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뿐인 의자는 내주지 말라 / 아잔차 스님
내게 나무의자가 하나 있다. 오래되어 색도 바래고 손때도 묻었지만 늘 앉는 의자이기에 이제는
내 분신처럼 익숙해진 의자이다. 이 의자에 앉아 세상을 바라보고, 책을 읽으면서 홀로 독백의
대화를 나누고, 삶이 나에게 가르쳐 준 것들을 반추한다.
밤 시간에는 고독이나 평화와 가까워져서 온전히 나 자신으로 돌아오는 그런 의자이다. 지금도
그 의자에 앉아 이 글을 쓰고 있다. 하지만 마냥 고요하기만 하고 평온한 의자가 아니다. 때로는
너무 많은 방문객이 찾아와 번갈아가며 그 의자에 앉는다. 방문객들은 어떻게 말릴 사이도 없이
내 의자를 차지하고 앉아서 온갖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때로는 방문객들의 이야기들이 매혹적이고 설득력 있는 내용이라서 의자의 주인인 나는 맨바닥에
앉아 귀 기울여 듣는다. 영화처럼 몰입한 나머지 방문객들의 이야기에 덩달아 흥분하고, 분노하며,
슬퍼서 울기도 한다. 금방 떠나는 방문객도 있지만 어떤 방문객은 통제할 수도 없이 몇 날 며칠 머문다.
그러다 보면 내 의자는 더 이상 내 의자가 아니다.
어느 날은 외출했다 돌아오면 십년 전, 혹은 이십 년 전 친구가 찾아와서 마치 본래 자신의 의자였던
것처럼 그 의자에 앉아 기다린다. 떠났던 첫사랑도 예전 모습 그대로 그 의자에 앉아 있다. 나는 과거의
내가 아닌데도 그들은 나에게 할 이야기가 많다. 사실은 수도 없이 많이 들어서 다음 말을 내가 먼저
말할 수도 있는 줄거리이다. 가히 '고백 의자'와 같아서 방문객들은 그 의자에 앉기만 하면 자신의 속내를
끝없이 들려준다.
사람들은 인생을 살아오면서 셀 수 없이 많은 의자에 앉았었다. 갓난아기일 때 키보다 높아서 간신히
올라가 앉았던 의자, 오래된 학교 교실의 대물림된 의자들, 때이른 서리에 얼어붙은 꽃봉오리 같던
하지만 그 속에 불을 품고 있던 청년기 때 밤마다 앉아서 시를 쓴 의자, 인도의 노천 찻집에 앉아
지나가는 장발의 사두를 시선으로 아련히 따라가던 의자……겉보기에만 멀쩡했던 의자들. 잠시 앉아
있었을 뿐 내 것이 아닌 의자들.
하지만 나의 이 나무의자만큼은 온전히 내 의자이다. 방문객들이 가끔 차지하고 앉긴 했어도 방문객들이
떠나면 어김없이 내 의자로 돌아온다. 나는 하나밖에 없는 이 의자가 좋다. 이 삶에서 다른 삶들로 걸어
오면서 여기저기 부딪혀 흠집이 난 의자지만 내가 그 의자에 앉아 심호흡을 하면 다시 온전한 의자로
돌아오는 마법같은 의자이다.
마법같은 그 의자를 거쳐간 그 많던 방문객의 흔적도 투명하게 사라지고, 나는 비로소 나 자신에 진실해
진다. 이 마법같은 의자는 누구나 다 가지고 있다. 나도 당신도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다 가지고 있다.
이 마법같은 의자는 다름 아닌 ‘마음’이라고 불리는 의자이다.
마음은 우주의 중심같은 하나의 점과 같고, 마음의 다양한 상태는 이 점에 찾아와 잠시, 혹은 오래머무는
방문객과 같다. 이 방문객들이 무엇인지를 잘 알아야 한다. 방문객들은 그대가 방문객들을 믿고 따르도록
유혹하기 위해 그들이 그린 생생한 그림을 보여 주고 매혹적인 이야기를 들려줄 것이다.
방문객들의 그림과 이야기들에 익숙해지되, 방문객들에게 그대의 의자는 내주지 말라. 의자는 그것 하나
뿐이기 때문이다. 만약 그대가 하나뿐인 의자를 계속 지키고 앉아 각각의 방문객이 올 때마다 반갑게
맞이하고 알아차림 속에 흔들림이 없으면, 만약 그대의 마음을 깨어 있는 자, 아는 자로 만들면 방문객들은
결국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다. 그대가 그 방문객들에게 진정으로 주의를 기울인다면 방문객들이 몇 번이나
그대를 유혹할 수 있겠는가.
방문객들과 대화를 해 보라, 그러면 방문객들 하나하나를 잘 알게 될 것이니 마침내 그대의 마음은
평화로워질 것이다.
출처: <의자는 내주지 말라> (『류시화 엮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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