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상스님의 날마다 해피엔딩

진여법계(眞如法界) 무타무자(無他無自)

장백산-1 2019. 8. 28. 11:53

진여법계(眞如法界) 무타무자(無他無自) - 신심명 25강 - - 법상스님


참되고 여여한 진여법계에는 어떤 분별 구별 구분이 없기에 때문에 남도 없고 나도 없다. 여기서는 참되고 여여한 진여법계라는 표현을 썼네요. 진여법계라는 말 말고 뭐 자성, 불성, 본래면목, 열반, 해탈, 공(空), 무아(無我), 일불승(一佛乘), 허공성(虛空性) 등 뭐라고 표현을 해도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진여법계(眞如法界) 무타무자(無他無自)라고 진여법계에는 분별인 남도 나도 없다.


아까 제가 꿈을 비유로 들었지요. 꿈속에 등장하는 수많은 남들이 있었잖아요. 꿈속에는 너도 있고 나도 있고 수많은 사람들이 등장했는데, 그 등장인물들이 내가 아닌 남입니까? 꿈속에 등장하는 모든 것들은 내 의식 속에서 일어난 환상이잖아요. 내 의식이 꿈이라는 환상을 만들어내서 꿈속에 너도 만들고 나도 만들고 구별해서 둘을 만든 거잖아요. 둘로 쪼개서 만들어낸 환상일 뿐입니다.


꿈을 깨고나면 ‘아! 둘이 아니었구나.’ 적도 나였고 아군도 나였고, 너도 나였고, 자타가 불이(不二)입니다. 자타불이(自他不二) 너와 내가 둘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라는 것이지요. 중생의 세계라는 이 꿈을 깨기 시작하면, 즉 둘로 구분된다는 네가 있고 내가 있다,라는 이 어리석은 망상심에서 깨어나기 시작하면, 무명이라는 꿈에서 깨어나게 되면 자타가 둘이 아니다. 남도 없고 나도 없다. 타(他)도 없고 자(自)도 없다. 타인도 없고 자기도 없다. 이 삼라만상만물 이 우주에는 모든 존재가 전부 다 내가 꾼 하나의 꿈이었구나 라는 사실을 알게됩니다.


저 사람이 꾸는 하나의 꿈이든, 내가 꾸는 하나의 꿈이든, 부처가 꾸는 하나의 꿈이든, 그 모든 꿈이 다 둘이 아니니까 다 하나의 꿈일 뿐이란 말이지요. 하나의 꿈, 하나의 부처, 일불승(一佛乘)뿐입니다. 여러분의 부처 따로 있고, 저의 부처가 따로 있고, 저 미국 사람의 부처가 따로 있고, 강아지 부처 따로 있고,  고양이 부처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이 우주에는 하나의 부처밖에 없다는 말이지요. 오직 한 부처밖에 없다.


하나의 부처가 우리 각자의 연기를 하면서 각자인 것 같은 이런 연기를 하고 있는 것일 뿐입니다. 이 소리(죽비를 치면서)가 내 귀에서 들린다,라고 느끼지만, 이것이(죽비 소리) 지금 여러분 귀가 듣고 있다고 느끼잖아요. 이 소리(죽비 소리)가 여러분들 개별적으로 각자의 귀가 듣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귀가 있지만 귀는 이 소리를 못 들을 수도 있거든요.


내가 딴 생각하느라고 막 집중하고 있을 때 누가 내 이름을 불러도 귀가 못 들어요. 귀가 있는 데도 못 들어요. 귀가 듣는 게 아니기 때문에 그래요. 내가 깊은 잠에 빠져 자고 있을 때는 누가 나를 불러도 귀가 못 듣습니다. 귀가 듣는 거라면 잠에 빠져 골아떨어져 자고 있을 때도 나를 부르는 소리를 귀가 들어야지요. 


눈이 보는 거면은 다 볼 수 있어야 되는데 내가 관심 있는 것만 보입니다. 관심 없는 거는 1년동안 같은 길을 왔다 갔다 했어도 안 보여요. 내 의식이 집중하는 것만 보입니다.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보는 게 아니라 내 관심사만 취사간택해서 보기 때문에 그래요. 수많은 사람이 있지만 그 사람들 가운데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나 내 가족이나 이런 몇 사람만 딱 두드러지게 드러나서 보이는 것입니다. 세상 모두를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는 것이지요.


눈이 있어서 눈이 보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 계신 모든 분들이 내 눈이 있어서 내 눈이 보는 거지 라고 생각하고 내 귀가 있으니까 내 귀가 듣는 거지 라고 생각을 하지만, 사실은 여러분 눈이 보거나 여러분 귀가 듣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부처(一佛), 일불승(一佛乘)이 보고 듣는 겁니다. 하나의 부처, 하나의 탈것(一佛乘)을 허공성(虛空性)으로 표현하기도 해요.


허공(虛空)은 내 허공이 따로 없고 네 허공이 따로 없잖아요. 허공은 하나뿐인 허공이잖아요. 그 하나의 허공이 배경이 되어서 허공이라는 그 배경 위에 우리가 발 딛고 서 있는 겁니다. 그것처럼 하나뿐인 부처, 일불승(一佛乘), 진여법계가 지금 이 소리(죽비 소리)를 듣고 있는 겁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각자의 귀가 이 소리를 듣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하나의 부처가 이 소리(죽비 소리)를 듣는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소리를 하나의 부처가 듣자마자 여러분은 이 소리를 해석해서 내가 아는 소리(죽비 소리)로 바꿔버립니다. 내 생각으로 바꿔버려요. 그래서 내 생각으로 이 소리를 해석해버립니다. 아, 죽비소리구나. 아, 목탁소리구나. 아, 이건 철수가 말하는 소리고. 이건 우리 남편이 말하는 소리고 이런 식으로 내가 어떤 소리를 듣자마자 곧장 내 식으로 해석을 해버려서 곧장 첫 번째 자리에서 어떤 소리를 듣는 하나뿐인 부처를 확인하지 못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두 번째 화살을 맞는 사람이다 이런 표현을 써요. 두 번째 자리에 떨어진 사람이다 이런 표현도 쓰구요. 제일의제(第一義諦), 하나뿐인 부처, 일불승(一佛乘), 진여법계, 자성, 불성, 본래면목, 열반, 해탈, 공(空), 무아(無我), 허공성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세속제만 이해한다. 세속제가 뭐냐면 말, 개념, 언어로 된 모든 것을 세속제 라 그래요. 언어나 개념으로 곧장 그 소리를 해석하기 때문에 하나뿐인 부처를 확인하지 못한단 말이지요.


‘야! 임마’라는 소리나 ‘사랑해’라는 소리나 ‘너 싫어’라는 소리나 모든 소리는 소리의 파장으로는 똑같은 소리에요. 소리 그 자체로만 받아들이면 이거는 분별할 게 없는 구별할 게 없는 그냥 하나의 소리일 뿐입니다. ‘싫어’ 하는 소리 나 ‘좋아’ 하는 소리가 그냥 동일한 소리에요. 그냥 소리 파장이에요.


이것이 사실인데도 사람들은 어릴 때부터 배워 익힌 습관이 있기 때문에 ‘싫어’라는 소리는 인상 찡그리도록 해석하는 걸 자동으로 배워왔고, ‘좋아’ 하는 소리는 기분 좋은 말로써 자동으로 해석하는 게 습관적으로 이렇게 머릿속에 딱 각인이 돼있단 말이지요. 그러니까 ‘좋아’하는 말과 ‘싫어’하는 말을 좋거나 싫은 것으로 해석하고 이해해서 받아들이는 거지요.


그런데 좋아한다는 소리든 싫어한다는 소리든 그 처음 첫 자음인 지읒(ㅈ) 시옷(ㅅ)이 나오자마자 그걸 이해하기 전에 이미 벌써 지읒(ㅈ) 시옷(ㅅ) 소리를 알아듣는 놈이 있단 말이지요 좋다 싫다 해석하기 이전에. 그러니까 사람들의 오래된 습관, 해석하는 습관, 그런 습관만 내려놓으면, 본성의 자리, 하나뿐인 부처의 자리, 일승의 자리에 있으면, 내가 부처가 되면, 분별하지 않고 괴로움이 없다,라고 하잖아요.


인간으로 왔던 석가모니부처님은 괴로움이 없잖아요. 남들이 욕을 해도 석가모니부처님은 괴로움이 없다 하는 게 왜 괴로움이 없다 그러겠어요? 누가 사람들한테 욕을 하면 사람들은 습관적으로 그 욕 따라가서 내게 욕을 한 저놈이 나쁜 놈이고, 저놈이 나를 욕했고,라고 막 해석해서 저놈을 죽일 놈이라고 생각하는데, 석모니부처님은 욕을 그냥 그 하나의 소리 파동이라고 이해하는 거지요.


물론 좋다 나쁘다,라는 개념을 이해는 다 하는데, 그래서 개념에 따라서 해석하고 분별하고 헤아리고 응해주는 건 다 하는데, 그렇게 하면서도 하는 것이 없는 거지요.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其心)’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는 겁니다. 집착하는 바 없이 마음을 내는 겁니다.


짜장 먹을래? 짬뽕 먹을래? 하면 나는 짜장 먹을래, 나는 짬뽕 먹을래 이렇게 얘기는 하지만, 짜장 먹어도 큰 상관없고. 뭐 짬뽕을 먹어도 큰 상관없고, 안 먹어도 상관없고, 분별은 안 하지만 그러나 짜장 짬뽕을 분별을 해야 할 때는 분별을 한다. 이것이 분별을 하면서도 분별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녹취 정리 by 하이얀마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