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어떻게 하면 모습, 소리, 냄새, 맛, 촉감,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장백산-1 2019. 4. 6. 16:41

진수요문(眞修要門) 제 1 장


세상 사람들은 모습을 보면 그 모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소리를 들으면 그 소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어떻게 하면 모습, 소리, 냄새, 맛, 촉감,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1. 우선 만법(우주삼라만상만물)의 생겨남이 없는 도리(무생법인, 無生法忍)을 알아야한다.


우선 <만법의 생겨남이 없는 도리>, 즉 무생법인(無生法忍)을 밝혀야 한다. '성품'을 밝히고 보면 온갖 법이 <생겨남이 없다는 사실>(無生)은 너무나 분명한 일이겠지만, 아직 지혜(智慧)가 충분히 열리지 못하였을 때에는 눈앞에 전개되는 '상대 경계' (相對 境界)의 실상(實相, 진실한 모습)을 깊이 깨달아 살피는 일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다. 


제법실상(諸法實相, 세상 모든 것, 만물, 만법의 참 모습), 즉 제법의 공상(空相, 이 세상 모든 것의 참 모습 진실한 모습, 이 세상 모든 것의 空한 모습)을 참구하는 데는 3 단계로 나누어 생각하는 것이 편리하다.


(Ⅰ) '인연(因緣)' 따라 생겨나는 이 세상 모든 것, 이 세상 모든 존재, 만물, 만법, 제법은 '자체의 성품'(自體性)이 없다. 이같이 세상 모든 것은 자체의 성품이 없는 것을 무유자성(無有自性)이라 이름한다.


마치 '그림자'는 '물체'에 의지해서 있게 되고, '음성'에 의지해서 '메아리'가 있는 것처럼, 따라서 '그림자'나 '메아리'는 '자체의 성품'이 없다. 만약 그림자나 메아리가 '자체 의 성품'이 있다면 구태여 인연(因緣)을 기다려 생겨날 것이 뭐가 있겠는가? 그렇다고 해서 메아리나 그림자가 '없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없고, 결국 있기는 있는데 '있는 것이 아닌 것', 이것이 바로 그림자요, 메아리가 아니겠는가. ․․․


그러므로 여기서 <'자체의 성품'이 없다>(無有自性)고 하는 말은 "그림자나 메아리 같은 그런 것은 실체(實體)가 없다"는 뜻으로 쓰이며, 다시 말해서 "꿈, 허깨비, 환(幻), 물거품, 이슬, 번개와 같다"는 뜻이니, 이것이 바로 불가(佛家)에서 말하는, 이른바 <텅~빈 도리>(空의 道理)이다.


(Ⅱ) 그런데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인연(因緣)으로 말미암지 않고 생겨나는 것은 단 하나도 없다.


언뜻 보기에,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마치 '짓는 자'(作者)가 있어서 상당한 시간과 공력(功力)을 들여서 지어내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모두 '짓는 자'(能作)와 '짓는 대상'(所作)를 세워서, 이 능․소(能所)의 상호작용을 통하여 사물의 생성과 소멸의 과정을 설명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리고는 이와 같은 짓는 자와 짓는 대상의 관계, 즉 능소의 상호작용을 일컬어 '인연법(因緣法), 인과법(因果法)' 즉, '원인'이 조건과 만남이 있어서 '결과'를 낳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미 (Ⅰ) 명제(命題)에서 보았듯이, 인연 따라 생겨나는 모든 것은 '자체의 성품' 이 없는 것이므로 당연히 '짓는 자'(所作)는 '실다운 존재'(實有)가 아닐 것이다. '짓는 자'가 실다운 존재가 아닌데 '짓는 대상'이 진실한 것일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능 ․ 소가 다 환(幻, 허깨비)과 같아서 능 소 둘 다 작용이 없으며, 오직 '인연(因緣)만'이 있을 뿐이다. 즉 사물(대상)이 생겨나는 것도 다만 실체가 없는 허망한 '인연'이 생겨나는 것일 뿐이며, 사라지는 것도 다만 실체가 없는 허망한 '인연'이 소멸되는 것일 뿐임을 알 수 있다.


(Ⅲ) 따라서 물질적 정신적 모든 현상, 일체 존재, 이 세상 모든 것에는 '자체의 성품이 없다(無有自性)'.


즉, 모든 것은 오직 인연 따라 생겨나는 것이기 때문에, 겉으로 보기엔 마치 무언가가 생겨나는 듯이 보이지만, (Ⅰ) (Ⅱ) 명제에 의해서, 실제로는 생겨나는 것이 없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무생법인(無生法忍)의 가장 단순한 모델인데, 그런데 무생법인(無生法忍) 여기에도 결정적인 함정이 숨어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즉, '무생법인(無生法忍), 생겨남이 없는 도리'를 단순히 <생겨남이 없음>(無生)으로 이해한다면 이것은 바로 중생의 경지에 떨어지고 만다. '성스러운 가르침'(聖敎)의 참 뜻은 생(生)도 무생(無生)도 아닌 단 하나뿐인 근본성품, '참 성품'을 드러내기 위해서. 중생들이 모든 존재가 한결같이 생멸(生滅)이 있는 것이라고 집착하는 미혹(迷惑)한 생각을 부셔주기 위해서 무생(無生), 즉 불생불멸(不生不滅)을 말했을 뿐인 것이다. 그러므로 '무생법인'은 '생멸법(생겨나고 소멸되는 것들)'을 포함하고 있음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이렇게 해서 눈앞에 드러나는 이 세상 모든 것, 모든 '티끌 경계'(塵境)는 전부가 꿈, 허깨비, 신기루, 물거품, 그림자, 이슬, 번개 메아리와 같은 실체가 없는 것임을 분명히 간파(看破)함으로써 비로소 모든 허망한 형상(形相)일 뿐인 모습, 소리, 냄새, 맛, 촉감, 생각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이다.



2. 이 세상 모든 것들이 오직 마음으로 지어진 것임을 밝힌다.

(만법유식,萬法唯識), 삼계유심(三界唯心), 유심무경(唯心無境)


앞에서는 이 세상 모든 것, 이 세상 모든 대상, '티끌 경계'에 자체의 성품이 없음(無有自性)을 밝혔으나, 여기서는 관찰의 주체인 '마음'의 공능(功能)을 살핌으로써 인식작용(認識作用)이 갖는 결정적인 허구성(虛構性)을 밝히고자 한다. 

사람들은 흔히 '의식'(意識)의 활동(活動)인 인식작용을 이해하기를, '관찰하는 주체'(能)가 있어서 '관찰의 대상'(所)을 보는 것으로 생각한다. 이와 같은 생각은 거의 움직일 수 없는 진실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게 현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관찰하는 주체인 사람이 관찰의 대상인 사물을 본다>는 사실 자체의 근간(根幹)부터 철저히 규명하고자 하는 것이다.


우선 <인간은 '의식의 영역'(意識領域) 바깥에 있는 사물 등 이 세상 모든 것들을 알아볼 수 있는 수단을 갖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이것은 아직 능력이나 재간이 미숙해서 그런 것도 아니고, 지혜가 덜 깨서 그런 것도 아니고, '법(法)의 이치'가 본래 그런 것이다. 왜냐하면 만약 '마음'은 이 몸 안에 있고, '사물'은 이 몸 저 바깥에 있는 것이라면, '안에 있는 마음'과 '바깥에 있는 사물'과의 사이에는 필시 '경계'가 있을 것이고, 그렇다면 안의 '마음'과 바깥의 '사물'이 서로 이르러(到) 맞닿지도 못할 터인데 어떻게 '안에 있는 마음'이 바깥에 있는 '사물'을 알아볼 수 있겠는가?


 ― 인간은 '자기 마음, 의식'으로 짓는 것만을 볼 수 있고, 자기 마음, 의식 저 바깥에 있는 것은 결코 볼 수가 없다니, ― 그렇다면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 눈앞에서 우리들이 보고 듣고 냄새맡고 맛보고 촉감을 느끼고 생각을 하는 이 숱한 '빛깔(모양 모습 대상 사물)', '소리', 냄새, 맛, 촉감, 생각들은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것이 좋건 싫건 우리가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는 '인간존재의 실상'인데야 어쩌겠는가. 그러므로 공부하는 사람이 <'진실'에 눈을 뜬다>고 하는 말은 바로 이와 같은 사실을 명명백백하게 밝혀내는 일에 다름 아님을 알아야 한다. 이 놀라운 사실에 내재하는 폭발성은 가히 혁명적이라 할 만하다. 


사람들은 이 세상 모든 것들이 오직 '자신의 마음'에 의해서 순간순간 요술처럼 마술처럼 지어지는 환상(幻想)임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언제나 눈앞에 전개되는 이 세상 모든 여러 현상들을 보기를, ― 저 바깥에 있는 것들이 제각각 자체의 성품을 따르면서 '각각 제 갈 길'을 가고 있는 것이라서, 그래서 바깥에 잇는 것들은 이 '마음'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독립적인 실체인 줄로 잘못 인식하면서 착각하면서 지금까지 살아왔고,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앞으로도 속절없이 그렇게 속아서 세상을 살아갈 것이다. 그러므로 고인들은 말하기를, 「어리석은 중생들이 '제 마음'을 '물건'이라고 하네」 하고 탄식하면서, 그 뒤바뀐(顚倒) 망견(妄見) 망상(妄想)을 꾸짖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관찰행위의 실상은 과연 무엇인가? ․․․ 사람들이 <무엇을 본다>고 하는 것은, 사실은 저 바깥에 있는 사물을 직접 보는 것이 아니고, 우선 그 사물을 대했을 때 순간적으로 머릿속에 떠오르는 먼저 경험했던 '영상(影像)'을 투영(投映)하고는 그림자 같은 그 영상(影像)을 보는 것이다. 투영된 영상 이것을 불가에서는 상분(相分)이라 하는데, 이 '상분'은 과거의 개인적인 경험들이 기억의 형태로 축적되어 있다가, ― 이 기억의 파편들이 쌓이고 엉키고 한 것이 바로 '의식(意識), 식(識), 지식(知識), 분별하는 마음(分別心)'이다 ― '바깥에 나타나는 사물'을 대하는 순간, 그 사물과 유사한 기억의 한 토막을 재빨리 찾아내서, 그 기억이 머릿속에 떠오르게 되면, 사람들은 그 영상(影像)을 인식(認識)하기를, 마치 저 바깥에 있는 똑같은 대상을 보고 있는 것처럼 착각하는 것이다. 이것이 인간의 관찰행위의 진실이다.


어렸을 적에, 다섯 사람의 소경이 코끼리를 만져보고 말하는 우화(寓話)에 대해 들은 기억이 있을 것이다. 그 기억을 되살리면서 한 번 생각해 보자. 한 소경은 코끼리의 배를 만지면서 한 참 머리를 갸웃거리더니, "코끼리는 마치 벽 같이 생겼구나" 하고 말한다. 또 한 사람의 소경은 코끼리의 다리를 만지면서 역시 한참 을 더듬거리더니 말하기를, 「코끼리는 마치 둥근 기둥처럼 생겼구나」 하고 말한다. 이 이야기를 끝까지 다 들어볼 필요도 없이, ― 우리는 눈먼 장님들이 본 것이 <자기 자신의 과거의 기억 속의 한 토막>을 되살려내서는, 그 기억을 마치 지금 여기서 코끼리를 보고 있는 것으로 여기고 있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만약 그들이 눈을 떠서 직접 코끼리를 보았다면, 그 때 과연 그들은 무엇이라고 말을 할까?


인간의 관찰행위는 이와 같은 이 착각하는 과정이 찰나지간에 이루어지기 때문에 그 관찰행위의 내막에 이런 곡절이 숨어있다는 사실을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다. 그리고는 비슷한 영상이 투영되면 "아! 알았다"고 여길 것이고, 또 아무리 해도 비슷한 영상을 찾아낼 수 없으면, 머리를 갸웃거리면서 "무엇인지 도저히 알 수 없다"고 말할 것이다. 이같은 관찰행위의 착각은 영화를 볼 때도 똑 같다. 영화나 드라마는 인간의 착시현상을 이용한 놀이다.


이와 관련해서 '꿈'의 '메커니즘'을 생각해 보면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즉 꿈속에 나타나는 온갖 것들은 '나' '남' 할 것 없이, 그것이 모두 '제 마음, 의식, 기억'이 투영되어 상영되는 것임에 틀림없는데도, 사람들은 꿈을 꾸면서 내가 저 바깥의 사물을 보고 있는 것으로 여기지 않는가. 그러므로 이제부터는 아름다운 무지개를 보거나, 눈부시게 찬란한 저녁 노을을 보거나, 또는 아름다운 자태의 남녀를 보거나 할 때에는 그 모두가 사실은 내 의식 내 마음 내 기억이 요술처럼 변해서 상영되는 실체가 없는 영상(影像)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며, 또한 바람 소리, 물소리, 새들의 지저귀는 소리 등, 이 세상의 온갖 다양한 소리가 나는 것을 들으면, 그것도 역시 내 기억이 요술처럼 변해서 상영되는 영상의 소리인 줄로 알아야 할 것이며, 결단코 저 바깥에 온갖 가지의 색깔 모습, 소리, 냄새, 맛, 촉감, 생각이 따로 있어서, 그것들을 보고 듣고 냄새맡고 맛보고 촉감을 느끼고 생각을 하고 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결코 잊어선 안 될 것이다.


요컨대, 우리들이 현재 보고 듣고 하는 것은, 사실은 저 바깥의 사물과 소리를 보고 듣고 하는 것이 아니고, (저 바깥에는 실로 한 물건도 없다. 本來無一物) 자신의 '분별심의 창고, 의식의 창고', 기억의 창고를 뒤져서는, 그 가운데의 비슷하고 알맞은 기억의 한 토막을 찾아 투영해서, 그것을 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결국은 '마음'이 '마음'을 보고 있는 셈이니, ―눈으로는 논을 볼 수 없고, 칼로는 칼을 벨 수 없듯이, ― '마음'으로는 '마음'을 볼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옛 성현들은 이르기를, 「이 보고 들음이 보고 들음인 채로 보고 들음이 아니니, 빛깔과 소리를 드러내 보일 길이 없도다」라고 노래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일 같이 <보고 듣고 깨닫고 아는> 바의 눈앞에 드러나는 세상 모든 것들, '티끌 경계'가 자기 자신의 '망령된 마음'(妄心), 망상(妄想), 망념(妄念), 망식(妄識)에 의해서 나타난 허망한 '업의 그림자'(業影)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철저히 깨달아서, 다시는 미혹(迷惑)에 빠져서 실체가 없어 허망한 이 세상 모든 모든 것을 집착해서 스스로 괴로워하는 허망한 일이 있어서는 안될 것이다.


3. 마음이 마음이 아닌 줄 알아야한다.


이미 앞에서 무생법인(無生法忍)에 대해 자세히 밝힌 터이므로, 이 세상 모든 것들, 모든 현상들 그것이 '물질'이건 '마음'이건 예외 없이 모두가 실체가 없는 빈 이름뿐이요, 실체가 없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따라서 본래 움직임이 없는 '한 마음', 진심(眞心), 본래성품, 본성, 근본성품, 본래의 나, 진리, 진실, 실재, 도(道), 부처, 불성, 본래면목,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의 현전, 눈앞, 목전, 당처, 낙처(落處)라는 방편(方便)의 말이 가리키는 '이것'만이 유일하고 참된 것임이 분명한데도, 워낙 오랜 세월 동안 움직이는 이 '몸'과 분별하는 '마음'을 붙잡아서 '나'로 삼고 '나'라고 동일시(同一視)해서 살아온 터라, 인연 따라 생멸하는 허깨비 같은 것들을 실유(實有)로 보면서 쌓인 착각, 고정관념은 좀처럼 다할 줄 모른다. 왜냐하면 '존재'에 헷갈렸던 분별하는 마음이 '진실', '이것'에 눈을 떠서 분별하는 그 마음, 의식 속에서 일체의 착각, 망상, 분별, 망념이 소멸한다는 것은 곧바로 <분별하는 의식, 분별하는 마음이 몰락의 길>로 들어서는 첫 걸음이기 때문이다.


그러는 가운데서도, 모든 물질적인 존재는 인연을 따르면서 생겨나는 것이기 때문에 겉으로 볼 때에는 생겨나는 것처럼 보여도 실제로는 생겨나는 것이 아니어서, 마치 그림자나 메아리처럼 '제 성품'이 없는 것임을 이해할 수는 있겠는데, 그래서 이 세상 모든 것들과 인간의 '몸'을 환화공신(幻化空身, 허깨비 처럼 텅~빈 것)이라고 불러도 그런대로 별 이의가 없는데, 그런데 분별하는 이 '마음 의식'만은 아무리 살펴봐도 실제로 일어나는 것처럼 보여서 도무지 분별하는 마음 의식이 쉬어지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마음공부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분별하는 '마음'을 쉬는 일이야말로 가장 성취하기 어려운 난제 중의 난제였으며, 때문에 어찌 보면 '명상'이니 '참선'이니 하면서 하는 거의 모든 수행이 오직 분별하는 <마음을 쉬는 일>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 석마하연론(釋摩訶衍論)에 보면, 「'한 생각'이 처음 일어나되, 처음의 모양이 없다」는 대목이 있다. 이 말의 뜻을 해석하면 「'한 생각'이 일어나기는 일어나는데, 사실은 일어나는 '생각'이 없다」는 뜻이 된다. 이것이 바로 '붓다'가 설파한 무심(無心)의 참 뜻이며, 무심(無心)은 무분별심(無分別心)과 같은 뜻이며, 무분별심은 곧 무생법인(無生法忍)에 다름 아닌 것이다. '생멸 있음'과 '생멸 없음'이 두 법이 아님(不二法)을 밝힌 것이 곧 '무생법인'의 참 뜻이다.


요약컨대, 지금처럼 치성하게 일어나는 분별하는 마음, 분별하는 생각, 분별하는 의식, 분별하는 망상이 바로 그대로 일어남이 없는 '공적한 마음', 본래의 나,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의 현전, 텅~빈 바탕자리라는 방편(方便)의 말이 가리키는 '이것'임을 밝힌 것이다. 그러므로 '시끄러운 마음'을 억지로 안정시켜서 '고요한 마음'으로 바꾸는 것으로써 '수행'의 요체로 삼고, 「잡인(雜人) 출입 금지」 라는 팻말을 써 붙여 놓고는, 스스로는 '지혜'도 없이 오늘도 그저 멍청하니 참선하면서 앉아만 있다면 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지를 분명히 깨달아야 할 것이다. 이것은 마치 '물결'을 여의고 '물'을 얻으려는 것과 다름이 없으니, 얼마나 부질없는 헛되고 허망한 짓인가.


모름지기 죽기 전에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우주만물의 '참마음'(眞心),  일어남이 없는 '공적한 마음', 본래의 나,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의 현전, 텅~빈 바탕자리라는 방편(方便)의 말이 가리키는 '이것'은 무시(無始, 시작이 없이) 이래로 일찍이 단 한 순간도 움직였던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지금에 있어서 쉴 새 없이 일어났다 사라졌다 하는 이 '시끄러운 분별하는 마음'은 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그것은 '참마음', '이것'이 아니라, 다만 움직임이 없는 '참 마음' , '이것'위에 허망하게 투영(投映)되는 '업의 그림자'(業影, 경험 기억의 그림자)이다.


― 보고 듣고, 헤아리고, 짐작하고, 따져서 알고, 분명히 알고, 능히 알고 하는 등의 ― 이 분별하는 마음, 분별하는 생각, 분별하는 의식은 사실은 '참마음', '이것'이 아니라, 다만 저 바깥의 그림자 같은 허망한  모든 현상(것, 존재, 대상, 경계)들을 상영하는 기억의 창고, 경험정보의 창고에 불과한 것이다. 결국 알고 보면, 우리 인간들은 이 허망한 업의 그림자를 '나의 참마음'인 줄로 잘못 알고는, 평생을 두고 이 '망령된 마음'(妄心), 망념, 망식, 망상에 속아서 그것을 따르고 섬기고 하면서 노예로 살아왔던 셈이니, 이 얼마나 기막힌 일인가. 이 같은 사실을 분명히 깨닫는 일이야말로 모든 공부하는 사람이 필히 넘어야만 하는 험한 고개임을 알아야 한다.


'참마음'(眞心), 일어남이 없는 '공적한 마음', 본래의 나,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의 현전, 텅~빈 바탕자리라는 방편(方便)의 말이 가리키는 '이것'은 결코 말로 표현할 수 없고, 분별하는 생각 마음 의식으로는 헤아려 알 수 없고, 본래부터 이미 완전무결하게 스스로 청정해서, 성품 없고(無性), 모양 없고(無相), 작용도 없이 (無作) 본래 스스로 온전히 이루어져 있는 실재(實在)이니, 이제 새삼스럽게 '이것'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릴 것도 없고, '망심'(妄心), 망념, 망식, 망상은 허망해서 본래 생겨나는 일이 없으니 구태여 소멸하기를 기다릴 것도 없으니, 결국 안팎이 항상 <지금 여기 있는 이대로> 가지런하고 적멸(寂滅, 空寂, 텅~비어 고요함)해서, 「'생사'가 그대로 '열반'(생사열반상공화, 生死涅槃常共和, 생겨남과 죽음이 언제나 그대로 '참마음'(眞心), 일어남이 없는 '공적한 마음', 본래의 나,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의 현전, 텅~빈 바탕자리라는 방편(方便)의 말이 가리키는 '이것'이다. 이는  지극한 이치가 홀연히 현전하는 순간이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안으로 육근(六根)과 밖으로 육경(六境), 그리고 육경과 육근 사이에서 헛되이 굴려지는 육식(六識) 셋 다가 몽땅 실체가 없는 허망한 꿈, 허깨비, 신기루, 물거품, 그림자, 이슬, 번개, 메아리 같기 때문에, 육근(눈, 구, 코, 혀, 몸, 뜻), 육경(색깔/모양, 소리, 냄새, 맛, 촉감, 모든 현상), 육식(눈의 의식, 귀의 의식, 코위 의식, 피부의 의식, 종합적으로 아는 의식)에 결코 집착할 필요도 없고 여의려고 할 필요도 없다는 사실을 철저히 터득하는 것이야말로 '마음공부'의 시작이요, 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현정선원, 대우거사님-  무진장 행운의 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