모든 의심이 남김없이 

사라지면 인연(因緣) 따라 조화롭게 인연에 응할 일만 있습니다.


-릴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