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은 객관적인 물질세계가 아니다 (신심명2강 중에서)|법상스님 법문녹취 by 하이얀마음
이 세상은 객관적인 물질세계가 아닙니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는 말처럼 이 물질적인 세상, 객관적인 세상이라는 것이 있는 게 아닙니다. 오직 주관적인 세상뿐 다른 세상은 없어요. 그래서 이 세상에 백 명의 사람이 있으면 백 가지 의 세상이 있습니다. 그걸 다중우주(多重宇宙)라고 부릅니다. 천 명, 만 명이 있으면 천 개 만 개의 우주가 있어요. 저라는 사람은 한 명이지만 여기 계시는 모든 분들의 마음의 개수만큼의 우주가 있는 겁니다. 저라는 한 명의 존재는 여러 가지로 역할이 나뉘거든요. 어떤 사람에게는 훌륭한 스님으로 보일 수도 있고, 어떤 사람에겐 그렇지 않게 보일 수도 있고, 저마다 각자가 보는 세계가 있는 것일뿐입니다.
심지어 석가모니부처님에 대해서도 어떤 사람은 사탄이다 마귀다 하고 욕을 할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훌륭하다,라고 볼 수도 있는 것이지요. 이것처럼 저마다 자기가 만들어놓은 세계, 자기가 만들어놓은 분별심의 틀, 자기의 분별심이라는 틀을 가지고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 모든 가치들을 자기 머릿속에서 재단합니다. 이건 옳고 이건 그르고, 이건 정의롭고 이건 정의롭지 못하고, 이건 좋은 거고 저건 나쁜 거야. 분별해서 이렇게 만들어놓고 내가 둘 중에 하나 선택한 것은 ‘옳은 것’ ‘좋은 것’ ‘맞는 것’으로 쥐고 머물러 집착한단 말이지요. 그걸 더 많이 늘리기 위해서, 내가 좋아하는 걸 더 많이 늘이기 위해서 집착을 하는 것이지요.
내 것을 많이 늘리는 그게 성공하면 내 인생은 성공적이라고 여깁니다. 그리고 거기 실패하면 나는 아주 ‘비참하다’ ‘괴롭다’ 이렇게 여기는 것이지요. 그래서 성공의 가치기준도 완전히 사람마다 다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남들이 봤을 땐 전혀 성공이 아니지만, 그 사람 마음속에서는 완전한 풍요로움 속의 성공을 누리며 살아갈 수도 있구요.
그렇기 때문에 남들이 봤을 땐 완전히 성공한 것 같아보여도 마음속이 아주 공허한 사람도 많습니다. 물론 그렇지 않은 사람도 많습니다. 제가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상담을 하다 보면은, 사회의 아주 고위층이라고 불리는 분들의 이야기를들어보면 그분들 중에도 마음 상태가 똑같이 극과 극으로 딱 나뉩니다. 마음의 상태가, 저명한 자리나 지위에 있으면서도 마음이 아주 힘들고 괴롭고 너무나도 작은 거에 많이 휘둘리고, 너무나도 괴로워하는 분들도 계시고. 또 그런가 하면 야, 참! 저러신 분이니까 저 자리까지 가셨겠구나 싶을 정도로 참 지혜롭게 훌륭하신 분들도 계시구요.
또 마찬가지로 모든 경제적인 아니면 모든 학벌에서 그 어떤 기준을 갖다 대도 최고위에 있는 분이나 가장 낮은 곳에 있는 분이나 의식수준들은 다양한 단계로 다 있습니다. 왜냐하면 겉으로 드러난 세상, 이 물질세계에서 보았을 때에 돈이 많고 적음, 성공과 실패,라는 분별은 우리는 그것들을 실체화시켜서 그건 성공이고 이건 실패야,라고 머리가 실체화시켜서 만들어내는 관념이지, 그게 진짜 성공 진짜 실패일 수가 없거든요. 그냥 우리가 만들어놓은 가치기준 속에서 그냥 그렇게 ‘성공이다’ ‘실패다’라고 이야기하는 것뿐이지요. 인류 역사 속에서 부처님도 그렇고 깨달은 많은 위인들이나 이런 사람들은 오히려 지위나 어떤 돈이나 이런 자리를 전혀 연연하지 않고 사는 분들도 계시겠지요.
그런가 하면 그런 분들이라고 해서 그런 자리, 그런 위치를 또 무조건 다 싫다,라고 해서 버리기만 한 것도 아닐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겉으로 드러난 모습을 가지고서 이것이 옳으나 그르냐를 얘기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자내증의 경계’라는 표현을 써요. 자기 내면에서 증득된 경계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인도에서는 아주 하층민 가운데도 깨달음을 얻은 성자들이 있을 수 있고, 또 아주 상류층 가운데도 깨달음을 얻은 사람들이 분명히 있을 수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제 우리는 그러한 내면의 진정한 어떤 법의 실상 이런 것들을 보는 것이 아니라, 겉으로 드러난 모양만을 보고 겉으로 드러난 분별된 모양만을 보고서 내 머릿속에 있는 생각의 틀을 가지고 그 겉으로 드러난 세상을 분별합니다. 비교합니다. 비교해서 누가 더 옳은지 누가 더 그른지, 누가 더 높은지 낮은지, 어느 것이 더 위대하고 위대하지 않은지 뭐 그런 것들을 분별하는 놀이, 개념놀이에 빠져 있습니다. 이거는 완전한 놀이입니다.
바로 요 옆 건물에 계시는 분들이 보았을 때 우리들을 상당히 저급한 수준이라고 느낄 수도 있을 수 있어요. 또 우리 중에도 또 저분들을 그렇게 생각하는 분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럼 그게 진실일까요? 저거든 이거든 그렇게 생각하는 것 자체가 진실일까요? 그건 진실이 아닙니다. 절에 와서 법문을 매일 들어도 정신적으로 아주 힘들고 괴롭고, 괴롭게 삶을 사는 분들도 계시구요. 교회에서 열심히 찬양을 하시면서 너무나도 행복한 삶을 사시는 분도 계십니다. 사실은 그분이 더 불교를 신앙하는 분이라고도 할 수 있어요. 왜냐하면 진짜 불교는 부처님을 믿느냐 안 믿느냐의 크기가 아닙니다.
이 신심(信沈)의 크기가 부처님을 더 믿느냐 안 믿느냐의 크기가 아니고. 불교는 사성제(四聖諦)라고 말씀을 드렸잖아요.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에서 보면 불교는 전부 다 사성제로 포섭된다 라고 해서 모든 가르침은 사성제 안에 들어간다,라고 했거든요. 그 말은 괴로움과 괴로움을 소멸하는 문제가 오로지 불교에서 가장 중요한 관점입니다.
괴로움이 많이 있는 사람은 중생이고 괴로움을 소멸한 사람은 부처거든요. 괴로움이 소멸됐느냐? 소멸되지 않았느냐? 그것이 내가 불자인지 아닌지 이것을 알려주는 것이지. 어떤 내 바깥에 부처라는 어떤 대상을 정해놓고 부처님은 어떤 다른 신들보다는 더 위대하고 하는 건, 그건 분별심일 뿐이지요. 부처님이 다른 신보다 더 위대하다,라고 생각하면 그 사람은 어리석은 중생입니다. 그같은 생각은 분별심이니까. 부처와 신을 비교 분별하는 거니까. 부처님은 그렇게 비교가 되는 대상이 아니지요. 오로지 하나거든요. 오로지 하나, 하나임 뿐입니다.
여기 잠깐 신심명 내용을 보면요. ‘지극한 도’라고 했는데 ‘지금 여기 있는 이대로가 그대로 도(道)’다.라고 쓰여있습니다. 지금 여기 그대로. 큰 스님들은 이런 말씀을 많이 하시지요. “도가 무엇입니까?” 하고 제자가 질문하면 큰 스님들은 “이게(죽비를 치며) 부처다.”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여러분 이 소리(죽비소리)를 듣고 계시잖아요. 만약에 여러분이 지금 완전히 딴 생각을 하고 딴 데 완전히, 몸은 여기 있지만 의식이 완전 딴 데 가 있었다면 제가 내는 이 소리를 들을 수 없을 겁니다. 이 소리(죽비 소리)도 듣지 못할 수도 있어요. 의식이 딴 데 완전히 집중해 있기에 듣지 못하는 겁니다. 아니면 너무 깊이 졸고 계신다든지, 아니면 지금 몸은 있어도 의식이 죽었다 이러며은 이 소리를 들을 수 없지요. 즉 몸이 여기 있다고 해서 무조건 이 소리를 다 듣는 게 아닙니다. 귀가 이 소리를 듣는다고 여기지만 귀가 있다고 무조건 이 소리를 듣는 게 아니에요. 소리를귀가 듣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이걸 듣는다,라는 이걸(죽비 소리) 듣는, 불교에서는 ‘듣는 놈’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하는데. 이걸 듣고 있다면 누가 듣고 있느냐? 이건 귀가 듣거나 내 몸이 듣는 것이 아니다. 부처가 듣는 것이다. 그럼 부처는 뭐냐? 법신을 부처라고 하잖아요 법신불(法身佛.
법신불(法身佛)은 뭐냐 하면 컵 뚜껑, 시계, 공기, 하늘, 땅, 구름, 자연, 나, 여러분, 스피커 등등 이 세상 모든 것들 두두물물 전부가 다 법신(法身)이라고 하지요. 그래서 ‘일승(一乘)’이라 그래서 오로지 하나의 부처밖에 없다.라는 표현을 법화경에서 씁니다. 부처의 자리, 법신, 일승, 일불(一佛)은 두 개, 세 개, 네 개로 쪼개질 수가 없다는 것이지요.
사람들이 법문을 듣거나 어떤 소리를 들을 때, 이게 중생일 때는 이 몸을 ‘나’라고 여기는 자아동일시(自我同一視)에 깊이 빠져있을 때 아집이 깊어져 있고 아상이 깊어져 있을 때는 누구나 이 귀가 소리를 듣는 것처럼 느낀다는 것이지요. 저분이 말하는 소리를 내가 이렇게 듣고 있구나, 이렇게 느낀다는 거지요.
그런데 점점 깨달음이 깊어질수록 이게 저 사람 입에서 나오는 소리가 아닌 것 같다. 그냥 온 우주에서 들리는 것 같고, 그냥 모든 곳에서 들리는 것 같다. 이런 표현을 쓰는 분들도 계시거든요. 그 말은 이게 나와 우주가 이제 하나가 돼버리는 겁니다. 우주가 낱낱이 둘로 셋으로 넷으로 쪼개지는 어떤 개념으로 분별되는 세계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온 세상 온 우주가 나와 하나가 된다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하나뿐인 거기에는 너와 나의 구별이 있을 수가 없는 것이지요. 그래서 지금 여기 있는 이대로가, 지금 이대로 우리가 보고 있다면 그게 내가 바로 부처다,라는 걸 증명하는 겁니다. 어떤 스님은 그렇게 표현했어요. 누가 “부처가 무엇입니까?”라고 질문을 했는데 “네가 부처가 무엇입니까?라고 말한 바로 그것이 부처다.” 네가 말을 할 수 있고 눈으로 볼 수 있고 귀로 들을 수 있고 눈귀코혀몸뜻이 색성향미촉법을 접촉할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부처가 있다,라는 사실을 100% 증명해주는 것이다. 부처가 아니라면 무엇이 그것을 보고 듣고 맛보고 견문각지 할 수 있겠느냐?
그러나 사람들은 이 소리를 듣자마자 곧장 그 소리를 분별해서 해석하는 데 문제가 있는 것이지요. 우리는 곧장 부처를 중생으로 해석해서 듣는 데 아주 능수능란한 도사인 것이지요. 이걸 보자마자 “무엇입니까?”라고 물으면 큰 스님들은 “도가 무엇입니까?” 이러면 이렇게 보여주거든요.(죽비를 들어보인다) 그런데 중생들은 큰 스님들이 이걸 딱 들자마자 어, 죽비? 죽비가 도인가? 이렇게 생각을 하는 거예요. 죽비라고 해석하는 순간 벌써 분별한 것이거든요. 죽비라고 해석되기 이전, 이걸 보자마자 죽비라고 생각이, 개념이 딱 입혀지잖아요. 개념이 입혀지기 이전에 이렇게 흔드는 이게 있잖아요. 죽비라는 개념을 입히지 않아도 분명히 '이것'이 있잖아요. 그래서 '이것'을 개념으로는 해석되지 않은 '있는 그대로의 있음’이다,라는 표현을 쓰기도 합니다. 그래서 눈으로 보자마자 ‘시계’ 이렇게 해석하기 전에 눈으로 보자마자 보이는, 보고 있는 게 먼저잖아요. 해석되는 건 그 다음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것'을 첫 번째 자리라고 한다.
사람들은 분별하고 해석하기 전 첫 번째 자리에서 언제나 보고 듣고 맛보고 삶을 살아가면서 매 순간 부처와 함께 있고, 부처를 쓰고 있고, 부처로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부처 아니면 살아갈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부처님 경전에 우리가 지금 이대로 부처다,라고 하는 말은 그냥 듣기 좋으라고 하는 소리가 아니고 100% 완전한 진실을 얘기하고 있는 겁니다.
완벽한 진실. 완전한 진실. 지금 여기 있는 이대로 아무 문제가 없거든요. 지금 여기 있는 이대로 전혀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몸에 병이 있다 하더라도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분별해서 비교를 해서 해석을 해서 그것이 내 머릿속에서 문제화되는 것이지 사실은 전혀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http://cafe.daum.net/truenature/S88I/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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