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어느 마음에 불을 지피겠소
고정된 실체 없음을 보여주는 일화
점심(點心)과 관련 덕산스님 고사는 금강경의 삼시심(과거심, 현재심, 미래심) 드러낸 일화로 머무름을 경계하려는 가르침
점심(點心)이란 말은 분명 중국에서 한국에 건너온 말이다. 송나라 사신으로 고려를 다녀간 서긍이 쓴 고려의 일상생활상을 적은 ‘고려도경’에도 “고려 사람들은 하루에 두 끼만 먹는다”고 되어 있으며, 아침과 저녁이 순수 우리말인데 반해 점심에 대한 순수한 우리 말이 없는 것도 그 때문인 것 같다. 중국에서 점심(點心)이란 말의 유래로는, 남송 때 한세충이란 명장이 있었는데 아내 양홍옥이 군사들을 위해 만들어온 만두의 양이 너무 적자 “심장(心)에 조그만 불씨를 지펴(點火) 기운이나 차리시게!”라는 데서 시작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금강경’에 통달했다는 당나라 덕산 스님의 점심(點心)에 관한 일화는 불가에 유명하다. 스님은 어느 날 가까운 지방에 고승이 머문다는 소식을 듣고 법거량을 할 생각으로 ‘금강경’을 지니고 길을 나섰는데, 출출하던 차에 고갯길에서 떡을 파는 노파를 보자 떡을 달라고 하였다. “거기 짊어지고 계신 건 뭐요?” “금강경이란 경전일세.” “그럼 금강경에 관한 문제를 낼 터인데, 맞히면 떡을 공양 올립지요.” 자신만만해 하는 덕산 스님에게 노파가 “금강경에 과거심불가득 ・ 현재심불가득 ・ 미래심불가득이란 말이 있는데, 스님은 어느 마음에 점(點心)을 찍겠습니까?”라는 말에 말문이 콱 막혔다는 일화는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이다.
점(點)을 단지 점을 찍는다는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점심(點心)의 심(心)은 육체에서 원동력이 솟아나는 엔진으로서의 심장을 가리킨다고 하면, 기력이 떨어졌을 때 꺼져가는 엔진에 불길을 지펴(點火) 육체를 움직일 수 있는 힘을 일으키듯 한다는 의미에서 점(點)은 점찍는다는 표현보다는 점화(點火)한다는 표현이 타당할 것이다. 그러면 노파의 질문은 ‘과거는 이미 지나가버려서 얻을 수 없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아 얻을 수 없으며, 현재는 잡는 순간 이미 과거가 되어버린다는데, 대체 스님은 삼시의 마음(과거심, 현재심, 미래심) 중 어느 마음에 불길을 지펴(點火) 사라져가는 기력을 되살리려는 것이오?’라는 의미로 해석된다. 당나라는 남송보다 300년이나 앞서니, 한세충의 일화가 불교에서 ‘금강경’의 삼시심(三時心 :과거심, 현재심, 미래심))과 연결되며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 덕산 스님의 일화로 정착된 것이라 볼 수 있겠다.
일체동관분 마지막 부분 ‘과거심불가득(過去心不可得) 미래심불가득(未來心不可得) 현재심불가득(現在心不可得)’ 바로 앞에 구마라집 스님은 “모든 마음은 모두 마음이 아니다(제심개위비심, 諸心皆爲非心)”고 옮겼고, 현장 스님은 “마음의 흐름이란 흐름이 아니다(심류쥬자비류주, 心流注者非流注]”라 옮긴 부분이 있는데, 범어로 된 범문은 “마음의 흐름이라는 것은 흐름이 아니다(cittadhāreti adhārā)”고 되어 있다. 이는 ‘citta(心) dhārā(流注)’로 분석된다. 앞서 묘행무주분에서 ‘응무소주행어포시(應無所住行於布施)’라 하여 중생은 감각대상(vastu)에 머무르지 않은 채 보시를 행해야 된다고 권하는 세존의 가르침에서 머무름을 경계하고 흐름을 권하는 내용이 나오는데, 이제 여기 와서는 그 흐름에 조차도 짐짓 머무를까 염려하여 털어버리려는 듯 ‘흐름은 흐름이 아니다 그래서 흐름이라 한다’라는 아공(我空) 뒤의 법공(法空)을 설하여 아공 법공을 모두 내려놓도록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마음은 한문으로 간단하게 심(心)으로만 옮겨지거나 또는 세분되어 심의식(心意識)으로도 번역되는데, 범어는 초기불교를 기준으로 한문의 심(心) ・ 의(意) ・ 식(識) 셋에 대응되는 단어가 각기 따로따로 구분되어 사용된다. 마음은 신구의 3업을 쌓고 일으키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고 보아서 심(心)이라 하는데, 이 심(心)은 범어로는찌따(citta, 감지된 것)에 해당하며, 초기불교에서는 생각이나 사고 일반을 가리킨다. 그리고 마음은 과거의 업(業)에 바탕하여 헤아리는 능력이 있는데 이를 의(意)라 하며 범어로는 마나스(manas, 생각)이며, 초기불교에선 생각을 관장하는 감각기관의 개념으로만 사용된다. 또한 마음은 인식된 대상을 구별 식별하여 가리는 능력을 갖추었다고 보아서 식(識)이라고도 하는데, 이 경우의 범어는 위즈냐너(vijñāna, 구별해 앎)로서 육근과 육경이 관여할 때 일어나는 알음알이(識)의 개념에 해당한다. 이처럼 마음을 조금 세분해 본 심(心) ・ 의(意) ・ 식(識) 또한 ‘감지함과 감지된 것을 헤아림 및 헤아려진 것을 구별하여 앎’이라는 고정되지 않은 일련의 흐름을 나타내고 있다. 어차피 심(心) ・ 의(意) ・ 식(識) 그 모두 고정불변의 실체를 지닌 것은 아니지만.
현진 스님 봉선사 범어연구소장 sanskritsil@hotmail.com
[1556호 / 2020년 10월1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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