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향기 메일

내가 나인 것이 나를 가두는 감옥이었구나

장백산-1 2019. 12. 17. 18:57

내가 나인 것이 나를 가두는 감옥이었구나   - - 릴라님


제가 태어난 곳은 남쪽에 있는 섬 제주도입니다. 그곳을 떠나 육지에서 살아온 지가 30년이 넘어갑니다.

그곳은 누구나 한 번쯤 가보고 싶어 하는 곳입니다. 그곳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그곳의 아름다운 

자연풍광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그곳에서 태어나  그곳에 살던 저는 그곳이 아름답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봄이 한창인데도 산꼭대기에 잔설이 남아있는 자연풍광이 한눈에 들어오는 산간마을에서 살았습니다.

늘 보아오던 풍경이어서 그 모습이 아름답다기보다는 방안의 벽지를 보는 듯 평범했습니다. 오히려 

한라산 꼭대기에 쌓인 잔설 아래로 짙은 음영이 물줄기처럼 흐르는 계곡을 보면서 아픔을 느낄 때가 

많았습니다.


제주 4.3사건 당시 돌아가신 할아버지, 가까운 친척들, 이웃 사람들을 떠올리게 됩니다. 가끔 아버지를 

따라 산 중턱의 목초지를 지날 때면 곳곳에 파인 땅굴을 보게 되는데 한라산 속으로 피란 온 주민들이 

숨어살았던 곳이라는 아버지의 설명을 들으면 섬뜩한 기분도 듭니다. 내가 태어나 살던 어릴적 그곳은 

아름다운 자연풍광을 마음 편히 즐길만한 곳이 아니었습니다.


그곳은 아픈 곳, 가난한 곳, 척박한 곳, 여유가 없는 곳이었습니다. 살아남은 자에게는 생존이 목전의 큰

일이었고 모든 부족하고 불만스러운 것들은 그 하나의 사건으로 덮어버리기에 충분했습니다. 가난한 집

이 싫었습니다. 먹고살기에 바빠서 낮에는 얼굴을 보기 힘든 부모님이 싫었습니다. 이런 곳에 태어난 것

이 싫었습니다. 교양이 부족하고, 문화가 없는 각박한 이곳이 싫었습니다. 이런 곳에 태어난 내가 싫었고, 

그 가운데서도 여자라는 이름으로 부족한 것 가운데 더 부족한 대접을 받아야 하는 현실이 미웠습니다.

상처와 가난과 매서운 바람을 간직한 섬이 싫었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마음 한 편에 이곳을 떠날 생각만 

키웠습니다.


막상 싫었던 그곳을 떠나 육지로 와보니 이곳 사람들은 저와는 전혀 다른 눈으로 그곳을 바라보고 있었

습니다. 육지 사람들에게 그곳은 아름답고, 낭만이 있으며, 피비린내 나는 이야기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

는 환상의 섬입니다. 보는 대상은 한 곳인데, 보는 눈은 다르다 못해 너무나도 이질적이었습니다. 그 간

극을 보며 피식 웃으며 '그런 곳이죠'라고 말하지만 여전히 그곳에 대한 이미지는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

이 버겁고 힘든 날것인 삶의 현장이었습니다.


어릴 적부터 싹터온 현실에 대한 불만족은 섬을 떠나 육지로 나와서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살아

가는 환경도 다르고 자연풍광도 다르고 말씨도 다르며, 사람들의 성향도 크게 다른 곳에 있지만, 내가 

그곳의 자식이라는 것은 여전했고, 나의 몸과 마음, 내가 갖고 있는 내면의 것들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

습니다. 나는 이곳에서도 지금보다 나은 것, 지금의 나를 긍정적으로 계발하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았고, 

그 노력의 결과 물질적이나 정신적으로 조금 더 나은 환경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환경이 내가 바라던 완전한 만족을 보장해주지는 않았습니다. 힘겨운 나날이 거듭될수록 

이런 식으로는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없다는 불안과 한계가 느껴졌습니다. 끝나지 않는 추구는 허기만 

계속 느끼게 할 것이라는 판단이 들었습니다. 이런 식으로는 내면의 평화가 찾아오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이 들었습니다. 하루하루가 거친 물살 사이로 허술하게 놓인 돌 다리를 휘청거리며 건너는 듯한 

불안한 나날이었습니다.


지금에 와서 보면 굳이 내가 태어난 그곳을 떠날 이유도 없었습니다. 문제는 이 몸과 마음이 나라는 

분별 망상을 굳게 믿었던 것이 지금까지 느껴온 나를 감금하는 구속하는 원인이었습니다.


내가 느끼는 모든 불만족의 출발점은 나 자신에 대한 아주 잘못된 이해였습니다. 나는 형체가 있는 몸과 

형체가 없어 보이지 않는 마음을 가진 사람도 아니고, 여성도 아니며, 부모님이 낳아준 자식도 아니며, 

제주도에서 태어나 살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특히 그 섬은 나를 한 번도 가둔 적이 없었습니다.


어려서부터 성장과정에 학습되고 익힌 분별망상을 그대로 사실이라고 받아들여 믿어버린 것이 나에게

일어났던 모든 문제의 원인이었습니다. 나는 어느 누구도 아니고, 무엇도 아니며, 특정한 모습을 가진

인간이라는 존재도 아닙니다. 나는 이 몸과 마음, 부모님의 자식, 남쪽에 있는 섬 안에 갇힌 존재가 아

니라, 이 세상 모든 것들을 통채로 하나로 드러내는 테두리 없는 텅~빈 바탕마음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내고향 그곳을 벗어나지 않고도 이미 그곳을 벗어나 있었던 것이며, 그곳을 떠나 육지로 왔어도

육지로 온것이 아니었던 겁니다.


밖으로 추구하던 마음을 멈추고 그 모든 추구의 진원지를 돌이켜 보니 이미 진원지에 모든 것이 이루어

져 있었습니다. 잘못된 이해와 그 이해를  받아들여 스스로를 아주 작은 형체 속에 가두어 놓고 일어나는 

생각을 따라 술 취한 코끼리처럼 휘청거리고 휘둘리면서 살아온 것이 모든 불만족과 나를 구속하는 원인

이었던 것입니다.


지금 제주 섬 그곳은 아름답습니다. 에메랄드빛 바다와 이곳에서는 볼 수 없는 수목들이 즐비합니다. 

그러나 그곳은 여전히 아픈 곳이기도 합니다. 젊을 적 고생을 많이 하신 어머님이 초라한 집을 지키고 

계시고, 형제자매들은 여전히 먹고살기에 바빠 오래간만에 가도 마음 편히 얼굴 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개발 바람이 불어 산 중턱까지 콘크리트 건물과 아스팔트 길이 들어서 있고, 외국인 관광객들이 떠드는 

소리가 한라산의 신비와 뭇 짐승들의 잠을 깨웁니다. 그러나 그곳의 모든 것을 사랑합니다. 그곳의 딸인 

제 모습도 사랑하고 배운 것이 많지 않은 부모님도 사랑하고, 사는데 바쁜 친척들도 사랑합니다.


그곳의 아픔도 사랑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뿐 아니라 내가 살고있는 지금 이곳의 모든 것

들도 사랑입니다. 원하든 원치 않든 모두 넉넉한 품에 안길만한 것들입니다. 이 사랑은 나 개인이 하는 

사랑이 아닙니다. 이같은 사랑은 그냥 본래 모든 것들은 아무런 조건과 이유와 핑계가 없는 사랑 그 

자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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