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행본처(行行本處) 지지발처(至至發處) - - 종범 스님
“행행본처(行行本處) 지지발처(至至發處) , 가는 곳마다가 본래 그 자리요, 이르는 곳마다가 본래 출발한 그 자리다”
"깨닫고 보면, 단 한 걸음도 옮긴 적이 없습니다. 가는 데마다가 본래 그 자리요, 이르는 데마다 출발한 그 자리 입니다.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에 있는 그대로의 세상이 화엄광불(華嚴光佛) 비로자나(Vairocana) 부처님 광명변조(光明遍照)의 세계라는 사실을 깨달으면 행행본처(行行本處) 지지발처(至至發處)를 알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화엄(華嚴)의 골수(骨髓)입니다.”
화엄경 약찬게(略纂偈)는 <화엄경>의 구성이 드러나 있다. 약찬의 ‘찬(纂)’은 ‘엮을 찬’이다. 품수와 등장 인물과 품수의 이름 등의 중요한 정보와 항목을 묶어 엮어 놓은 게송이다. 화엄경 약찬게(略纂偈)에는 사상(思想)이 없다. 반면 의상스님의 법성게(法性偈)를 보면, <화엄경>의 구성에 대한 말은 일체 없고 오로지 화엄경의 내용과 화엄사상(華嚴思想)이 담겨있다. <화엄경>에서 말하는 우주(宇宙)와 깨달음(覺)을 도표로 구성한 것이 법성게(法性偈)이다. 그래서 법성게(法性偈)를 ‘반시(盤詩)’라고도 말한다. 도표와 그림이 함께 해서 법성(法性, 법의 성품)을 노래한 것이다.
법성게(法性偈)는 순전히 화엄경의 내용만 언급한 노래이다. 약찬게(略纂偈)는 화엄경의 구성만을 언급한 노래다. 그래서 법성게(法性偈)와 약찬게(略纂偈)를 외우면 화엄경의 구성과 내용이 그대로 한 눈에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7언 30송 210자’로 구성된 법성게(法性偈)의 내용을 살펴보자.
법성원융무이상 제법부동본래적 (法性圓融無二相 諸法不動本來寂)
무명무상절일체 증지소지비여경 (無名無相絶一切 證智所知非餘境)
모든 것과 모든 것의 성품은 원융해서 둘이 아니고 모든 것은 부동해 적멸의 모습이다. 세상 모든 것의 성품은 이름도 없고 모양도 모두 없으니 그같은 사실을 알 수 있는 방법은 스스로 터득한 지혜로써만 알 수 있다.
그럼, 법성(法性, 이 세상 모든 것과 이 세상 모든 것의 근본성품(根本性稟)이란 무엇인가? 온 우주법계(宇宙法界, 이 모든 것들의 세상)의 본성(근본성품, 根本性稟)이 법성(法性)이다. 우주법계(이 세상 모든 것들)과 우주주법계의 근본성품은 원융(圓融)해서 둘이 없다. 이 세상 모든 것과 이 세상 모든 것의 근본성품은 원융(圓融)해서 시작(始作)이 그대로 끝(終)이고 끝이 그대로 시작(始昨)인 것이다. 쉽게 말해서 이 세상 모든 것은 무시무종(無始無終)이다. 이 세상 모든 것은 불생불멸(不生不滅)이다. 이 세상 모든 것은 불거불래(不去不來)이다. 보이지 않는 것이 그대로 보이는 것이고, 보이는 것이 그대로 보이지 않는 것이다. 태어남이 그대로 죽음이며 죽음이 그대로 태어남이다. 가는 것이 그대로 오는 것이고 오는 것이 그대로 가는 것이다. 이것이 원융(圓融)이다. 그래서 진리(眞理), 깨달음(覺), 도(道), 법(法), 불(佛), 마음(心)은 다르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생각(生覺)엔 두 가지 생각이 있다. 그래서 법성(法性, 이 세상 모든 것과 이 세상 모든 것의 성품)이 들어맞으면 되는데, 법성과 사람의 생각이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는 것이다. 모든 인간의 모든 고통(괴로움)은 세상과 나를 둘로 나눠서 보는 데서 비롯된다. ‘어제는 그랬었는데 오늘은 왜 다를까?’ 사람들은 이 세상을 행복과 불행, 참과 거짓, 있고 없음, 좋아함과 싫어함, 탄생과 죽음, 나와 너, 주인과 손님, 착함과 악함, 부유함과 가난함, 지위가 높고 낮음, 여자와 남자, 이별과 만남, 시작과 끝, 건강과 질병, 아름답고 추함, 향기와 악취, 좋아함 싫어함, 순응과 반란, 몸과 마음, 어리석음과 지혜로움, 욕심과 나눔, 믿음과 불신 등으로 분별(分別)해서 나누어 보기 때문에 괴로운 것이다.
그런데 깨달은 눈으로 이 세상을 보면 이 세상은 둘이 아니다. 이 세상은 원융(圓融)하다. 이 세상을 원융성(圓融性)으로 보면 이 세상은 깨달음(지혜, 도, 부처, 진리, 마음)이고, 이원성(二元性)으로 보면 분별심(분별만을 하는 생각)이다. 分別心(분별만을 하는 생각)은 사람들로 하여금 이 세상을 둘로 분별(分別)해서 보게한다. 인간이 겪는 모든 고통(苦痛)과 모든 대립(對立)은 둘로 분별(分別)한 데서 오는 것이다. 둘로 나눠보면 서로 대립할 수밖에 없다. 원융(圓融)한 입장에서 보면 좋은 것이 나쁜 것이고, 나쁜 것이 좋은 것이다. 그래서 대상이 무엇이든 좋은 것을 집착할 것도 못되고, 나쁜 것을 싫어할 것도 못 된다. 이것이 법성원융무이상(法性圓融 無二相)의 뜻이다.
그래서 이 세상 모든 것들, 현상들, 제법(諸法)은 변하고 달라지는 것(無常)이 아니라 본래 고요하다. 이 세상 모든 것들이 그런데 제법과 제법의 성품을 어떻게 분리헤서 이름을 붙이고 다른 모양을 그릴 수가 있는가? 인간에게는 지혜와 생각이 있는데, 생각(生覺)은 항상 이 세상을 둘로 나누어 보게 하는 분별(分別)해서 보게 하는 속성(屬性)을 갖고 있다. 생각은 곧 나뉘어진 둘이다. 지혜로 보면 본래 고요함과 원융을 볼 수 있다. 이렇게 보는 것은 지혜(智慧)로 느껴지는 세상이다. 이름도 모양도 없으나 증득한 지혜(智慧)로만 말 할 수 있다.
문제는 ‘지혜(智慧)'와 '생각(生覺)의 차이’이다. 지혜(智慧)로 돌아가면 모든 괴로운 문제가 해결되고, '생각에 매이면' 모든 괴로운 문제가 발생한다.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지식(知識)과 능력(能力)이 아니다. 요즘 세상은 지식적 카리스마를 요구한다. 그런데 지식과 재능만으로는 행복을 장담할 수 없다.
그럼 어떤 사람이 행복한가? 자기 감정(感情)을 조절할 수 있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다. 행복(幸福)과 불행(不幸)은 ‘자기 감정을 스스로 다스리고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이 얼마나 되는가’에 달려있다. 자기의 감정을 다스리는 능력은 매우 중요하다. 작은 감정(感情)을 다스리지 못해 모든 일을 한순간에 망쳐버리는 경우가 허다하지 않은가.
그럼, 감정(感情)의 성격은 어떤 것인가?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 감정이다. 그런데 의상 스님의 유명한 ‘10전(錢)’ 비유로 자기를 사랑하는 감정을 알 수 있다. 동전 10개(10전)의 비유가 있다. 감정은 동전 10개를 보는 관점이 있다. 동전 1개를 중시하느냐 동전 10개를 중시하느냐에 따라 감정이 다르다. 돈전 10개 전체로 보면 10전도 1전에 의해 생긴다. 문제는 1 또는 10 어디에다 중심을 두느냐이다. 이것이 ‘즉(卽)과 중(中)’이다. 즉(卽)은 일즉십(一卽十), ‘하나가 바로 열이다’는 관점이고, 중(中)은 십중일(十中一), 즉 ‘열개 가운데 하나가 있다’는 관점이다. 똑같은 하나인데, 이 하나를 어떻게 보느냐는 관점에 따라 다르다는 것이다. 하나가 그대로 열이라는 것과 하나는 전체 중에 하나일 뿐이란 관점이다.
그런데 감정(感情)은 자기를 사랑하는 노력이기에, 자기, 즉 '나' 하나를 우주(宇宙), 세상 전체로 보는 것이다. 내가 없으면 사람도 없고 이 세상도 없다는 생각(분별심)이다. 반면 다른 사람을 볼 때는 그 사람들을 전체 중에 하나로 본다. 이것이 서로 부딪치는 것이다. 자기가 자기를 보는 것과 다른 이가 나를 보는 데는 이렇게 엄청난 차이가 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보고 나를 자기와 같이 사랑해달라는 요구를 하게 된다. 그래서 사람들이 다른 사람에게 고통을 주는 주된 이유(理由)는 내가 다른 사람들로부터 사랑받고자 하는 욕심 때문이다.
부부지간의 싸움도 사람지간의 싸움도 사랑해달라는 요구다. 상대방을 괴롭히는 것도 자신을 사랑해달라는 욕구다, 그런데 사랑해달라는 방법이 틀렸다. 고함치는 것도 나를 사랑해달라는 욕구이다. 폭력 행사도 마찬가지로 나를 사랑해달라는 욕구다. 왜 인간은 상대에게 사랑을 요구하는가? 자기가 보면, 자기가 세상 모든 것이다. 일즉십(一卽十)이다. 이 세상에 자기 밖에 없는데 다른 사람은 왜 나를 나로 봐주지 않는가. 즉 십중일(十中一)의 관점이 부딪치는 것이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자기한테 관심을 가져달라고, 사랑해달라고 그런 욕구를 갖고 있다. 이것이 감정(感情)이다. 감정(感情)은 이 세상을 둘로 분별(分別)해서 보는데서 온다. 나와 나 아닌 것, 즉 본래 고요하다는 세상 모든 것과 세상 모든 것의 성품은 원래 원융(圓融)하다고 보는 지혜(智慧)가 없는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世上)은 둘이 아닌 모습, 즉 무이상(無二相)인데 나와 나 아닌 것, 삶과 죽음, 지혜와 어리석음 등 둘로 분별해서 나눠서 보는 데서 감정이 비롯되는 것이다.
나와 나 아닌 것으로 보여지니, 나 아닌 것으로부터 철저히 나를 보호하려고 애쓰고,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나에게 관심을 갖기 하기 위해서 욕심을 부리고 화를 내고 어리석은 마음을 내어서 스스로 고통을 받는다. ‘왜 화내는지도 모른다’는 말도 ‘모두 사람들이 나를 왜 나처럼 사랑해주지 않느냐’는 것이다. 아주 간단한 이치다. 그래서 마음(心)의 근본(根本)을 알아야 한다. 인간은 모두 자기사랑을 위해 표현한다는 마음을 이해하고 서로가 서로를 감싸주면, 그대로 서로 감싸주는 마음이 서로에게 녹아든다.
자기 주장만 강조하고, 자기 의견, 자기 표현만 늘어 놓는 것은 옳지 않다. 문제는 이런 주장은 사랑받을 짓을 모른다는 것이다. 중생이 겪는 윤회세계(輪廻世界)가 이와 같다.
보령 성주사지 만해 무념 국사 화상 비문에 “이 몸에는 주인도 스승도 있다”는 말이 있다. 그럼 몸에 있다는 스승은 무엇인가?. 마음이다. 그럼 마음에 있다는 스승<心師>은 무엇인가? 몸이다. <心爲身主 身作心師>라 몸이 주인인 마음을 따르고, 몸이 마음을 스스으로 삼아 공경하면 몸도 마음도 부지런해진다는 이치다. 이 말은 마음만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다. 화엄과 연관된 수행가풍을 말하는 것이다. '마음주인'을 중시하고, '몸의 스승'을 경시하는 풍조가 있는데, 한암 스님의 가풍은 그렇지 않다. 한암은 몸(身)을 마음(心0의 스승으로 봤다 (심작심身作心師).
그래서 6-25 전쟁 통에서도 좌정하신 한암(漢岩) 스님의 수행이었다. 마음은 몸의 주인이고 몸은 마음의 스승이란 말(心作心師 身作心師)라는 말씀을 깨치면 삶(生)과 죽음(絲)의 경계도 간단히 해결된다고 본다. 법성게의 구절에서 이같은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다라니무진보 장엄법계실보전(以陀羅尼無盡寶 莊嚴法界實寶殿)
궁좌실제중도상 구래부동명위불(窮坐實際中道床 舊來不動名爲佛)
결코 다함없는 지혜의 무진보(無盡寶)로 온 세상을 아름답게 장엄(莊嚴)한다. 궁극적으로
실제인 진실한 중도상에 다다르면 그것이 옛부터 말한 동요가 없는 부처라는 말이다.
다라니(陀羅尼)는 없는 것이 없이 다 있다는 뜻이다. 즉 지혜(智慧)를 말한다. 총지(總智)가 다라니(Dharani)다. 보배로 말하면, 쓰고 또 써도 줄지 않는 지혜보배(智慧寶杯)라는 것이다. 지혜(智慧)를 사용해서 여러 가지 좋은 일을 일으키면 무진보(無盡寶)다. 얼마든지 사랑을 만들고 줄 수 있는데, 사람들이 그것을 몰라서 자기도 남도 괴롭히는 것이다. 지혜로써 알고 보면, 항상 원융무애한 중도상(中道床), 중도의 자리에 앉아 있다. 애시 당초 본래부터 원융무애(圓融無礙)한 자리에 한 발짝도 물러나 있지 않다. 다만 꿈을 꾸어 온갖 고통을 받는 것이다. 꿈꾸는 사람이 고통에서 벗어나려면, 꿈에서 깨어나면 된다. 그것이 깨달음, 부처, 도, 마음, 진리이다. 깨닫고 나서 보면, 한 걸음도 옮긴 적이 없다 행행본처(行行本處) 지짖발처(至至發處)이다. 이 세상 모든 것이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에 있는 그대로 부처(佛, 깨달음)이다. 이것이 화엄의 핵심 사상이다.
이 사상을 의상 스님이 법성게를 설명한 '법계도기총수록法界圖記叢髓錄' 권상1에서 ‘ 행행본처(行行本處) 지지발처(至至發處)’라고 표현했다. ‘가는 데마다가 본래 그 자리요, 이르는 데마다가 출발한 그 자리다’ 라는 뜻이다. 지혜로운 사람은 항상 본래 그 자리에 있다. 그런데 보통의 사람들은 생각(분별심)에 사로잡혀 죽고(死) 사는(生) 걱정으로 스스로 자처해서 고통을 받는다. 생겨나는 것이나 죽는 것이나, 가나 오나 본래의 자리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스스로 둘로 나눠서 보는 생각(분별) 때문에 언제나 영원히 생과 사, 가고 옴이 본래의 자리에 있는 사실을 모르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 집에 있다 해도 꿈을 꾸면, 자기 집이 자기 집인 줄 모른다. 꿈을 깨면 자기 집이 본래 자기 집임을 안다. 교학이든 철학이든 수행이든 화엄경(華嚴經)은 인류에게 엄청난 가르침이다.
화엄경(華嚴經) 초회 6품에는 세주묘엄품(世主妙嚴品) 여래현상품(如來現相品) 보현삼매품(普賢三昧品) 세계성취품(世界成就品) 화장세계품(華藏世界品) 비로자나품(毘盧遮那品) 등이 있다. 이 부분의 내용은 무엇인가? 화엄경(華嚴經) 은 석가모니 부처님이 깨달았을 때의 광경을 설명한 것이 특징이다. 다른 경전에는 이렇지 않다. 화엄경 초회 6품은 석가모니 부처님이 깨달은 세계를 설명한다.
화엄경에서는 부처님(佛)을 어떻게 표현할까? 대방광불(大方廣佛)로 표현한다. 대방광불(大方廣佛)은 부처님의 세계, 즉 깨달음의 세계이다. 원효 스님의 <화엄경 서문>에서 “대방광불화엄경은 법계는 끝이 없는 세계다. 법계는 지혜의 세계다. 이 말은 인간(人間)의 지혜(智慧)가 곧 부처의 지혜(佛智慧)임을 깨닫게 하는 것이다. 인간이 지닌 불지혜(佛智慧) 그것이 체(體)와 용(用)이다. 대방광(大方廣)은 지혜의 본체와 지혜의 작용에 대한 말이다 <체용동시/體用同時>. 이를 부처님이 화엄을 한다고 한다. 부처님이 지혜로 온갖 공덕의 꽃을 피워 우주 법계를 꾸민다. 이것을 화엄에서는 장엄불(莊嚴佛), 선(禪)에서는 자성불(自性佛)이라 말한다.
그래서 화엄경 수행은 보현행원(普賢行願) 수행이고, 선(禪)은 무념(無念) 수행이다. 이것이 화엄수행과 선수행의 차이다. 화엄수행은 온갖 공덕을 짓고 회향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보살은 자신이 지은 복을 보살 자기가 탐하지 않는다. 복을 많이 짓되 항상 보시하고 회향(廻向)하는 것이 화엄수행이다. 두루 회향하지 않으면 자기 사업과 자기 이익에 몰두하는 것에 불과하다.
반면에 선(禪)의 무념수행(無念修行)은 무엇에도 집착하지 않는 수행이다. 분별이고 집착인 애증(愛憎)을 내려놓는 것이다. 인간에게 비극이 생기는 까닭이 분별이고 집착인 애증(愛憎)을 내려놓지 못하는 여기에 있다. 아집과 집착 분별 애증을 버려야 하는 것이다.
문제는 좋아하고 싫어하는 감정, 즉 분별심(分別心), 분별의식(分別意識), 분별을 하는 생각이다. 여기서 생사윤회(生死輪廻)를 하는 것이다. 선사들은 말하기를 눈감고 보지 말고, 귀 막고 듣지 말라고 했다. 부처님, 즉 깨달은 사람은 무엇을 보든지 무슨 소리를 듣든지 그것들이 모두 무상(無常)함인 줄로 알기에 그것들에 집착(執着)하지 않는다. 무상(無常)을 아는 사람은 집착하면 허망하게 괴로움만 있다는 이치를 안다. 이같은 사실을 살펴 아는 것은 지혜(智慧)이고, 그것(定慧)을 세상을 살피되 그 세상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 선정(禪定)이다. 보되 보지 않고 보되 집착하지 않는 것이 무념(無念)이다. 그것이 정혜쌍수(定慧雙修)다. 정(定)은 분별하지 않고 집착하지 않는 것이고, 혜(慧)는 보는 그대로 있는 그대로 아는 것이다.
분별하고 집착해서 허망한 분별 망상(妄相) 번뇌를 일으키지 않으면 무념선정(無念禪定)이다. 보되 좋고 싫음이라는 애증(愛憎)을 안 일으키고 집착하지 않는 것이 대승선정(大乘禪定)이다. 화엄이 바로 그같은 대승선정(大乘禪定)이다. 만행(萬行)의 꽃을 피우는 것이다. 우선, 초회 6품의 제1 세주묘엄품(世主妙嚴品)에서 대승선정(大乘禪定)의 기가 막히는 시작을 볼 수 있다. 화엄경(華嚴經)은 시성정각(始成正覺), 즉 시작부터 올바른 깨달음을 얻었다고 믿고 출발한다. 그 다음은 정각의 세계, 깨달음의 세셰를 설명한다. 깨닫고 보니 보이는 세계부터 달라졌음을 강조하는 것이다.
第 一會 六品 說法 , 世主妙嚴品 第一之一 , 시성정각(始成正覺)
여시아문(如是我聞)하사오니 일시(一時)에 불(佛)이 재 마갈제국아란야법보리장중(在 摩竭提國阿蘭若法菩提場中)하사 시성정각(始成正覺)하시니라.
二, 장엄(莊嚴) / 땅(地)의 장엄(莊嚴)
기지(其地)가 견고(堅固)하야 금강소성(金剛所成)이어든 상묘보륜(上妙寶輪)과 급중보화(及衆寶華)와 청정마니(淸淨摩尼)로 이위엄식(以爲嚴飾)하고 제색상해(諸色相海)가 무변현현(無邊顯現)하며 마니위당(摩尼爲幢)하야 상방광명(常放光明) 하고, 항출묘음(恒出妙音)하며, 중보라망(衆寶羅網)과 묘향화영(妙香華纓)이 주잡수포(周帀垂布)하며, 마니보왕(摩尼寶王)이 변현자재(變現自在)하며, 우무진보(雨無盡寶)와 급중묘화(及衆妙華)하야, 분산어지(分散於地)하니라. 보수(寶樹)가 행열(行列)하야 지엽광무(枝葉光茂)이어든 불신력고(佛神力故)로 영차도량일체장엄(令此道場一切莊嚴)으로 어중영현(於中影現)하니라..
“한 때에 <지금 이 순간> 부처님께서 마갈제국 아란야 법보리장에서 처음으로 바른 깨달음을 이루시었다. 그 땅은 견고하여 금강으로 되어있다. 가장 묘한 보배들과 여러 가지 훌륭한 꽃과 깨끗한 마니구슬로 장엄하게 꾸며졌으므로 온갖 빛깔들이 그지없이 나타났다”고 설하고 있다. 이는 성불에는 시간과 공간에 제약을 받지 않는다는 사실. 지혜를 사용해서 해결되고 완성된다는 사실. 지금 이 순간 무량한 업겁의 과거 현재 미래를 보는데 걸림이 없게 하는 것이 지혜(智慧)라는 말이다. 최고의 바른 깨달음을 이루면, 삼세에 들어가 평등하고 몸이 일체 세간에 가득해 없는 데가 없다. 이것이 석모니 부처님이 깨달은 세계이고 우리들이 사는 세계다. 시간공간(時間空間)에 대한 의문은 깨달음으로 해결한다. 시공을 극복하는 불교의 방법이다. 시간공간(時間空間)의 극복은 지혜와 깨달음으로 해결한다. 지혜가 생겼을 때, 모든 고통이 사라진다.
제2 ‘여래현상품(如來現相品)’의 핵심은 다음 게송에서 확인할 수 있다.
불신충만어법계 보현일체중생전(佛身充滿於法界 普現一切衆生前)
수연부감미부주 이항처차보리좌(隨緣赴感靡不周 而恒處此菩提座)
부처의 몸 온 세상에 가득하니, 부처의 몸 일체중생 앞에 나타나시었다.
부처의 몸은 인연(因緣) 따라 가지 않는 데가 없지만, 언제나 깨달음의 자리에 항상 계신다.
불신상현현 법계실충만(佛身常顯現 法界悉充滿) 항연광대음 보진시방국(恒演廣大音 普震十方國)
부처님 몸이 항상 나타나 법계(法界)에 가득히 찼다. 늘 광대한 음성을 내어 온 세상을 모두 진동시킨다. 이는 바로 지혜(智慧)의 자리에서 조금도 벗어남이 없다는 의미다. 깨친 마음의 지혜의 세계가 못 깨친 생각의 세계와 다름을 말하고 있다. 어둠과 공포를 만드는 생각의 세계, 분별의 세계를 벗어나 지혜의 세계로 나아가야 한다. 사람들이 어리석은 업(業力)에 빠지면 고통 없는 곳에서 스스로 고통을 만들어서 고통을 받다.
화엄경(華嚴經)을 통해 일상의 생활 속에서 지혜(智慧)를 계발하는 노력을 해야 한다. 지혜로 돌아가면 어리석은 감정들이 모두 해결된다. 어리석은 감정을 해결하려면 지혜로 돌아가야 한다. 그러려면 먼저 학습이 필요하다. 두 번째는 관조(觀照), 자기를 관찰하고 들여다보는 것이 필요하다. 오늘날에는 특히 자기 자신을 챙기고 돌아보는 노력이 중요하다. 상대방에 대해 원망을 많이 하고 사는 것이 요즘 세상인데, 해서 마음챙김 수행이 더욱 필요하다. 자기 마음을 늘 관조해야 한다. 그러면 상대방이 자신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자신의 마음에 달려있음을 분명하게 알게 된다.
남이 내가 바라는 대로 해주질 않아 고통스럽고 원망스러운 마음을 스스로 알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자각《自覺》이다. 상대를 향해 내가 바라던 마음을 항상 들여다보면 상대방이 밉지 않다. 이것이 관조《觀照》다. 다음은 수련(修鍊), 즉 마음공부다. 끊임없이 마음을 닦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게 해서 마음 공부를 제대로 익히면, 자기 마음을 스스로 관조할 수 있게 된다. 그렇게 하는 것이 행복한 삶을 살게 하는 원동력(原動力)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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