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 심리적이 건 물질적이 건 이 세상 모든 것은 뿌리 없는 나무와 같다
1. 마음으론 마음을 깨닫지 못한다
이 세상 모든 것은 혼자 생겨나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반드시 무엇인가 인연(因緣)에 의지해서 생겨납니다. 흔한 말로 그림자는 물체 사물에 의지해서 생겨나게 되고, 메아리는 소리에 의지해서 생겨나듯이 말입니다. 그러나 이 말은 주로 사물에 대한 집착심(執着心)을 떨쳐버리게 하기 위해서 한 말이지만, 일반적으로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습(相)’이 있고 ‘이름(名)’이 있는 모든 존재는 하나도 예외 없이 서로 짝이 되는 상대에 의지(依持)해서만 성립될 수 있는 겁니다.
예를 들면 이 세상에 ‘추함’이 없으면 ‘아름다움’이라는 관념이 어떻게 혼자서 있을 수 있으며, ‘악’이 없으면 어떻게 ‘선’이라는 개념이 세워질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사람들은 왕왕 이 추함 아름다움, 악 선을 전혀 서로 상관이 없는, 독립적인 존재로 인정하고는, 이 중에 하나만 남겨두고 다른 하나를 없애려고 애쓰는 통에 사람들 간에 갈등과 투쟁이 생겨서 세상이 시끄러운 겁니다.
그런데 이미 밝힌 바와 같이, 모든 법(것, 존재, 현상)은 실로 ‘자체의 성품’(體性)이 없는 것이기 때문에, 모든 법(것, 존재, 현상)은 본래 ‘한 성품’, 한 마음, 본래면목, 참나, 지금 이 순간 여기, 본래의 나 라는 방편의 마리 가리키는'이것'인데, 범부들이 다만 이 ‘성품 없는 도리를 알지 못해서무지한 사람이 된 겁니다. 그래서 모든 법이 본래 <지금 있는 그대로> 즉, 좋은 것은 좋은 것인 채로, 나쁜 것은 나쁜 것인 채로 본래 평등하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겁니다.
‘길다 짧다’, ‘많다 적다’가 그것의 본성, 한 성품, 한 마음, 본래면목, 참나,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 본래의 나에 있어서 완전무결하고 평등하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곧 이 세상의 참 모습, 실상을 알아차리는 첫걸음입니다. 이 말은 현상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현상들(것들, 존재들)은 실체가 없는 허망한 것들이므로 이 세상 모든 것들에 대해 집착하는 마음을 일으키지 말라는 말입니다, 그렇게 해서 사람들의 마음(의식 생각)이 텅~비워져서 청정(淸淨)해지면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에 현전해 있는 이대로의 세상이 곧 행복한 세상라는 사실을 일깨우기 위해서 한 말입니다.
‘이상향(理想鄕)’이라는 꿈의 세상은 사람들이 머리로 그려낸 그림, 즉 관념(觀念)의 세상 개념(槪念)의 세상이며, 그렇게 사람들의 머리로 그려진 그림은 고정불변하는 실체로서 실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도 그 쓰라린 현장을 누비면서 묵묵히 애쓰는 어진 사람들이 많지만, 끝이 보이지 않는 난제 앞에서 늘 자신의 무력함을 한탄하며 시름겨워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어제 오늘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현실적으로 겪고 있는 그 숱한 아픔과 억울함, 가진 게 없어서, 힘이 없어서 겪을 수밖에 없는 가슴앓이, 원하고 바라는 일들이 전부 다 실체가 없는 허망한 꿈, 허깨비, 물거품, 그림자 같은 것이라는 사실을 힘들어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스스로 깨닫도록 돕는 일, 이것이 바로 종교활동가들의 몫입니다. 이 길이 아무리 외롭고 어려운 길일지라도, 이 길만이 영원하고 진정한 ‘구원(救援)의 길’이라면 그 길을 끝내 가지 않을 수 없는 게 바로 성직자들이 스스로 택한 길입니다. 저는 지금 그 ‘구원의 손길’을 성직자들의 몫으로만 돌릴 수 없다고 말하는 겁니다. 어찌 보면 구원(救援)의 길, 깨달음의 길은 사람들 각자의 몫인 겁니다.
‘진실’이 뭔지 알지도 못하고, 또 알려고도 하지 않는, 이 세상의 보통 사람들 중에도, 선비 같은 꼿꽀한 기상을 가진 어진 사람들이 있었어요. 그들은 아무리 어려운 일이 닥치더라도 그것을 남의 탓으로 돌리고 세상을 원망하는 일은 없었습니다. 적어도 세상 사는 사람들의 마음이 지금처럼 각박해지기 전엔 그런 꽀꽀하고어진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던 게 사실입니다.
‘도(道)’가 뭔지, ‘불법(佛法)’이 뭔지 알지 못하는 범부들 가운데에도 이렇게 선비다운 기상을 지닌 사람들이 있는데, 세상 인심이 그저 저만 알고, 개인의 입신출세만을 좇으면서, 온 세상이 황금만능주의에 휘말려 있는 가운데서 오직 홀로 ‘자기 한 몸을 헌신해서 많은 사람들을 구원하겠다는 ‘보살(菩薩)의 길’을 택한 사람에게 있어서야 더 말해 뭣하겠습니까? 더구나 이 세상이 몽땅 ‘내가 지은 업(業)의 그림자(影), 즉 업영(業影)’일 뿐이라는 사실이 밝혀진 마당에서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세간’과 ‘세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각기 저마다 지은 업(業)에 의해서 ‘각자의 마음’ 속에 허망하게 나타난 꿈, 허깨비, 물거품, 그림자(影)일 뿐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깨닫는 일이야말로 깨달음, 구원(救援)의 시작이자 끝입니다. 결국(結局) 자기가 자기를 구원(救援)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깨달음을 남이 어떻게 나를 대신해서 해줄 수 있습니까? 그러므로 ‘깨달음’ 즉, 진정한 구원(救援)은 자기 스스로 오직 ‘모든 법(法)의 실상(實相)’, 즉 이 세상 모든 것의 참 모습을 분명히 깨달아 마치는 길밖에 다른 방법이 없는 겁니다.
- 대우거사님의 <그곳엔 부처도 갈 수 없다> 중에서
'자기계발과 마음공부' 카테고리의 다른 글
태평가(太平歌) (0) | 2020.04.25 |
---|---|
무한(無限)한 도(道) (0) | 2020.04.25 |
옛날과 지금을 관통하는 '이것' (0) | 2020.04.22 |
세상 모든 것이 꿈속의 일 (0) | 2020.04.21 |
생명력(生命力) 자체인 부처 (0) | 2020.04.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