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진리(眞理)는 애시당초부터 이미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에 영원히 현존(現存)하고 있다.

장백산-1 2021. 3. 2. 13:44

진리(眞理)는 애시당초부터 이미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에 영원히 현존(現存)하고 있다.


진리는 존재한다. 진리는 다만 존재할 뿐이지 진리에 대해 말할 수 있는 내용은 아무것도 없다. 설령 진리에 대해 말해질 수 있는 내용이 있다고 치더라도 그 내용은 전부 다 거짓이 될 것이다. 그렇기에 진리에 대한 설명은 필요가 없다. 진리는 아무 설명이 필요 없이 단도직입적으로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에 현존할 뿐이다.

진리는 그대를 사방팔방 십방 온 우주에서 둘러싸고 있다. 진리는 그대의 몸 안에도 있고 몸 밖에도 있다. 우주삼라만상만물은 진리 안에 있다. 진리가 없다면 우주삼라만상만물은 존재할 수 없다. 그렇기에 진리를 잃어버릴 방법은 없다. 진리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진리 안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깊은 잠에 빠져있기 때문에 진리를 확인하지 못한다. 진리를 확인한 사람들은 철학(哲學)이나 지식(知識)이 진리를 확인 하는데 전혀 도움이 안 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진리를 알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그대는 더 깊은 잠에 빠져들게 된다. 진리를 알려고 하는 노력 자체가 사람들을 엉뚱한 길로 인도하기 때문이다.

진리를 느끼고 확인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진리에 대해 아는 것은 불가능하다. 진리를 느끼고 확인한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이 말은, 진리가 그대 앞에 현존(現存)하는 동시에 그대가 진리 앞에 현존(現存)한다는 뜻이다. 이 말은 진리와 우주삼라만상만물의 현존(現存)이 둘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래서 진리와 우주삼라만상만물이 둘이 아닌 하나라는 말이다.

그러나 진리에 대해 알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진리는 결코 객관화(客觀化)될 수 없다. 진리를 저만치 떨어진 곳에 놓고 객관적으로 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사람들은 손에 진리를 붙잡고 진리를 들여다 볼 수 없다. 제 삼자의 입장에서 진리를 들어다 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사람들은 오로지 진리의 속에서 진리와 하나가 됨에 의해서만 진리를 느끼거나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진리에 대한 느낌이나 확인이 진리에 대한 유일한 앎이다. 그러므로 진리를 느끼거나 확인한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사랑이 곧 진리에 대한 길이라고 지식(知識)은 진리에 대한 일종의 무지(無知, ignorance)라고....

진리(眞理)는 애시당초부터 이미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에 영원히 현존(現存)하고 있다.

무지(無知, ignorance)는 애시당초부터 이미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에 영원히 현존(現存)하고 있는 진리를 무시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식(知識)이 많으면 많을수록 진리(眞理)에 대해 더욱 더 무지(無知, ignorance)해진다. 진리에 대해 안다고 생각할수록  애시당초부터 이미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에 영원히 현존(現存)하고 있는 진리(眞理)를 더 무시하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진리에 대해 무지(無知, ignorance)한 사람은 이론과 종교교리와 종교경전에 눈이 멀어 더 이상 진리의 실체를 느끼거나 확인하지 못한다. 그런 사람은 언어(言語)의 미로(迷路)와 언어의 유희에 빠져 그의 눈에는 먹구름이 끼어버렸다. 그런 사람은 애시당초부터 이미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에 영원히 현존(現存)하고 있는 진리를 있는 그대로 보지를 못한다

이런 사람처럼 분별을 하는 마음 분별을 일삼는 생각의 구름에 휩싸이고 사로잡힐수록 사람들은 진리를 더둑 무시하게 될 것이다. 진리를 느끼고 확인하는 데는 지식(知識)은 불필요한 것이다. 단지 순진무구한 가슴, 어린아이처럼 순진무구하고 예민하게 열려있는 가슴이 필요할 뿐이다.

진리에 대해 알려고 노력하지 말라. 진리에 대해 알려는 노력은 일종의 폭력이다. 그 노력 안에서 그대는 진리의 실체를 공격하거나 겁탈한다. 이것이 내가 학문(學文)을 일컬어 진리의 실체에 대한 공격 또는 겁탈이라고 말하는 이유이다. 학문(學文)은 지식(知識)에 불과할 뿐이다.

진리는 느끼거나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진리는 살아있는 경험이다. 그러므로 진리에 대해 뭐라고 말하든지 간에 그 말은 진리가 아니다. 말해졌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그 말은 이미 진리가 아니다. 진리에 대해 지금까지 말해진 내용, 그리고 앞으로 말해질 수 있는 어떠한 말도 진리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

진리(眞理)를 말이나 글로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은 전혀 없다. 진리(眞理)는 매우 미묘(微妙)해서 머리로는 이해가 불가능하다. 진리(眞理)는 결고 말이나 문자로 표현될 수가 없다. 분별을 하는 생각 분별을 하는 마음을 통해서는 결코 진리를 알 수 없다. 분별을 하는 생각 분별을 하는 마음은 계속해서 진리와 어긋나거나 빗나간다. 왜냐하면 분별을 하는 생각 분별을 하는 마음의 기능 자체가 진리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분별을 하는 생각 분별을 하는 마음의 기능은 비실존적(non-existential)이다. 분별을 하는 생각 분별을 하는 마음은 실존(實存)하지 않는 것에 대해 작용한다. 분별을 하는 생각 분별을 하는 마음은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가 아닌 항상 과거(過去)나 미래(未來)로 달려간다. 과거(過去)는 '이미' 존재(存在)하지 않는 것이며, 미래(未來)는 '아직' 존재(存在)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분별을 하는 생각 분별을 하는 마음은 오로지 과거나 미래에 대해서만 작용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라는 현재(現在)에는 분별을 하는 생각 분별을 하는 마음이 작용을 하지 못한다.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라는 현재(現在)에 현존(現存)할 때, 사람들은 문뜩 분별을 하는 생각 분별을 하는 마음으로부터 분리되어 나온다.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에서 어떻게 분별을 하는 생각이나 분별을 하는 마음을 일으킬 수 있겠는가? 분별을 하는 생각이나 분별을 하는 마음은 사람들을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에서 멀리 끌어내다 버릴것이다.

분별을 하는 생각이나 분별을 하는 마음 단 하나만 일어나도 사람들은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에서 수만 키로미터나벗어난다.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에 현존할 때, 분별을 하는 생각이나 분별을 하는 마음은 존재할 수가 없다. 분별을 하는 생각이나 분별을 하는 마음이 떠오를 공간(空間)이 없어지는 것이다.

분별을 하는 생각이나 분별을 하는 마음은 실재(實在)하지 않는 것에 대해 작용을 한다. 분별을 하는 생각이나 분별을 하는 마음은 항상 허구(虛構)와 상상(想像) 속에서만 작용을 한다. 분별을 하는 생각이나 분별을 하는 마음은 꿈이다. 분별을 하는 생각이나 분별을 하는 마음에 의지해서는 결코 진리(眞理)를 느끼거나 확인할 수 없다. 내가 진리는 결코 알려지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이다.

진리는 가슴에 의해 느껴지거나 확인되는 것이다. 머리에 의해서가 아니라 유기적인 단일체로서의 그대 자신, 그대의 전체성에 의해 느껴지거나 확인되는 것이다. 진리를 느끼거나 확인할 때에는 그대의 머리, 가슴, 뼈, 혈관, 내장, 머리컬, 손가락, 발가락까지도 진리를 느끼거나 확인 한다. 그대의 숨결도 진리를 느끼거나 확인 한다. 그대의 몸 전체, 그대의 존재 자체가 진리를 느끼거나 확인한다. 진리는 그렇게 존재 전체에 의해 알려지는 것이다. 그것이 내가 진리는 느껴지거나 확인되는 것이라고 말하는 의미이다. 진리는 직접적인 경험이다.

- 오쇼의 <자비의 서>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