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깨달은 경지에서 보면 천지와 나는 하나

장백산-1 2021. 3. 5. 18:42

깨달음 소리로 드러낸 수행자의 본분

 

1917년 쓴 만해 스님의 깨달음의 노래

 

깨달은 경지에서 보면 천지와 나는 하나, 주인 · 빈객 없는 경지로 천하 평정해

 

 

인제 백담사 만해당에 쓰여진 글씨 쓴 사람 석주정일(昔珠正一, 1909 ~2004).

 

 

남아도처시고향(男兒到處是故鄕) 기인장재객수중(幾人長在客愁中)

일성갈파삼천계(一聲喝破三千界) 설리도화편편비(雪裡桃花片片飛)

 

(사나이 이르는 곳 모두가 고향인데 긴 시름에 겨운 나그네 몇 사람이던가?

한마디 외쳐서 삼천세계를 갈파함에 눈 속의 복숭아꽃 펄펄 휘날린다.)

 

이 게송은 올곧게 독립운동을 하신 만해 용운(卍海龍雲, 1879~1944) 스님의 오도송(悟道頌)이다. 스님이 정사년(1917) 12월3일 밤 10시경 좌선 중에 홀연히 바람에 부딪혀 물건이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의심하던 마음이 단박에 풀려서 얻은 시라고 알려져 있다.

 

남아(男兒)는 사내를 말하지만 이 시에서는 출격장부를 뜻한다. 출격장부는 격식(格式)에서 벗어난 장부라는 의미로 어디에도 어는 것에도 얽매임이 없고 구속당하지 않는 당당한 사람을 말한다. 견성(見性 : 근본성품을 보다)을 한 사람을출격장부, 줄여서 장부라고 말한다. 마음을 찾아가는 과정을 소에 비유해 심우(尋牛)라고 하듯이 깨달음의 경지에 이른 이를 혈기 왕성한 장정에 비유한 것이다. 왜냐하면, 장정은 힘이 세고 한창 활발한 시기이기에 어떤 일이든 크게 개의치 않고 해내며 막힘이나 걸림이 없어 자유자재(自由自在)하기 때문이다. 

 

한용운 스님이 시의 첫머리에서 장부도처(丈夫到處)라 하지 않고 남아도처(男兒到)라고 표현 한 것은 스스로를 낮춰 하심(下心)하는 마음으로 쓴 것이라고 봐야 한다.

 

고향(故鄕)은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곳이다. 이 시에서 고향(故鄕) 마음(心)의 본성(本性), 근본성품(根本性品)을 뜻한다. 게송의 첫머리인 남아도처시고향(男兒到處是故鄕)에서 만래 스님은 이미 살활자재한 도리를 여과 없이 고스란히 드러낸 것이다. 기인(幾人)은 사람의 수을 말한다. 객수(客愁)는 객지에서 쓸쓸한 마음을 느끼는 나그네이기에 아직 견성(見性)을 하지 못하고 헤매고 있는 사람을 뜻하며 그러한 견성(見性)을 못한 나그네들이 한두명이 아니기에 기인(幾人)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그러므로 객수(客愁)는 업장과 분별 망상 번뇌에 얽매여 시달리는 인생을 비유한 것이다. 고통이 따르는 삶은 타향살이며 중생의 삶이다. 반면 견성(見性)하고 나면, 깨닫고 나면 가는 곳곳마다 고향(故鄕)이 되는 것이다.

 

고려 시대 보조지눌 스님은 견성(見性)을 하기가 어려운 이유에 대하여 ‘염불요문’에서 “대개 말세 중생들은 근기와 성품이 어둡고 둔하여 탐욕과 습기가 두텁기에 오랫동안 나고(生) 죽음(死)이라는 분별심(分別心), 즉 생(生)과 사(死)라는  실체가 없는 허망한 환상(幻想)에 빠져 온갖 분별 망상 번뇌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므로 스승과 도반의 꾸지람을 받지 않으면 분별 망상 번뇌에서 벗어나는 즐거움을 얻기 어려울 것”이라 했다. 또 “애욕(愛欲)에 휘둘리는 번뇌장(煩惱障), 알음알이(識)에 집착하는 소지장(所知障), 육신에 집착하는 보장(保障), 고요함만 집착하는 이장, 사물에 대해 분별심을 내는 사장”을 5가지 장애(障碍)로 지적했다.

 

일성갈파(一聲喝破), 즉 깨달음 소리이다. 일성갈파, 깨달음 소리를 사자후, 확철대오라고도 한다. 고로 이다음에 나오는 시구는 오도송의 핵심이다. 삼천계(三千界)는 우주 삼라만상만물을 뜻한다. 세상의 이치, 우주의 이치, 자연의 이치를 깨닫고 나면 내 마음 안에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 즉 우주삼라만상만물이 있음을 명확하게 알기에 천지만물(天地萬物)이 나와 더불어 하나가 됨을 아는 것이다. 한용운 스님도 자신도 모르게 일성(一聲)을 함으로써 수행자의 참다운 본분을 드러내고 있다.

 

설리도화(雪裡桃花), 눈 속의 복숭아꽃은 설중매(雪中梅)를 연상시킨다. 여기서 펄펄 날리는 눈은 분별 번뇌 망상을 표현한 것이다. 세속의 모든 일이 시련의 연속이듯 분별 번뇌 망상 또한 그러하다. 그런데 눈 속의 복숭아꽃이라고 했으니 이는 단심을 말하는 것이며 마음을 나타내었다.

 

설리도화(雪裡桃花)를 설리화(雪裡花)라 해도 될 것을 굳이 복숭아꽃이라고 했을까? 예로부터 우리나라 민간신앙에서는 귀신(鬼神)을 물리치기 위해 복숭아나무를 사용했다. 여기서 분별 번뇌 망상이 곧 귀신(鬼神)이기에 귀신(鬼神)인 분별 망상 번뇌를 타파했음을 나타낸다. 편편비(片片飛)라고 하면 눈같은 복숭아 꽃잎이 휘날린다는 표현이다. 참고로 ‘한용운시전집’에서는 편편비가 아니라 편편홍으로 되어있다. 편편홍은 “눈 속에 점점이 복사꽃이 붉게 지네!”라는 표현이 된다. 

 

스님은 결국 객수를 전도해 주(主)도 없고 객(客)도 없는 분별(分別)이 없는 경지로 천하를 평정했다. 시비(是非) 분별 비교 판단 해석이 끊어진 자리라 만래 스님은 자유인(自由人)이 됐다. 이를 선종에서는 '진면목(眞面目), 본래면목(本來面目)을 드러냈다”고 말하는 것이다.

 

법상 스님 김해 정암사 주지 bbs4657@naver.com

 

[1575호 / 2021년 3월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