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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신 지옥? 하느님 왜 그리 쩨쩨한가" 최원석 동생의 깨달음

장백산-1 2020. 10. 5. 13:07

"불신 지옥? 하느님 왜 그리 쩨쩨한가" 최원석 동생의 깨달음

 

백성호 입력 2020.10.05. 05:01 수정 2020.10.05. 11:33

 

[백성호의 현문우답]

 

“기독교는 이제 ‘배타적 기독교’에서 ‘상생의 기독교’로 패러다임을 바꾸어야 한다.”

 

지난달 28일 서울 서소문에서 최원영(66) 작가를 만났다. 그는 최근 『예수의 할아버지』(좋은땅)라는 소설을 출간했다. ‘예수의 아버지’가 아니라 ‘예수의 할아버지’라니, 처음에는 제목이 다소 생뚱맞았다. 책장을 넘기면서 곧 깨달았다. 그것은 현실 기독교를 향한 날 서린 문제 제기였다. 복음서에 따라 ‘예수 할아버지’의 이름이 달리 기록돼 있기 때문이다. 예수의 아버지는 요셉이다. 그런데 요셉의 아버지가 마태복음에는 ‘야곱’, 누가복음에는 ‘헬리’라고 돼 있다. “성경은 일점일획도 오류가 없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며 문자주의 신앙을 고수하는 기독교인이라면 이에 대해서 어떻게 답을 할까.

 

 

최원영 작가는 소설 '예수의 할아버지'를 통해서 현실 기독교를 향해 날 선 물음을 던진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최 작가는 “예수의 할아버지 이름이 왜 복음서마다 다른가?”라는 질문을 첫 단추로 소설을 풀어간다. 목사와 기자, 신학자 등 교회 안팎의 사실감 넘치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추리 형식을 띤 스토리는 긴장감이 있다. 소설가 김훈은 추천사에서 “(이 소설은) 기독교의 교리에서부터 현실 교회의 문제에 이르기까지 깊고 넓은 질문을 던진다. 그의 질문은 명료하고, 그는 남이 알아들을 수 있는 방식으로 말한다”며 “소설 『예수의 할아버지』는 하느님과 교회를 교리로부터 해방시켜서 현세의 생활 속에서 살아 있게 한다”고 평했다. 마주 앉은 최 작가에게 그 길을 물었다. 하나님(하느님)과 교회가 교리로부터 해방되는 길은 뭘까.

 

Q : 이 소설을 쓴 이유가 뭔가.

A : “기독교를 향해서 문제의식을 던지고 싶었다. 저는 모태신앙이다. 종교는 오랫동안 제 관심의 중심이었다. 어릴 적부터 어머니 손을 잡고 교회에 다녔다. 중학생 때는 주일학교 학생회장을 하며 교회 주보도 만들었다. 그때는 일일이 등사기로 밀던 시절이었다. 그러다가 고등학생 때 회의가 들기 시작했다.”

 

Q : 어떤 회의인가.

A : “당시에 제가 듣고 알던 신앙은 이랬다. ‘하늘 높은 곳에 전능하신 하나님이 계신다. 이 분은 자신을 안 믿는 사람은 지옥에 보낸다. 그 사람이 아무리 착해도 하나님을 안 믿으면 지옥에 보낸다.’ 저는 하나님이 어쩐지 하나님 답지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나님이라면 좀 더 통이 크고 공평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런 식의 회의였다. 교회에서 하는 설교도 그랬다.”

 

Q : 어떤 설교인가.

A : “큰 지진과 해일 탓에 외국에서 사람이 많이 죽었다. 비기독교권 국가였다. 어떤 목사님은 ‘예수를 안 믿어서 그렇다’고 했다. 저는 그런 교회에 나가기가 싫었다. 그때부터 방황이 시작됐다. 다른 교회를 다녀보기 시작했다.”

 

Q : 다른 교회는 어땠나.

A : “다른 교회도 영 신통치가 않았다. 그러다가 놀라운 교회를 하나 찾았다. 서울 장충동의 경동교회였다. 당시 강원용 목사님의 설교는 제게 충격이었다. 강 목사님은 ‘예수 믿으면 천당가는 것’보다 ‘예수의 제자가 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했다. 강 목사님은 열린 분이었다. 예수님을 신으로 숭배하는 것보다 예수님을 따르는데 방점을 찍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 분이 미국 유니언 신학대에서 세계적 신학자 폴 틸리히에게 배우셨더라.”

 

 

경동교회의 강원용 목사는 생전에 설교에서 예수를 신으로 숭배하는 것보다 예수를 따르며 제자가 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 [중앙포토]


파격적인 설교 앞에서 그는 겁이 났다. ‘아, 이게 올바른 교회구나’라는 생각과 ‘저렇게 믿으면 천당에 못갈 텐데’라는 생각이 충돌했다. 이후 미국 유학을 떠나 뉴욕주립대에서 경제학을 전공하고, 돌아와 결혼도 했다. “서른 살 즈음에 이화여대에서 강의를 하던 김흥호 목사님을 알게 됐다. 이대를 나온 아내가 김흥호 목사님의 설교를 저보다 먼저 들었다.” 다석 유영모의 제자인 김흥호(1919~2012) 목사는 유ㆍ불ㆍ선에 두루 밝았으며 생전에 ‘기독교 도인’으로도 불리었다. 최 작가는 “신앙에 대해서 심각한 질문을 던지기 시작한 건 그때부터였다”고 말했다.

 

Q : 가장 심각한 질문이 무엇이었나.

A : “하나님은 어떤 분일까. 이게 가장 근본적인 물음이었다. 저는 어릴 적부터 어머니와 새벽기도를 다녔다. 그러니 어머니가 믿는 하나님과 내가 믿는 하나님이 같은 하나님이어야 했다. 그런데 같은 것 같지가 않았다. 게다가 교회는 ‘묻지마 신앙’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제가 어릴 때는 더 심했다. 그런 질문을 하면 야단도 맞고 그랬다. ‘네 믿음이 약해서 그런 거다. 그런 건 성령 받으면 다 알게 돼.’ 그런 식이었다. 김흥호 목사님은 수십년간 하루 한 끼만 먹는 일일일식(一日一食)을 하셨다. 그래서 집으로 저녁 초대를 해 종교에 대한 질문을 많이 던졌다. 김 목사님은 천당에 대한 물음에 답하기보다 ‘지금 여기’를 강조하셨다.”

 

 

'기독교 도인'으로도 불리었던 김흥호 목사가 이화여자대학교 대학교회의 연경반 강의에서 한문 성경의 ` 시편 ` 부분과 동양 고전인 양명학의 구절을 비교하면서 강의를 하고 있다. [중앙포토]

 


최 작가는 2남1녀 중 막내이자, 동아그룹 최원석 회장의 동생이다. 그는 동아그룹 사장을 역임했고, 시사저널을 창간해 10년간 대표회장을 지냈다. 공연예술 전문지 월간 『객석』도 그가 창간했다. 예음그룹 회장과 경원학원 이사장을 지냈다. 그러다 IMF(국제통화기금) 사태가 터졌고, 계열사 부도를 막는 과정에서 어려움을 겪다가 결국 배임 판결을 받았다. 그는 5년 7개월간 감옥에 수감됐다. 소설 『예수의 할아버지』는 감옥에서 집필한 두 편의 소설 중 하나다.

 

Q : 소설 제목이 왜 ‘예수의 할아버지’인가.

A : “예수의 아버지 요셉은 다들 아는데, 예수의 할아버지는 잘 모른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나오는 예수의 족보에는 서로 다른 이름이 기록돼 있다. 나는 궁금했다. 어느 쪽이 맞는 걸까. 또 사람들은 왜 이걸 문제 삼지 않는 걸까. 그래서 소설의 첫 챕터 제목도 ‘예수의 할아버지’로 정했다.”

 

Q : 교회를 다니면서 줄곧 가졌던 아쉬움은 어떤 것이었나.

A : “교회에서는 ‘묻지마 신앙’이 훌륭한 신앙으로 간주된다. 저는 그게 답답했다. 김흥호 목사님을 만나면서 또 다른 세계에 눈을 떴다. 기독교뿐만 아니라 불교, 유교, 도교의 세계도 넓고 깊다는 것을 느꼈다.”
소설 『예수의 할아버지』의 말미에는 92권이나 되는 참고문헌이 적혀 있다. 하나같이 그리스도교의 본질을 찾아가는 국내외 저자들의 책이다. 5년 7개월의 수감 생활이 최 작가에게 ‘5년 7개월의 묵상’으로 작동했음을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

 

 

최원영 작가는 "예수님은 무상하고 무의미한 인간의 삶에서 사랑의 아픔을 보여주기 위해 오신 분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Q : 예수는 왜 이 땅에 왔다고 생각하나.

A : “기독교에서는 ‘인간은 죄 덩어리’ ‘인간은 오직 악하다’고 말한다. 그런데 예수께서 이런 말씀을 하려고 오신 것 같지는 않다. 인간의 죄성에 대한 개념은 성 오거스틴이 정립해 기독교 교리로 만든 거다. 이런 죄성만 종교가 강조하다 보면 인간성 말살의 위험이 있지 않겠나. 예수님은 오히려 무상한 인간의 삶에서 사랑의 아픔을 보여주기 위해 오신 분이라 생각한다. 왠지는 모르지만, 사랑의 아픔 안에 생명이 흐른다.”

 

Q : 그러한 ‘예수의 본래 뜻’이 현대에 와서 다른 뜻으로 굴절돼 받아들여지고 있는 이유는 뭔가.

A : “예수님은 기독교를 만들 생각도, 자신이 신이라는 생각도 안 했다. 오히려 제자들을 나무라는 대목이 복음서에 나온다. ‘왜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 선한 분은 하나님 한 분밖에 없다.’ 이 구절은 요한복음을 뺀 나머지 공관복음에 다 나온다. 그렇지만 그분의 삶에 대한 제자들의 감격이 너무 컸다. 그 울림이 여러 각도로, 특히 바울의 그리스 철학을 바탕으로 전개됐다. 당시 바울의 정신적ㆍ학문적 수준은 대단히 높았기 때문에, 기독교의 근간이 대부분 거기서 만들어졌다. 이후 기독교는 로마의 공식 종교로 인정된 후 로마의 국교가 됐다. 이 과정에서 서기 325년 니케아 공의회에서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격으로 선언됐다. 당시 이에 대한 격렬한 논쟁이 있었다. 이때부터 신학자들 사이에 교리 논쟁, 특히 구원에 대한 논쟁이 시작됐다. 처음에는 구원에 대한 교리가 지금보다 유연했다.”

 

 

                                                         소설 '예수의 할아버지' 표지

 

 

 

Q : 유연했다면, 어떤 식이었나.

A : “서기 473년 알즈 공의회에서는 이렇게 선언했다. ‘그리스도가 죽은 것은 오직 그를 믿는 사람만 구원하기 위함이라고 하는 사람들을 저주한다. 그리스도는 누구도 멸망하기를 원치 않았다.’ 이게 당시의 정통 교리였다. 그런데 1215년 라테란 공의회에서 ‘교회 밖에는 전혀 구원이 없다’라는 교리가 선포됐다. 그러다가 1962년에 열린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요한 23세 교황이 다시 포용 정책을 펼치게 됐다. 가톨릭은 갈라져 나간 동방 정교와 화해하고, 오랫동안 전쟁을 한 개신교도 ‘분리된 형제’라고 인정했다. 그렇지만 가톨릭을 개혁해 태어난 개신교는 종교개혁 500주년이 지난 지금, 가톨릭보다 더 폐쇄적인 종교관을 유지하고 있지 않나. 특히 많은 한국 교회가 기복주의 신앙과 성경 문자주의를 상당수 견지하고 있다고 본다.”

 

Q : 성경을 문자주의로 믿으면 어떤 문제가 생기나.

A : “여자는 정말로 남자의 갈비뼈에서 나왔다고 믿어야 한다. 여호수와가 아모리 사람을 죽이기 위해 잠시 태양이 하늘에서 멈추었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현대 과학으로 설명하자면 지구가 자전을 하루 정도 멈춘 일이다. 성경을 문자주의로 받아들이면, 오히려 성경에 담긴 더 깊은 메시지와 생명력을 놓치게 된다. 저는 성경이 일점일획도 오류가 없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지는 않는다. 성서 기록자들이 그 시대의 과학과 문화의 한계를 안고 쓴 역사적 산물이 성경이기 때문이다.”

 

Q : 좀 더 구체적인 사례를 든다면.

A : “구약 성경의 아가서ㆍ전도서ㆍ잠언 등은 예루살렘 멸망 이후 서기 90년 얌니아 회의에서 구약으로 편입 확정되었고, 요한복음의 간음한 여인 이야기는 독립적으로 돌아다니다 요한복음에 편입됐다. 성경을 깨달음을 위한 상징이나 비유의 말씀으로 이해할 때 우리는 신앙적 진리에 더 가까이 갈 수 있다.”

 

 

최원영 작가는 "십자가는 하나님 나라를 위해 자기 스스로 선택한 자기 비움"이라고 말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Q : 복음주의 진영에서 존경을 받던 고(故) 옥한흠 목사조차 생전에 “갈수록 ‘십자가 설교’를 피하게 된다. 성도들도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라’고 설교를 하면 부담스러워한다”고 말했다. 교회에서 ‘십자가 설교’가 갈수록 보기 드문 이유가 뭔가.

A : “십자가는 하나님 나라를 위해 스스로 선택한 자기 비움이라고 본다. 자기 십자가는 처음에는 고통의 무게로 다가온다. 그렇지만 스스로 지는 십자가는 비움의 깨달음으로 변한다. 마태복음에 나오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는 말씀과도 상통한다고 본다. 십자가 설교가 줄어드는 건 기독교인이 ‘자기 비움’을 원하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

 

Q : 소설에는 이런 대목이 등장한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이 주는 물을 마시면서 종족의 벽을 허물었고, 가난한 사람들을 축복하고 위로하면서 물질의 벽을 허물었으며,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다는 말씀으로 종교의 벽을 허물었다.’ 그런데 왜 현대의 개신교, 현대의 크리스천에 대해 사람들은 오히려 벽을 느끼나.

A : “21세기 들어서 한국 교회는 양적으로도, 질적으로도 쇠퇴하고 있다. 성장 제일주의로 교회 건물은 커졌지만, 사회적 지탄을 받는 일이 급격히 늘었다. 교회 세습도 그렇고, 목회자의 성범죄 등도 그렇다. 엄청난 건물을 짓고서 바로 도덕적으로 무너지기 시작하는 모습이다. 게다가 우리 안에만 구원이 있다며 상대방을 자꾸 밀어내지 않나. 그런 배타성이 스스로 벽을 만들고 있다.”

 

 

예수는 당시 유대인들이 천시하던 사마리아 지방의 여인이 건네는 물을 마시면서 종족의 벽을 허물었다. 렘브란트의 작품 '그리스도와 사마리아 여인'. [중앙포토]

 

 

Q : 기독교가 그 벽을 허물려면 어찌해야 하나.

A : “가장 개혁이 필요한 대목은 ‘묻지마 신앙’이다. 교회와 신도가 달라져야 한다. ‘복 받는 교회’에서 ‘정직한 교회’로 말이다. ‘종교 뒤에 숨는 신도’에서 ‘생각하는 신도’로 말이다. ‘새벽기도 나오면 복 받는다. 돈 번다. 천당에 간다’는 말보다는 자기를 비우고 자기 십자가를 져야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말을 해야 한다.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은 예수님을 하나님으로만 믿고, 그의 삶을 따르려 하지 않는다. 그게 가장 큰 문제라고 본다.”


이어서 최 작가는 ‘회개와 용서’에 대해서도 지적했다. “믿는다고 입으로 시인했으니 구원은 이미 받았고, 놀라운 세상의 복도 받을 것이고, 죽으면 천당 가니 아쉬울 게 아무것도 없다. 나는 조금 잘못해도 회개하면 즉시 용서받고, 다른 사람들이 잘못되는 것은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심이라. 이렇게 생각하지 않나. 이처럼 이기적인 기독교는 예수에게서 멀어도 너무 멀다.”

 

Q : 소설 속 등장인물인 신방주 목사는 “그분(예수)을 따라 ‘종교를 위한 기독교’를 ‘사람을 위한 기독교’로 개혁하고 싶다”고 말한다. ‘종교를 위한 기독교’란 무엇이고, ‘사람을 위한 기독교’는 또 무엇인가.

A : “과거의 기독교는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가 먼저인 교리적 종교였다. 교리는 진리를 나타내기 위한 방편이다. 그런데 그 방편을 끝까지 지고 가면, 강을 건너고도 뗏목을 지고 걸어가는 것과 같다. 이제는 종교와 신앙을 구분해야 한다. 종교로서 기독교는 한계에 부딪힌다. 기독교는 종교를 넘어 신앙으로 패러다임이 바뀌어야 한다. 서로의 관계, 이해, 생명을 더욱 중시하는 신앙이 먼저여야 한다. 이것이 ‘사람을 위한 기독교’다. 기독교가 이제는 교리에서 진리로 나가는 여정을 시작해야 한다고 본다.”

 

 

렘브란트는 예수의 초상화를 그리기 위해 3년간 유대인 마을에 살면서 그들의 공통적 생김새를 연구했다고 한다. 작품은 렘브란트가 그린 예수의 초상화. [중앙포토]

 


소설 『예수의 할아버지』의 앞날개 저자 이력에는 ‘6년간 수감 생활’이라고 적시 돼 있다. 그에게 자초지종을 물었다.

“수감 이유는 학교 이사장으로서 배임 등의 형사처벌을 받았기 때문이다. 1998년 외환위기 시절, 방계회사 중 아파트를 짓는 건설회사가 있었다. 당시 모든 건설회사가 어려웠다. 우리도 분양을 앞두고 자금이 경색돼 학교 자금을 잠시 유용한 것이 나중에 문제가 됐다. 당시 실무진은 외환위기가 곧 극복되면 아파트가 분양될 것이고, 자금 위기를 문제없이 넘길 수 있다고 믿었다. 학교 자금이 바로 회사로 넘어가면 불법이지만, 학교에서 금융회사에 입금을 시키고, 거기서 회사와 신용거래를 하면 괜찮다고 해서 그런 줄 알았다. 하지만 나중에 재판 결과 이것도 횡령ㆍ배임에 해당됐다. 결국 회사 때문에 문제가 된 학교의 자금을 모두 보전하는 조건으로, 유능한 분에게 학교를 양도했다. 학교 자체는 아무 손해가 없었으나, 자금 유용사건은 재판결과 유죄였다. 모든 것이 저의 불찰이고 책임이다. 지금도 우리 회사의 일원이었던 분들에게 어려움을 끼쳐드려서 미안하고 죄송한 마음이다.”

 

Q : 수감 생활은 어땠나.

A : “5년 7개월 중 5년을 독방에 있었다. 방은 화장실을 합해서 1.2평 정도다. 아주 좁다. 일자로 누우면 양팔을 다 못 벌린다. 수감 생활 중 매일 글을 썼다. 병원에 나가서 검사를 받는 3일 동안만 수갑이 채워져 있어서 못썼다. 감방에는 책상이 없다. 책받침을 하나 구해서 한 손으로 받친 뒤 선 채로 글을 썼다. 서 있으면 좁은 방이 조금 더 커보였다. 앉아 있으면 허리도 아팠다. 이 소설도 그렇게 썼다. 감옥은 제게 도서관이었다. 거기서 평생 가장 많은 책을 읽었다.”

 

 

최원영 작가는 "한국 교회는 배타적 기독교에서 상생의 기독교로 거듭나야 한다"고 지적했다. 권혁재 기자


최 작가가 감옥에서 쓴 나머지 한 편의 소설도 기독교에 대한 이야기다. 마지막으로 그에게 “종교란 한 마디로 무엇인가?”라고 물었다. 최 작가는 이렇게 답했다. “종교는 한 마디로 내가 변하는 것이다. 제아무리 교회의 목사나 장로가 된다고 해도, 자기 자신이 변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그런 이들은 예수님을 신으로만 숭배할 뿐, 따르거나 닮으려고 하진 않는다. 기독교는 이제 패러다임을 바꾸어야 한다. 배타적 기독교에서 상생의 기독교로 달라져야 한다.”

 

백성호 종교전문기자 vangogh@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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